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12:13-21
설교자: 최종혁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그들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도 만나서 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만났는데, 안타깝게도 그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 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부류다. 이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양식을 얻고 병 고침을 얻는 것에는 열광적으로 반응하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그런 일을 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또 다른 부류는 영적인 것에 관심은 있지만 여전히 물질적인 것에 매여있는 경우다. 이 경우는 종교 생활에만 집착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영적인 일(그렇게 보이는 일)만 할 뿐,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선택지는 이들에게 없다. 예수님보다 더 우선순위에 있는 물질적인 것들이 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놀랍지 않게도, 이 둘은 상부상조하는 관계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영적인 것에 관심이 있으면서 여전히 물질적인 것에 매여있는 사람들은 거짓 종교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물질적인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그들이 안심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그들을 통해 채운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 종교가 정확히 그런 모습이었고, 오늘날의 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많은 종교 집단의 모습도 정확히 그런 모습이다. 한 마디로 이들 모두는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포장된 물질주의자들이다. 앞으로 4시간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던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이런 물질주의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돈’에 대한 말씀이다.
로마서 1장에서 성경은 죄의 본질적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즉,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어떤 것을 두는 것이 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무엇이든 그렇게 한다. 실제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신으로 만들어 섬기기도 한다. 쾌락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하고, 명예나 인기를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한다.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것들의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은 ‘돈’이라 할 수 있다. 돈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가치가 없지만, 사람들의 약속에 따라 모든 것의 가치가 돈으로 매겨진다. 그래서 지금 세상은 돈으로 원하는 모든 것들을 얻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원하는 것, 가지고 있어도 더 갖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그런 면에서 돈은 대단한 것이 되었다. 사람들이 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고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도 돈과 관련된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한다(딤전 6:10). 예수님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그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다고 하시면서(마 6:21),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동급의 주인으로 놓고 비교를 하신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래서가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렇게 비교하신 것 뿐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은 재물에 대한 태도가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음을 말씀하신다. 핵심이 되는 두 말씀을 먼저 읽어보자.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고,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경고하셨다. 이 명령과 경고 사이에 예수님은 한 부자의 비유를 통해 이 말씀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신다. 본문을 그렇게 나누어서 살펴보자.
명령: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3-15절)
이 사건은 수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한 사람에 의해서 시작된다.
눅 12: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절 말씀을 보면, 당시 현장에 수만 명이 모여서 서로 밟힐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셨고, 높은 경쟁률을 뚫고 이 사람은 예수님께 직접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던 것과 완전히 상반되는 요청을 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주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궁극적인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을 말씀하셨다. 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니, 세상 속에서 두려워하지 말 것도 말씀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참된 신앙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맥락에서 발언권을 얻은 이 사람은 유산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다. 하늘의 유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이 땅의 유산에 대해서 이 사람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께 이 상황을 바로 잡아 줄 것을 요구했다. 이 상황이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재물과 탐심에 관한 교훈을 주기 좋은 상황이 되었고, 지혜로운 교사이신 예수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셨다.
상속에 대한 율법의 규례는 신명기 21:15-17 등에서 발견된다. 장자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두 배의 상속을 받을 수 있었다. 신명기의 말씀은 혹 장자보다 차자가 더 사랑을 받았다고 해도, 장자는 장자로서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가야할 몫을 제대로 주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규례가 장자에게만 특권을 주어서 자녀들을 차별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당시의 문화를 고려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장자는 그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는 비단 지금 우리 개념에서의 작은 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역할 뿐 아니라, 형제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하는 대가족의 가장으로서의 역할까지 포함했다. 우리나라도 지금은 이런 개념들이 많이 약해졌지만, 불과 한 두세대만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봐도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형제들은 단지 한 부모의 자녀들일 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묶여 있었던 운명 공동체에 가까웠고, 가장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장남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아 그 공동체를 이끌고 돌보는 일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남이 더 많은 상속을 받는 것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모든 장남들이 그런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았고, 설령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형제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돈에 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태도(더 가지고 싶다!)는 항상 자신이 손해본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그래서 상속에 대한 싸움은 그때나 지금이나 꽤나 흔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고대 이스라엘은 율법의 선생들인 랍비들이 중재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이 사람도 예수님을 찾아와 중재를 요청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왜 상속에 불만을 가졌는지는 말씀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정말로 형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이 동생이 유산을 더 가지고 싶은 욕심에 문제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동생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요청하는 것을 보면 그 형이 동생의 몫을 아예 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할 수 있다. 만약 형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이 문제를 공론화 해서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 경우 이 사람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기보다 “내 형을 명하여 유산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라고 명령에 가까운 요구의 말을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당연히 형이 잘못을 하고 있는 상황이고 공의로우신 예수님께서 그의 편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상황이 반드시 그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오히려 이 사람은 정해진 이상을 원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근본적으로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예수님도 먼저는 이렇게 답하셨다.
