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에서 은혜로

본문: 시편 134편

설교자: 최종혁

그동안 14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통해서 우리의 예배에 대해서, 그리고 예배자(순례자)로서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 시편들이 엄밀하게 성전에 올라가서 예배하는 순서를 따라 배열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어느 정도는 그 과정이 의도된 것처럼 보인다.

처음 3개의 시편(120-122편)은 세상 속에 살던 예배자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상황에 적절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시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서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기억한다. 괴롭고 아픈 기억이 있지만, 언제나 하나님께서 도움이 되셨고 구원이 되셨음을 이 시편들은 기억한다. 마지막 3개의 시편(132-134편)은 예배하는 공동체를 바라본다. 132편은 그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133편은 그들의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을 바라본다. 그리고 134편은 그들의 계속될 예배를 바라본다. 성전 안에서 계속될 예배와 성전 밖에서 계속될 예배를 바라보며,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시편 134편이라 할 수 있다. 예배 안과 밖으로, 또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순환이 이 시편의 주제다.

특히 시편 134편의 저자는 매 절에서 ‘축복하다’ 혹은 ‘복을 빌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단어 ‘바라크’를 사용하여, 이런 은혜의 순환을 강조했다. 즉, 은혜를 받은 자들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은 또 다른 은혜를 예배자에게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 은혜에서 은혜로 은혜가 이어진다.

은혜 받은 자의 예배

먼저 1-2절을 통해서 은혜 받은 자의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시 134:1–2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1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이 시편은 다양한 상황에 적용될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은 좁은 의미에서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 즉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의미할 수 있다. 그들은 밤에도 맡은 책임이 있었다.

대상 9:27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직분이 있으므로 성전 주위에서 밤을 지내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더라
대상 9:33 또 찬송하는 자가 있으니 곧 레위 우두머리라 그들은 골방에 거주하면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므로 다른 일은 하지 아니하였더라

특히 순례자들이 많이 몰려오는 절기에는 밤 늦게까지 예배가 진행되었을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그런 상황이라면, 이 시편은 긴 순례의 길 끝에 밤에 성전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그 밤에 성전에서 섬기고 있는 제사장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격려하고, 제사장들이 그에 화답하여 순례자들을 축복하는 내용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혹은, 예배를 드리고 밤에 성전을 떠나는 예배자들이 성전에 남아 있는 제사장들에게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말하고, 제사장들은 떠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상황에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혹은 제사장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는 상황에서도 사용되었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여호와의 모든 종들”을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모든 백성들로 본다면, 백성들이 서로에게 말하거나, 혹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예배자들에게 하는 말로서도 이해할 수 있다.

이 시편이 어떤 상황을 특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상황이 다양하다면, 애초에 그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시편이 기록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여호와의 모든 종들”이라는 표현은 제한적이기보다 포괄적이다. 누구든 여호와의 종이라면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이 1-2절의 핵심이다.

다만 “여호와의 모든 종들”에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이라는 표현이 추가되어 있는 것은 흥미롭다. 특히 “성전에 서 있는”이라는 표현이 제사장에게 적합하기 때문에, 이 표현을 제사장에게로 한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은 지금 우리와는 다르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 있는”이라는 표현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 누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다.

오히려 특이한 점은 언급된 시간, “밤에”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전에서는 밤에도 낮과 동일한 예배가 드려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상황보다는 밤에도 여호와의 성전에 서서 예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이런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가족들을 데리고 먼 길을 왔다. 그렇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좋은 교제를 나누며, 영적으로 충만해진 상태로 이제 다시 먼 길을 돌아가야할 때가 됐다. 그런데, 그냥 떠나기는 아쉬워서 밤에 성전에 가보니, 그 밤에도 예배가 드려지고 있었다. 제사장들, 낮부터 계속해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 밤 늦게 도착했는데 예배를 드리러 온 사람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 성전을 떠나지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이 시편으로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다 함께 예배를 드리는데, 먼저 가야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는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정확히 이런 상황이든 아니든, 이 시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 말한다.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송축하라.”

