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1)
본문: 유다서 1:11-16
설교자: 최종혁
유다서는 크게 보면 1-2절은 인사말이고 24-25절은 축복 기도로서 맺음말이라 할 수 있다. 3-23절이 본문인데, 이 중에서 3-4절이 주제문으로서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이 편지를 기록한다고 밝힌다. 그리고 5-16절은 특별히 이들의 특징에 대해서 여러 방식으로 묘사하고, 17-23절은 교회가 이들에 대항하여 어떻게 믿음을 지켜가야 하는지를 여러 명령을 통해 말해준다.
우리는 지금 거짓 교사들의 특징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고 있다. 5-10절이 거짓에 기초한 삶을 강조한다면, 11-16절은 그런 삶의 결말인 심판을 강조한다. 각 부분이 더 강조하는 부분은 있지만, 거짓에 기초한 죄악된 삶과 그런 삶의 궁극적 결말인 심판이라는 두 주제는 반복되서 나타난다. 이 둘이 절대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11-16절도 마찬가지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로 시작하여 심판이 강조되고 있지만, 이 심판 받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도 또 다시 여러 방식으로 보여준다. 마치 수배 전단지의 몽타주를 그리는 것 같다. 비슷한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고(11절),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묘사하고(12-13절), 글로 설명하는 식이다(14-16절).
이들에 대한 설명은 마지막 절인 16절에 정리되어 있다.
유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전체적으로 이 사람들의 ‘말’이 어떠한지가 강조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은 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로 그들의 삶을 감추려고 하겠지만, 결국 말이 그들의 삶을 드러내기도 했던 것이다.
16절의 설명은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다. 앞 부분인 원망하는 자, 불만을 토하는 자,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는 11절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고, 뒷 부분인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고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것은 12-13절에 대한 설명이다. 오늘은 11절에 나오는 비슷한 사람의 사진 3점을 함께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화 있는 이 사람들의 마음의 동기를 살펴 볼 수 있다.
16절은 이 사람들을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묘사와 상당히 유사하다(5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시작으로 광야에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지만, 이들이 하나님께 감사했다거나 찬양했다는 기록은 처음 홍해를 건넜을 때를 제외하면 전무하다. 물론, 감사했던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는 마치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처럼 여기고, 항상 무언가를 더 원했다. 그래서 무언가 부족하다 싶으면 원망과 불만을 토했다. “불만을 토하는 자”라는 말은 “흠을 찾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들은 어떻게든 불평거리를 찾아내려고 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이들의 특징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마음이 이런 원망과 불평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원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자기 정욕대로 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 이런 특징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특징을 보인다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멸하셨다. 그렇다면, 지금 교회 안에 들어와서 원망하고 불만을 토하고 정욕대로 행하는 자를 어떻게 하시겠는가. 유다는 이 사람들에게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라며 화를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고, 최소한 이를 통해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들의 길을 따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고를 받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유다는 또 다른 구약의 예를 통해 그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준다. 세 장의 사진이다.
유 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가인, 발람, 고라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들이 바로 이들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이들의 길을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동기에 대한 부분이다.
가인: 나의 길
먼저 이들은 가인의 길로 행했다.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로 유명하지만, 여기서 유다가 주목하는 것은 그의 행위 자체 보다는 동기다. 즉, 거짓 교사들이 가인을 따라 다른 사람을 살해한 사람들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했었던 가인과 같은 마음의 동기를 가지고 자기들 나름의 정욕을 따랐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가인의 이야기는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이야기는 창세기 3장에서 죄가 처음 인류에 들어온 이후에 직접적으로 인간 관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함께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 치는 자로서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창 4:4-5).
이 사건에 대한 기록에서 하나님께서 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되어 있다. 가인이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고, 아벨과 다르게 가인은 ‘첫’ 소산으로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이다. 이 말은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히브리서 11:4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말한다. 즉,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려진 제사였고, 가인의 제사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
요한일서 3:12는 가인이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고 말한다. 가인은 동생을 죽이는 것으로서 악한 자에게 속하게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악한 자에게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동생을 죽인 것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유는 그의 행위는 악하고 동생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행위’는 분명 하나님께 제물을 바친 행위를 말한다. 앞의 히브리서 말씀과 함께 정리해 보면, 아벨은 믿음으로 의로운 제사, 즉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제사를 드렸다고 할 수 있다.
