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죄가 습관이 되는 이유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우리는 반드시 죄와 멀어져야 한다. 구약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은 주범이 우리 “죄악”이라고 했고(사 59:2), 신약 성경 또한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어둠 가운데 행하지 않는다고 단언하며, 지속적인 자백으로 죄 사함을 얻고 다시 새롭게 될 것을 명령했다(요일 1:5-10). 이번 <죄의 습관 끊기> 시리즈를 통하여 우리가 습관적으로 허용하고 있는 죄를 끊어낼 기회를 얻으려고 한다. 제리 브릿지즈가 쓴 “Respectable Sins”(“존경할 만한 죄”)와 비슷한 내용이 될 것이다.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우며 반복적으로 행하여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잘 몰라서, 진정으로 회개하거나 대항하여 싸우려고 하지 않는 (그렇게 존중하는) 죄들을 몇 가지 다루려고 한다. 주님께서 우리 삶을 얽매고 있는 죄에서 우리를 돌이키시고 다시 새롭게 영생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1. 죄는 우리를 쉽게 얽맨다

구체적인 죄를 다루기 전에, 먼저 죄가 습관이 되는 이유를 탐구해 보자. 먼저, 죄가 습관이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처럼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라고 명령하면서, “모든…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릴 것을 요구했다(히 12:1). 여기서 죄에 관하여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1) 죄는 신앙생활의 장애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2) 우리는 죄에 쉽게 얽매인다. ‘얽매이다’는 ‘능숙하게 에워싸다,’ ‘포위하다’라는 뜻을 갖는데, 죄의 이러한 특성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을 때,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고 “너를 지배하려” 한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생생한 묘사와 일치한다(창 4:7, 우리말 성경). 

죄는 쉽게 우리를 지배한다. 그리고 계속된 피지배 경험은 우리로 종의 근성을 갖게 한다. 죄가 우리 본성의 일부처럼 굳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다. 성경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악에 “익숙”하다고 했다(렘 13:23). 죄가 우리의 본성처럼 굳어진 것이다. 또한 성경은 우리가 자신을 죄에 종으로 내주어 죄의 종이 되었다고 진단한다(롬 6:16). 한 번 실수로 내준 것 때문이 아니라 계속 내어줘서 생긴 문제다. 계시록에 불과 유황에 던져질 죄인들을 가리켜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등으로 규정하는데(계 21:8), 그들은 각각 언급된 죄로 특징지을 수 있을 만큼 그 죄에 얽매이고 계속해서 굴복하는 삶을 살았다는 말이다. 신자도 죄의 끈질긴 공격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데, 바울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사망의 몸”이라고 하면서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 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롬 7:23-4). 우리는 죄에 쉽게 사로잡힌다.

죄가 우리 삶을 쉽게 얽맨다는 사실은 우리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거짓말을 잘하는 친구’, ‘남 얘길 쉽게 하는 애’, ‘불평을 달고 사는 사람’ 등으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가? 그리고 고질병처럼 달고 사는 죄 때문에 낙심하거나 좌절한 경험이 다들 있지 않은가? 타고난 기질과 성향처럼 어떤 죄는 마치 우리가 죽기까지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우릴 억누른다.

2. 자기 욕심이 죄를 낳는다

죄는 습관이 되기가 쉽다는 걸 잘 알았다. 그러면 거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죄가 왜 습관이 되는지 그 이유를 밝혀보자. 야고보는 신자가 죄의 유혹을 받는 원인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고 강력하게 변호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약 1:13). 우리는 실족이 잦아질 수록 하나님을 원망하는 악한 습성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 이 부분에 특별히 약점을 갖게. 그리고 그런 환경을 허락하셨잖아. 죄를 반복해서 짓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죄에 하나도 기여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는 이유는 따로 있다. 야고보는 계속해서 이렇게 밝힌다: 

14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1) 죄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의 종말은 사망이다. 2) 그리고 죄를 낳는 건 바로 욕심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모든 환경 자체는 결코 시험이 아니지만, 우리가 그 환경이나 사람을 통하여 시험을 받는 것은 우리가 자기 욕심대로 이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욕심’(에피뚜미아)은 부정적으로 번역되었지만, 본래는 중립적인 단어다. 강력한 의지, 원함, 바람을 뜻하는 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셨다고 하실 때처럼 긍정적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눅 22:15). 야고보는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했는데, 왜냐하면 그 강력한 의지에 끌려가는 경우를 가리켜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너무 크고 강해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것,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속는 것, 그것이 바로 죄가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미혹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것을 한 단어로 자기애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누구든 무엇이든 투쟁한다. 죄는 바로 그 자기애를 먹고 자란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본성에 죄는 착상하고 마침내 잉태된다.

