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만 있거나 감정만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살다 보면 이성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고, 감정에 이끌려 말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MBTI에서 T와 F를 구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람과 감정적인 사람을 구분한다. 이런 성향의 차이는 논쟁을 하거나 갈등을 겪을 때, 인생의 큰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더 크게 드러난다. 가령 욥과 그의 아내는 모든 자녀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는 비극을 똑같이 겪었다. 그때 욥의 아내는 “당신이 그대로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반응했다(욥 2:9). 욥은 그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과 같다고 했다(욥 2:10).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바르게 인식하는 사람은 절대로 이런 어리석은 반응을 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만큼 욥의 아내는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감정에 휩쓸려 반응했다. 반면 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욥은 온몸에 종기가 나서 하루 종일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오래된 친구들이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충분히 감정적으로 북받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라 반응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서 성향에 따라 각각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주로 이성을 좇는지 아니면 감정을 따르는지 아는 것은 중요하다. 중요한 대화를 나누거나 사귐을 가질 때, 이 차이가 서로에 대한 오해를 크게 일으키기 때문이다.
머리로 말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 답답하다
머리, 곧 이성을 따라 말하는 사람은 가슴, 곧 감정적으로 대화하는 사람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명백한 사실을 근거로 주고받아야 건설적인 대화가 될 수 있는데,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 사실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요나는 분노의 감정이 폭발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기로 했다가 그 뜻을 돌이켰기 때문이다(욘 4:1-2). 요나의 감정은 정도를 지나쳐 죽기를 자처할 지경에 이르렀다(욘 4:3). 하나님은 요나를 말로 설득하시기 전에, 먼저 그가 느낄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하셨다. 박넝쿨을 예비하여 요나가 그 그늘 밑에 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욘 4:6). 다음날 벌레를 예비하여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고, 요나는 머리에 쪼이는 뜨거운 동풍에 격분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했다(욘 4:8). 하나님은 요나가 충분히 동의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 경험한 사실을 기반으로 그의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하셨다. 그가 수고하거나 재배한 적 없는,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박넝쿨이 그에게 그토록 소중하다면,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기르신, 오랜 세월 아끼고 돌보신 십이만여 명의 사람과 가축들을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머리로 말하는 사람이 볼 때,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런 설득과 접근이 잘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이 겪은 일에 갇혀서 상황을 여러 측면에서 보지 못하고, 자신이 느낀 감정과 받은 상처에 머물러서, 다른 사람이 느꼈을 감정과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다. ‘아, 정말 그렇구나. 나는 십이만여 명에 육박한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을 박넝쿨보다 덜 귀하게 여겼구나!’하면서 돌이켜야 할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된다. 머리로 말하는 사람은 사실이 중요하다. 그래서 그 사실을 기반으로 대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사실보다는 자신이 받은 인상, 느낀 감정이 중요하다. 명백한 사실은 이거다: ‘하나님은 바다에 빠져 죽어가던 요나를 살리셨다. 그리고 박넝쿨을 사용하여 자비롭게 요나를 바로잡기 원하셨다.’ 그러나 요나가 이 일을 통해 받은 인상 혹은 느낌은 이렇다: ‘내가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도 물거품이 되었고, 나를 안위하던 박넝쿨까지 사라졌으니, 나는 더 살아갈 이유가 없다.’