눅 12: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먼저 예수님은 “이 사람아”라는 표현을 통해 약간의 거리를 두시면서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물으셨다. 쉽게 말하면 “내가 너희 물건이나 나눠주는 사람이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재판장이자 심판의 주시다. 바로 앞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두려워할 자”, 사람을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5절).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세상을 심판하고 다스릴 왕이시다. 그 예수님께 나아와서 겨우 요청한다는 것이 유산 상속에 대한 것이니 정말 어이가 없고 답답한 상황이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이신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영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실 때,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영원에 있지 않았고, 지금에 있었다.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이 놀라운 말씀을 하고 계시는 예수님께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재물에 있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 빨리 이 유산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유산 문제에 대해서 누구의 잘못인지는 여기서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훨씬 더 근본적인 문제를 보시고 그 문제를 공론화 하신다. 바로 탐심의 문제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신다.
눅 12:15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탐심 혹은 탐욕은 ‘더 원하는 마음’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탐심은 필요 이상을 원한다. 옳은 것, 적정한 것 이상을 원한다. 항상 ‘더’ 원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않는 마음이 탐심이다.
탐심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전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기서 “사랑하는”을 “탐하는”으로 바꿔도 의미가 동일하다. 사랑은 만족을 모른다는 면에서 탐심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그것을 더 가지기 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 만족이라는 것은 이제는 충분해서 더 이상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더 원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할 뿐이다. 정말로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더 하나님을 알기 원하고 더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탐심의 또 다른 이름은 “우상 숭배”일 수 밖에 없다(골 3:5,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는 것이 탐심이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사람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인정 받고자 하는 탐심도 있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자 하는 탐심도 있다. 쾌락을 원하는 탐심도 있다. 그리고 오늘 주제인 재물을 원하는 탐심도 있다.
예수님은 그 모든 탐심에 대해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다. “삼가”라는 것은 분별하라는 의미다. “물리치라”는 것은 경계하여 지키라는 의미다.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탐심을 가질 수 있다. 탐심은 없다가도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분별해야 하고 내 마음을 지켜야 한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처럼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보는 순간 탐심이 내 마음속에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처음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와 같은 일이 우리 안에 계속해서 일어난다. 뱀을 만나기 전까지 하와에게 금지된 열매는 금지된 열매일 뿐이었다. 다른 많은 나무도 있었기에 굳이 그 나무에 관심도 두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뱀을 만나고 나서 그 나무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였다. 하와의 마음에 그 열매를 원하는 마음(탐심)이 생겨났고 결국 그 마음을 따른 것이 첫 죄가 되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마음을 가만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언가를 원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죄악된 것이라면 그 마음도 죄가 된다. 그 대상은 죄악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원한다면 그 마음이 죄다. 이것은 정량적으로 측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내 마음을 분별하고 지켜야 한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것을 원하는 탐심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켜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 사람은 지금 이 일을 해야했다. 영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오직 지금 어떻게 유산을 더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분별하고 지켜야 했다. 자신의 마음에서 탐심이 자라고 있음을 알고 물리쳐야 했다.
그런 그를 돕기 위해 예수님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할 이유로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제시하신다(15절). 여기서 예수님은 최대한 이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신다. 사람의 죽고 사는 것, 거기에 더하여 정말 사는 것 같이 사는 것은 소유의 넉넉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진 소유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나눠지는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비유를 통해 쉽게 설명해주신다.