앞서 이 시편의 매 구절에서 반복되는 단어가 있다고 했는데, 그 단어가 바로 “송축하라”다. 히브리어 ‘바라크’인데, 1, 2절에는 “송축하라”고 번역되었고, 3절에는 “복을 주실지어다”로 번역되었다. 똑같은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우리말에는 적절한 표현이 없어서 다르게 번역되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바라크’는 ‘축복하다’ 혹은 ‘복을 주다’의 의미다. 오늘 본문에서는 3절에서 그런 일반적인 용례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1-2절은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여호와의 모든 종들이 여호와에게 축복한다거나 복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 누가 주는 복을 받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줄 수는 없다. 그런데 마치 그런 것처럼 ‘바라크’가 사용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용례는 성경에서 드물지도 않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시편 103편에서 살펴봤었다.

시 103:1–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여기서 주목할 표현은 2절 끝에 나오는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다. 이것이 “송축하라”는 명령에 감추어져있는 명령을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송축하라”는 우리가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찬양하라” 혹은 “감사하라”와 의미 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런 명령에 비해서 “송축하라(바라크)”는 풍요로우신 능력의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 혹은 은혜를 기억하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는데 중점이 있다.

“복”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생각하시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실 것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다. 은혜를 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복을 생각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께 우리가 주는 복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에 풍요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족함을 누가 채워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복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이미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을 선포하며 예배한다. 우리는 이미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예배한다. 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복 되신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시며, 우리에게 복 주심을 기억하고 예배하라는 것이 “송축하라”는 명령의 의미다. 즉, 송축하라는 명령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복(은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복을 어떤 방식으로든 돌려드리는 것이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은 그래서 각자 하나님을 송축할 이유가 있다. 133편에서 언급한 형제의 연합이 송축의 이유가 될 수 있다. 132편에서 말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 송축의 이유가 될 수 있다. 131편이 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이유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130편), 하나님의 구원(129편), 순종의 열매(128편), 안식(127편), 소망(126편), 안전(125편), 승리(124편), 공의(123편), 평안(122편), 도움(121편), 화평(120편) 등이 모두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이고, 따라서 이 모든 것이 송축의 이유가 된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의 시작이었던 120편에서 예배는 절망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배웠었다.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된다.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사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의지할 것이 없을 때 좀 더 쉽다. 힘들게 사는 나라의 사람들이 여전히 복음에 더 쉽게 반응하는 것이 이런 이유다. 가진 것이 많고, 의지할 것이 많으면, 세상에 소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이것은 믿는 자의 예배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내가 가진 것들, 좋아하는 것들, 기쁘게 누리는 것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송축하지 못한다. 내가 이런 것을 가질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셨다는 것을 알면 송축은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나에게 이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수고로 이런 것들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여전히 많다면, 송축은 그냥 형식적인 고백이 될 뿐이다. ‘모든 것이 은혜’라고 찬양은 하지만, 그것이 진짜 마음의 고백은 되지 않는 것이다.

욥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었다.

욥 1: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은 정말로 모든 것이 은혜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가진 것들이 그의 손으로, 그의 수고로 일구어 낸 그의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따졌을 것이다. 그의 아내의 말처럼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것처럼 보였던 그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욥은 그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이렇게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욥의 경우는 너무 극단적이란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원리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나에게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하나님께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해 보라. 그에 대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지금 나는 하나님을 송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에 베푸신 은혜를 돌려 드리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절망에서 시작된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각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송축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심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송축은 예배를 자연스럽게 하나님 중심이 되게 한다. 2절은 송축하는 예배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데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라고 묘사한다. 손을 드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도와 관련된 행동이지만, 좀 더 넓게는 예배와 관련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시 63: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송축할 때, 반드시 손을 들고 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묘사한다. 그냥 서서 예배하는 경우도 있다.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경우도 있다. 완전히 땅에 엎드려서 예배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지금 주로 의자에 앉아서 예배하는데,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 문화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예배할 수 있다.

