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잃어버린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19:1-10

설교자: 최종혁

구원 받은 성도의 간증을 듣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구원 간증을 들을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간증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선포이고, 구원 간증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았다. 내가 하나님을 찾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신 것이다. 성경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 때 내포하는 중요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엡 2:8).

우리 관점에서 보면 내가 구원을 갈급하고 하나님을 찾는 면이 있고,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들은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셨다고 고백한다. 대단한 내가 하나님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아닌 나를 하나님이 찾으시고 구원하신 것이다. 이것이 구원 받은 자들을 공통된 간증이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또 다른 한 성도의 동일한 간증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역시 잃어버린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셨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삭개오이고 직업은 세리장이다.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배경과 등장 인물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다.

19: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예수님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유월절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 순례길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겠지만, 예수님께는 그렇지 않았다.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예수님은 이 순례길을 평생 다니셨지만, 이번 순례길은 특별했다. “굳은 결심”이 필요한 길이었다. 예수님은 이제 그동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대제사장들의 손에 의해 이방인에게 넘겨져서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마지막이자 궁극적인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굳은 결심을 하고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다.

순례길은 요단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이었다. 당시 여리고는 한마디로 풍요롭고 번성했던 도시였다. 교통의 요지로서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로마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운 큰 3개의 세무서 중 하나가 여리고에 있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길에서 여리고는 마지막 휴게소와 같았다고도 할 수 있다. 예루살렘까지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에 여리고를 통과하여 바로 예루살렘으로 갈 수도 있지만, 휴양지 같은 여리고에서 쉬어 갈 수도 있었다. 여리고를 지나야 했지만, 꼭 그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번 여정에서는 여리고에 머물 이유가 있었다. 바로 세리장인 삭개오를 만나는 것이었다.

삭개오에 대해서 누가는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두 특징을 말해준다.

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는 세리장이고 부자였다. 세리는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로마는 식민지의 현지인들에게 일부의 세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맡겼다. 사실 세금이라는 것은 그 필요성을 인정하더라도 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쉽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세금을 내면서 이방인의 종처럼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치욕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리인이 되어서 세금을 걷어가는 세리들은 매국노, 반역자로 여겼고, 그들을 ‘공적인 죄인’으로 정죄했다.

7절을 보면 실제로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부르는데 아무 주저함이 없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삭개오는 세리장이었다. 직접 세금을 거두러 다니기 보다는 그런 세리들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세리장인 삭개오는 그런 반역자들의 우두머리처럼 보였을 것이다.

삭개오의 이런 위치는 자연스럽게 그가 왜 ‘부자’였는지에 대한 설명도 된다. 당시 로마는 현지의 세리들을 통해 세금을 걷으면서, 실제로 그들이 얼마를 걷든 자신들이 요구한 만큼의 세금만 들어오면 상관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리들은 부가된 것 외에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그 차액으로 자신의 부를 쌓았다. 칼을 들고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뿐 강도짓을 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여리고에는 특히나 큰 세무서가 있었으니, 삭개오가 자신이 가진 권세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그는 정말 큰 부자였을 것이다.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유대 사회의 관점에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사실 유대인들은 ‘부자’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오히려 부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여겼다. 하지만 세리의 경우 그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알았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죄인’으로 정죄했다. 흥미롭게도 삭개오라는 이름은 ‘의롭다’, ‘순수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마 부모가 지어준 이름일텐데, 부모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의인이 아닌 죄인 취급을 당했고, 자연스럽게 사회에서 관계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 소외된 만큼 더 돈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갈취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여리고를 지나고 계셨고, 그곳에는 세리장이며 부자인 삭개오가 있었다. 어떤 죄도 없으신 예수님과 사람들에게 죄인으로 낙인 찍힌 삭개오,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을 생각하기도 힘든 두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이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로 가고 계셨다. 이제 곧 그를 만나 그의 모든 삶을 바꾸실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예수님을 찾은 삭개오

19: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었으니, 그와 친분이 있어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은 당시 널리 알려지셨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삭개오는 그 이상으로 예수님을 알고 싶었다.

