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20-134편까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통해서 궁극의 예배 자리인 하늘 나라를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들로서 우리가 어떻게 지금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들을 살펴봤었다. 특히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134편을 통해, 언제나 우리는 은혜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함을 배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는 그 받은 은혜로 인해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은혜를 주시며 이 은혜의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것이 예배자의 삶이고, 우리가 살아야할 삶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 뿐 아니라 성경 전반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배는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특히 우리가 이 땅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은 더욱 그런 목적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 가운데 선포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우리 삶의 시작에 있고 끝에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동기가 되고, 또한 목적이 된다. 정말로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어떤 의미조차 찾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있다고 해도, 사실 이 동기와 목적은 항상 남아있고, 따라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예배를 잊어서는 안된다. 욥이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은(욥 1:21), 그가 바로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때로는 예배가 사치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숨을 쉬고 밥을 먹는 것처럼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내 상황이 이렇고 내 마음이 이런데 무슨 예배냐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언제나 예배하고 있다. 방금 말한 그런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있다면, 하나님을 그 정도의 분으로서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욥과 같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송한다면, 하나님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며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는 우리 삶의 일부이거나 우리 삶에 덧붙여진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 삶 자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이 얼마나 순종할 만한 가치가 있으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신지를 드러낸 하나의 예배였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골짜기에서, 어둠 속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하나님이 가치 있는 분이시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 135편부터 마지막 시편인 150편까지는 하나님께 드리는 직접적인 예배의 시가 많다. 이 시들을 통해서 우리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더욱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더 합당한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시편 135편은 찬송시의 전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작과 끝에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명령이 반복해서 나오고, 중간에는 그 이유를 설명한다.
“찬송하라”(1-2절)
시 135:1–2 할렐루야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여호와의 종들아 찬송하라 2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
이 말씀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바로 앞 시편 134편과 표현과 내용에서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시편 113:1에도 거의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사실 시편 135편의 매 구절이 성경의 다른 부분(시편, 신명기, 출애굽기, 예레미야)에서 발견된다. 무엇이 먼저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해당 말씀이 이 시편 135편을 인용한 것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시편 135편이 해당 말씀을 인용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은 후자에 해당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시편 135편은 기록된 말씀을 바탕으로 찬송하는 좋은 예시도 된다.
1절 시작의 “할렐루야”는 이어서 반복되는 “찬송하라”는 명령과 같은 언어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1절에서만 찬송하라는 명령이 3번 반복된다. “할렐루야”는 오늘날 하나님과 관계 없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용하면서 그 의미가 크게 퇴색되고 왜곡되었지만, 본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을 표현하는 감탄사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 마음에 기쁨이 가득하여, 단순히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명령하여 그 당위성을 더 드러내는 표현인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거룩하고 고귀한 표현을 오늘날 사람들이 가볍게 혹은 더 나아가서 신성모독에 가깝게 사용하고 있는 실태는 정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튼, 시편 135편은 “할렐루야”로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선포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찬송하라”는 명령을 반복하면서 강조한다. 사실 시편을 찬송시로 생각하면, 이런 명령형의 표현이 적절한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찬송시이면 ‘찬송하라’가 아니라 ‘찬송합니다’가 더 적절한 것 같다. 그런데 성경은 ‘찬송하라’는 명령형을 사용하여 찬송의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찬송합니다’는 주관적인 고백의 성격이 강하다면, ‘찬송하라’는 객관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전제가 바탕에 있는 표현이다. 누군가는 ‘찬송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싶지 않을 수 있지만, 모두가 ‘찬송하라’는 명령은 들어야하고 순종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 나오는 “찬송하라”는 명령은 거의 항상 복수형으로 되어있다. 명령의 대상이 어떤 개인이 아니라 사람들, 공동체인 것이다. 그들은 함께 이 찬송을 하면서 세상에 하나님에 대한 찬송의 당위성을 선포하고, 그 대상에는 찬송을 하고 있는 각 사람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시편 135편에도 그렇게 여러 대상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1절: “여호와의 종들”
- 2절: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
- 19절: “이스라엘 족속”, “아론의 족속”
- 20절: “레위 족속”,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
제사장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오른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심지어 마지막 21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라고 하여 하나님은 모두에게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선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이 명령을 들어야 하고, 또한 이 명령을 해야 한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위대하시도다”(3-18절)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 하나님이 그런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는 3-18절에서 밝힌다. 먼저 3-5절이 전체에 대한 요약이다.
