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시편 강해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의 기도 1 (시 139)

최종혁 · 2026.10.28 · 시편 13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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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은 많은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은 책이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더 많은 사랑을 받은 시편들이 있다. 시편 23편이 가장 대표적이고, 시편 1편이나 8편도 그렇다. 시편 139편도 그런 시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교리적으로도 시편 139편은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는 전지하심에 대해서 그 어떤 성경의 다른 말씀들보다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어디든 계신다는 편재하심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주권적으로 계획하심에 대해서도 말하고, 하나님의 타협하지 않는 거룩하심에 대해서도 말한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성품을 시편 139편은 아름답고 노래했고,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여러 찬양에서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시편 139편의 중요한 특징 하나는 이 모든 교리적인 내용들을 지극히 개인적으로 적용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관련된 성품들은 하나님을 우리와는 구별되는 분으로서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관련 없는 분이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시편 139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139편은 이런 면에서 보면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태도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공부는 머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시편 139편은 단지 하나님의 전지, 편재, 주권, 계획, 거룩 등에 대한 지식적인 노래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을 기뻐하여 함께하고 싶어하는 사람의 노래이고 기도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항상 나와 함께 있고, 나에 대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어떨까? 두 극단의 반응이 가능하다. 한쪽 극단에는 소름끼침이 있고, 다른 극단에는 기쁨이 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까? 그 ‘누군가’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냐가 차이를 만든다. 내가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나를 알고 나와 함께 있고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다. 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내가 정말 기뻐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그 사람이 나를 안다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이 좋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좋다.

시편 139편의 다윗이 정확히 그렇다. 다윗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단지 그것을 객관적인 사실로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며 기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노래인 것이다.

139편은 6절씩 4개의 연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각 연의 첫 4절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대한 설명이고, 나머지 2절은 그에 대한 보다 개인적인 묵상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1-6절)

시 139:1–6 1[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6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먼저 다윗은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에 대해서 말한다. 기이하다는 것은 이상하거나 괴상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6절이 밝히는 것처럼 이해하기에는 너무 높아서 그곳에 미칠 수가 없는 지식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우리로서는 다 알 수 없는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아신다.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부분적으로만 알 수 있고, 그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같습니다’, ‘저에게는 이렇게 보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와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모르는 것은 배우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지식은 모든 면에서 완전하다. 불확실함이 없고, 하나님이 모르고 있던 것을 더 배워야하실 것도 없다. 엘리후의 말처럼 하나님은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욥 36:4; 37:16).

시 147:4–5 4그가 별들의 수효를 세시고 그것들을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5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이 5000개 정도 되고, 우리 은하에 속한 별만 1000억-4000억개라고 한다. 관측 가능한 우주 전체 별의 추정치는 100해(10의 22승개)에서 1자(10의 24승) 개라고 한다. 어디까지나 추정치이고, 아마도 실제 별의 숫는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많은 별들의 수효를 세실 뿐 아니라, 이름까지 부르신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기 때문이다.

큰 것만 세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마 10:30). 이런 보이는 것만 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신다(왕상 8:39; 잠 15:11). 그들의 필요도 아신다(마 6:8, 32).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도 하나님은 아신다.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사 44:6–8 6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7내가 영원한 백성을 세운 이후로 나처럼 외치며 알리며 나에게 설명할 자가 누구냐 있거든 될 일과 장차 올 일을 그들에게 알릴지어다 8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듣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알리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은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

이런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다윗도 6절에서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도 분명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사 55:8–9 8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9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고, 하나님께서 드러내주신 것에서 더 나아가서 내가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교만도 내려 놓아야 한다. 대신 이렇게 반응해야 한다.

롬 11:33–36 33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34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35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고, 그에 대한 객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교리 공부를 지식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가져온다.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이 자신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생각한다.

다윗이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속속들이, 빠짐없이 아신다는 사실이다. 1절의 “살펴보다”가 내포하는 의미가 그렇다. 이 단어는 보석 등을 찾기 위해서 땅을 파헤치는 것, 정탐꾼이 정보를 얻기 위해서 땅을 탐색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철저하게 조사한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다. 다만 다윗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라도 하신 것처럼 자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다윗에 대해서도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그냥 어떤 하나의 정보로서만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관계적으로 개인적으로 다윗을 아신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별들을 세실 뿐 아니라 이름으로 그것들을 부르신다는 것도 그런 의미다. 별들 각각을 특별하게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로 아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으로서 아신다. 그리고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나”를 아신다.

