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되는 것은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교통 사고가 나면 사람들의 이런 성향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상대가 얼마나 다쳤는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책임이 몇대몇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명백하게 내가 잘못한 경우에도 먼저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나의 권리를 지키는 것, 내가 이익을 얻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자는 그렇지 않아야 합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더 이상 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하고, 다른 성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서는 내 권리를 내려놓기도 하고 그래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하는 것이 맞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절제’라고 표현했습니다. 절제라고 하면 식단이나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은 이 표현을 그런 관리의 측면보다는 목적을 가지고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사용합니다. 즉 복음을 위해서 이런 저런 모습이 되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절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선호가 있고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질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에 따라서 무엇을 할지 말지, 하면 어떻게 할지 등을 결정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난 원래 남들 앞에서 뭐 하는 것이 어려워. 그러니까 앞에서 기도하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난 원래 책 읽는 거 싫어해. 그러니까 성경도 읽지 않을거야’
‘난 원래 직선적인 성격이야. 그러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거야. 그 형제도 직언이 필요해’
‘난 원래 조용한 노래가 좋아. 그러니까 예배 시간에도 조용한 노래만 부를거야’
…
결과적으로 그 결정이 잘한 결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결정했느냐 입니다. 단순히 내 선호나 원함, 기질에 따라서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손해 보고 싶지 않아서 결정하는 것, 내 권리니까 그렇게 결정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절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음’이 기준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라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해야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복음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지만, 쉬운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향방 없이 달리고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싸우는 일이 됩니다. 무언가 열심히는 하는 것 같지만 의미 없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분명한 목표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살기 위한 용기와 지혜가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과 그에 대한 성경의 해답을 보면서, 결국 교회가 죄의 특징인 이기심(자기중심성)을 버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 그리스도, 성도, 복음을 두지 않으면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내가 정말 이런 면에서 세상과 다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