즉, 가인과 아벨은 무지의 상태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각자 최선을 다해서 제물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벨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 것이고, 가인은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고 자신이 원하는대로 제물을 드린 것이다. 유다서가 말하는 것처럼 가인은 “가인의 길”, 즉 자기 길을 선택했다. 아벨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자기 길을 따라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가인의 반응과 하나님의 책망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가인은 분노했다. 만약 그가 순전한 마음으로 무지한 상태에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 것이라면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아벨의 방법으로 다시 제사를 드리거나, 아니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하나님께 직접 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노했다. 자기 방식을 하나님이 거절한 것에 대한 분노였기에, 이 분노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분노는 이내 동생에 대한 시기와 미음으로 바뀌었고, 결국 동생을 살해하는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책망하시는 말씀도 살펴보자.
창 4:6–7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이것은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책망이다. 즉, 가인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선을 행하지 않은 것, 악을 행한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 가인의 무지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그의 의지에 대한 책망이다. 가인은 무지해서 실수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이어지는 상황은 더욱 분명하게 가인의 이런 죄를 드러낸다. 하나님은 가인의 지난 죄를 책망하셨을 뿐 아니라 거기서 이어질 수 있는 더 큰 죄에 대해서 경고도 하셨다. 죄가 너를 다스리려고 하지만, 네가 죄를 다스려야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하지만 가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자기 정욕을 따라 동생을 살해했다.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기 길을 따른 것이다.
그런 가인을 하나님께서 찾으셔서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에 대해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짜증을 냈다(창 4:9).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저주를 선고하셨을 때도 가인은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며 반발했다(창 4:13).
가인이 바로 ‘원망하며 불만을 토하고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지만,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분노했다. 그렇게 결국 자기 정욕대로 행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이 아닌 악한 자에게 속했다는 증거다.
하와는 가인을 낳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도다”라고 말하며 기뻐했었다(창 4:1). 아마 하나님의 약속대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 바로 이 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가인은 하나님을 가까이 알았지만 하나님의 길을 거절하고 자기 길을 따라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시조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
유다는 지금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꿈꾸는 사람들이 이런 가인의 길로 행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방법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나의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화 있는 자들의 첫번째 몽타주다.
발람: 유혹의 길
다음으로 유다는 이 사람들이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라고 묘사한다. 여기서는 표현이 보다 강해진 것이 보인다. 발람의 길은 “어그러진” 길이다. 잘못된 길인 것이다. 이들은 그 잘못된 발람의 길로 “몰려” 갔다. 그 길로 달려들었다. 뛰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늪에 빠지듯 빠져버렸다. 실수로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닌 것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길로 달려든 것이고, 그 목적은 “삯”, 곧 재물이다.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결국 세상에 있다. 이들은 세상과 다르고 싶어하지 않는다. 구원(?) 받기 전의 삶을 원한다. 그러면 그냥 세상으로 가면 될 것 같은데, 여전히 교회 안에 머물고 있는 이유가 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다는 발람의 예를 들면서 대표적으로 “삯”, 즉 돈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자기 정욕대로 행하고 싶어하는데, 많은 경우 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래서 이들은 돈을 원해서 교회 안에 머문다. 이들은 단지 자기의 길로만 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만들면서 그들에게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 모습은 구약의 발람의 모습과 같다.