다만, 어떤 모습으로 하든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함께 누워서 예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누군가에 대한 존중의 표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손을 드는 것은 존중의 표시다. 특히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드는 것은 그 존중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그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송축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에 계셔야 한다.

우리는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여기 시편의 묘사처럼 손만 높이 들고 있으면 되는걸까? 아니면, 예배당 한가운데 십자가를 크게 세워놓으면 그것이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예배인가? 아니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주시옵소서’라는 간구가 없으면 그것이 하나님 중심 예배인가? 아니면, 우리가 부르는 찬양이 다 오래된 찬양이면 그것이 하나님 중심 예배인가? 아니면, 설교에 예화는 하나도 없고 교리만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 중심 예배인가?

이런 노력들이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은 아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하나님 중심의 예배이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은 죄인으로서 이 예배의 자리에 나온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된다.

그 모습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자연스럽기 때문에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게 드러난다. 손을 높이 드는 것으로 그것이 표현될 수도 있다. 손을 모으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엎드리는 것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눈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말씀의 올바른 선포로, 잘 준비된 찬양으로, 진심의 기도로 표현될 수 있다. 예배자가 받은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며 예배를 드린다면, 그 모습은 다양할지라도 하나님이 그 예배의 중심에 계신다.

우리는 예배를 재밌게 만들 수 있다. 정말로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와 있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심지어 계속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수 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중심에서 밀어낸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예배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예배는 가장 기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송축하는 자리다.

유진 피터슨, “우리의 이야기는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핵심이 아니다. 우리의 성취는 놀라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호기심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그것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송축하라.”

마지막으로, “송축하라”가 초청이면서 명령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거절할 수 없는 초청인 것이다. 거절하면 안되는 초청인 것이다. 은혜를 받은 자는 반드시 송축해야 한다. 내 기분에 따라서 하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에 관해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고전 11:28)라는 명령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 말씀을 마치 그날 자신의 상태를 봐서 괜찮으면 만찬에 참여하고 아니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명령의 의도는 그렇지 않다. 떡과 잔에 참여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괜찮은 상태로 나아오라는데 중점이 있다.

“송축하라”가 명령이라는 것도 우리가 비슷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이 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내 상태가 괜찮으면 송축하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은 이와 관련하여 두 사람의 차이를 말한다. 한 사람은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교회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그때 가겠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교회에 가서 예배의 자리에 나 자신을 두겠다.

둘 중에 예배에 대해 합당한 자세를 가진 사람은 두번째 사람이다. 마음이 그렇지 않을 때,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어쩌면 자신을 속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 자체가 위선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참된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은 성도는 없다. 그런 성도는 성도가 아니다. 단지 지금의 감정의 문제를 겪고 있을 뿐이다. 그럴 때,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명령을 따라야 한다.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 더 어려운 상황에 계속해서 자신을 두는 것이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예배 드리고 싶은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노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의 기분에 따라 순종하거나 불순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기분이 그렇지 않다면, 그 기분까지도 하나님께 맡기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순종할 때 하나님은 또 다른 은혜를 우리에게 주심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자들로서, 이미 받은 그 은혜로 인해, 마땅히 하나님을 송축해야 한다. 이 사실을 스스로 기억해야 송축해야 하고, 또한 이 사실로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은혜 받은 자는 은혜 주신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 은혜를 돌려드리는 예배를 드린다.

예배자에게 주시는 은혜

그런 예배자에게 또 다른 예배자들은 이렇게 축복한다.

