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독된 마음 말씀으로 지키기
본문: 잠언 26:11 외
설교자: 조정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중독’, ‘포르노 중독’ 등 중독은 주로 실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생각에도 중독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중독을 세 종류로 정의하는데, 두 번째가 “술이나 마약 따위를(실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이고, 세 번째가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이다. 사상, 사고 등 생각이 한쪽으로 굳어져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된 상태, 그것이 바로 중독된 마음이다. 성경은 중독된 마음을 “미련한 것”으로 보고 이렇게 묘사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어떤 사람은 쉽게 자책하거나 쉽게 낙심한다. 반복하여 우울감에 빠지거나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분명 좋지 않은 생각이고 반응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극이 주어지면,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거듭 미련하게 행한다. 마음의 길이 그리로 뚫린 것처럼, 생각이 항상 그 길로 흘러간다.
성경 상담학자 에드 웰치는 <중독의 성경적 이해>라는 책에서 “중독으로 이끄는 것은 모든 인간의 마음 안에서 발견된다”라고 말했다(국제제자훈련원, 2013). 솔로몬도 거듭 미련한 것을 행하는 자의 문제를 단순히 미련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 가득한” 미련함을 거듭 보이는 것이다(눅 6:45). 그러면 어떻게 중독된 마음을 말씀으로 바르게 진단하고 효과적으로 처방할 수 있을까?
1. 중독된 마음 말씀으로 진단하기
에드 웰치는 중독이 “죄인가, 질병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라는 물음에, 유전적, 신체적 결함이나 손상이 없는 한, 중독은 결국 개인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거듭 반복되는 나쁜 선택은 강력한 의지를 가진 선택일 수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 같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크게 보면 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반항하는 성향, 기질,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중독은 죄인이 미련한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다윗은 강한 욕정에 사로잡혀 유부녀를 데려다가 강제로 관계를 맺는 의지적 선택을 했다(삼하 11장). 한편, 잠언 7장에선 유부녀의 유혹에 빠져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젊은이가 나오는데,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라고 묘사한다(22절). 지극히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모습이지만, 이 또한 정욕에 이끌린 젊은이의 선택이라는 점에서 다윗의 경우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중독은 죄다. 자발적으로 보이든지 비자발적으로 보이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에서 멀어지는 것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분명 죄다.
중독이 죄라는 점을 고려해 웰치는 중독을 이렇게 정의했다: “어떤 물질, 활동, 또는 마음 상태의 종이된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어 나쁜 결과를 회개하지 못하도록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원해지게 하는 것이다”(63p). 핵심은 “종이 된 것”에 있다. 어떤 물질과 활동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마음 상태”도 우리를 종으로 억압할 수 있다. 우리를 지배하려는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로, 고라 자손이 쓴 시편 42편에서 저자는 이렇게 자기 영혼을 깨우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 11절). 시편 기자의 마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낙심과 불안의 마음이 자기 영혼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저항하고 있다. 부정적인 마음이 계속해서 자기 영혼을 늪처럼 잡아 이끌려 할 때, ‘이제 아무런 소망이 없어’, ‘누구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라고 소리치며 마음을 사로잡으려 할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고 부르짖은 것이다.