발람의 이야기는 민수기 22장 이후에 기록되어 있는데, 구약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 중 하나다. 이야기 자체도 흥미롭지만, 발람에 대한 평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약간은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이 사람을 좋게 봐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쉽게 분별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이런 면이 11절에 언급된 예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가인의 경우 몰라서 그랬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람의 경우는 왕의 청탁을 받고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도 있었는데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이방인 예언자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고라의 경우도 뒤에서 보겠지만, 그가 했던 말을 들어 보면 꽤나 일리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모습들이 거짓이 우리 가운데 가만히 들어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100%의 거짓은 쉽게 눈에 띄기 때문에 분별하기 쉽다. 하지만 진리와 섞인 거짓은 그렇지 않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안에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으면, 우리는 그 말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그렇게 우리는 거짓을 받아들이게 된다.
민수기 22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평지를 통해 가나안 땅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보니,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많고 강해서 불안했다. 여기서 발람이 등장한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인해서 불안했던 발락은 (용하다고 소문난) 발람이라는 예언자에게 돈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발람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한다(민 22:8). 하나님은 그런 발람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모압 왕의 제안을 따르지 말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민 22:12).
하지만 발락이 더 높은 신하를 보내서 더 많은 것을 약속하자, 발람은 결국 발락의 신하들을 따라 나선다.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정황 상 발람은 애초부터 발락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에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제안이 들어오자 그를 찾아온 신하들을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께 간청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가라고 하시면서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민 22:20)고 말씀하셨고, 발람은 아침에 나귀를 타고 모압의 고관들과 함께 모압 왕에게로 갔다.
흥미로운 일은 그 길에서 벌어졌다. 나귀가 갑자기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발람이 아무리 돌이키려고 채찍질을 해도 나귀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귀에서 내려서 나귀를 지팡이로 때렸는데, 갑자기 나귀가 말을 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 때리느냐?”(민 22:28)라고 억울해 하며 따졌다. 화가 잔뜩 났던 발람은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민 22:29)라고 답한다. 그리고 그 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여셔서 손에 칼을 들고 길에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볼 수 있게 하신다.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민 22:32–33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겉보기에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며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의 길은 사악했다. 발람은 순종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정욕의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겉보기에는 순종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그의 길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길이었다. 그 마음의 동기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그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은 그가 원했던 ‘돈’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르는 말만 하지 않는다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다시 한 번 확실하게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후 발람은 결국 모압 왕 발락의 요구에 따라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축복하는 예언을 한다. 정말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축복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돈을 위해 움직였고, 죽고 싶지 않아서 축복했던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말 못하는 나귀를 사용하여 말씀하셨던 것처럼, 원치 않는 발람을 사용하셔서도 말씀하셨던 것이다.
신 23:4–5 …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5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결국 발람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민 24:11). 그런데 발람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발람은 민수기 31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민 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미디안을 쳐서 여호와의 원수를 갚으라고 명령하셨고, 이 말씀은 그 결과로서 언급된 것 중 하나다. 브올의 아들 발람도 미디안의 다섯 왕과 함께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왜일까? 이유는 뒤에 나온다.
민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 모세가 말하고 있는 사건은 발람의 이야기가 끝난 직후인 민수기 25장에 기록되어 있다. 브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모압의 여자들이 우상 숭배를 하면서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했고, 결국 그들이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를 범했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그들을 심판하셔서 이만 사천 명이 죽었다(민 25:9). 하나님은 이 일로 인해서 미디안을 치라고 명하셨었고(민 25:17-18), 민수기 31장이 바로 그 결과다.
즉, 발람이 모압 여자들이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하는 일의 배후에 있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 2장 14절도 이 사실을 확인해 준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은 ‘어쨌든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긍정적인 인물이 아닌 것이다. 중간 중간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의 중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그 마음을 따라서 다른 방법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고, 성공했던 것이다. 그들을 죄로 유혹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고 심판을 받게 한 것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전승에 기반하여 발람이 어떻게 이스라엘 앞에 걸림돌을 놓아서 죄로 유혹했는지를 이렇게 기록했다.