시 134:3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이 복이 어떤 복일지는 모른다. 다만 “네게”라는 단수형의 표현은 이것이 개인적인 것임을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상황에 맞게 필요한 복을 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이 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복을 주냐는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복을 주는 주체가 아니다. 다만 복을 빌어줄 뿐이다. 이 복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다. 예배자들은 이제 각자의 장소로 흩어질 것이다. 누군가는 북쪽으로 올라가서 갈릴리로 갈지 모른다. 누군가는 더 남쪽으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혹은 훨씬 더 멀리 이방인의 땅까지 가야할지도 모른다. 시편 120:5는 메섹과 게달이라는 곳을 언급했었다. 이제 그 힘들었던 땅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천국과 같았던 이곳을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던 예배자들은 지금이든 나중이든 언젠가는 내려가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야 한다. 하지만 어느 곳에 있든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는 시온에서 복을 주실 수 있으시다. 예루살렘에만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복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이 예루살렘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예루살렘에서 내려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 되셨던 것처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복이 되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자는 이렇게 다른 예배자를 축복할 수 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은혜 받은 자들은 은혜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떠날 때,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은혜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도 넓은 의미에서의 순례자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의 목적지를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했다(히 12:22). 우리는 우리의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곳은 우리의 본향이기도 하다. 우리가 있어야할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례자이며 이 땅의 나그네로서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이 땅에도 임시 예루살렘 같은 곳이 있다. 바로 교회다. 교회가 모여 함께 예배하는 그곳이 바로 우리의 지상 예루살렘이기도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오르내렸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여서 예배하고, 또 흩어진다. 은혜 받은 자들로서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흩어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한다. 우리는 매 주일, 매 수요일에 공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많은 교회들이 이런 의미에서 예배를 마무리하면서 ‘축도’라는 것을 한다. 그것이 어떤 때는 목사가 마치 성도에게 복을 내려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고(강복 선언, “-있을지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반’ 성도보다 ‘특별한’ 목사가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공적인 예배의 자리를 떠날 때, 이렇게 축복하는 것, 다르게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오늘 시편에서 본 것처럼 성경적인 예배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축복을 어떤 특정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볼 수 없다. 어떤 특별한 사람이 복을 빌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주신다거나 하는 생각도 성경적이지 않다. 하지만, 축복 자체는 성경적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각자의 삶에 적합한 은혜를 내려주시기를 성도들은 서로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삶에서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또 다른 예배로 우리를 기쁘게 인도할 것이다. 그렇게 예배의 은혜는 은혜에서 은혜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도전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4:2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때는 메시야의 때였고, 이미 우리는 그 때를 살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 어디서든 영과 진리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우리가 한 장소에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를 무가치하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예배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셨던 것처럼, 지금 교회가 어느 곳에서든 함께 모여서 드리는 예배의 모습을 하나님은 기쁘게 보신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의 이 말씀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의 많은 말씀이 우리가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상황을 전제로 기록되어 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모두 제사장이 되어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지 않고 각자 알아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라는 말 자체가 각 개인을 지칭하는 표현이 아니라, 그 개인이 모인 하나의 공동체 혹은 연합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벽돌은 건물의 일부이지만, 건물의 일부가 되어있지 않은 벽돌은 건물의 일부라고 할 수 없다. 몸의 지체는 몸의 일부이지만, 몸에서 떨어져 나온 지체는 몸의 일부라고 할 수 없다. 성도와 교회의 관계도 그런 것이다. 성도는 교회의 일부여야 하고, 교회는 모여서 함께 예배한다.

그렇게 모일 때, 오늘 말씀에서 살펴봤던 은혜의 순환이 적용된다. 우리는 은혜 받은 자로서 모여서 하나님을 송축한다. 이것은 마치 받은 은혜를 돌려드리는 것과 같다. 그 모든 은혜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의 삶에 하나님은 또 다른 은혜를 주신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모여서 하나님을 송축한다. 그렇게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은혜의 하나님은 높임을 받으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예배자가 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다. 은혜 안에서 항상 기쁘게 예배하는 하나님의 예배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