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38편은 145편까지 이어지는 다윗 시편 모음의 첫 시편이다. 이후 146-150편은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는 할렐루야 시편으로서 시편의 대결말을 이룬다. 이 시편들을 통해서 우리는 특별히 예배에 대해서 묵상해보고 있다.
138편은 시편의 초반부에 있는 다윗의 시편들처럼 ‘고난’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 시편은 탄식시가 아닌 감사를 담은 찬송시다. 다윗은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1-3절), 단순히 개인적인 감사를 넘어 온 세상이 그와 같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4-5절). 그리고 고난을 통해 배운 교훈을 확신으로 표현한다(6-8절).
환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이것이다. “환난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고(요 16:33), 실제로 제자들은 많은 환난를 당했지만 그것을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예외가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바울은 돌에 맞아 죽은 줄 알고 버려진 적이 있었는데, 다시 일어난 후에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며 제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행 14:22).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며 이 고난의 당위성을 말하기도 했다(롬 8:17).
바울만 환난에 대해서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당하거든”은 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알 수도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표현이고, 실제로 그럴 때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도 같은 말을 했다.
벧전 4:12–13 12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환난(고난)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빼낼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우리에게 없으면 더 좋은 것인데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 삶에 허락하신 것이 고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고난 없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말해주신 것이 아니라, 고난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셨다. 이에 대한 오늘 시편의 답은 이것이다: 환난 중에 나를 살아나게 하시는 주를 신뢰하라.
우리에게는 항상 환난이 있지만 그 속에 우리는 혼자 있지 않는다. 다윗의 유명한 고백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시 23:1). 그래서 환난은 우리가 그냥 견디는 시간이 아니라 예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시편 138편의 다윗처럼 환난을 통과하고 올바른 반응으로 계속해서 예배할 수 있다.
감사(1-3절)
환난을 통과한 다윗의 첫 반응은 감사였다.
시 138:1–3 1[다윗의 시]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 2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3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다윗은 “감사”한다고 말한다(1절). 우리는 감사를 생각하면 그 대상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을 생각하지만, 성경, 특히 시편에서 감사는 공적인 인정을 의미한다. 1절의 병행 표현을 봐도 이 의미가 드러나 있다. 다윗은 “신들 앞에서 주께 찬송하리이다”라고 말한다. 혼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 “신들 앞에서”라는 표현은 실제로 다른 신들이 있음을 전제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여러 신들이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4절을 보면 특히 다윗은 여러 왕들을 생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은 그들 앞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신들을 믿는 왕들 앞에서도 숨기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이 믿는 신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참된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다윗은 다른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사실을 숨기지 않고 인정하며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윗은 “전심으로”, 즉 온 마음을 다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스펄전, “우리 죄를 슬퍼할 때는 깨어진 마음이 필요하지만, 주의 완전하심을 찬양할 때는 온전한 마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마음이 온전하고 한 가지 일에 전적으로 사로잡힐 때가 있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을 때여야 한다.”
사실 이렇게 온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어디서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다. 137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상황을 살펴봤었다. 그 때는 입을 열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합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해야하는 상황에서 우리 입을 닫는다. 하나님을 드러내야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기를 주저한다. 최근 한 성도님은 직장에서 식사할 때 기도하는 사람도 안보인다는 말씀을 하셨다. 식사할 때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는 아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할까를 생각해 봐야한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있는 것이다. 드러내고 싶지 않고 숨기고 싶은 것이다. 그런 이유라면 우리 마음을 점검해 봐야한다. 내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담대한 마음이 함께할 것이다.
2절에서는 예배에 있어 이런 담대함과는 상대적으로 다른 낮아짐의 태도를 볼 수 있다. 다윗은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예배하다”는 예배의 태도를 강조하는 단어다. 기본적인 의미가 땅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을 더욱 높이기 원한다. “성전을 향하여”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이름을 두셨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그렇게 칭했다고 할 수 있다. 여튼, 자신이 성전 안에 있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곳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두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이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예배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셔야 하고 그 앞에서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하나님은 한없이 높임을 받으셔야 하기에 우리는 누구 앞에서도 담대해야 하고, 우리는 한없이 낮아져야 하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실이지만, 다윗이 지금 특별히 이 시편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며 언급하는 이유가 있다. 그가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이다(2절). 인자하심이 변하지 않는 사랑이라면, 성실하심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둘 다 하나님의 ‘변하지 않으심’과 관련이 있는 속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그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심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다윗의 구체적인 경험은 3절에 기록되어 있다. 아주 구체적이지 않은 것은 이것이 함께 예배하는 용도로 기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공감할 수 있는 경험이다.
시 138: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에 힘을 주어 나를 강하게 하셨나이다
그가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 그가 약해져 있을 때 힘을 주셔서 강하게 하셨다. 7절의 표현을 빌려오면 그가 환난 중에 다닐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살아나게 하셨다. 그 손으로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고 구원하셨다.
