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제사보다 나은 순종

본문: 사무엘상 15장

설교자: 최종혁

사울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래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오늘 본문일 것이다. 사울 자신에게 있어서도 사무엘상 15장은 인생의 분수령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울의 등장은 나쁘지 않았다. 사울이 처음 왕으로 선정되었을 때는 사무엘을 비롯한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는 못했었다. 사무엘은 애초에 왕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백성들 중에서도 사울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울이 암몬 사람들을 치면서 백성을 하나로 모으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상황은 달라졌다. 반대 소리를 내던 사람들은 오히려 숙청의 대상이 되었고, 사무엘은 백성들을 불러 모아서 정식으로 사울을 왕으로 세웠다.

이렇게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자신이 왕으로서 적합함을 증명했던 사울의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가 소위 말하는 사울의 고점이었다. 그 이후로 사울은 계속해서 내리막을 걷는다. 말년에 그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큰 두려움에 쌓여서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전혀 응답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사무엘이 나타난다.

이 장면은 아마 성경에서 가장 이상하게 보여지는 사건 중 하나일 것이다. 여러 설명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서 사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상 28:18–19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결국 사무엘의 말대로 이어진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의 아들들이 죽었고, 사울도 부상을 입고 도망하다가 살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오랜 적인 사울을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블레셋의 각 지방으로 보내서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후에는 사울의 시체를 성벽에 박아서 효시하기도 했다. 하나님이 세운 왕으로서 사울은 너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무엘의 말처럼(삼상 28:18)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이 일로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셨다. 사무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상 15:23 …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그리고 15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삼상 15:34–35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35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울이 하나님에게 등을 돌렸을 때 하나님도 그에게서 등을 돌리셨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거두셨을 때 사울의 말로는 비참했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울의 길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사무엘상 15장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청종(듣는 것)’이다. 신명기 6장의 ‘쉐마’(들으라)를 알 것이다. 쉐마는 ‘듣다’를 의미하는 동사 ‘샤마’의 명령형이다. 사무엘상 15장에는 이 동사가 여러 형태로 9번 사용되었고, 주로 ‘듣다(청종하다)’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그 중 우리에게 익숙한 22절의 “청종하는 것”과 “순종”도 바로 이 동사를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본들은 동일하게 “순종”이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듣는 것과 순종은 분명 다른 개념이지만, 명령과 관련해서는 듣는 것이 곧 순종이 된다. 그런 면에서 ‘청종’이라는 번역은 꽤 좋은 번역이다. 듣고 따른다는 의미가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자신이 ‘청종했다’고 주장하고(20, 24절), 사무엘은 당신은 ‘청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19절, 22절). 사울이 생각했던 청종(순종)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청종(순종)이 달랐던 것이다. 이 차이는 결국 사울의 마음 중심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울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에는 자기 자신이 가득했고, 사울은 특별히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그런 자신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하기를 원했다. 그런 사울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음, 즉 불순종으로 드러났다. 본문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자.

사건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먼저 사무엘은 사울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함’을 강조한다.

삼상 15:1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으로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울은 지금 사무엘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샤마)해야 했다. 그를 왕으로 삼으신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전하는 것은 사무엘이었지만, 그 말의 권위는 사무엘이 아닌 하나님께 있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의 시작에서도 사무엘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하여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한다. 사울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했다.

삼상 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3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고 명하셨다. 완전히 끝을 내라고 하신 것이다. 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처럼(“벌하노니”)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아말렉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18절에서 사무엘은 이들을 “죄인 아말렉 사람”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땅 정복이 가나안의 죄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아말렉의 죄를 심판하시려고 사울을 보내셨던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이 명령에 사울은 바로 순종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바로 군사를 모집하여 전쟁에 나섰다(4-6절). 7절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8절의 말씀이 좀 이상하다.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백성들을 진멸한 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아말렉의 왕인 아각은 ‘사로잡기’만 했다. 동사가 잘못 사용된 것 같다. 아각을 ‘죽이고’라고 되었어야 할 부분이 “사로잡고”로 되어 있다. 사로잡은 후에 처형하려고 했던 것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어지는 9절은 분명히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8-9절에는 3절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진멸”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런데,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이 보인다.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명하실 때, 그 대상에 아말렉의 모든 것이 포함됨을 강조하셨다. 혹시라도 오해할까바 예외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언급하셨다. 젖 먹는 아이부터 모든 사람,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다. “남기지 말라”는 말은 “긍휼히 여기지 말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셨던 것처럼, 아말렉을 사울을 통해 심판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아말렉에게 긍휼의 때는 끝났고, 이제 심판의 때가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사울과 관련되어서는 “진멸”이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모든 백성을 진멸했지만, 그들의 왕인 아각은 사로잡기만 했다. 모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했지만, 모든 좋은 것은 진멸하지 않았다. 거기에 아말렉 왕 아각도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외 없이 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은 예외를 두고 멸했다. ‘진멸’이 진짜 진멸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이 진짜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할까? 어쨌든 하나님 말씀을 듣기는 했으니 괜찮다고 봐야할까? 하나님은 이 상황을 이렇게 보셨다.