비유: “어리석은 자여”(16-20절)
눅 12:16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예수님의 비유 속에 이 사람은 이미 부자였다. 그런데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해서 더 큰 부자가 된 상황을 예수님은 가정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이 사람은 소유가 넉넉했는데, 이제는 더 넉넉해진 상황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나쁜 일을 했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도 없다. 이 사람은 풍성한 소출을 거뒀을 뿐이다. 직접 농사를 지은 것은 아닐 수 있지만, 어쨌든 자신의 투자의 결과로 많은 이익을 얻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이 부자이고 더 큰 부자가 된 것이 문제일까? 그렇지 않다. 욥도 부자였고, 아브라함도 부자였다.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물질적인 복도 약속하셨다. 그 안에는 농업에 있어서의 풍요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느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재물에 대한 태도이고, 예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 부자의 재물에 대한 태도를 그의 말을 통해 보여주신다.
눅 12:17–18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18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7절에서 부자는 고민한다. 곡식이 너무 많아서 쌓아 둘 곳이 없는 것이다. 이 고민에서 이 사람의 재물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는 일단 이 많은 곡식을 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곡식이 너무 많으면 적당히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남기고 나머지는 팔거나 혹은 그냥 나눠주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부자는 그런 선택지를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일단 쌓아두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니 쌓아 둘 곳이 부족한 문제가 있어서 그는 고민하고 있다.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서 부자가 생각한 것은 기존의 곳간을 헐고 더 큰 곳간을 짓는 것이다(18절). 땅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농사지을 땅을 더 확보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자가 선택한 것은 곳간을 추가로 더 짓는 것이 아니라 아주 큰 곳간을 새로 짓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곡식 쌓아 둘 곳이 없는 문제를 해결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통해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19절에 기록되어 있다.
눅 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부자는 그 자신에게 말한다. “내 영혼”이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진정한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 즉, 여기 말이 이 부자의 진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제는 먹을 것, 쓸 것을 충분히 모았으니 먹고 싶은대로 먹고 즐기고 싶은대로 즐기면서 살겠다고 다짐한다. 이것이 이 부자의 계획이었다.
아마 유산 상속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부자가 부러웠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이 부자가 부러웠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 부자가 부러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살 수 있는, 누구나 꿈꾸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사업이 정말 잘되어서 이제는 내가 뭘 하지 않아도 알아서 통장에 돈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다. 주식이 알아서 잘 굴러가서 계속 수익이 나고 있는 상황이다. 통장에 거액의 돈이 있어서 이자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 부자의 말에서 심한 탐심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그 결과를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이 사람의 모든 계획과 삶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출이 풍성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곳간은 “내 곳간”이고 내가 마음대로 헐고 세울 수 있다. 곡식과 물건도 “내 곡식과 물건”이다. 내가 원하는대로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도 내가 평안히 쉬는 것, 내가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의 중심, 계획의 중심에 내가 있을 뿐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소유의 넉넉함이었고, 이제는 그것을 가졌으니 내가 마음껏 누리며 살자는 생각만이 그에게 가득했다.
그런 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부자가 부럽다고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제대로 찬물을 끼얹으셨다. ‘내가 이 비유 속의 부자였으면’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부자에게 하신 말씀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말씀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말씀에 어떤 답도 할 수 없고 그 말씀을 거역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바로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람의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언제든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부자의 완벽한 계획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는데, 바로 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계획에서 제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곳간을 더 지으면 되는데, 굳이 있던 곳간을 헐고 크게 지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더 수익률 좋은 곳에 투자 하는 것이 나은데 그냥 쌓아두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심지어,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르는데 재물을 쌓아두기만 하고 제대로 누리지도 못해서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어떤 부자는 충분히 잘 누리고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똑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실 것이다. 그가 그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삶을 마감했다면 제 아무리 먹을 것 다 먹고 마실 것 다 마시고 즐길 것 다 즐긴 사람이라고 해도, 제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추앙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실 것이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이 없는 편이 자신에게 더 좋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탐심에 따라 살려면 하나님은 없어야 한다. 비유 속의 부자는 그렇게 하나님이 없는 듯이 자신의 탐심을 따라 살다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위치에 그가 올려둔 그의 넉넉한 소유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이 부자가 실존했던 사람이라면, 안타깝지만 이 사람의 최종 목적지는 지옥이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부자는 자신이 다 누리고 오지 못한 그 재물들이 자꾸 생각났을까? 혹, 많은 것을 이 땅에서 누리고 지옥에 간 사람은 그래도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렸으니 괜찮다고 생각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재물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보지 못한 자신을 원망할 것이다. 그 재물이 차라리 없었더라면이라는 후회를 할 것이다. 정말로 생명은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잘못된 삶의 태도의 결말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2:45–46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여기 말하는 ‘종’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더디 오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주인을 삶의 선택에서 배제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종들을 괴롭히면서 먹고 마시고 취하며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았다. 그리고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때 주인을 마주하게 되었고, 주인은 그를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의 부자가 이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성경은 우리 삶에 대한 바른 태도를 이렇게 말한다.
