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주께서 물으신다 – 네가 어디 있느냐
본문: 창세기 3:8-10
설교자: 이병권
제가 얼마 만에 말씀을 전하는 건지 궁금해서 확인해봤습니다.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설교를 했던 게 3년 6개월 전이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전하는 말씀이니까 어떤 말씀을 전하는 것이 좋을까 더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오늘 말씀이 선택을 받았습니다. 제가 준비한 말씀은 하나님이 특별한 상황에서 인생에게 하셨던 질문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물으신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질문으로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셨던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아담이 어디 있는지 아담이 무엇을 했는지도 모두 아십니다. 그런데 다 아시는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며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는 모르기에 알기 위해서 질문하지만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느 나무에 숨었는지 알기위해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담을 난처하게 만들려고 물으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을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은 왜 하나님을 피해 숨었을까요? 전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을 피해 숨어있습니다. 왜 아담은 성공할 수 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을까요?
그런데 이런 숨바꼭질을 아담만 했을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도 숨는 것을 잘하는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무언가 무서운 것이 있으면 이불 속으로 숨습니다. 학생 때는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부모님을 피합니다. 어른이 되어도 너무 힘든 일이 있으면 마음을 닫고 숨어버립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에게서도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숨기도 하고 상처 때문에 숨기도 하고 실망 때문에 숨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어떤 분은 이렇게 대답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본관 2층에 있어요.” 혹은 “저는 별관에 있어요.” “저는 온라인으로 예배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여기 있는 건 아는데, 지금 너의 마음은 어디 있느냐?”
제가 지금 이 질문을 가지고, 성도님들께 말씀을 전하고 있지만 사실 가장 먼저 이 말씀이 필요한 사람은 저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오늘 말씀은 저를 위해서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이 저 하나만을 위한 말씀은 아니기에 하나님이 이 시간에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모두가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새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8절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들이 왜 숨었는지 그 이유는 그 앞에서 알 수 있습니다.
창 3:6-7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은 분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말씀과 다른 거짓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의 모든 열매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동산에는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뱀은 그들의 시선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많은 열매가 아니라 하나님이 금하신 단 하나의 열매를 향하게 했습니다.
뱀의 말을 듣고 아담과 하와의 시선이 만족에서 결핍으로 이동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풍족한 은혜보다 하나님이 금하신 한 가지에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뱀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유혹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그러시더냐?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보다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 말씀보다 뱀의 말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을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합니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끔찍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좋았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피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데 하나님 곁에 있어야 살 수 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피합니다. 숨어있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해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죄는 단지 잘못된 행동 하나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죄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고 결국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오래전에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단지 아담과 하와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너무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을 피하고 숨으려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경우 그 중심에는 불신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불신하면 불순종하고 불순종하면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편해지는 이유가 언제나 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우리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삶이 믿음을 붙잡고 뒤흔들어 놓을 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하나님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상황은 바뀌지 않습니다. 절박함으로 매달렸는데 오히려 또 다른 어려움이 더해집니다.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올라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그럴 때 마귀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너를 사랑하시더냐?”