그 동기나 목적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뒤에 나오는 삭개오의 행동을 보면 단지 예수라는 사람 얼굴이나 한번 보자는 마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 뭔가 예수님께 특별히 얻고자 하는 것이 있었을까? 키가 작았다고 하니, 키가 크고 싶었을까? 예수님은 당시에 기적을 행하는 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눈을 뜨기 위해서, 걷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었던 사람들이 많았었다. 삭개오에게 그런 마음도 조금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맥락 상 그는 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던 것 같지는 않다. 삭개오의 진짜 문제는 내적인 것이었다. 영적인 것이었다. 그에게 재물은 많았지만, 내적인 평안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며, 그 스스로도 죄의 무게에 눌려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누리던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나마 그가 가진 재물이 그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18장에 나오는 부자 관리처럼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선생님, 제가 어떻게 해야합니까?”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지 못했다. 부자 관리는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사람이었겠지만, 삭개오는 죄인으로서 멸시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그 옷을 손을 대었던 혈루증 여자처럼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꾸짖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예수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질렀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처럼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지도 않았다. 삭개오는 단지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호기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예수님께 어떤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19: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돌무화과나무는 기둥은 짧고 가지가 넓게 퍼지는 나무다. 그래서 나무에 오르는 것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삭개오로서는 큰 결심을 한 것이 사실이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당시 어느 정도 나이도 있었을텐데, 정말 단순한 호기심만 있었다면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키가 크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도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삭개오는 그 이상의 갈급함이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다.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간절한 마음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지나시는 길에 있는 나무 위에 올랐고, 그의 예상대로 예수님은 곧 그 길로 지나가셨다.

삭개오를 찾은 예수님

누가의 기록은 흥미롭다. 분명 예수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삭개오가 그가 원했던 대로 예수님을 먼저 봤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본 부분은 생략했다. 그리고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를 보신 것을 강조하여 기록했다.

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을 보고 싶어했던 삭개오를 예수님께서 보셨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 문맥 상 삭개오는 단 한번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으로서 삭개오의 이름을 아셨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삭개오가 큰 세무서의 세리장으로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었음을 고려하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만난 적이 없던 그의 이름을 아시는 것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분명 의도적이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그냥 지나치실 수도 있으셨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예수님이 그를 꼭 주목하셔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혹은 삭개오를 부르실 때 ‘거기 나무 위에 있는 너’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실 수도 있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다. 마치 오래 알고 있었던 친구를 부르듯, 그렇게 삭개오를 부르셨다. “죄인 삭개오”라는 모순된 말을 들으며 살아왔던 그의 이름을 죄인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부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더 놀라운 말씀을 하셨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어떤 면에서는 무례한 말이다. 초대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요청을 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오늘 반드시 너 삭개오의 집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었던 삭개오의 입장에서는 그저 감사한 말씀으로만 들렸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사마리아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셔야만 했었던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해 그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연히 여리고를 지나가셨던 것이 아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까지 올라갔기 때문에 삭개오를 주목하셨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아 여리고로 오셨다. 나무 위에 삭개오가 있다는 것을 그를 보기 전에 이미 아셨다. 그의 이름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고 목자가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양을 자기에게 이끌 듯,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다.

그에게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가 있었으니, 천천히 조심히 내려오라고 해야할 것 같은데, 속히 내려오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만나고 싶으셨다. 그에게 참된 구원을, 참된 평안과 안식과 기쁨을 주기 원하셨다. 참된 삶을, 영생을 주기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아래서 예수님은 삭개오를 찾으셔야 했던 것이다.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찾아 오셔야만 했다.

예수님을 만난 죄인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예수님을 영접했다(6절). 삭개오 역시 그것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는 기쁨이었다. 이미 그 안에 성령님께서 역사하고 계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 원했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습을 보던 다른 군중들의 반응이다.

19: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들어간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죄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그들과 함께 하셨다. 이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집에 유하셨던 것이다.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고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이 구원이 보이지 않았다.

삭개오의 집으로 가는 길에, 그리고 그 집에서도 많은 대화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는 삭개오의 이 말을 기록했다.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자기 소유의 절반을 포기하고, 자신이 속여서 빼앗은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율법에 따르면 남의 것을 훔치거나 하면 그것을 돌려줄 뿐 아니라 배상을 해야했는데, 기본적으로는 1/5을 더 주어야 했다. 때로는 2배를 배상해야할 때도 있었고, 주요 생계 수단인 소나 양에 대해서는 최대 5배까지 배상을 해야 했다. 삭개오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일이 남의 것을 빼앗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4배로 갚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잠깐!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가 아닌가! 믿음에 대한 언급은 단 한번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님은 삭개오를 향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실까? 뒤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 즉 유대인이기 때문일까? 그럴 수는 없다. 만약 그런 이유라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른 것이 아니라, 이미 옛날에 이르렀다고 해야하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오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다. 혈통적으로는 이미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다. 허울 뿐인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예수님은 선포하신 것이다.

침례 요한은 자기에게 침례를 받으러 오는 무리를 향해서 이렇게 말했었다.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요한의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더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큰 죄를 범하지 않는 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즉,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혈통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죄인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향하는 멸망을 향해 걸어갔던 것이다. 그 길에서 돌이켜야 했다. 진정한 회개가 필요했다. 그래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도전한 것이다.

