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본문: 유다서 1:11-16
설교자: 최종혁
심판에 대한 말씀은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듣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심판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이미지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히 모여서 우리끼리 예배하고, 모인 헌금으로는 이웃돕기에 힘쓰고, 성경의 권위 같은 것 운운하지 않고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면서 격려의 말이나 약간의 도덕적인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정도의 말만 했다면, 아마 세상에서 사랑 받는 종교가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교회의 목적은 세상에서 사랑 받는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말은 세상을 적으로 두고 세상에서 미움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첫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둘째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온 사람들이 교회로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이 땅의 교회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이 이와 같았다. 예수님은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나타내셨다(요 1:18).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리고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요 1:14). 참 빛으로서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빛을 비추신 것이다(요 1:8).
그런데, 어둠에 빛이 비추면 다 좋아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요 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생명의 빛,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췰 때, 오히려 어둠은 더 깊은 어둠으로 숨었다. 그 행위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둠의 행위를 드러내는 예수님을 미워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그럼 예수님은 세상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빛을 감추셨을까? 죄와 심판에 대한 말씀을 멈추시고, 사람들이 받을만한 말씀만 하셨을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여전히 빛을 비추셨고, 그 빛을 미워했던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통해 예수님은 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릴 교회를 구속하셨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은 교회에게 성령님을 보내셔서 교회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하게 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충만하게 드러내는 일을 한다. 생명의 빛을 받은 자들로서 그 빛을 나타낸다. 그렇게 할 때 빛을 사랑하여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실 두번째 반응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고 그런 면에서 교회는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 이런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로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은 교회의 죄이고 회개해야 하지만, 빛을 비추는 것으로서 미움을 받기 때문에 빛을 비추지 않는 것은 교회로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빛을 비추는데 있어 필수적인 것이 심판의 메시지다. 그래서 예수님도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셨고, 그 결과로 세상의 미움을 받으셨다. 이것이 교회가 따르는 그리스도의 길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실제로는 없을 일을 가지고 위협용으로, 그냥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세상에서 좀 더 의미있게 살아보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이것이 단순히 위협이라면 구원도 의미가 사라진다. 심판을 제거하면 구원도 함께 제거된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실제로 존재하는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고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도 진짜 구원이다. 교회는 이 진리의 빛을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한다.
유다서 말씀이 흥미로운 이유 중 하나는 이 심판의 메시지를 세상이 아닌 교회에게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는 눈에 보이는 교회로서 실제로 거듭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함께 있는 교회다.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는 상황이다. 스스로 믿고 구원 받았다고 고백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와 있었다. 이들은 심판을 향해 가면서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 길로 끌어 들이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교회는 경고를 받아야 했다. 이 거짓을 분별하여 그들 가운데서 그리고 자신의 삶 가운데서 그것을 제거해야 했다. 이것이 유다서가 교회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유다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로 11절을 시작하여, 우리에게 ‘화 있는 사람들’의 수배 전단지를 보여 준다.
“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동기(11절)
11절에서 이들과 유사한 사진을 보았다. 가인, 발람, 고라의 사진을 통해서 알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공통된 마음의 동기였다. 16절의 전반부 말씀이 설명하는 것처럼 이들은 정욕대로 행하고자 하여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만을 토한다. 그들의 말은 듣기 좋은 말일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만이 그 안에 숨어 있다.
“이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12-13절)
다음으로 12-13절은 이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 삶의 열매에 대해서 말한다.
유 12–13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여기서는 사진보다는 비유를 통해 그림을 그리듯 보여준다. 16절의 후반부 말씀은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한다.
유 16 …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이 설명을 쉽게 바꿔 말하면 ‘말만 있고 결과는 없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한다. 거창한 말을 하는 것이다. 자신을 포장하여 마치 뭔가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따르면 뭔가 있을 것처럼, 좋은 결과가 있을 것처럼 말한다.
또한 이들은 아첨의 말을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 그 말이 결국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든지, 삶을 무너뜨리든지도 상관 없다. 나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꿈이 되었든,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되었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지지한다. 그래서 더 매력적으로 들리게 한다. 하지만 그 말들은 아첨의 말일 뿐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말일 뿐이다. 이것이 화 있는 사람들의 특징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다.