삼상 15:10–11 여호와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1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하나님의 판단은 명확했다. 사울은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울이 행한 일의 단 하나도 칭찬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나름 어느 정도 순종은 했지만, 이게 좀 아쉽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진멸하지 않고 사람을 긍휼히 여긴 점은 높이 산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울이 ‘돌이켜서 하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표현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으로 그 결과가 매우 심각할 때 구약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 사울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사람이 정반대로 행한 것이다.

하나님의 이 말씀에 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11절 뒷부분). 이 부르짖음의 내용은 우리가 알 수 없다. 사무엘에게는 힘든 밤이 지났고, 아침 일찍 사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삼상 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여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사울이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사울의 일로 인해 사무엘은 근심하며 밤을 지새웠는데, 정작 사울은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러워하면서 기념비까지 세웠다. 사무엘로서는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무엘의 감정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아마 사무엘도 그 끓어오르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렀을 때, 사울은 이렇게 말했다.

삼상 15: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

사울의 말은 의도적인 거짓말일 수도 있고 순수한 무지일 수도 있다.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종했다고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정말로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고 생각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마 정답은 그 중간쯤일 것이다. 사울은 냉정하게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한 일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순종했다고 믿고 싶었고 그래서 좋은 쪽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사울이 뒤에서 하는 말을 보면 이런 사울의 마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순종에 대해서 사울은 ‘이건 순종한 거라고 봐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울은 순종 자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자신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는 전쟁에서의 승리가 곧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신 말씀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13절에서 사울은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때 사용한 ‘행하다’는 ‘세우다’는 의미도 된다. 사울은 자신이 여호와의 명령을 세웠다고 말하고 있지만, 12절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사울은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을 뿐이다. 사울은 그 둘이 긍정적인 연관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이 묻는다.

삼상 15:14 사무엘이 이르되 그러면 내 귀에 들려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라

아마도 사무엘은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참으며 냉정하게 이 말을 했을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였으면,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이 양의 소리와 소의 소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사울은 예상했다는 듯이 이렇게 답한다.

삼상 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이 시점에서 사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사실을 포함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일단은 최소한 그가 바로 사실 확인이 가능한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는 가정으로 말씀을 읽어 보자.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양들과 소들은 어차피 죽을 것들인데,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남긴 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사울은 “진멸하였나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인다. 어차피 죽을 것들 중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살려둔 것인데, 문제될 것이 있을까 싶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기특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이들의 진짜 동기였을까 싶은 생각이 들지만, 그것을 차치하고 이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내 것’을 가지고 드려야 한다. 내 것 중에 좋은 것을 드리는 것이 제사다. 소나 양을 드릴 수 없으면 새를 드릴 수 있었고, 그조차 어려우면 곡식을 드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내 것이 아닌 것을 드리는 규정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의 사람들은 진멸하고 그들의 가축은 너희가 취하라고 명하셨고, 이들이 자신들이 취한 가축 중에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것이면, 그것은 귀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진멸하라고 하셨다. 남김없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백성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되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어떤 것도 이들의 것이 아니었기에, 어떤 것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것은 없었다.

