제목: 구원자를 거절한 사람(들)

본문: 요한복음 5장 1-16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 좋은 예를 보여주었던 것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의 이야기다(요 6장).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었다(요 6:15). 그들이 원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정확히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고프지 않기를 원했고 병 낫기를 원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때 예수님은 자리를 피하셨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만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삶을 주기 위해 오셨다. 사람들은 당장의 아픔이나 당장의 배고픔에서 구원 받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더욱 근본적인 죄의 문제가 있었다. 죄가 가져온 결과가 배고픔과 아픔이었다. 미움과 다툼, 전쟁이었다. 그 죄에서 그들은 구원 받아야 했고 예수님이 바로 그 구원자로 세상에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을 주는 양식, 생명의 떡이 되어 주실 것이었다. 그 예수님을 먹는 자, 즉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 이것이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먹을 것으로 그들을 배부르게 하시자 그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생명에 떡에 대한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요 6:66).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썩을 양식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을 배고픔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면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는 부분과 딱 맞아떨어져서 누구나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다. 질병에서 구원하는 것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바라는 이 땅에 속한 것만 예수님께서 채워주셨다면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어서 인기를 얻으실 수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암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환자가 원한다고 해서 진통제만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실제로 병을 더 악화시킨다면 더욱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떡을 주는 왕이 되기를 거절하시고, 그들에게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고 도전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었다(요 6:61). 그 결과로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 비단 이 때 뿐아니라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런 일은 계속해서 있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요한은 이렇게 기록했다.

1:9–12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최종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왕이며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민족적으로 영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개인이 예수님을 배척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했던 사람과 영접하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지난 몇 주 동안 살펴봤던 율법교사와 젊은 부자 관리는 예수님을 거절했지만, 니고데모나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특권을 누렸지만, 모두 동일한 선택을 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편에 섰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갈렸고, 그것이 오히려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0:34–36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이 일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굶주리는 자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에 대한 호불호가 이렇게 나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그런 세상을 만드실 것이다. 죄가 없는 세상이 바로 그런 세상이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예수님을 따를 이유가 없다. 오병이어 이후 예수님을 떠났던 사람들, 율법교사, 젊은 부자 관리와 마찬가지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렇게 예수님을 거절한 사람을 보게 된다.

베데스다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갈릴리에서 표적을 행하신 후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여기서 말하는 “명절”이 어느 명절인지는 알 수 없다. 예수님께서 명절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것을 고려하면, 무교절(유월절)이나 칠칠절, 초막절 중 하나였을 것이다. 신명기 16:16에 따라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해당 명절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서 예배해야 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셨는지를 설명하기위해 명절을 언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이 사건이 일년 중 어떤 “명절”에 일어났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일주일 중에 어떤 “요일”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 9절에 보면 이 사건은 “안식일”에 있었던 일이고 그 사실이 이 사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장소에 대한 정보는 좀 더 구체화된다.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양문”은 양의 문이라는 뜻으로 성전에 가까운 문이었다. 희생 제사를 위한 양들을 이 문을 통해 가지고 들어갔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곳에 “베데스다”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 주위에 행각, 즉 기둥에 지붕을 덮은 구조물이 다섯이 있었다고 말한다. 햇볕이나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연못 근처에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내용은 3-4절에 나온다.

5:3–4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그 행각 안에는 많고 다양한 병자들이 누워있었다. 3절의 뒷부분과 4절까지 큰괄호로 묶여있는데, 이는 오래된 사본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는 의미다. 아마 7절의 병자의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후에 추가되었을 것이다.

이 큰괄호의 내용은 성경을 읽는 사람을 좀 당황하게 만든다. 성경에는 많은 기적들, 특히 치유와 관련된 말씀들이 많다. 구약의 나아만 같은 경우 요단강에 몸을 씻었을 때 나병이 깨끗함을 받았었다. 예수님도 맹인을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게 하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적도 있다. 하지만 여기 묘사된 모습은 좀 특이하다. 마치 어떤 미신이나 설화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난다. 어느 깊은 산에 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어디를 만지면 아이를 가지게 된다더라와 같은 느낌이다.

