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
본문: 베드로후서 3:1-13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양한 표현으로 불리는데, 그 중의 하나가 ‘순례자’나 ‘나그네’, ‘이방인’ 같은 표현이다. 베드로도 독자들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라고 불렀다(벧전 2:11).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도 말했다(빌 3:20). 이런 표현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한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이다.
히 11:13–16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이 땅이 본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본향인 것이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래서 나그네이고 이방인이기도 하다.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살면서 본향인 하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땅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력이 지배하고 있다. 그 세력의 우두머리가 사탄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사탄을 “이 세상의 임금”이라고도 표현하셨다(요 12:31). 에베소서 2:2은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표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탄이 이 땅에서 궁극적인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도 다스리시고, 그들은 하나님께 복종해야만 한다. 사탄은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눅 4:5–7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사탄은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그에게 “넘겨 준 것”이라고 표현했다. 즉,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한도 안에서 사탄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이 자신에게 절하면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어차피 이 땅을 되찾는 것이 목표라면, 굳이 원하지 않는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던 것이다. 그 길이 목적지에 도착하는 ‘편한 길’이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길’은 아니었기에 이것은 죄로의 유혹이었고, 예수님은 이 유혹을 거절하셨다. 그래서 여전히 사탄은 이 땅의 임금이고,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그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이방인으로 산다는 사실은 여행이나 소풍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나그네의 삶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는 고난과 핍박, 기다림과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우리를 틀렸다고 하는 이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 우리 왕을 기다리는 사람들인 것이다.
베드로는 바로 그런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벧후 3:1–2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두 편지로 너희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나게 하여 2곧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이어지는 말씀에서 분명히 밝히듯이 2절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다시오심에 대한 말씀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지금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랐다. 어떤 핍박과 유혹 속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이 편지를 성경으로 우리에게 남겨주셨다.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말씀이다.
과거 세상을 살았던 사람이 지금 세상을 없는 이유는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이 죽으셨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계속 남아계시지 않고 다시 하늘로 돌아가셨다. 그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행 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 이후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다. 신약 성경을 봐도 성도들은 항상 이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았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0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같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주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를 기다리는 자들로서 주의 오심과 관련하여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이 사실들이 우리가 주를 기다리는 자들로서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해준다.
그날은 정해져있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3-7절)
벧후 3:3–7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4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베드로는 특별히 베드로후서를 통해 거짓 교사들을 주의 할 것을 경고했다. 베드로는 이제 자신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후에도 교회가 바른 믿음의 기초 위에서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랐다.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할 중요한 믿음의 기초 중 하나가 바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종말론에 있어서 다양한 관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공통적으로 믿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재림에 대한 믿음이다.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왕으로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그 믿음이다. 이 예수님의 재림이 지금 이 세상의 끝과 새로운 세상의 시작에 있어 핵심이 되는 사건이라는데는 모두가 동의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천사들이 예수님께서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을 말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하신 말씀도 많다.
마태복음 24-25장에 기록된 감람산 강론이 대표적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마 24:2), 제자들은 그 일과 함께 세상의 끝날에 대해서 질문했었다. 이 질문에 답하시면서 예수님은 세상에 임할 대환란과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마 24:29–31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30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31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 25:31–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재림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초림 때와는 그 모습이 다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처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아기로 태어나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재림은 다르다. 예수님은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 예수님을 땅의 모든 족속과 민족이 보게될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 땅에 구원자로 오셨었고,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의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심판자로 오셔서 반역자들을 처단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다.
이 날은 두려운 날이다. 궁극적인 심판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하여 사용된 표현이 10절에 나오는 “주의 날”(여호와의 날)이다. 주의 날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해야할 말이 정말 많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날이 심판의 날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는 이 날을 “원수 갚는 날”(사 63:4), “보복일”(렘 46:10)이라고 표현했고, 신약 성경에서는 “진노의 날”(롬 2:5)이라고도 표현했다. 하나님을 반역한 세력에 대해서 그동안 하나님은 궁극적이고 즉각적인 심판을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쏟아내실 것이다.
이 날이 언제 이 땅에 임할지는 아무도 모른다(10절, “도둑같이 오리니”).
마 24: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하지만 확실히 임한다.
마 24:34–3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말씀이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할 것에 대해서 말한다.
벧후 3:4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베드로후서가 기록될 시점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지 30여년이 지난 때였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제자들을 비롯한 초기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오실 것이라고 믿었다는 사실이다. 그럴 수도 있을거라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그럴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졌다. 30년이 지났다.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다. 베드로도 이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롱하는 자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들은 거짓 교사들이다. 이들은 주님의 강림(재림)에 대한 약속이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세상은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갑자기 달라질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균일과정설’이다. 세상은 갑자기 어떤 변화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균일한 과정을 통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현재의 모습을 통해 과거를 알 수 있고 미래도 알 수 있다는 것이 균일과정설이다. 그래서, 이들은 애초에 세상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일부러 잊는다(5절). 그리고 그런 주장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재림도 없을 것이라며,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을 조롱한다.