시 135:3–5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4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5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속성)을 크게 둘로 분류하면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이 있다. 공유적 속성은 사랑이나 공의와 같이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속성을 말하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하심이나 무한하심같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한다. 그래서 공유적 속성은 상대적 속성이라고도 하고, 비공유적 속성은 절대적 속성이라고도 한다.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심과 관련이 있다면, 비공유적 속성은 하나님의 높으심과 관련이 있다. 이것을 또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과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3-5절은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한 이유로서 바로 이 두 속성을 언급한다.
3절이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을 찬송의 이유로 제시한다.
시 135:3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
여기서는 시편 133:1처럼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함께 언급하는데, 의미 상 큰 차이는 없다. 선하심이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아름다움은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보여지는 것을 더 강조한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의 예배자는 그 선하심을 아름다움으로 바라보고 기뻐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름다움으로 보지 못했을 때 죄가 사람에게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이 선했던 것이다. 피조물들은 보기에 아름다웠고 어떤 악함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낮은 해가 주관하고 밤은 달이 주관하는 것, 물이 모여 바다를 이루고 육지로 넘어오지 않는 것,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이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여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것 등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가 선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있었고, 그 명령도 선했다. 하지만 뱀은 하나님의 그 명령에 의문을 제기했고, 하나님의 의도가 선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보니, 그 열매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만큼 아름답고 탐스럽게 보였다. 그렇게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했을 때, 죄가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은 이 질문과 여전히 싸우고 있다. 하나님은 정말 선하신가. 그래도 하나님은 선하신가.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상, 우리에게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 생기는 나쁜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하지만, 왜 그 선한 뜻이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우리 눈에 아름다워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에게 성경은 두 가지 측면의 답을 제시한다. 하나는 내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처럼 알지 못하는데, 무엇이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부모가 아이를 밀치는 것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당연히 나쁜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가 차에 치이려는 순간이었다면 어떤가? 당연히 좋은 일이다. 아는 정보에 따라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미지) 우리 삶을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하나님만큼 아는 것처럼 쉽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도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행하신 선한 일을 아는 것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셨음을 기억한다면, 이해되지 않는 아름답지 않은 일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까지 의심하지는 않을 수 있다. 욥과 같은 상황을 만나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찬송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도 4절에서 이 사실을 다시 상기시킨다.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이 선택에 대해서 뒤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지만, 이 역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계속해서 의심하지 않게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여기서 언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선한 일을 하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
다음으로 5절은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말한다.
시 135:5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반응은 감사의 측면이 있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반응은 좀 더 순수한 찬양의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일을 해주셔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로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둘이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분리되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구분하는 것 뿐이다.
이런 찬송은 마치 아름다운 꽃을 봤을 때의 반응과 같다. 맑은 밤하늘에 별이 가득한 모습을 봤을 때의 반응과도 같다. 장엄하게 떨어지는 폭포를 봤을 때의 반응, 높은 산에 올라 그 아래를 내려볼 때의 반응과도 같다. 그 자체가 나에게 어떤 실제적인 유익을 주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에 감격하고 그 감격을 마음에 담아두고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입에서 ‘와~’하는 감탄이 나온다. 그것이 찬송이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라면, 그것이 바로 유일한 올바른 찬송이 되는 것이다.
이 찬송 역시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5절에서 시편 기자는 “내가 알거니와”라고 말한다. 알지 못하면 찬송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사람이 있다. 알지 못해서다.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죄인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을 다른 피조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면 절대 이렇게 할 수 없다. 시편 기자는 이 위대하심에 대해서 짧게 설명을 더한다.
시 135:6–7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7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하신다. 하늘, 땅, 바다, 더 깊은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들,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일어날 일들, 무엇 하나도 하나님께는 뜻밖의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시다.
이 세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지금의 현상을 관찰하면서 놀라움을 금하지 못한다. 어떻게 생물이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어떻게 우주가 이런 원리로 움직이는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 이유는 찾지 못한다. 나름의 답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과학자들은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가 있어서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지금의 모습이 된 세상을 우리가 살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한다.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 이유이시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다. 안개가 땅에서 일어나고, 비가 오고, 번개가 치고, 바람이 부는 것을 우리는 ‘자연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신적현상’이다. 그 어떤 일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고 우리는 그 결과를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현상을 보면서 그 자연에 감탄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모든 것을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이유는 달을 보라는 것이지 손가락을 보려주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이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누구든지 창조의 경이로움을 바라보면서도 이 모든 경이로움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게는 놀랍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있습니다. 인기 있는 텔레비전 시리즈 ‘코스모스(Cosmos)’에서 칼 세이건은 밤하늘의 찬란한 별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주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것이며,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다.” 그는 우주에 관하여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완전히 놓치고 있었습니다. … 그것들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도다”(5절)라고, 그분께서 만드시 모든 피조물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찬송하고, 예배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성이라 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마땅히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된다.