감정에 치중된 사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사실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는 것도 소용이 없고, 어떤 말의 의도와 내포된 의미를 크게 확장하고 왜곡하여 간직하고 상처받았다고 하는 상대방에게 실제로 한 말과 의미, 의도와 목적을 설명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 그냥 무조건 그 감정을 헤아려주고,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러면 반대로 내가 오해받고 상처받은 것에 관해서는 왜 알아주지 않을까? 머리로 말하는 사람은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감정적이다 못해 자기감정에만 치중하여 이기적이고, 생각이 바뀔 여지가 없이 꽉 막혀 있다고 느껴져서 답답하다.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머리로 말하는 사람이 매정하다
반대로,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머리로 말하는 사람이 매정하다고 느낀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때로 이성적인 사람은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인다. 상처받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리를 말한다고 하지만 사랑은 없고, 올바른 것을 말하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바울과 바나바는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세운 교회가 잘 서 있는지 점검하기 위하여 두 번째 전도 여행을 계획했다(행 15:36). 바나바는 그의 생질 마가 요한을 이번에도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바울은 그가 첫 번째 사역에서 무책임하게 집으로 돌아간 것을 문제 삼아 그것이 “옳지 않다”라고 반대했다(행 15:37-8).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두 사도였지만, 그들은 이 일로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기까지 했다(행 15:39). ‘위로의 아들’이라 불린 바나바(행 4:36) 입장에서 바울은 지나치게 이성적이라고 판단되었을 것이다. 바울의 입장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선교라는 사명은 성령께서 친히 시작하시고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그런데 도중에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끼워 넣는다면, 하나님의 사명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개인적 친분이나 동정심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망칠 수 없다’ 그러나 바나바의 입장은 달랐다: ‘일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선교 사역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면, 일에 방해가 된다고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회복시키고 살리는 것이 결국 선교 사역에 합당한 것이 아닌가? 주님도 바울을 버리지 않고 복음을 위하여 일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으셨나?’
바나바는 바울을 떠나 마가 요한을 데리고 선교 사역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바울은 마가를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종으로 인정했다(딤후 4:11). 물론, 결론이 항상 이렇게 나는 것은 아니다. 감정적인 선택이 많은 경우에 있어서 바울이 우려한 결과로 이어지기가 쉽다. 그러나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런 사례를 근거로, 이성적인 사람을 판단한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알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과 분별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제한적이고 교만하기까지 한 태도라고 본다. 아무리 이성적인 판단의 근거가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가슴으로 말하는 사람은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의 방법이 아닐 수 있을까? 그 방법이 주님처럼 우는 자를 위로하고 연약한 자를 일으키고 잃어버린 한 영혼까지 사랑으로 챙기는 방법과 거리가 멀다고 분명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말이나 결정, 행동 따위는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옳다고 해도 말이다.
이성과 감정만 앞세우지 말고 같은 믿음 안에서 대화하라
그러면 이렇게 서로 다른 성향의 사람이 어떻게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중요한 사안을 주제로 논의하고, 한 마음으로 행동하고 일할 수 있을까? 믿음이 그 답이다. 이성과 감정이 생각과 판단과 결정과 행동의 열쇠를 쥐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가장 감정적이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이렇게 간구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마 26:39). 그러나 주님은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고전 1:23). 어떻게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 사람의 손에 의하여 저주받은 나무에 달릴 수 있는가? 이토록 무력하고 모욕적인 죽임을 당한 사람을 어떻게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정하신 주권적인 뜻과 그 결과를 믿음으로 보는 자는 십자가를 진실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라고 인정하고 자랑한다(고전 1:24).
하나님께 둔 믿음을 가지고 서로를 대할 때, 머리와 가슴으로 대화하는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진다. 내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가슴으로 말하는 저 성도를 통하여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을 수 있다. 내 가슴이 내키지 않는 일이라도 머리로 말하는 사람의 주장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내가 느끼는 것 또한 충분히 바꾸어주실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우리에게 이성과 감정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논리와 이성으로 집대성된 슈퍼컴퓨터가 아니다. 하나님의 감정은 다양하고 풍부하지만, 그분은 절대로 감정 조절에 실패하지 않으신다. 기분에 따라, 감정에 따라 통제하지 못한 말이나 행동이 튀어나오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이 정확히 그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고 따르고 본받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이성적으로 또는 감정적으로 치우쳐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하나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하나님은 내가 답답해하거나 매정하다고 여기는 상대방을 어떻게 헤아리고 용납하고 대응하기를 원하시는지 충분히 생각의 되새김질을 해야 한다. 논쟁에서 이긴다고 항상 얻는 것이 아니고, 감정으로 호소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항상 유익한 것도 아니다. 내 이성과 감정이 승리하게 하지 말고,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내 이성과 감정을 굴복시키라. 그러면 팽팽하게 맞선 진리와 사랑, 이성과 감정, 머리와 가슴이 함께 마주 보며 충만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