비슷한 원리를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있었던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나안의 첫 성인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은 그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하셨다(수 6:17-18). 그런데 아간은 그 중의 일부를 자신이 취했고(수 7:1)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수 7:25). 만약에 아간이 하나님께 예배할 목적으로 어차피 버려질 것 중에 이것들을 챙긴 것 뿐이었다고 주장했다면 어땠을까? 그 말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아간은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진 것, 즉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 뿐이고, 그 훔친 것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예배가 될 수 없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아이 성 점령에서는 물건들을 탈취하라고 명하셨다. 실제로 백성들은 그렇게 했고, 아무도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무엇이 달랐는가? 하나님의 명령이 달랐다. 전쟁에서 똑같은 물건을 취했다고 해도, 명령이 달랐기 때문에 아간은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이 되었고, 다른 백성들은 정당하게 자기 것을 취한 것이 되었다. 그 백성들은 그것들 중에서 좋은 것을 하나님께 제사로 바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 합당한 제사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간의 경우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간과 같은 상황이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애매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외를 두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진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다(3절). 따라서 그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몫은 없었다. 그들의 소유가 될 것은 없었다. 그 중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릴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정 승리에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싶었으면, 아말렉의 짐승이 아니라 자기 가축 중에서 좋은 것을 골라 그렇게 했어야 했다. 정말로 사울의 말대로 백성들이 그렇게 행한 것이라면 그들은 아간의 잘못된 길을 따른 것 뿐이었다. 양과 소를 살려둔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럼, 정말로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일 뿐이고 사울은 책임이 없을까? 15절의 사울의 말만 보면 그렇게 들린다. 그는 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좋은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 뿐이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가 만약 정말로 순종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에 대해서 훨씬 더 변호하는 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몇몇 백성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저렇게 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자신은 그들이 살려둔 양과 소를 죽이다가 왔다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사울의 말을 봐도 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사실 그의 생각도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실상은 19절의 사무엘의 말에 따르면(“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이 모든 말이 거짓말이다. 단지 양과 소를 그냥 죽이는 것이 아까워서 가지고 온 것 뿐이다. 하나님을 생각해서 이런 일을 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이 와서 문제를 삼으니 이렇게 둘러대고 있는 것이다. 이 안에 어느 정도의 사실은 있을 수 있지만, 사울의 말처럼 “여호와께 제사”드리는 것이 양과 소를 살려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그런데, 사울은 마치 그런 것처럼 거짓말을 하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무엘은 사울의 이런 치졸한 변명을 더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밤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하나님께 들어서 정확히 알고 있었다. 사무엘이 말한다.

삼상 15:16–19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7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8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19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하나님의 명령은 분명했다. 하나님의 권위도 분명했다.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듣지, 순종하지) 않았다. 대신에 탈취하기에만 급했다. 여기 사용된 ‘급하다’는 동사는 독수리 같은 맹금류가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급강하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것은 탐욕적인 모습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멸하는데 우선순위를 둔 것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탈취하는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같은 것은 그의 마음에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이었다.

이것이 이 사건의 전모다. 그런데 사울은 여전히 억울한 듯 다시 자신을 변호한다. 19절에서 사무엘은 책망을 한 것이지 질문을 한 것이 아닌데, 사울은 질문에 답하듯 답한다.

삼상 15:20–21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21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이미 했던 말의 반복이다. 여기서는 양과 소에 대해서 “마땅히 멸할 것”이라는 표현을 더해서 이 선택이 아무 문제가 없음을 강조한다. 자신은 어차피 버릴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려는 것 뿐이라는 논리다. 자신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다 했고, 사실은 그 이상을 한 것인데 칭찬은 못해줄 망정 왜 자신을 책망하느냐는 식으로 말한다. 앞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사울은 하나님을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지칭한다. 이것이 사무엘에게도 좋은 일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그랬을 것이다. 사울은 정말로 자신이 한 일이 죄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에 사무엘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한다.

삼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한 일은 죄라는 것이다. 사울은 불순종했고 불순종은 죄다. 사무엘은 이것이 우상 숭배라고도 말한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사울이 제사 얘기를 꺼내니, 사무엘도 그 말을 받아서 말한다. 설령 정말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청종하지 않으면서 제사만 드리면 그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시겠냐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은 것은 이런 면에서 그렇다. 사실 제사와 순종을 나눠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제사에게 좀 억울할 것이다. 본래 제사와 순종은 나눠져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순종이라는 큰 개념 안에 제사가 있다. 그리고 그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하지만 사람은 쉽게 어려운 순종은 빼고 쉬운 제사만 드리려고 한다. 순종은 내 삶에 큰 변화를 요구하지만 순종과 분리된 제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순종을 위해서는 삶의 전부가 필요하지만, 제사는 삶의 일부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종을 버리고 제사만 드리려는 경향이 사람에게는 있다. 그것이 곧 종교이고 우상 숭배다. 어려운 것은 빼고 쉬운 것만 하면서 좋은 것은 누리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렇게 드려지는 제사를 하나님은 경멸하신다.

1:10–13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23절의 사무엘의 말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완고한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는 점치는 것, 우상 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래도 제사는 드렸으니까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순종 없는 제사를 하나님은 미워하신다. 사울은 결국은 ‘제사’가 자신의 ‘(어느정도의) 불순종’을 덮어서 ‘순종’으로 만들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고 정당화하려고 했지만, 사무엘은 단호하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여기 사무엘의 말에서 우리는 순종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기계적으로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무엘은 순종을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는 것,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는 것과 연관지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순종에는 함께 있어야 한다. 이런 순종의 마음이 순종의 행위로 드러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순종이다.

10:12–13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애초에 사울에게는 이런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것이 겉으로 이렇게 불순종으로 드러난 것 뿐이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순종으로 포장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것 뿐이다. 애초에 순종이 아닌 것을 아무리 잘 포장해도 순종으로 만들 수는 없다. 사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그의 말과 행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냈다.