이어지는 8-12절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사건에 대한 짧은 요약이다. 4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이 출애굽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모두 보여주셨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여기서 그 역사를 되짚어 본다.
시 135:8–12 그가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셨도다 9애굽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셨도다 10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11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 12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되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도다
8-9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 모든 처음난 것의 죽음을 포함한 10개의 재앙을 내리셔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사건을 말한다. 11절에 언급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은 요단 동편의 왕들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실 것임을 보여주었던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기 때문에 따로 강조되었을 것이다. 결국 ‘왕’이라 불리던 자들이 이스라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스라엘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기뻐하시는 뜻대로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시편 기자는 8-12절에서 특별히 주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그 느낌을 좀 더 살리면 이렇게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치신 분이 그분이시다. 애굽이여, 네게 행한 표적들과 징조들을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들에게 보내신 분이 그분이시다. …”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강력한 민족이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다. 모세라는 불세출의 리더가 만들어냈던 기적같은 일도 아니다. 이 사건을 그렇게 보면, 또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보고 있는 것과 같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 특별히 드러났던 것이다.
이 구원을 생각하면서 시편 기자는 잠잠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이런 일을 행할 수 없다. 그 누구도 하나님처럼 선하고 위대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
시 135:13–14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14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
14절의 번역은 조금 오해할 수 있는데, 신명기 32:36을 인용했다.
신 32:36 참으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고 그 종들을 불쌍히 여기시리니 곧 그들의 무력함과 갇힌 자나 놓인 자가 없음을 보시는 때에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어려움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의 편에서 판단하고 정의를 행하신다는 의미다. 출애굽은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경험했던 가장 극적이고 놀라운 구원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들이 경험했던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은 그후로도 계속해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구원을 베푸셨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 계속해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라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변하지 않고 영원하니, 그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그런 것이다. 이 기억은 단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날로 새로워지는 그런 기억이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으로 시편 기자는 가장 근본적인 찬송의 이유로 그 생각을 옮긴다.
시 135:15–18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16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17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18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이 말씀은 시편 115:4-8에서 인용했다. 하나님이 찬송 받으셔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분만이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신(하나님)이라 불리는 다른 모든 신들은 우상일 뿐이다. 그저 사람이 자기 손으로 혹은 생각으로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다고 해도 실제로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아무리 그 신에게 헌신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생명이 없는 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시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사람이 만든 신과 사람을 만든 신의 차이다. 사람을 만든 신, 하나님만이 우리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고, 마땅히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상을 만드는 자와 다르지 않게 된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결국 무언가를 예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상을 예배하게 될 것이고, 우상과 같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우상처럼 영적으로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우상처럼 영적으로 죽은 자로서 우상이 불에 던져지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결말을 맞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할 일이다. 오직 살아계신 참 하나님 만이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여호와는 찬송을 받으실지어다”(19-21절)
이 시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결론을 내린다.
시 135:19–21 이스라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론의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레위 족속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1예루살렘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서 찬송을 받으실지어다 할렐루야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쏟아내듯이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지성소까지 들어갈 수 있는 대제사장이든, 성전 뜰까지밖에 못가는 평민이든, 누구는 여호와를 송축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 계신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명령이 필요하다. 때로 우리는 눈 앞의 환경을 보느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잊고 찬송하기를 잊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눈 앞의 사람을 보느라 그들을 만드신 하나님을 잊고 찬송하기를 잊기 때문이다. 언제라도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 마땅하고, 우리에게 마땅하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철학자 안토니 콜린스에 대해서 전해져오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그가 교회를 가고 있는 한 평범한 노동자를 만났다고 한다. 그를 무안하게 만들 생각으로 말을 걸었다고 한다.
“어디 가십니까?”
“교회에 갑니다, 선생님.”
“거기 가서 무엇을 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그럼, 당신의 하나님은 큰 하나님입니까, 작은 하나님입니까?”
당황스러울 수 있는 이 질문에 그 노동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둘 다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크셔서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분을 담을 수 없습니다. 또한 너무나 작으셔서 비천한 내 마음 속에도 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사람이야 말로 신학적인 용어는 몰랐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다.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터져나왔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 그리고 지금도 매일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여러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유혹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위대하심을 기억하라.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그렇게 하라. 서로에게 찬송하기를 권면해야 한다.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