하나님이 다윗에 대해 무엇을 아시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6가지를 언급한다: “내가 앉고 일어섬”, “나의 생각”, “나의 모든 길”, “내가 눕는 것”, “나의 모든 행위”, “내 혀의 말”. 하나님께서 이것들만 아신다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까지 아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윗은 계속해서 “나”라고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일반적으로 아시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아신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한다.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2절): 하나님은 다윗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 여기서 앉는 것과 일어서는 것의 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앉는 것은 쉬는 것이고 일어서는 것이 일하는 것을 의미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 반대의 경우도 많다. 앉고 일어서는 것은 움직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작은 움직임까지도 하나님은 아신다. 오늘날은 센서가 있는 장비들(스마트워치?)을 통해 이런 움직임을 기록하고 확인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2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움직임만 아시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지 의도도 아신다고 말한다. 여기 “생각”으로 번역된 단어가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것이 ‘의도’ 혹은 ‘동기’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움직임에 있는 우리의 의도, 즉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아신다는 의미다. 가끔씩, 방을 나왔는데 내가 왜 방을 나왔는지 생각이 안나서 다시 들어갈 때가 있다. 혹은 무언가를 찾아보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한참 다른 것만하고 다시 내려놓는 경우도 있다. 내 행동의 의도를 나도 잊어버릴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멀리서도” 나의 의도를 아신다. 가까이에서 내 행동을 지켜보고 있으면, 의도가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추론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나의 의도를 아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멀리서도 아신다. 보지 않아도 아신다.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3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의 하루를 모두 아신다고도 말한다. 모든 길은 그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 다닌 것, 즉 공적인 모든 일들을 의미한다. 눕는 것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드는 것을 의미한다. 집 밖에서 한 일과 집 안에서 한 일,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특별히 다윗은 여기서 “살펴 보셨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것은 판단을 의미한다. 감찰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신다. 다윗의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놀라게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알 때 항상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그 사람의 모습이 있다. 교회에서만 알던 사람을 집에서 보면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도 그렇다. 집에서만 알던 사람을 다른 곳에서 보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미 아셔서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익숙하시다.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4절): 4절은 감탄이다. 이런 하나님의 나에 대한 지식을 생각할 때, 속에서 놀라움이 솟아나는 것이다. 4절을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번역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 “내 혀에 어떤 말도 있기 전에, 정말로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어떤 경우는 말을 해도 알지 못하는데, 하나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아시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일반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나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아신다는 의미다. 내 행동 하나 하나를 하나님은 아신다. 내 마음의 생각도 하나님은 모두 아신다. 내가 어떤 일을 왜 하는지 아신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익숙하다. 하나님은 나를 여원 전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6절과 같이 반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인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 대해서 이렇게 안다면 정말 답답할 것이다. 5절을 보면 다윗도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식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지식을 피할 곳이 없기 때문에 앞뒤로 둘러쌓였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둘러싸이는 것은 언듯 생각하게 긍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 누군가 나를 안아주는 것은 그 사람의 팔로 둘러싸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느낌을 좋아한다. 특히 내가 약해져 있을 때, 누군가 안아주는 것은 위로와 평안을 느끼게 한다. 적이 공격해 올 때,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안에 있는 것도 평안을 준다. 사나운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 집 안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적대적인 것들이 내 주변에 가득한 상황에서 나에게 호의적인 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것이 없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도 정확히 그랬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지식에 놀랐던 것이 아니라 감사했다.

시 139: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안수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덮으셨다는 의미다. 찬송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내가 위험한 곳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바위에 숨기시고 그 손으로 덮으셔서 보호하시는 이미지다.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지식으로 다윗에게 하셨던 일이고, 또한 우리에게 하시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 실제로 하나님은 그 지식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까?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이런 비슷한 일을 하려고 할 때가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성장을 위해서 어떤 사람을 시험 가운데 두는 것이다. 내가 도와주면 쉽게 해결될 일을 그냥 그 사람이 하게 두는 것이다. 특히 자녀를 둔 부모들이 이런 일들 한다. 문제는 부모도 자녀를 100% 알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도는 좋았지만 결과가 성장이 아니라 포기나 증오로 남는 경우도 있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정도를 감당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아신다. 우리가 믿음에서 파선하지 않게, 우리의 삶을 미세조정하신다. 우리 각 사람에 맞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잠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우리의 길은 우리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다.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당황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나의 걸음을 인도하고 계시다. 내 계획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계획과는 일치한다.

잠 19:21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

사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 계획에는 우리의 구원도 포함되어 잇다.

엡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다윗은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에 안심했고 평안했다. 자신도 모르겠는 삶의 여정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께서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사탄이 그것으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었다. 너희도 하나님처럼 알아야하지 않겠느냐며 마치 그들의 유익을 위하는 듯 말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을 알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하나님을 알고 신뢰할 수 있다면, 알지 못하는 답답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참된 평안은 나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지식에서 온다.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7-12절)

시 139:7–12 7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다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의 편재 혹은 무소부재의 속성이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고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어디에 더 많이 계시거나 더 적게 계시지도 않다. 하나님은 어느 공간에 부분적으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모든 곳에 전체로 존재하신다.