이제 이들에 대한 묘사를 보자. 첫째는 이렇다. “그들은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12절)
“애찬”은 말 그대로 사랑의 식사(잔치)다. 지금은 예식으로서의 만찬과 교제로서의 애찬이 분리되어 있고 애찬이 사라진 경우도 많지만,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고린도전서 11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애찬과 만찬은 함께 시행되었고, 공동체로서의 교회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떡과 잔을 나누며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다시 오심을 기다렸다. 또한 한 떡과 잔에 참여함으로서 교회가 하나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도 선포했다. 애찬은 교회가 단순히 어떤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된 형제, 자매, 가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족의 식사 자리가 애찬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전반적으로 생활 수준이 올라왔기 때문에 그렇지 않지만, 우리도 과거에 애찬 시간이 일주일 중에서 가장 좋은 식사를 하는 시간이었을 때가 있었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의 애찬도 그러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먹기 힘든 음식을 다른 성도의 희생과 사랑으로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애찬이었다. 그렇게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는 교회의 하나됨을 확인하며 공고하게 하는 사랑의 시간이 애찬이었기 때문에, 애찬은 교회에 있어 정말 중요한 시간이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의 애찬에 죄가 들어 왔을 때, 사도 바울은 매우 강하게 그들을 책망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하여 우리가 자연스럽게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애찬 시간은 한편으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식사 교제는 단순히 같이 먹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서로의 깨달음, 간증, 어려움 등을 공유하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교제 가운데 교회가 서로를 세워주는 기능이고, 또 다른 형태의 말씀 사역, 즉 가르침이다. 설교가 공적인 말씀 사역이라면, 교제는 사적인 말씀 사역의 일부를 감당한다. 특히나 교제 중에 있는 가르침은 설교보다 구체적이고 상황적인 가르침일 경우가 많기때문에 더 피부로 와닿는 가르침이 되기도 한다.
유다는 교회의 이런 중요한 사랑의 자리에 가인, 발람, 고라의 길로 행하던 사람들이 기탄 없이 함께 하고 있는 문제를 지적한다. 유다는 이들을 “암초”라고 표현한다. 암초는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는 바위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리 알고 조심하지 않으면 배가 부딪쳐 침몰할 수 있다. 겉보기에는 다를 바 없는 바다인데, 그 안에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교회를 침몰 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교회의 애찬에 함께 하고 있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무도 모르게 숨어 있었다.
고린도 교회에는 부한 자들이 애찬 시간에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만든 일이 있었다. 실제로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유다서가 말하는 암초 같은 거짓 교사가 그들의 애찬에 참여 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에게서 얻을 것이 더 많다고 판단하고 그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부자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애찬과 관련된 의문을 조금씩 던졌다. 처음에는, 좋은 음식들은 다 당신들이 가져오는데 다 똑같이 나눠 먹는 것을 보니 당신들 참 사랑이 많다는 식으로 칭찬을 했다. 부자들은 처음에는 이 말을 좋게 들었는데, 자꾸 듣다 보니 이렇게 하는게 맞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어떻게 했었냐고 물으니, 이 사람들은 전에 있던 교회에서는 먼저 온 사람들은 먼저 먹고 나중 온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먹었다며, 그게 서로 편하고 좋았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부자들은 지금처럼 하는 것이 꼭 맞는 것은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조금씩 먼저 자신들이 가져온 것을 먹게 되었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들이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는 것이 안좋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고에 전혀 감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오기 전 최대한 빨리 많이 자신들이 가져온 음식을 먹었다. 그래서 취한 사람이 생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교회는 분열되었고, 그런 상태에서 주의 만찬은 합당치 않게 행해지게 되었다. 그렇게 교회는 죄를 용납하고 오히려 모이는 것이 해로운 교회가 되어 버렸다.
가상의 상황이지만, 이것이 유다가 말하는 애찬의 암초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이들은 좋은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할 뿐이고, 그 결과로 교회가 어떻게 되는 것은 상관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다는 이 사람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도 표현한다. 교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이익 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자기 유익이 아니라 듣는 자의 유익을 위해서 말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들의 말을 따르면 뭔가 유익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이익을 얻는 사람은 이들일 뿐이고, 그것이 이들이 원하는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또한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고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다. 구름은 그 자체가 물 알갱이이기 때문에 “물 없는 구름”은 ‘비 없는 구름’의 시적인 표현이다.