베드로가 경고했던 이런 사람들은 그때도 있었고,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있다.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그들이 그런 주장을 했던 동기는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고 싶었기 때문이다(3절). 즉,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의 결과로서 그런 주장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정욕을 따라 살기 원하기 때문에 그런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고 싶기 때문에 심판자로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부정한다는 말이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동일한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같은 주장을 한다.
지금 세상은 성경 자체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도 그저 잘 보존된 고대 문서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 당연히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의 한계, 인식의 한계도 성경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성경 안에 좋은 지혜의 말들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이나 소크라테스의 말이나 공자의 말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가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기는 하지만 오류도 있기 때문에 분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창세기 1장을 예로 들면, 창세기의 창조 기록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말해주려는 것 뿐이지 실제로 하나님이 6일에 걸쳐서 창조를 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치 나라마다 있는 건국 신화(설화)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신화들에서 누가 알에서 나왔느니, 태어나기 전에 무슨 태몽 같은 것이 있었느니 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하는 얘기일 뿐인 것처럼, 성경의 창조나 심판 혹은 기적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실제 사건이 아닌 꾸며낸 이야기로 본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도 복음서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일어날 일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이야기가 될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정말로 성경의 그런 사건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라면, 그 목적을 받아들이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가? 하나님께서 실제로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지 않았는데 마치 그런 것처럼 기록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위대한 능력의 창조주라는 결론에 정말 이르는가? 하나님이 실제로 심판하지는 않을 것인데, 심판할 것처럼 기록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정말로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에 살아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는가? 그렇지 않다.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부인하면 결국 그것을 통해 성경이 말하려고 하는 바도 함께 부인하게 될 뿐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관점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경에 대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영향이 재림에 대한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성도들은 점점 재림 자체를 실제 일어날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보다 어떤 교훈을 위해서 기록된 이야기처럼 받아들인다.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그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것을 진짜 일어날 일로서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말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게 생각한다. 뭔가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면 이미 내 마음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로 빠르게 그 생각이 바뀐다. 그러면서 마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이미’와 ‘아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이미’는 특별히 지금 성도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측면을 말한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예수님의 왕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의 측면이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시작하실 하나님 나라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측면이다.
앞서 말했던 성경에 대한 잘못된 관점이 세상을 지배하다 보니, 교회는 그래도 세상이 이해할만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러다보니 점점 실제적 하나님의 나라는 말하지 않고 마음 속 하나님 나라만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창조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고, 기적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심판에 대해서도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고 그에 따라 우리 지금의 삶이 변화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금 여기’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정말 필요하다. 따라서 당연히 우리는 이 사실을 강조해야 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지금 이 땅에서 좀 더 의미있게 살아보자는 뉘앙스의 말이 되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된 것처럼 다루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 정욕을 따라 행하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재림을 우리 마음에서 멀어지게 만들면, 어떤 식으로든 그것은 내 정욕을 따라 행하는 삶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무신론자의 캐치프레이즈는 “신은 없을테니 걱정 말고 즐기라”다. 그들이 원하지 않는 신은 바로 우리의 삶을 심판하는 신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어떤 형태로든 부정하는 것은 결국 이런 삶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확실한 사건으로 말한다. 반드시 실제로 일어날 일로 말한다. 선지자들이 예언했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셨고, 사도들도 마찬가지로 말했다(2절). 노아 시대의 대홍수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대홍수 자체도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그조차도 더욱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일 뿐이다. 하나님은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고 무지개를 그 약속의 징표로 주셨지만, 그 약속은 앞으로는 어떤 심판도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물 대신 불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말씀으로 무에서 유를 만드신 하나님은 언젠가 그 만드신 것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노아 때는 물로 심판하셨지만, 최후에는 불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이는 확실히 정해진 심판이다. 그 때까지 하늘과 땅은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구 온난화가 가속되고, 핵전쟁이 터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세상은 보존될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들에게 직접적인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 물론 간접적인 심판은 있다. 죄를 범한 것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개인에 대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도 있다. 하지만 온 우주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뤄질 것이다.
노아의 때에 사람들이 아무도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 지구에 물이 가득 차 멸망했던 것과 같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롯이 그의 사위들에게 임박한 멸망에 대해서 말하자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지만, 그들의 생각과 관계 없이 하늘에서는 불과 유황이 비같이 떨어져서 그들을 멸망시킨 것과 같은 일이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다. 어느 때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의 끝날을 정하셨고, 그 정하신 날이 되면 세상은 끝날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이 사실이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세상을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꾸어 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 마치 그것이 우리의 목적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오실 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선포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의 말과 삶은 다가올 하나님 나라에 합당해야 한다.