약 4:13–15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시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 삶의 최우선에 두어야할 것은 바로 삶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시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모든 것을 우리는 삼가 물리쳐야 한다. 내 마음을 계속해서 들여다 보면서 분별하고 지켜야 한다. 특히 재물에 대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마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달린 것처럼 살게 된다.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경고하신다.
경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21절)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 경고의 말씀은 일차로 무리 중에서 나와 유산 상속에 대한 중재를 요구했던 사람을 위한 것이고, 또한 이 상황을 보고 있던 그 무리들을 위한 것이고,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읽는 우리를 포함한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사람이 되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이어지는 22절부터의 말씀이 이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않는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이미 충분하고 훌륭함을 믿는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을 팔아 다른 사람에게 나눈다. 그냥 쌓아두지 않는 것이다. 꼭 넉넉하게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누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채우실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즉,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인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이런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를 위해 사는 사람, 모든 것을 나를 위해 쌓아두는 사람이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자들인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것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말씀은 경고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다.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천국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가 받는 벌을 받을 사람이다. 소유의 넉넉함은 이런 운명에서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오히려 나를 이런 운명으로 이끌고 가기 쉽다. 그러니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한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을 두어서는 안된다.
도전
재물에 대한 태도는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2:34). 유산 문제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은 이 땅에 마음이 있었던 사람이다. 그가 원하는 보물이 이 땅에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중심에는 항상 중심의 문제가 있다’는 말도 있다. 유산 문제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단지 어떻게 유산을 나누는 것이 공평하냐가 아니라, 더 가지기 원하는 탐심이라는 중심(마음)의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의 문제를 유산 상속의 문제가 드러낸 것 뿐이다.
재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지 점검해 보라.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어쩌면 나는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제거한 불신자일 수 있다. 어쩌면 나는 그런 불신자처럼 살고 있는 또 다른 어리석은 자일 수도 있다. 정말 하나님께 대하여 점점 더 부요한 자가 되어가고 있는지, 재물에 대한 나의 태도를 점검해 봐야 한다.
15절의 예수님 말씀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 이 진리에 따라 살고 있는지, 이 진리를 자녀들에게, 친구들에게, 친척들에게, 직장의 동료들에게 강조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살기도 한다. 하나님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불안해 하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한다. 반대로 자랑하기도 한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교회 헌금하면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랬으면 아마 순종이 더 쉬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물을 주시고 하나님의 좋은 청지기가 되라고 하신다.
어떤 목사님이 이제 자기에게 필요한 충분한 돈이 있으니 더 이상 교회에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장로들은 그 제안을 거절하고 계속 사례비를 주겠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이 그 필요 없는 돈으로 무엇을 하는지 보기 원합니다.”
그 후로 만약 그 목사가 차를 더 좋은 차로 바꾸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고, 계속해서 자기 통장에 돈을 쌓아두고, 전부를 자녀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다고 그는 믿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것이 그것이 아니다. 가난하게 살든, 부하게 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들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통해서,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이 땅의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썩어질 이 땅의 재물이 썩지 않을 하늘의 보화가 되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부요한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염려 말고 이 영원한 삶에 투자 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