먹구름이 몰려 오면 사람들은 비가 올 것을 기대한다. 특히 비가 간절히 필요할 때는 더욱 그렇다. 거짓 교사들은 비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구름과 같은 존재로 자신을 나타낸다. 자신들이 마치 비를 줄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 그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부를 약속하고 건강을 약속한다.
- 삶의 평안을 약속한다.
- 과거로 돌아가 정욕을 따르는 삶을 살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 교회만 잘 나오면 되고, 헌금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한다.
- 가능하면 심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 심판이 있어도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해준다.
- 복음의 말씀을 깨달은 적이 있다면, 지금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든 천국가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해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그저 바람에 불려가서 사라지는 물 없는 구름과도 같다. 실제로는 아무 것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줄 수 없는 것을 마치 줄 수 있는 것처럼 약속할 뿐이다.
이 모습은 열매 없는 가을 나무와도 같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니 열매가 있을 것 같지만 없는 것이다. 열매가 없는 이유는 이미 뿌리까지 뽑혀 있기 때문이다. 유다는 이 상태를 “죽고 또 죽은” 상태로 표현한다. 두 번 죽은 것이다. 두 번 태어나는 ‘거듭남’의 반대를 표현하고자 이렇게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의 상태는 그야 말로 거듭 죽은 상태다. 허물과 죄로 인해서 영적으로 죽은 모든 사람들의 상태를 넘어서, 이들은 복음을 알면서도 의지적으로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정욕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 어떤 영적인 열매도 맺을 수 없다. 그런데도 마치 좋은 것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말만 한다.
13절은 이들을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고 묘사한다. 이것도 참 흥미로운 표현이다. 앞의 묘사는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강조했었다. 그런데 사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는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 수치를 만들어낼 뿐이다. 좋은 열매의 관점에서는 아무 열매도 없지만, 나쁜 열매의 관점에서는 풍성한 것이다.
결국 이들은 그저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일 뿐이다. 과거 별들은 밤에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거짓 교사들도 마치 자신들이 그런 별과 같은 존재인 양 포장해서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 자신도 유리하는 별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의 종착지는 캄캄한 흑암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유성처럼 그들도 사라질 것이다. 7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영원한 불의 형벌이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
이것이 거짓의 특징이다. 거짓은 항상 좋은 것이 있을 것처럼 말한다. 뱀이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거짓도 모두 그렇게 좋은 것을 약속한다.
그들을 따르면 부하게 될 것 같다. 그들을 따르면 건강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을 따르면 무엇이든 잘 될 것 같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사람은 그 말을 한 사람 뿐이다. 추종자들을 통해 자기 몸만 길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의 말을 따르면 모두가 이렇게 될 수 있다는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한다. 그들의 추종자들은 그저 그들을 배부르게 하고 그들을 건강하게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게 해주면서, 결국은 그들의 비극적인 결말을 함께 맞게 된다. 에스겔 34장에 나오는 자기만 먹는 목자, 자기 양을 잡아 먹는 목자의 모습이 정확히 이런 거짓 교사들의 모습이었다.
이것이 정확한 거짓의 몽타주다. 화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모든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심판이 없다면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은 진실을 가리고 거짓 평안을 주는 거짓 목자가 아니시다. 그렇게 하시기에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신다.
전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심판이 있고,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제 유다는 “화 있을진저 이사람들이여”라고 탄식했던 직접적인 이유인 심판을 기술한다.
“이 사람들”에게 선고된 심판(14-15절)
이 부분은 수배 전단지에서 경고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사기죄로 징역을 몇 년 선고 받았는데 도주 중이다라는 식의 내용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와서 자기 이익을 위해 그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 사람들에게 내려질 형벌은 징역 몇 년은 아니다. 영원하고 무거운 심판이 그들에게 예정되어 있다.
유다는 여기서 아주 오래된 예언을 인용하여 말한다.
유 14–15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의 이 예언도 천사장 미가엘이 마귀와 다툰 장면처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에녹1서). 하지만 이 예언은 참된 예언으로서 노아의 가족들을 통해 전달되었고, 후에 에녹1서라는 책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녹1서는 성경이 아니고,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성경에 근접하지도 않다. 다만 이 참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유다를 통해 이 오래된 예언이 참된 예언임을 여기서 증명하신다.
먼저 이 예언은 심판의 확실함을 증언한다.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말한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 즉 천사와 함께 임하시는 모습은 신약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이다.