그날이 아직 임하지 않은데는 이유가 있다(8-9절)
하지만 아직 그날은 오지 않았다. 어쨌든 계속 지연되고 있는 것 같은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다. 특히 믿는 자에게 더 그렇다. 믿는 자들은 이 모든 것을 믿기 때문에 당장의 불편함, 어려움, 핍박, 고난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베드로는 두 가지로 지금 상황을 설명해 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주권).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여기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은 숫자적으로 우리의 하루가 하나님께는 천 년이고 우리의 천년이 하나님께는 하루라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하나님의 시간표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뿐이다. 우리는 하루면 된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나님은 천 년을 생각하실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한 대로, 우리가 예상한대로 움직이지 않으신다.
하지만 이 말은 하나님은 제멋대로 어떤 기준도 없이 순간 순간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신다는 의미도 아니다. 정확히 그 반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신대로 행하신다. 다만 우리가 그 계획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6:10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하나님은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일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어떻게 될지 아시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 늦는 것 같고 더딘 것 같아 보이는 일도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정확하게 계획하신대로 하신다.
예수님의 초림도 그랬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창세기 3:15 이후로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처음에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이 아이가 그 약속의 아이가 아닐까 기대와 희망을 품었었다.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노아(안위함)라고 한 이유는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는 기대를 가졌기 때문이다(창 5:29). 즉, 이 아이가 죄의 저주에서 그들을 해방할 메시야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후손, 다윗에게 약속한 자손 등 모두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었고 사람들은 곧 바로 그 후손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메시야에 대한 생각마저 희미해져갈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갈라디아서 4:4는 그 사실을 이렇게 표현한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늦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는 정확한 때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할 이유가 없다. 초조할 필요가 없다. 만약 사람의 약속이라면 당연히 불안하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이다. 폐해지지 않는다. 연기되지도 않는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이루어진다.
둘째로 이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사랑). 이 시간은 회개의 시간이고 구원의 시간이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이긴 하지만, 하나님께는 믿지 않는 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기를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에 그렇다면 진작에 우리는 멸망했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오래 참고 계신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견뎌보라고 우리를 시험하시는 시간이 아니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탈출해야할 시간이고 사람을 구출해야할 시간인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배는 결국 침몰할 것이다. 그렇게 정해져 있고, 따라서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배와 함께 침몰할 필요는 없다.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허락하고 계신 시간의 의미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먼저 구원 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이 사실을 알려야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경고를 듣고 안듣고는 듣는 사람들의 책임이지만, 알리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지금 우리 삶의 우선 순위가 여기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날에 마땅한 지금의 삶이 있다(10-13절)
끝으로 베드로는 이렇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살 것을 강조한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벧후 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는가.
벧후 3: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
6개월 뒤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할까? 지금 집을 리모델링하고 지금 집에 꼭 맞는 새로운 가구와 가전 제품을 들이고 그렇게 해야할까? 아니면 빨리 정리를 하고 새로운 집에서 살 준비를 해야할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이며 이방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원히 살지 않는다. 세상은 결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끝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럼 우리가 할 일도 명확하다. 그날을 준비해야 한다.
첫째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아야 한다.
벧후 3:11 …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주를 기다리는 소망은 곧 지금 내 삶에 대한 책임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자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사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사는 모습은 ‘이상해’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마른 하늘에 방주를 만들고 있었던 노아가 이상해 보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좋은 의미에서 그렇게 보여야 한다. 즉, 매력적으로 이상해 보여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나와 다르기 때문에 이상해 보이지만, 나도 그것이 가지고 싶고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세상의 어떤 것을 따라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교회에서 더 화려한 조명과 멋진 음향으로 찬양을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은 훨씬 더 많은 자본으로 더 화려하고 멋진 음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결혼 생활을 해야한다. 그런 부부 관계, 가족 관계, 친구 관계, 이웃 관계, 동료 관계가 되어야 한다. 재미있는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가장 믿을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장 정직한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외식주의자, 율법주의자처럼 나는 거룩한데 너는 더러워라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더럽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이런 삶을 살고 있어라고 삶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살아야할 삶이다.
둘째로 그러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봐야 한다.
벧후 3:12–13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 일이라는 사실이 우리 지금 삶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 이 소망이 희미해지면 이 땅에서 다르게 살 이유도 잃게 된다. 다르게 살려는 이유가 잘못되게 된다. 이 땅에서 잘 살아보려고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우리 주님의 나라다. 우리 주님이다. 이 소망이 없으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은 그냥 힘들고 괴로운 삶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참된 소망을 바라보고 산다면, 그 모든 괴로움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이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성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도전
아마 주님이 가장 기다려질 때는 지금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주님을 가장 만나고 싶은 이유라면 서글픈 사실이다. 만약 그런 괴로움이 없다면 주님도 필요 없는 것인가? 이 땅에서 평안하고 즐겁게 살 수 있다면, 굳이 하나님 나라는 바라지 않을 것인가? 물론,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이 우리의 시선이 지금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를 바라보고, 주를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는 이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삶이 힘겨워서가 아니라, 정말로 주님을 만나기 원해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