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겸손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남이 겸손하기를 바라지 자신이 겸손하려고 노력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타락한 우리는 기본적으로 나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데, 겸손은 그런 우리의 본성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나마 나보다는 내가 속한 집단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과거에는 이런 면에서 조금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이 우선인 지금 사회에서는 그조차도 사라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졌습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는 가치관이 너무나 당연해졌습니다. 겸손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남을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도 대단한 희생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조금만 내가 양보를 해도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원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상대가 제대로 감사를 표하거나 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고 양보했던 것을 취소하고 싶어집니다. 호의를 베풀었더니 권리인 줄 안다며 상대를 비난합니다.
물론 양보와 배려에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상대의 호의를 요구할 권리가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호의를 베푸는 내가 상대에게 그런 것을 바라고 더 나아가서 요구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내가 정말로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까지 한다”라는 겸손의 모양만 취한 것의 결과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저것도 못해?’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하나됨에 대해서 가르치는 오늘 본문에서 정말 중요한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고(3절) 다른 하나는 ’권리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6절). 다르게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가치는 인정하고 나의 가치는 주장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와 반대로 할 때 항상 다툼과 싸움이 있습니다. 나의 가치를 남이 인정하기를 주장하고 반대로 다른 사람의 가치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면 항상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대단한 일이고 남이 하는 일은 당연한 것이 됩니다. 내가 하는 양보와 배려는 대단한 내가 해주는 일이 되고, 남이 하는 양보와 배려는 사람이면 당연해 해야할 일이 됩니다. 문제가 생기면 항상 나는 할 일 이상을 했는데 상대는 최소한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툼이 생기고 갈등이 쉽게 해결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나를 낫게 여기고 나의 권리를 항상 취할 것으로 여긴 결과입니다.
성경은 정확히 반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에서는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얘기지만, 성경은 이것을 교회의 하나됨의 핵심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이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는 하나될 수 없고,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세상에 나타낼 수 없습니다. 우리 주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궁극의 본을 보여주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제자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쉬우니까 그렇게 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지혜를 약속하셨습니다. 정말 안될 것 같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주님 같은 겸손함으로 하나되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