마 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마 24:30–31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불과 유황도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것으로 세상이 끝나지는 않았다.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과 관계가 없었다. 노아의 대홍수가 이 심판에 가깝겠지만, 그 때도 하나님은 또 다른 기회를 주셨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고 결정적인 심판이다. 더 이상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날은 이미 정해져있다.
행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고 은혜의 때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시고 먼저 믿은 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며 오라고 부르신다. 하지만 이날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우리가 언제일지 모를 뿐이지 이날은 계속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하루 하루가 지날수록 그만큼 가까워지고 있다. 이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예언에 과거형의 동사가 사용되었다(“임하셨나니”).
베드로후서 3장에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이런 확실한 주의 오심을 부인하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벧후 3:3–4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지금까지 이 세상이 변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렇게 될 것이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이들의 말을 보면 창조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끝을 부정하고 있을 뿐이다. 이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자기의 정욕에 따라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편에 있는 것 같으면서 결국은 이런 거짓을 돕고 있는 자들도 있다. 바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알고 계신 그날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동일하게 자기 정욕을 채운다. 이런 잘못된 종말론을 주장하여 결국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종말까지도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만든다. 어쨌든 종말론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닌 것이다.
또한 세상은 또 다른 종말론을 말하기도 한다. 기후 위기, 지구 온난화, AI 혁명, 핵전쟁 등으로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한다. 그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 끝은 하나님의 시간표와 하나님의 방법대로 될 것이라는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세상은 그냥 끝나버리지 않는다. 지구가 멸망하면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그냥 모든 것이 끝나거나 리셋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단순히 끝이 아니라 심판이다. 종말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5절 말씀은 그래서 분명한 심판에 대해서 말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이유는 “뭇 사람을 심판”하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은 이 ‘모든’에 무엇이 해당되는지를 확실하게 한다.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완악한 말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한 ‘일’에 대해서, 한 ‘말’에 대해서 빠짐 없이 심판이 임할 것이다. 예외는 없다.
히 4:11–13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아주 작은 죄 하나도 하나님 앞에서 숨기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게 된다. 심지어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도 그렇게 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는 내가 그렇게 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롬 14:10–12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12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이 심판으로 하나님은 죄를 끝내실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교만과 반역을 끝내실 것이다. 15절 말씀이 “경건하지 않다”는 말을 얼마나 강조해서 반복하는지 보라. 경건하지 않은 것은 교회 안다닌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종교적 행위를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경한 생각 한두번 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하여 높아진 교만의 결과가 경건하지 않음이다. 그 모든 것들을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고, 심판하실 것이다. 빠짐 없이, 남김 없이, 숨김 없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누구도 명백한 증거 앞에서 핑계할 수 없고 자신을 변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이유는 결국 이 심판을 원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딱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실제적으로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마치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들도 많이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경건하지 않음은 모두 심판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경건하지 않게 행하면서 심판 받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
유다서가 강조하고 있는 심판 받을 자들의 특징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다.
유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하나님을 향해서는 원망과 불만을 토하고 사람들을 향해서는 자랑하고 아첨하면서, 결국은 자기 정욕대로 행하여 그 정욕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성경은 이들에게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니, 이들의 말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이들의 거짓에 속지 말라. 이들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무시한다. 우리가 원하는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한다. 구원 받았으니까 이제는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고 한다. 교회만 잘나오면 괜찮다고 한다. 헌금만 잘하면 괜찮다고 한다. 심판도 없다고 한다.
속지 말라. 유다서의 수배전단지를 유심히 보고, 거짓을 분별하여 내 삶에서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젠가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라는 경고의 말을 무시한 자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따른 모든 경건치 않은 자들에게, 영원한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도전
이 모든 말씀을 들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경고를 받아야 한다. 경고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특별히 교회 안에 있으면서 복음을 알고 경험한 자들은 더욱 이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히 10:28–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교회 안에 있는 거짓 성도(교회)에게 더 무거운 형벌을 내리실 것이다.
이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다. 바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이 심판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이 심판에서 예외가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기 때문에 이미 형벌을 다 치른 죄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지 않으신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을 먼저 만나야만 한다. 예수님을 영접하라.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바로 이런 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내가 받아야할 이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내가 받아야할 화를 예수님이 받으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나에게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신다. 진짜 심판에서 진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나에게 일어난 적이 있는가? 없다. 그 전에도 없고 후로도 없다. 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는 것이 내가 해야할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된 예배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