성경의 기적이 특별한 것은 그것이 ‘표적’이기 때문이다. 즉,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특별한 일이 성경의 기적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한번씩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고 아무나 제일 먼저 그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의 기적과는 분명 다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마도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미신이었을 것이다. 즉 4절의 말씀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한 기록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병자들에게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오늘날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오늘날도 중한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어쨌든 좋다는 것은 다 해본다. 그것이 과학이든 미신이든 종교든 상관없이 낫기 위해서 무엇이든 한다. 하물며 2000년 전인 예수님 당시는 더욱 그러했다. 진짜로 누가 병이 낫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니 그러기를 바라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명절이었으니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병자들이 그곳에 몰려들어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지하수가 솟아 올라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특별한 현상으로 보고 생겨난 미신이었을 것이다.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란 뜻으로 아마 이런 전설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은 ‘은혜’하고는 거리가 멀다. 다양한 병자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의 병이 낫는다. 7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병자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기 위해 경쟁해야했다.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가득한 경쟁의 집이었다. 아마 대부분 가장 덜 아픈 사람이 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38년된 병자

그런 곳에 오늘의 주인공이 있었다.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요한은 이 사람이 어떤 병자인지는 특정하지 않았는데, 8절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면 걷는데 장애가 있었던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38년 된 병자라는 것이었다.

38년은 정말로 긴 시간이다. 당시 남성들의 평균 수명이 40살을 조금 웃돌았다고 하는데, 그 기준으로 보면 이 사람은 삶의 대부분을 장애를 가지고 살아왔던 것이다. 금방 죽을 그런 병은 아니었겠지만 이 병은 그를 정말 비참하게 살게 만들었을 것이다. 14절을 보면 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랬던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50살은 넘었을 것이다. 성인이었고 정신도 온전했기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신의 삶을 더 비관했을지 모른다. 자신의 죄에 대한 자책도 있었을 것이고, 그럼에도 이런 벌을 내리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었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곧 괜찮아지겠지라는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38년이 지났다. 이 절망 속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기적 뿐이었다. 그런 기적을 바라고 그는 베데스다에 계속 왔을 것이다. 사실 진짜 기적이 그에게 일어날 것을 크게 기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명절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지도 못했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기적이 그를 찾아왔다.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셨다. 베데스다에 병자가 가득했지만, 그 중 이 한 사람을 보셨다. 왜 이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사람이 가장 심각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까? 이 사람이 가장 오랫동안 아팠기 때문일까? 이 사람이 가장 절박했을까? 가장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었을까? 이 모든 것에 ‘그렇다’고 답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보셨던 이유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성경은 예수님이 이 사람을 보셨다고만 말한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병을 고치신 경우를 보면 참 다양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한 중풍병자는 그 친구들이 그를 데려다가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서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었다. 자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했던 한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하기도 하셨지만,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는 여인의 말에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며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나 간절함과 관계없이 병을 고쳐주신 일도 많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이 대표적이다. 그 경우도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그 사람을 보셨고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으시고 그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신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가 순종했을 때 그는 볼 수 있게 되었다. 다른 맹인도 많았을텐데, 왜 이 사람이었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여기 38년된 병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예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았다. 고쳐달라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사실 이후에 진행되는 이야기를 보면 그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몰랐던 것 같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이 갈릴리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혹시 모를 기적이었지만, 그에게 확실한 기적을 베풀어 주실 수 있는 예수님이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의 고통을 아시고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다. 이에 38년된 병자는 이렇게 답했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앞서 말한 그런 미신을 이 사람은 믿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물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선착순 기적’에 있어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가장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은혜의 집을 찾아 왔지만 그가 경험했던 것은 냉정한 현실일 뿐이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다. 사실 당연한 것을 물으셨다고 볼 수 있다. 낫고자하지 않는데 베데스다에 와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았다면 이 병자는 “제가 낫고자 합니다. 저를 낫게 해주세요”라고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제가 물에 들어갈 수 있게 좀 도와드릴까요?”라는 의미로 이해했던 것 같다. 그래서 7절과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도와주시면 좋죠”라는 의미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럼 내가 옆에 있다가 물이 움직이면 너를 제일 먼저 물 속에 넣어줄게”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서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옆에서 이 장면을 보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이 사람을 조롱한다고 생각할만한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마치 잠깐 누워있던 사람에게 말씀하시듯 38년을 누워있던 사람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들은 병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예수님을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곧 자신의 몸이 나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예수님은 불가능한 일을 명하신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시고 순종하라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렇게 이 안식일은 이 병자에게 최고의 안식일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없어서 그동안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말을 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가 장애를 가지고 38년을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누가 하는지가 중요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말씀하셨을 때 이 사람은 낫게 되었다. 38년 간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절망에서 벗어났다. 그러기 위해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한순간에 그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가장 심각한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개입하셨을 때 일어난 변화다.