다윗의 시편에서도 이런 상황이 많이 언급되었고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삶에서도 이런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실제 왕이 되기까지 사울에게 쫓겨다녔던 때가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왕이 될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상황은 그렇게 좋게 흘러가지 않았다. 다윗이 백성들의 인기를 얻을수록 사울의 시기는 더욱 심해졌고 결국은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는 지경에 되었다. 그 스스로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고 말할 정도였다(삼상 20:3). 그는 사울이 두려워서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했다가 침을 흘리며 미친 척을 해서 살아남기도 했었다(삼상 21:10-15). 중간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임일 기억하고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런 호의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은 다시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도 도망했다.
거기서도 다윗은 끔찍한 일을 경험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그의 성읍(시글락)을 불태우고 아내와 자녀들을 사로잡아갔던 것이다(삼상 30장). “다윗과 그의 백성들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서 울었더라”라고 성경은 당시 다윗과 백성들의 상황을 묘사한다(삼상 30:4).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백성들의 슬픔은 분노로 변했고 그 분노는 곧 다윗을 향했다.
삼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
다윗으로서도 정말 낙담이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쯤되면 도대체 하나님의 약속은 어디있는가하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윗은 그 상황에서 힘을 냈다.
삼상 30:6 …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힘을 주신 것이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지금이라도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느냐고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셨고, 빼앗긴 것은 모두 되찾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삼상 30:8). 이 말씀을 믿고 다윗은 군사들을 독촉해서 아말렉을 추격했고,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그리고,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그 아들들과 함께 사망했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과정은 전혀 기대했던 모습과 달랐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 말씀을 이루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다.
다윗은 이 긴 시간을 환난 중에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아나게 하셨다. 하나님의 손으로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고 그를 구원하셨다. 다윗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그 영혼에 힘을 주어 그를 강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다.
이후 그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바로 이어졌던 사울 집과 다윗 집의 전쟁에서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갔다(삼하 3:1).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도 계속해서 승리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갔다. 그때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행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을 점점 더 강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다.
시편 138편이 다윗 생애 중에서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윗은 그 삶을 통해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며 그에게 힘을 주시는 경험을 했고, 이 시편은 그 중 하나 혹은 그 이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 모든 경험을 통해 다윗이 무엇을 배웠느냐다. 다윗이 배운 것은 바로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배웠다.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하신 말씀을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래서 다윗은 아주 흥미로운 표현을 여기서 사용했다.
시 138: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의미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당장 여기 2절에서도 다윗은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모든 이름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높게 하셨다는 이 말은 좀 당황스럽다. 말씀을 지나치게 신성시한다는 느낌이 든다.
이 말씀은 절대적인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다윗의 개인적인 경험에 대한 진술로 봐야 한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다윗은 그 삶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 즉 하나님의 속성을 통해서 이루어졌는지를 경험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그 사랑과 능력으로 모두 지키셨다. 다윗의 간구에 응답하시고 그를 강하게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지 않았지만, 이 모든 경험들은 그에게 새로운 지식이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이름들, 특히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다윗에게 하신 약속, 즉 말씀을 이루셨다. 다윗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환난이었고, 어떻게 할지도 모르겠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이 그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다 이루는 모습을 보았다. 이것이 그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되었고,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낮은 자세로, 하지만 모두 앞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밖에 없었다.
환난을 경험한 모든 사람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룬 자신의 성취로 생각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 그저 시간이 지나서, 운이 좋아서, 환난이 끝났다고 생각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다. 환난 중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그 하나님이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감사를 드릴 수 있다. 겸손하게, 그리고 담대하게 그렇게 할 수 있다.
기대(4-5절)
다윗은 이런 감사를 자기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은 자신만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만 경험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두가 경험하고 알 수 있는 분이셨고, 그래야한 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은 좋은 것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의 본성을 따라, 세상의 모든 왕들이 자신처럼 하나님께 감사하고 노래할 것을 기대한다.
시 138:4–5 4여호와여 세상의 모든 왕들이 주께 감사할 것은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5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다윗이 굳이 왕들을 언급한 이유는 세상에서는 그들이 이런 감사와 노래의 대상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왕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을 찬양했다. 때로는 그들을 신으로 여겼다. 그러니 왕들은 다른 어떤 존재에게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을 깎아내리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리고 모든 왕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며 그렇게 되기를 기대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기 때문에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다윗이라는 개인이 찬양하는 것으로 부족하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찬양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모든 사람, 모든 민족, 그들 중에 가장 높은 왕들도 하나님의 양광을 찬양해야 마땅하다.
다윗은 그들이 몰라서 그렇게 못한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이 주의 입의 말씀을 들”으면, 주께 감사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1-3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지칭할 때 2인칭 대명사를 사용했을 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았다. 그가 전심으로 감사하고 신들 앞에서 찬송하고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그 이름에 감사할 존재는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저 “당신”이라는 표현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여기 왕들을 언급할 때는 “여호와여”라고 하여(4절), 분명히 감사의 대상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밝힌다. 세상의 왕들은 각자의 신을 생각하며 감사와 찬양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감사와 찬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그 대상은 “신들”이 아닌 유일하신 하나님이셔야 한다. 다윗은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기에, 그렇게 될 날을 기대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왕 중에 이렇게 했던 왕들이 있다. 느부갓네살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기대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것이다.