사무엘의 말에 마침내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

삼상 15: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백성을 두려워해서 하나님이 아닌 그들의 말을 청종했다고 한다. 이 말은 사울 자신은 하기 싫었던 일을 백성들의 위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뒤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사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인정 받기 원하는 사람이었다. 이것이 사울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울의 약점이다. 사울에게는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중요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사울은 회개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삼상 15: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다. 25절에서 사울은 죄 용서를 사무엘에게 구한다. 비슷한 상황에서,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다윗의 죄를 드러냈을 때 다윗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13).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따라서 죄 용서를 가장 먼저는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을 다윗은 알았다. 실제로 시편 51편의 기도를 통해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울은 다르다. 그는 사무엘에게 용서를 구한다. 왜일까? 그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사무엘이 더 중요했다. 사무엘이 여기 온 것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자신에게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용서를 구하여 자신과 함께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 줄 것을 구했던 것이다.

이것이 후회와 회개의 확실한 차이다. 후회하는 사람은 일을 생각한다. 하지만 회개하는 사람은 관계를 생각한다. 후회하는 사람은 결과 때문에 후회할 뿐이다. 결과가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원인이 된 일에 대해서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후회다. 사울의 경우 결국 자신이 범죄했다고 인정은 했지만,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일이다. 만약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것 때문에 백성들의 신임을 잃게 되지 않는다면, 그는 굳이 사무엘에게 용서를 구하고 함께 가자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울은 지금 상황 때문에 후회를 했을 뿐, 회개했던 것은 아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마음이 애초에 그에게 없었음을 보여준다.

회개는 다르다. 회개는 결과와 상관 없이 관계를 생각한다. 다윗의 시편 51편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계속해서 구한다. 그는 순종하고 싶었던 사람인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으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그는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가고 싶어했다.

사울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에게 중요했다. 그래서 사무엘이 함께 가기를 거절하자 그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삼상 15: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안타깝지만 이것이 사울의 신앙이었다.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사울에게는 제사 밖에 없었다. 진실한 순종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사보다 나은 순종이 그에게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그를 버리셨고, 사울은 비참한 삶을 살고 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던 것이다.

교훈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기 원한다.

첫째로, 불순종에 대한 합리화를 멈춰야 한다. 우리는 정말로 합리화를 잘한다. 나의 죄를 인정하기 보다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는데 더 익숙하다. 그래서 불순종을 하고서도 합리화를 통해 이것은 순종이라고 나를 세뇌하려고 한다.

사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좀 더 그럴 듯한 이유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백성이 좋은 것을 드리려고 남겼다는 변명은 궁색해 보인다. 그보다 더 좋은 이유가 있다. 바로 사랑과 긍휼, 자비다. 어떻게 이 불쌍한 사람들을 진멸할 수 있는가. 어떻게 아무 죄 없는 짐승을 그냥 죽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할 때, 그렇게 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진멸은 절대 옳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는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순종을 한 것이다.

맞는 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불순종은 불순종이다. 선한 동기나 의로운 동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더 나은 순종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 순종할 수는 없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서 더 나은 순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랑이신 하나님보다 더 사랑 많은 사람될 수 있다는 것이고, 공의로우신 하나님보다 더 공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지혜의 하나님보다 더 지혜로울 수 있다는 의미다. 정말 그런가? 그럴 수 없다. 불순종은 마치 그런 것처럼 하는 것이기 떼문이 곧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결국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의 문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신뢰,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말씀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또한 나에게도 최고의 선이 됨을 믿는 것이다.

불순종에 대한 합리화를 멈춰야 한다. 이게 맞는 것 같아서, 그건 너무 어려워서, 나에겐 너무 버거워서와 같은 모든 불순종의 합리화를 멈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절대로 제사로 불순종을 덮을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제사는 마음의 중심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 활동(생활)을 의미한다. 사울과 백성들이 정말로 그들이 남긴 양과 소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그것이 그들의 불순종을 덮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삶은 엉망이지만, 교회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는 나오고 있고, 헌금도 꼬박꼬박 잘 하고 있고, 맡겨진 일들은 그래도 남들만큼은 하고 있으니, 불순종하고 있는 내 삶이 괜찮은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서 마치 불순종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사람이다.

생각해 보면, 불순종을 덮을 수 있는 제사는 오직 하나 예수님의 제사 밖에 없다. 예수님의 순종의 제사가 우리의 불순종을 덮는다. 이 제사는 이미 드려졌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드릴 제사는 순종의 제사다.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우리의 순종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참된 제사(예배)인 것이다.

제사보다 순종이 낫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라. 이 말은 곧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원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원하신다는 의미다. 이런 저런 불순종의 이유, 핑계가 생각나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들 이유는 되지 않는다. 순종의 길이 우리의 길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