잘못된 선택

이 사람이 걸어서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바로 집으로 갔을 수도 있고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수도 있다. 이대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우리는 이 사람에 대해서 조금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좀 다르게 흘러갔다.

5: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상황은 요한복음 9장의 사건과 유사하다.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고치시고 예수님은 자리를 피하셨었다. 그날도 안식일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 삼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병 나은 사람에게 왜 나았냐고 따졌다. 안식일에는 병이 나았어도 누워있었어야 했다는 말이다.

스윈돌 목사는 이 상황을 이런 비유로 설명했다.

스윈돌, 148. “당신의 옆집에 사는 사람이 사고로 30년 넘게 전신 마비인 상태로 지내왔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주일 아침 6시에 잔디 깎는 기계 소리가 깊은 단잠에 빠져 있던 당신을 깨운다. 짜증이 난 당신은 쉬는 날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소음으로 온 동네의 창문이라는 창문은 다 흔들어놓을 만큼 몰상식한 인간이 누구인지 보려고 현관으로 뛰쳐나간다. 가보니 전신이 마비되었던 그 친구가 온전히 성한 모습으로 기분 좋게 잔디를 깎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신은 뭐라고 말하겠는가? 당신이 바리새인이라면 이렇게 소리칠 것이다. “이봐, 주일 아침이잖아! 그 기계 좀 끄라고!”

유대인들은 사람에 관심이 없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38년을 보냈는지,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지금 얼마나 기쁜지,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오로지 이 사람이 자기들의 안식일 전통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만큼 이들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인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의 태도다. 이 사람은 자신을 낫게한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책임을 전가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5:11–13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자기는 그냥 자기를 낫게한 사람의 말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도 낫고 싶어서 나은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억울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셨다면 “다 저 사람이 한 일이예요! 난 아무 잘못이 없어요!”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이 사람의 이런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더욱 분명해 진다.

5:14–16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셨다. 우연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의 육신의 병이 낫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그를 찾아오신 것이다. 14절의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람이 38년을 그렇게 병으로 고생했던 이유가 그의 죄 때문임을 전제로 한다. 모든 병이 개인의 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이 사람의 경우는 그랬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이상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결과는 더욱 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다른 질병이 될 수도 있지만, 영원한 멸망이 될 수도 있다. 그가 계속해서 죄를 따라 산다면 육체의 질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 영혼이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영적인 필요가 있음을 알게 하시려 일부러 찾아오셨던 것이다.

이 장면 역시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셨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기 전, 이미 예수님께서 그에게 행하셨던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했었다. 그로 인해 유대인들과 논쟁했고 결국 그들 가운데서 쫓겨나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자신을 알리셨을 때, 그는 “당신이 내 눈은 뜨게 해줬을지 모르지만 지금 내 꼴을 보라”면서 예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배했었다.

