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본문: 고린도후서 7장 10-11절
설교자: 조정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우리는 크고 작은 일로 근심한다. 아무것에나 염려할 수 있다(빌 4:6). 그런데 성경은 우리 근심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2) 세상 근심. 이것은 근심의 내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아니면 근심하는 이유나 태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인가? 그것을 밝히려면 먼저, 본문을 기록한 바울이 어떤 맥락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후 7:8-9)
바울은 고린도 교회 일어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엄중한 경고와 책망이 담긴 편지를 썼고, 디도는 그 편지에 대한 고린도 성도의 반응을 바울에게 전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얻게 했다(고후 7:6). 디도는 그들이 주님을 사모하고 죄에 대하여 애통히 여겼으며 바울에 대한 열심이 변치 않았다는 소식을 전했고, 바울은 잠시 근심을 줄 수 있었던 그 편지가 결국 회개를 낳은 사실에 감사하면서 편지를 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됐다(고후 7:7). 그러므로 문맥을 볼 때, 성경이 근심을 두 종류로 나누는 기준은 이거다: 근심이 낳은 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 다소 극단적인 결과다: 구원과 사망. 오해하면 우리가 어떤 근심을 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은 무슨 일로 근심하든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이고(그래서 후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의 근심은 결국 사망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근심으로 어떻게 선을 이루는지 아는 게 중요하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11절)
근심은 우리가 겪는 실재다. 심한 근심은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의 근심으로 하나님이 결국 이루시는 선이 무엇인지 안다면, 우리는 잠시 근심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루실 선을 기대하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 가운데 바랄 수 있다.
1. 이 근심이 당신을 얼마나 간절하게 하는가?
간절함(σπουδή)은 ‘부지런함’, ‘힘씀’을 뜻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근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참으며 어떻게든 주님을 부지런히 섬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심 그 자체가 우리로 부지런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근심 때문에 게을러지고, 염려 때문에 주를 섬기는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심 때문에 더 기도하고, 염려 때문에 더 모이기를 힘쓰며, 낙심 때문에 더 성도를 돌아보고 세워주며, 걱정 때문에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을 얻기 위하여 더 간절히 말씀을 찾고 따르는 것이다. 당신의 근심은 당신을 얼마나 간절하게 하는가?
2. 이 근심이 당신을 얼마나 변증하게 하는가?
변증(ἀπολογία)은 기독교 신앙으로 불신앙이 낳은 여러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 근심 중에 우리는 자문한다: ‘복음은 어떻게 이 근심 중에 소망이 되는가?’, ‘기독교 신앙은 이 어려운 질문에 답을 주는가?’,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이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뜻은 근심이 만든 질문에 우리가 올바로 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믿을만한 분인지, 사랑이 많은 분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고 불신과 원망으로 답하는 게 아니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사랑을 볼 때,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고 사랑이 많은 분이다’라는 답을 찾는 거다. 당신의 근심은 올바른 답을 찾게 하는가?
3. 이 근심이 당신을 얼마나 분하게 하는가?
우리의 분노는 거의 대부분 악하다. 그러나 의로운 분노도 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분노가 대표적인 예다. 근심이 일으키는 분노 또한 둘로 나뉜다. 악한 분노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로 쏟아지며 판단과 정죄, 상대적 우월감(교만), 미움 등을 낳는다. 의로운 분노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집중한다.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하며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97:10). 근심과 슬픔 가운데 우리의 분노는 변질되기가 너무 쉽다. 나에게 범죄한 성도를 용서하고 그가 악에서 돌이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분노하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하나님의 처벌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분노한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보고 분노하신 주님을 보며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하는 시편 말씀을 떠올렸다(요 2:17; 시 69:9).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바로 이런 종류의 분노를 품게 한다. 주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는 열심에 사로잡힌 공의로운 분노.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4. 이 근심이 당신을 얼마나 두렵게 하는가?
바울이 말한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후 5:11),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고후 7:1). 우리는 근심 중에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돌아본다. 교만했던 마음을 뉘우치고, 하나님이 언제든 드러내시면 한순간에 벌거벗은 것처럼 실체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그래서 거룩하신 심판주를 두려워하는 자는 근심 중에 오히려 경건한 삶을 권면하고 또 이루기 위해 힘쓴다. 근심이 결국 우리를 하나님 경외하는 태도와 삶으로 이끄는 것이다. 당신의 근심은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게 하는가 아니면 불신하고 원망하게 하는가? 거룩한 삶으로 이끄는가? 아니면 나태하고 게으른 삶으로 이끄는가?
5. 이 근심이 얼마나 당신을 사모하게 하는가?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일뿐만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다(고후 7:7). 본문이 말하는 사랑(ἐπιπόθησις)은 ‘기다림’, ‘갈망’을 뜻하는데,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은 시편 기자의 마음에서 잘 발견된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5-6). 깊은 어둠이 지나면 밝은 동이 튼다는 걸 아는 파수꾼은, 밤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근심을 이겨내며 아침이 되기를 간절히 기다린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실 것을 믿는다. 말씀으로 내 발을 비추시고 내 길을 보이실 것을 믿는다. 주께서 마침내 평안한 아침을 주실 것을 기다리며 갈망한다. 세상 근심은 우리로 주저앉게 하지만, 하나님 주신 근심은 그 자리에서 기도하게 한다.
6. 이 근심이 얼마나 당신을 열심 있게, 벌 하게 하는가?
열심과 벌을 같이 다루기를 원한다. 이는 “열심”이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든 죄에 대한 맹렬한 분노(요 2:17; 히 10:27)를 뜻하기 때문이고, “벌”은 그 죄에 대한 징벌을 내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눅 21:22; 살후 1:8, “원수 갚는 것”, 롬 12:19). 특별히 본문에서 바울이 의미한 바는 고린도 교회 일어난 범죄를 그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다룬 것을 뜻한다. 근심이 깊을수록 우리의 판단력은 흐려진다. 타인의 잘못은 왜곡 또는 확대되고, 자기 잘못은 축소 및 미화된다. 그러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죄를 정직하고 겸손하게 다루지 못한다. 그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웠는지, 성령을 근심하게 했는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로 행한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근심하게 하신 이유는 그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인정하고 회개하여 다시 주님과 더불어 먹게 하시려는 것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당신의 근심은 당신의 죄를 미워하게 하는가? 당신을 그 죄에서 돌이키게 하는가?
7. 결론적으로 이 근심이 얼마나 당신을 깨끗하게 하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이것이 결론이다. 핵심 단어는 “일체”(πᾶς)다. 단수형으로 ‘각각’의 뜻을 갖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앞서 다룬 여러 측면에서 “각각,” “구석구석”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정결한 신부라고 했다(고후 11:2).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 말하면서, 신랑이신 예수께서 신부인 우리를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신다고 했다(엡 5:27). 그래서 근심을 주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하신다. 그렇게 티나 주름 잡힌 것을 없애시고, 모든 면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신다. 당신의 근심을 낭비하지 말라. 세상 근심은 사망을 낳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근심을 통해 그분의 선하신 뜻,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시기를 기도한다. 기억하라. 우리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자다(고후 6:10).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