만일 육신적인 마음에 중독되면, 다시 말해 육신적인 마음에 종이 되면, 어떤 나쁜 결과가 일어나는가? 그 마음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에서 멀어진다. 성경은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한다(롬 8:5).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라고 가르친다(롬 8:7). 통제에 관한 표현이 가득하다(‘따르다’, ‘굴복하다’). 육신의 지배를 받으면 육신의 일을 하며 산다. 육신의 통제 아래 있는 자는 하나님의 통제를 거부한다. 결국 중독은 누가 우리 마음을 차지하는가의 문제다. 누가 우리 삶을 다스리는가의 문제다. 내 생각, 감정, 의지가 다스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다스리도록 내어드릴 것인가?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거듭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굴복한 것처럼(삿 2장), 예수님의 제자가 거듭 예수님을 불신하고 어리석은 염려와 불안에 빠졌던 것처럼(“믿음이 없는 세대여…내가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막 9:19), 우리는 반복해서 어떤 마음에 우리 영혼을 내어주고 굴복한다.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2. 중독된 마음 말씀으로 처방하기
풀밭에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생긴 넓은 길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런데 그 길은 나쁜 길이다. 새로운 좋은 길을 내려면, 풀로 뒤덮인 곳에 새 길을 내야 한다. 이것은 거듭난 신자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사는 법, 육신의 지배를 벗어나 영의 지배를 받고, 그래서 육신의 일을 버리고 영의 일을 행하는 법을 잘 묘사한다. 중독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유혹이나 자극이 생기면 곧바로 수없이 다녔던 넓고 나쁜 길로 향한다. 거기서 해방되려면 새롭고 좋은 길을 내야 한다. 적어도 세 단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1) 진리로 깨우치기: 중독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 생각과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다’라고 확신한다. ‘그러면 왜 거듭 잘못된 것을 선택하는가?’라고 물으면, ‘다 알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약하고, 힘이 없다’라고 핑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 안에서 의지와(소원) 힘(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하나님의 영이 우리 “몸의 행실을 죽”인다(롬 8:13). 그 힘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후 10:5). 중독된 마음을 가진 자는 쉽게 자신이 거듭 품었던 육신의 생각을 택한다. ‘나는 혼자야’, ‘나는 우울해’, ‘나는 실패자야’, ‘다 내 탓이야’, ‘다른 사람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성경도 교회도 아무 소용 없어’ 등.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감사할 이유가 넘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이루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시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나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성경이 거듭 가르치는 진리라면, 나는 그 진리에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끊임없이 굴복시켜야 한다. 이렇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하느냐. 너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바라라.’
2) 거짓에 철벽 치기: 우리 마음에 경부고속도로처럼 넓게 육신의 나쁜 길이 뚫려있다고 상상해 보라. 웬만하면 우리 생각과 감정과 의지는 그 길로 가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넓은 길도 수십 년 다니지 않으면 풀과 먼지로 뒤덮여 사라진다. 중독된 마음을 가진 자가 취해야 할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거짓에 철벽을 치는 것이다. 잘못된 길을 완전히 봉쇄해야 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중독 문제를 앓는 환자에게 내려지는 처방이기도 하다. 약물 중독은 약물을 원천 봉쇄하는 것으로 일부 해결되기도 한다.
당신이 자주 취하는 태도나 생활 방식, 반응을 가만히 점검해 보라. 어떤 자극이 있을 때마다 모든 것을 팽개치고 부정적인 마음에 젖어 있는가? 분노를 터뜨리거나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는가? 타인과 연락을 모두 끊고 잠적하는가?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거나 자책하거나 반대로 타인을 원망하거나 정죄하지는 않는가? 바로 그것을 차단해야 한다. 그 길과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특별히 중독이 누구의 지배를 받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 대신 통치자의 자리에 앉은 대상을 끌어내리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때로는 물리적 환경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3) 주님께 통제받기: 팀 챌리스는 포르노 중독에 관한 책, <마침내, 자유>에서 유혹받는 장소를 피하고 전자 기기를 멀리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중독을 막을 수는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회복은 갈망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중독이 어떤 생각의 종이 되는 것의 문제라면, 그 문제에서 마침내 자유를 얻는 것은 우리의 원래 자리, 곧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쁜 길을 봉쇄하는 것과 함께 새 길을 내는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 마음의 새 길은 하나님을 향하는 길이고, 그 길을 걷는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의 영이 통제하신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말씀, 기도, 교제, 예배 등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을 최대한 활용하라. 단순히 그 행위를 반복하라는 말이 아니다(양). 그 수단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신뢰하고, 더 많이 사랑하라는 말이다(질). 결국 중독된 마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매료되고 사로잡힐 때 해방된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스럽고 보배로우시며 사랑스러운 분으로 우리 마음을 독차지하시면, 그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우리 마음을 종으로 삼을 수 없다.
믿는 우리에게 왜 중독된 마음과의 전쟁이 주어졌을까? 바울은 말한다(롬 5:1-4):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4절). 여기서 “연단”은 ‘증명’, ‘검증’의 의미를 갖는다. 어떤 자극에 의해 중독된 마음에 빠질 때, 그때는 아무런 의미와 가치 없이 힘든 일을 겪는 것이 아니다. 우리 믿음을 증명할 때다. 소망으로 향하는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끝까지 인내하자. 거짓에 속지 말고 늘상 빠지는 생각과 감정에 철벽을 치고, 오직 주께 우리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복종시키자. 그분께 소망을 두고. 그분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 믿음을 증명하자. 그렇게 새 길을 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게 하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종 된 자들이 되어 주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시고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진리를 사모하게 하시며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게 하시기를 날마다 간구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내주신 이가…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롬 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