예를 들어보자.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하나님 편에서 그 일을 바라볼 수도 있었다(창 4장). 만일 그랬다면 그가 선을 행하지 않아 하나님이 예배받지 못하신 것에 진심으로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려고 했을 것이다. 만일 그가 동생 아벨 편에서 그 일을 바라봤다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애에 빠졌다. 제물을 거절당한 자신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억울하게 생각했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받으신 형제를 미워하기까지 했다. 죄는 마땅히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할 자신이 무시당하고 거절당한 것을 보상하려면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동생을 죽이기까지 미워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하나님 그리고 형제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로 선택한 가인은 그 죄의 요구에 끌려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그것이 옳다는 확신 가운데. 이것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다. 

또 다른 실례다. ‘당신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아서 아이에게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잘 모른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엔 그 말이 상처가 되었다. 평소에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데도, 상처가 되니까 자녀를 주지 않으신 하나님도 원망이 되고, 처지를 잘 알면서 이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도 미워졌다. 이런 말을 듣는 나 자신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는 나에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옳다고 미혹했고, 자기애는 그 죄의 요구를 강력하게 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선택지를 나에게 보여주셨다. 만일 그 상황이 나에게 억울한 상황이라면, 내가 정말 받지 않아도 되는 수치를 경험한 거라면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보상하실 것이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아이를 양육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돕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지혜와 배려가 부족한 말처럼 들려도 결국 그 사람이 나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도 자신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이해해달라는 요청이라는 것을 보게 하셨다. 죄는 내 앞에서 도사리고 나를 사로잡으려 했고,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죄를 다스리기를 원하셨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령하고(신 6:5),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요구한다(레 19:18). 예수님도 이것이 가장 큰 두 계명이고, 성경이 요구하는 모든 것의 핵심이라고 하셨다(마 22:37-40). 뭔가 빠진 것이 있다. 오늘날 그토록 강조하고 권장하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없다. 왜 없을까? 오히려 성경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라 경고한다(딤후 3:2). 자기애를 건강한 것으로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가져오는 장애물로 경계한 것이다. 왜 그럴까? 참된 의미에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를 가둔다. 내 입장과 처지에 집중하게 한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의 유익을 추구하는 일에 매진하게 한다. 하나님과 이웃이 그 일에 방해가 된다면 싸워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싸우게 한다. 그것이 진짜 자신을 사랑하고 위하는 길이라고 속인다. 하지만 복음의 은혜는 우리가 죄에 사로잡혀 자기애에 빠지도록 놔두지 않는다. 철저하게 나 중심적인 관점과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돕는다. 이웃을 나처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유익을 사랑으로 구하게 한다.


제리 브릿지즈는 불경건함, 염려, 불만족, 감사하지 않는 것, 자만, 이기심, 무절제, 인내심 부족, 분노, 정죄, 시기와 질투, 악한 말, 세속적인 삶 등을 우리가 존중하는 죄로 선별했다. 지난번 BHC 시리즈(말씀으로 마음지키기)에서 분노, 염려, 불평, 자책, 무기력한 마음 등을 다루었기 때문에, 다음에 “불만족”의 죄를 끊을 기회를 얻기를 원한다. 사실 죄는 엄격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같은 뿌리에서 맺은 열매처럼 서로 비슷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살펴본 것처럼 죄를 낳는 과정은 매우 유사하다.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 지배하려고 할 땐 항상 우리를 자기 욕심에 이끌리게 하여 미혹한다. 그것이 무조건 옳은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내게 유익한 것처럼. 그러나 죄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다.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이웃을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옳은 선택은 비뚤어지고 왜곡된 자기 사랑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우릴 지배하던 죄의 습관을 끊고, 죄를 다스리는 능력을 더한다.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죄의 요새를 허물기를 바란다. 그곳에 갇힌 왜곡된 자기애를 벗어나기를 바란다. 복음의 은혜가 당신을 모든 죄의 습관에서 끊어버리고 하나님과 이웃과 나를 바르게 사랑하는 건강하고 복된 삶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