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골로새 교회에게 편지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 교회 안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입니다(8절). 이들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성도들을 비판했습니다(16절).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하여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습니다(18절). 이는 자연스럽게 율법주의와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하는지를 실제적이고 세부적으로 말해줍니다.
이런 말들은 구원 받고 그에 합당한 “삶”을 살고 싶어하는 성도들에게 큰 유혹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고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의 동기가 있는데, ‘실제’로 ’눈에 보이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마음의 소원에 따라 주님께 헌신하시면 됩니다”라는 말보다는, “매주 주일 예배에 빠지지 말고 십일조를 하십시오”라는 말이 훨씬 더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전합시다다”라는 말보다는 언제 언제까지 무조건 한 사람을 교회에 데려오고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더 사람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면 보람도 느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구나하는 자부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하다보면, 점점 ‘행위’ 자체에 주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되면 내가 잘했다는 생각에 자만하고 잘 안되면 자책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같았지만, 사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8, 19절). 금욕주의나 율법주의는 영적으로 자란 것 같다는 착각을 하게될 뿐 실제로 영적으로 자라지는 못합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붙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19절). 머리 없이 자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문제는 동일하게 교회 안에 있습니다.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금욕주의와 율법주의는 여전히 오늘날 교회에서도 활개치고 있습니다. 실용주의도 있습니다. 뭐든 효과가 있으면 그것이 맞는 것, 즉 진리라고 믿는 세상의 철학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참된 부흥의 의미를 흐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들이 사랑의 수고가 아닌 프로그램화 되어서 동기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냥 진행되기도 합니다. 성도들 개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말씀에 따라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를 보며 그에 맞춰 살려고 합니다. 참된 경건이나 참된 영적 성장에는 관심이 없고 보이는 것들,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는 것들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영적인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미혹하는 ‘노이즈(소음, 잡음)’가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거짓에 귀를 막고 진리에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골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을 뿐 아니라, 이미 주신 진리 위에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예전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 눈을 감고 세상 귀를 닫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의 음성만 듣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꽉 붙들어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