요세푸스, “그러니 만일 너희가 그들에게 단기간의 승리라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너희는 내가 지시하는 것들을 따름으로써 그것을 얻을 것이라:—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딸들 중에서 미모가 가장 탁월하여 그녀들을 보는 자들을 얌전하게 만들고 사로잡기에 합당한 가장 아름다운 자들을 준비시키고, 이들을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최고로 꾸미고 치장하라. 그리고 나서 그녀들을 이스라엘 진영 근처로 보내어 잡히도록 주어서, 히브리인들의 젊은 남자들이 그녀들과 함께 있기를 원할 때에 그것을 허용케 하라. 그리고 그녀들로 하여금, 그 남자들이 자신들에게 반하게 된 것을 보았을 때, 떠나게 하라. 그리고 만일 그 남자들이 그녀들에게 머물기를 간청하면, 그녀들로 하여금, 그 남자들이 그들 자신의 율법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세워주셨던 예배를 떠나 미디안 족속과 모압 족속의 신들을 숭배하도록 설득할 때까지 동의하지 않게 하라. 이 방법을 사용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노하실 것이라.”
왜 이렇게 했을까? 그가 처음부터 원했던 돈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일이 끝나자마다 바로 이런 꾀를 생각해 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발람과 같은 경험을 하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을 법도 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접 말씀하셨고, 실제로 죽음 바로 직전의 경험도 했다. 그가 타고 다니던 나귀가 말을 하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하시는지도 목격했다. 하지만 가인이 그랬었던 것처럼, 발람에게도 그 모든 경험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발람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저 그가 원했던 것은 돈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시는 일은 원망과 불만의 일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자기 정욕을 따라 행했다. 그것을 위해 사람들을 죄에 빠뜨리는 일도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든,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면 상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에 사로 잡힌 사람의 특징이다.
토마스 맨튼, “그리스도께서는 영혼들을 자신의 피를 흘릴 만큼 가치 있게 여기셨으나, 유혹하는 자들은 영혼을 값싼 물건으로 여긴다. 그들은 자기 이익과 세상적인 야망을 위해 영혼을 배신하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
유다는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그것이 마음의 동기다. 그리고 그 어그러진 동기를 따라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행한다. 그것이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지, 특히 다른 영혼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개의치 않는다. 이것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고, 화 있는 자의 두번째 몽타주다.
고라: 반역의 길
세번째로 유다는 “고라”의 사진을 들고 온다. 이 사진의 특징은 반역과 멸망이라 할 수 있다.
고라의 이야기는 민수기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고라는 레위 자손이었는데, 출애굽기 6장의 족보에 따르면 모세와는 사촌 지간이 된다. 그런 고라가 여러 사람을 모아서 당을 짓고 백성 가운데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 250명을 선동하여 모세를 대항하여 일어났다.
고라가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면서 강조했던 것은 이것이다.
민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괜찮게 들린다. 시대를 앞서간 민주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세와 아론만 특별한 지위와 특권을 누리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250명이 되는 사람들이 이들의 말에 동조했던 것도 이해가 된다. 만약 모세와 아론이 이들의 말처럼 실제로 스스로 높이면서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면, 고라의 이런 주장은 반역이 아니라 오히려 공동체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죄를 들춰내어 바로 잡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구분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들을 세우셨던 것 뿐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모세를 특별히 부르셨다. 그와 대면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특별하게 구별하셨다. 백성들이 다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다는 고라의 주장은 틀린 말은 아닐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따로 세우신 권위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그런 권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지도 않았다.
사실 스스로 높이고 싶었던 사람은 모세와 아론이 아니라 고라 자신이었음이 드러난다. 후에 모세는 고라를 이렇게 책망했다.
민 16:9–10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이것이 고라가 반역을 일으킨 진짜 이유다. 남의 교만을 지적하는 사람은 본인이 교만한 경우가 많은데, 고라의 경우가 정확히 그랬던 것이다. 고라는 지금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역할 이상을 원했다.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정욕을 따라 행한 것이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 모든 것을 백성을 위하는 것처럼 좋은 말로 포장했었을 뿐이다. 고라와 함께 반역을 주도했던 다단과 아비람을 모세가 오라고 불렀을 때도, 그들은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민 16:13–14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 14이뿐 아니라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도 아니하고 밭도 포도원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니 네가 이 사람들의 눈을 빼려느냐 우리는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
이들도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한다. 그러면서 말로는 백성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시고, 아론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보다, 이들의 말이 훨씬 더 듣기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좋은 말이 결국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역임을 알지 못했다. 그 좋은 말에 속아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멸망했다.