그 순간 하나님 말씀보다 눈앞의 상황이 더 크게 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보다 현재의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마음 문은 점점 좁아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불편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심 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보다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우리도 아담과 하와처럼 저마다의 방식으로 숨어버립니다. 어떤 경우는 바쁜 일상 속으로 숨어버리고 어떤 경우는 신앙적인 말 뒤로 자신을 감춥니다. 어떤 경우는 웃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괜찮다합니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버텨보려 합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으신다
그런데 아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의 숨바꼭질은 절대로 성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숨어있는 자에게 다가오십니다.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지만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셨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숨어 있는 아담에게 먼저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에는 숨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숨은 자를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시고 먼저 부르시고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외면하지 않으시지만 죄인을 외면하지도 않으십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오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으십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께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 숨어 버린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뛰어난 사람만 찾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사람 두려워 숨어버린 사람도 찾으십니다. 믿음이 좋고 잘 나가는 사람만 찾지 않으십니다. 넘어지고 무너진 사람도 찾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저마다의 이유로 숨어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죄 때문에 숨은 사람도 상처 때문에 멀어진 사람도 지치고 낙심해서 주저앉은 사람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찾으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잃어버린 사람을 먼저 찾아오신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세 가지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닙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내기까지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습니다.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다 멀리서 돌아오는 아들을 보고 먼저 달려가 끌어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무너진 우리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십니다. 숨은 자를 끝까지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나는 모르겠다. 네가 해결해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나는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단다”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아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십니다. 열정으로 마음이 뜨거울 때도 아시지만 식어 있을 때도 아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할 때도 아시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을 때도 아십니다. 기쁨으로 감사할 때도 아시지만 실망으로 멈춰있을 때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모두 다 아십니다. 중요한 것은 아시면서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는 어느 정도 숨길 수 있습니다. 마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영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두려움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가장 어두운 모습까지 모두 아시면서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는 나의 마음까지도 모두 아시면서 그럼에도 나를 찾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나의 실체를 알면 싫어할 수 있습니다. 나의 약함을 보면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복되는 실패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조차도 모르고 있는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도 그래도 찾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가 나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이 내가 보여주는 모습만 볼 때는 부담 없이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숨기고 싶은 나의 악함과 속마음까지 알게 되는 것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자신을 숨깁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덮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다 아시면서도 찾으십니다.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숨은 자를 찾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여전히 수치를 느끼는 인생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사실을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두 번째는 하나님은 숨은 자를 덮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부끄러우니까 가렸습니다. 자신의 수치가 드러나는 것이 싫으니까 가렸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잠시 가릴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습니다. 임시방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그렇게 합니다. 우리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우리도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을 가립니다. 누군가는 교회 일에 대한 열심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누군가는 세상적인 성취와 사람들의 인정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누군가는 도덕적인 의로움으로 자신을 가립니다. 내가 만든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문제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괜찮아!” “이 정도면 충분해!”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
그럴 듯하게 겉모습을 꾸미고 자신을 가릴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고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은 우리가 하는 일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죽옷은 아담이 만든 옷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옷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덮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이 가죽옷은 생명의 희생을 생각하게 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여기서 복음의 그림자를 봅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봅니다. 결국 이 장면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끌어갑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으시고 덮으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수치를 피해 숨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부끄러움을 당하셨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고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덮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 앞에 섭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옷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입혀주신 옷, 그 은혜의 옷을 입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수치가 그리스도 안에서 덮였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의 존재는 더 이상 죄와 실패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덮어주시고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들은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실패한 인생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아오실 뿐만 아니라 그 수치와 부끄러움까지 덮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필요한 것은 완벽한 모습이 아닙니다. 정리된 마음도 아닙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된 후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두지는 않으십니다. 은혜로 덮으시고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는 죄책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해야 한다는 압박이나 강요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변화는 사랑받고 있음을 알 때 시작됩니다. 정죄감은 사람을 더 깊이 숨게 만듭니다. 하지만 은혜는 사람을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다시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하나님은 나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람은 그럴 수 있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십자가로 증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셨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나의 위치를 묻고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이 질문은 숨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초대입니다. 그렇게 우리를 십자가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숨어 있는 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피해 숨지 말고, 십자가로 나오너라. 내가 내 아들의 생명으로 너를 덮었단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셨던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살펴보았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을 들으면 두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은 정죄의 질문이 아닙니다. 회복의 질문입니다. 사랑의 질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인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은 것도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은 나무 뒤로 숨었지만 하나님은 그 나무에까지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피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로 품으셨습니다.
이 가운데 어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피하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에 대한 서운함 때문에 숨어 있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답은 변명이 아닙니다. 자기방어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탓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친 모습 그대로, 두려운 마음 그대로, 상한 마음 그대로 그저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덮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숨은 자를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나무 뒤가 아닙니다. 두려움의 자리도 아닙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자리도 아닙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 앞입니다. 은혜의 자리입니다. 십자가 아래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주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다시 주님께 나아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