하지만 여기 38년된 병자였던 사람은 다르다. 그는 자신을 고친 사람이 누구인지 알자마자 바로 유대인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고 보고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신이 해를 당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신 두 발로 예수님의 대적들에게 갔던 것이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이 사람들에게 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외쳤던 것과는 다르다. 이 사람은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자신의 병을 고쳐준 예수님이 아닌 그들의 편에 섰던 것 뿐이다. 사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굳이 이 사람이 이렇게 하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를 통해 자신이 어느 편인지를 분명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여기 등장한 38년된 병자였던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에서 돌밭에 해당된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3:20–21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병 고침을 받았을 때 이 사람은 기뻐했을 것이다. 병을 고쳐준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것이 그가 원했던 전부였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박해를 받을 상황이 되자 그는 예수님을 버렸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비참한 선택을 한 것이다. 너무나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이다. 땅을 치고 후회할 선택을 한 것이다. 그의 눈 앞에 구원자 메시아가 계셨다. 그 메시아의 능력을 이미 그는 체험했다. 놀랍게 체험했다. 그런데 그 메시아가 아닌 사람을 선택했다.

이 잘못된 선택에는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사람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당장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처럼 보여서 두렵겠지만 정말 두려워해야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이 아닌 사람을 선택하는 잘못을 범했던 또 다른 이유도 같은 맥락에 있다. 38년 동안 병으로 고통받던 이 사람은 자신의 육신이 병에서 구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안식일의 전통을 깨는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자기 영혼이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걷지 못하던 자신이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서 걷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가 고통 가운데 있던 38년 동안 그를 정말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질병이 아니라 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께 자신의 죄의 문제를 맡기고 도우심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육신의 치유자이신 예수님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 육신에 관심을 가지는 만큼 영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님에게서 얻을 것은 모두 얻었고, 더 이상 예수님의 편에 서는 것은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이란 생각에 예수님에게서 떠났다. 그의 일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선택을 했던 것이다.

도전

얼마 후면 성탄절이 되는데, 그쯤 되면 사람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이 땅에 사랑과 평화를 전하러 태어난 아기 예수’라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궁극적인 우리의 삶도 우리가 서로 싸우지 않고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삶이긴 하다. 문제는 우리가 이런 얘기를 할 때 우리가 좋아하는 결과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가 좋아하는 죄를 누리면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우리에게서 죄가 제거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전하신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예수님을 거절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바로 이 이유 하나로 예수님을 거절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해결해야할 죄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병을 낫게 해주는 예수님은 필요했지만 죄를 사하시는 예수님은 불필요했다. 먹을 것을 주는 예수님은 필요했지만 영생을 주는 예수님은 불필요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수님께 바라고 기대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것들을 주신다고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온다. 교회로 모여든다. 돈을 위해 온다. 명예를 위해 온다. 사랑을 위해 온다. 성적을 위해 온다. 성공을 위해 온다. 건강을 위해 온다. 심지어 베데스다의 미신을 믿고 몰려든 병자들처럼, 정말 그런 것을 예수님이 주는지 주지 않는지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몰려든다.

그리고는 예수님은 당신을 죄에서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말을 들으면 예수님을 떠난다. 그런 예수님은 필요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나는 죄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영원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특히 교회에 잘 나오면서 여전히 예수님을 구원자로서는 거절하고 있는 분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예수님을 원하는가?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게 두면서 결국 죽고 나서는 천국에 가게 해주시는 예수님은 계시지 않다. 그런 예수님을 찾는다면 결국 오늘 말씀의 38년된 병자처럼 예수님을 거절하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참담한 선택을 하지 않기 바란다. 나를 찾아온 구원자를 앞에 두고 떠나가는 선택을 하지 않기 바란다.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도우심을 구하면 당신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계시다. 그 예수님을 영접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