민 16:31–33 그가 이 모든 말을 마치자마자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32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33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
고라에게 속한 자들은 이렇게 멸망했고, 곧 하나님께서 불을 보내셔서 반역에 동참했었던 250명을 태우셨다. 그리고 이어진 염병으로 만 사천칠백 명이 죽었다.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고 원망과 불만의 듣기 좋은 말을 따른 결과가 그렇게 참혹했던 것이다.
이것이 고라의 반역의 길이다.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의 사람들은 이길을 따르며 사람들을 멸망의 길로 이끌고 있다.
그린&루카스 in <BST>, “이 독성 강한 침투, 혹은 치명적인 납치극은 바로 우리 코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유다가 우리에게 ‘이런 일을 하자고 권하는 저 좋은 사람들’이 사실은 위험한 반역자라고 경고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정말 우리 편같다.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주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마음을 놓게 만든다. 하지만, 그럴 때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납치범은 험상 궂게 생겨서 누구도 따라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누가봐도 친절하고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결국 얼마나 사람이 ‘나이스’한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말과 삶을 봐야 한다. 그 말과 삶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만으로 특징지어진다면, 그 사람은 고라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빼고 생각해 보면, 고라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고라는 기득권에 용감하게 대항하여 백성을 위해 옳은 말을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혁명을 이루지 못했던 사람으로 평가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고라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게 선동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기 생각을 말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하려고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괜찮은 사람으로 평가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것이 화 있는 사람의 세번째 몽타주다.
도전
가인과 발람, 고라의 길은 사실 다르지 않다. 우리가 계속해서 본 것처럼 이들의 길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하며, 자신의 욕심을 따르는 삶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는 원망과 불만, 정욕으로 표현되었다. 특히 이들 모두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은혜를 누렸다는 면에서 단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떠난 사람들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타깝지만 이들에게 성경은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라며 심판을 선포한다.
정말로 교회 안에 있는 가인과 발람과 고라와 같은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 이들은 개인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가치관이 될 수도 있고, 혹은 작은 생각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들에 유의해야 한다. 특히 이들의 특징이 정욕이 동기가 된 원망과 불만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가끔씩 이와 비슷한 말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떻게 성경 말씀에 그대로 다 순종하냐,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도 우리가 다 순종하지 못할 것 알면서 주신 말씀일텐데, 그렇게 다 순종하려고 할 필요 없다. 그건 율법주의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다.
어떤가? 맞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하나 하나를 따로 놓고 보면 틀린 말이 없다. 문제는 이 말이 순종하고 싶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순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다. 순종하고 싶지 않은 정욕이 동기가 되어 순종하기 싫다는 원망과 불만의 말이 이렇게 잘 포장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순종하고 싶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항상 안타까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종하고 싶은 사람은 더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순종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핑계를 찾지 않는다.
가인은 정말로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어 했는데 그렇게 못한 사람이 아니다. 발람은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축복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 아니고, 고라는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했던 사람이 아니다. 자기 정욕에 의해 움직였고, 그래서 그들의 말에는 원망과 불만이 있었다. 성경은 이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포했다. 만약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다면 우리도 같은 종착지에 도착하게 될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내가 그들과 같이 다른 사람들도 멸망으로 이끌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경고하신다.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사진을 보며, 내가 가까이 하고 있는 무엇이 그와 비슷하지 않은지 살피고, 특별히 나에게 그런 비슷한 모습이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만약 그런 비슷한 모습이 보인다면 방에서 더럽고 위험한 벌레를 발견한 것처럼 그것을 죽이고 나에게서 제거해야 한다.
길은 항상 어느 곳으로 이어지고 종착지가 있다. 내가 걷는 길이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이면,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에 나도 도착할 것이다. 멸망의 도시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할 길은 그 길이 아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길을 걸어야 한다. 그 길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