빌 2:9–11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성경은 여기까지 가는 과정을 말한다. 예수님이 먼저 환난을 통과하셨다. 그리고 자기 형제들을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신다. 하지만 이 예수님을 거절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스로 그 무릎을 꿇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 무릎을 꿇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입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실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또한 기대하는 미래다.
확신(6-8절)
그 미래를 기대하면서 우리는 지금을 확신 가운데 살 수 있다. 6-8절에서는 다윗의 확신을 볼 수 있는데, 이 확신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확신이기도 하다.
은혜(6절)
시 138:6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서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는 것, 은혜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삶에 개입하시고 돌보시는 것 자체가 은혜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사람들 중에서도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은혜 받을만한 사람들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시 113:5–9 5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9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오히려 낮은 자들이 은혜를 받는다.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 사무엘이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집에 다음 왕으로 세워질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러 갔을 때, 사무엘은 장남인 엘리압을 보고 바로 이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시면서 내가 이미 그를 버렸다고 하셨다(삼상 16:7). 사람이 보기에는 은혜 받기에 합당했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은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다윗이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영원한 나라의 언약을 주셨을 때, 다윗은 이렇게 반응했다.
대상 17:16–17 16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17하나님이여 주께서 이것을 오히려 작게 여기시고 또 종의 집에 대하여 먼 장래까지 말씀하셨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를 존귀한 자들 같이 여기셨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 앞에서 낮아진 마음, 겸손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징인 것이다.
사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이것이 이 환난을 통해서 다윗이 더 확실히 알게된 하나님의 모습이다. 경험을 통해 이것이 그의 진짜 지식이 되었고, 그래서 그는 앞서 본 것처럼 하나님께 겸손히 감사의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을 확신한다면, 삶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더 대단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다. 더 인기 있는 사람, 더 영향력 있는 사람, 더 예쁜 사람이 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것들이 마땅히 나에게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우리는 더 겸손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구원(7절)
다음으로 다윗이 확신했던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시 138: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분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다윗이 경험한 환난이 어떤 환난인지는 모르지만, 그 환난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환난은 지나갔지만, 또 다른 환난이 올 수 있다. 아니, 올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환난 중에 다니게 될 것이다.
환난이 지나고 나서 확신하는 것은 다시는 나에게 이런 일이 있지 않을 것이다가 아니라, 이런 일이 또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원수의 분노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펴신 손은 그 분노에서 나를 보호하시고도 남고, 하나님의 오른손은 나를 구원하신다. 그 과정은 때로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힘을 주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힘을 주셔서 환난 중에 다니게 하신다.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할 수 있다.
성취(8절)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성취를 신뢰할 수 있다.
시 138:8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보상해 주시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여기 “보상해 주시리이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끝내다, 성취하다가 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환난은 과정이지 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환난을 끝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다윗은 이 환난을 통과하면서 이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얻었다. 그래서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오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주 흥미로운 기도를 한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
이 기도는 시편 138편에서 유일한 직접적인 간구의 기도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혹여나 자신을 버릴까봐 염려하는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드리는 겸손한 기도라 할 수 있다.
그 어떤 환난도, 그 어떤 원수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수 없다.
J. W. 버건, “그분의 창조의 손이 태초에 우리 영혼을 지으셨다. 그분의 못박힌 손이 갈보리에서 우리를 구속했다. 그분의 영화롭게 된 손이 우리 영혼을 굳게 붙드시고 영원히 놓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의 손에 우리 영혼을 맡기자. 비록 우리 손으로 한 일들이 그분의 손으로 하신 일들을 헛되게 만들었을지라도, 그분의 손은 우리 손이 망쳐 놓은 모든 것을 다시 완전하게 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바꾸면 이렇다.
요 10: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바울의 말로 바꾸면 이렇다.
롬 8:35–37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유다의 말로 바꾸면 이렇다.
유 1:24–25 24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이 25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영원 전부터 이제와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도 다윗처럼 확신할 수 있다. 환난 중에 다녀도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 길에 끝까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확신 가운데 기도할 수 있다. 약속하셨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 나를 끝까지 지키셔서 주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도전
우리가 경험하는 매일의 환난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를 외롭게 하고 좌절하게 한다. 우울하게 만들어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의심하게도 한다. 두려워하게도 한다. 원망과 불평의 마음도 품게 한다.
이 모든 것들이 환난 중에 사탄이 원하는 것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환난 중에 나를 살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다. 외롭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 좌절이 되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 우울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이 있고 사명이 있다. 의심이 되고, 두려움도 있고, 원망과 불평의 마음도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맡기고 이 길을 걸어가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이 환난의 길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담대함과 겸손함을 더하시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