요한의 이 말을 들은 사람들 중에 세리가 물었다.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눅 3:12). 요한은 이렇게 답했다.

3: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이것이 세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였다. 단순히 정직하게 세금을 걷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이 부정직하게 세금을 걷은 이유는 그들의 우상이 재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참된 회개의 열매는 그 재물을 포기하는 것으로서 드러나야 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가진 재물을 모두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던 삶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삶으로 바뀌어야 했던 것이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은 기꺼이 그렇게 한다.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는 말은 그 모든 것을 쓸모 없는 것으로 여기고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삶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위해서 필요하면 그것을 사용한다. 방해가 된다면 버린다. 예수님이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왔었지만,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먼저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니고데모의 경우, 산헤드린 공회의 일원이라는 사회적 지위를 빼앗길 수 있는 상황에서 나서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많은 돈을 들여서 장사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도 그렇다. 그는 그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겼다. 그의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주인이 달라졌기 때문에 나타난 변화다.

여기 삭개오가 정확히 그런 모습을 보인다. 구원 받는 참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진정한 회개의 열매을 맺는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바로 잡고 싶어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다고는 하지만 같은 상황이 되면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진정한 믿음도,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지나간 일을 바로 잡는 것은 대부분 불가능하다. 일부 어느 정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지나간 일을 돌이킬 수 없다. 삭개오가 이제와서 자신이 부당하게 취한 것을 돌려준다고 해서 모든 것을 돌이킬 수는 없는 것이다. 어찌어찌 돈은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행위를 통해 깨어진 관계를 바로 잡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삭개오가 하는 말은 자신이 할 수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싶다는 것이다. 뉘우치고 회개하는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 회개한 자의 열매이고 참된 믿음의 증거다. 그동안의 자기 삶을 부인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 원한다.

죄인이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을 믿었다.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 일이 삭개오에게 일어난 것이다. 혈통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회개의 열매로 그는 자신이 평생을 조롱과 별시를 받으며 쌓아온 재물을 기꺼이 나누겠다고 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삭개오가 문자 그대로 자신이 한 말을 지킨다면 그에게 남은 재산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그가 정직하게 벌어들이는 수익의 대부분을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반대로 이렇게 돈을 나눠주어도 여전히 부자였을지도 모른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 삭개오가 더 이상 자신의 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믿음의 분명한 증거가 그에게 있었다. 오늘 구원이 그에게 이르렀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다.

죄인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어떻게 죄인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게 되었을까?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 아닌가?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사실을 알고, 사람들이 많아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자 체면을 무릎 쓰고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삭개오가 아닌가?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여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것도 삭개오가 한 일이 아닌가? 맞다. 그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결과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말이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들도 보면 목자가 양을 찾고, 여자가 잃어 버린 동전을 찾는다. 마지막 탕자의 비유에서는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아들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다시 받아들이면서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했다(눅 15:24).

예수님께서 5절에서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어떤 면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은 말씀을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삭개오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셔야 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고, 그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실 성경의 핵심 줄거리인 ‘구속사’는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찾으시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어디 숨어계시지 않으셨다. 숨어계시면서 죄인들에게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보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계속해서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자기를 찾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 있는 것이 바로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야만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믿는 자들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고 그렇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기도 하시고,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눠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죄인을 찾아 오셨다. 죄인이 구원자를 만나는 것은 오직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을 찾아 오셨기 때문이다.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도전

오늘 본문의 분명한 메시지에 우리는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바르게 반응해야 한다.

우리 중 누군가는 여전히 “잃어버린 자”일 것이다. 삭개오처럼 스스로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고,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다. 세상에서도 죄인 취급을 받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고, 모두에게 칭찬 받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고, 교회에 빠짐없이 잘 나오고 있는 잃어버린 자도 있을 것이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상태에 있든, 어떤 삶을 살아왔든, 나는 잃어버린 자다.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찾고 계시는 잃어버린 양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영접하라고 그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을 얻으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신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라. 삭개오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오늘 구원이 임할 것이다.

찾아 오신 예수님을 이미 만났다면, 내가 어떻게 이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되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때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뭔가 구원 받는데 기여를 한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특히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런 착각을 한다. 나도 잃어버린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주셨다는 사실을 잊은 듯이 말한다. 그러면서 마치 내가 하나님을 찾은 듯, 내가 예수님을 믿어준 듯이 오해한다. 하나님과 나의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했지, 하나님에게 내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그래도 남보다 괜찮아서 믿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바울의 이런 고백이 필요하다.

딤전 1:15–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죄인인 내가 구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이 긍휼을 입은 것처럼 우리도 동일하게 긍휼을 입었다. 잃어버린 나를 하나님께서 찾아주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영원하신 왕,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 은혜에 영원히 감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간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