렘 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시편 139:7-12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다윗의 답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7절): 여기서 다윗은 앞에서 했던 것처럼 객관적인 사실을 자신에게로 가져와서 생각하고 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을 피해서 숨고 싶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상황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피해서 “어디로” 가야한다면 어디로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은밀한 곳”은 정말 없을까? 다윗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장소들을 몇 가지 제시해 본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8절): 먼저 다윗은 위 아래를 생각해 본다. 가장 높은 곳으로 간다면 거기는 하나님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늘로 피할 가능성은 아마 일찍 접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계신 곳을 하늘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시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시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사람이 볼 때 하늘이야 말로 하나님의 주무대라고 할 수 있으니,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아주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어떨까? 내려 가고 내려가서 죽은 자들의 땅인 스올에까지 내려간다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없지 않을까?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8절): 다윗은 그렇지 않다고 확실히 말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땅에도 계시다. 생명과 죽음 모두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지옥은 사탄이 다스린다는 생각은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지옥은 사탄이 죄수로 있는 곳이지 왕으로 있는 곳이 아니다. 

암 9:2 그들이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이 말씀은 심판에 대한 말씀이지만,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위로 가든, 아래로 가든,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으로 갈 수는 없다.

위 아래가 안된다면, 좌우(동서)는 어떨까?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9절):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바다는 서쪽에 있다.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간다는 표현은 해가 뜨는 그 순간, 빛이 강렬하게 비추는 모습을 그리는 것일 것이다. 빛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처럼 순식간에 해가 뜨는 동쪽에서 서쪽 끝 바다까지 이동하는 모습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에 닿을 수 있을까?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10절): 그렇지 않다. 아무리 빠르게 이동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다. 따라오시는 것이 아니다. 이미 계신다.

현실에서는 요나가 비슷하게 하려고 했었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서 도망하려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했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에도 계셨고, 결국 요나를 니느웨로 보내셨다.

7절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피하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10절에서 분명히 밝혀진다. 다윗은 그가 있는 곳 어디든 하나님이 계심을 기뻐한다. 어디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그를 인도하고 붙드는 하나님의 손이 어디든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이 그러했듯,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도, 다윗에게는 답답하거나 벗어나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그에게 위로가 되는 감사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는 11-12절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시 139:11–12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계시지 않은 곳을 찾아 그곳으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혹시라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하나님과 가장 먼 곳을 생각하면서 그곳에도 하나님이 계실까를 생각해 봤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은 ‘계시다’였다. 하나님의 ‘충만하심’에는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스올이든, 바다 끝이든, 그곳에 하나님은 계시고, 하나님은 그 능력의 손으로 보호하신다.

그래서 11-12절에서 다윗은 확신을 가지고 “흑암”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리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때로는 그렇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흑암” 가운데 있을 때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흑암은 단순히 어둠은 아니다. 그냥 깜깜함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를 덮고”라는 표현은 나를 해한다, 나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의미다. 어둠 자체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않는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그렇게 한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빛과 대조되는 어둠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그런 상황이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를 당할 것 같다.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마치 스올에 있는 것처럼, 마치 바다 끝에 외롭게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1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상황을 가정해서 말하고 있다.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하면서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삼상 20:3)라고 했던 그런 상황이다. 욥이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욥 30:26)라고 탄식했던 그런 상황이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면서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눅 22:53)라고 말씀하셨던 그런 상황인 것이다. 고통 중에서 탄식하는 그런 상황이다. 다윗은 자신조차도 그렇게 말하는 상황을 가정하여 말한다.

정말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말하느냐에 관계 없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시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흑암 중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보지 못하시지 않으신다.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께는 차이가 없다. 어둠 가운데 빛을 만드신 분이 빛이 없다고 못보시는 것이 아니다. 흑암이나 빛이 하나님께는 같다. 다윗은 하나님을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보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해도 하나님은 흑암 중에 계신다. 그리고 그 손으로 붙드시고 인도하신다.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묵상하며, 혹 그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며 마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처럼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심을 확신한다.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사실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사실을 결정한다. 하나님의 임재는 완전하다. 이 사실을 신뢰하고 우리는 안식할 수 있다.

도전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신다고 말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는 것 같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만약에 하나님이 정말로 그런 분이셨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런 하나님을 신뢰하며 내 인생을 걸고 사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만들지 말고, 그런 분으로 생각하지 말자. 하나님의 기이한 지식과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가 오늘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윗처럼 깊이 묵상해 보자. 말씀을 나에게로 가져오지 않으면 말씀을 아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 하심을 묵상하며 안심하고 기뻐하자.

또한, 반대 측면에서도 이 진리를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나를 모르고 나와 함께 하시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살 때가 있다.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면 되고, 나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만 아셨으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우리는 그 사실에 기뻐해야한다.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에 기뻐해야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사실이 기쁨이 되도록, 우리가 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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