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의 소망, 하나님의 약속
본문: 시편 132편
설교자: 최종혁
15편의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이제 3편이 남아있다. 이 세 편은 특별히 예배 공동체적인 성격이 강하다. 133편은 연합에 대해 말하고, 134편은 일반적인 공동체의 예배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132편은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대해서 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신 중요한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다. 어떤 약속은 개인적이고 단기적이지만, 어떤 약속들은 훨씬 더 광범위하다. 주로 ‘언약’이라고 부르는 약속들이 그렇다.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 새 언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언약들이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것도 바로 이 언약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이 중 시편 132편은 ‘다윗 언약’을 다룬다. 다윗 언약은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가운데 있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궤(언약궤)가 임시거처인 장막에 있는 것에 마음이 쓰였고,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건축하겠다는 선한 마음을 품었었다. 이에 하나님은 집을 건축하는 것은 그의 뒤를 이을 자손이 할 것이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삼상 7:12). 여기에는 다윗에게 주는 약속과 그의 후손에게 주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그의 후손으로 올 메시야를 통한 영원한 나라와 통치에 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편 132편은 바로 이 언약에 기초한 기도문이라 할 수 있다.
다윗 언약은 후반부인 11-18절에서 언급된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언약, 혹은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헌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전반부인 1-10절은 이에 대응하는 ‘하나님을 위한 백성의 헌신’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은 소망을 만들고, 그 소망을 붙드는 믿음은 지금의 헌신으로 드러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백성들의 헌신(1-10절)
시 132:1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시편 132편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성전에 올라가는 예배자의 기도다. 예배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며 그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을 구한다.
“겸손”은 다윗의 성품이나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사실 다윗의 “고난” 혹은 “어려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이어지는 맥락을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고, 언약궤를 둘 성전을 위해 헌신했던 “수고”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윗의 이런 수고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시 132:2–5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성경의 다른 곳에 다윗이 이런 맹세와 서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 시편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처소를 찾기까지는 쉬지도 않고(3절) 잠자지도 않겠다는(4절) 의지를 분명하게 한다. 문자 그대로는 성취할 수는 없는 맹세다. 3절은 어떻게 할 수 있다고 해도, 4절은 의지 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것은, 과장법을 통해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다윗은 반드시 하나님의 처소를 마련하고 싶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은 서두에 언급했었던 사무엘하 7장이다. 사무엘하 7:2에서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라면서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을 표명했다. 하지만, 다윗의 행적을 고려하면 이 때 처음으로 성전 건축에 대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닐 것이다. 즉, 언약궤를 가지고 와서 보니까 장막에 두는 것이 좀 그래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갑작스럽게 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중심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언약궤를 두고 싶었고, 공식적으로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에 이 일을 차근차근 진행했다고 볼 수 있다.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기록된 다윗의 행적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은 것이었다(삼하 5장). 그러고 나서 그가 한 일은 언약궤를 찾아 예루살렘으로 옮겨 오는 것이었다(삼하 6장). 그 때 다윗은 지휘관들을 모아두고 이렇게 말했었다.
대상 13: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다가 기럇여아림으로 반환된 후에 그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물론 그곳 사람들은 언약궤를 관리했지만, 국가적인 관심에서는 멀어졌던 것이다. 왕의 자리에 오른 사울은 하나님의 언약궤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여기 다윗이 사용한 표현 “묻지 아니하였느니라”는 기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찾는다”는 의미다. 사울은 언약궤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년에 그는 하나님께 듣고 싶어서 신접한 여인을 찾기까지 했지만, 정작 하나님께서 자기 임재를 두시고 백성을 만나겠다고 하신 언약궤는 찾지 않았던 것이다. 사울의 통치 기간이 40년이었고, 그 앞뒤의 기간까지 고려하면, 언약궤는 최소한 60-70년 동안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고, 그동안 백성들의 삶과 예배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
다윗은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았던 것이다. 왕이 된 다윗은 하나님이 그 나라와 백성들의 중심에 계셔야함을 알았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2-5절과 같은 맹세를 하고 실제로 실행해 옮겼던 것이다. 그 과정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다윗은 포기하지 않았다.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때가 되었을 때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왔다. 6절은 언약궤를 찾았던 상황을 묘사한다.
시 132:6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다윗 시대에 언약궤는 “에브라다”가 아닌 기럇여아림에 있었다. 물론 여기서 에브라다를 베들레헴과 기럇여아림까지 포함하는 넓은 지역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언약궤에 관한 소식을 에브라다에서 들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럽다. “나무 밭”은 각주에 표기되어 있는 것처럼 “야일(야알)의 밭”이다. “야일”이 나무 혹은 수풀을 의미하기 때문에 “나무 밭”으로 번역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마치 언약궤를 찾던 자들이 숲에 버려져 있던 언약궤를 찾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는 않다. 언약궤가 있었던 ‘기럇여아림’은 숲의 도시라는 의미로서 ‘여아림’은 ‘야일’의 복수형이다. ‘야일’ 자체가 기럇여아림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 것이다. 즉, 6절을 쉽게 정리하면 다윗의 명에 따라 언약궤를 찾던 사람들은 에브라다에 있을 때에 언약궤가 기럇여아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찾았다는 말이다.
6절에서 하나 흥미로운 점은 5절까지는 다윗의 맹세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었는데, 6절부터는 “우리”로 표현이 바뀌어서 그 모든 과거의 일에 이 노래를 하고 있는 자들을 참여시킨다는 점이다. 언약궤를 찾고 예배를 회복하는 일은 다윗이 주도했고 그 당시의 백성들이 했던 일이지만, 지금 성전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예배자들도 사실 같은 마음으로 그 일에 동참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유평교회가 과거에 한 일에 대해서 ‘우리’가 그렇게 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 일은 누군가의 독단적인 일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이 함께 한 일이었기에, 그 이후의 사람들도 자신들이 한 일로서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예배자들도 다윗과 같은 마음으로 언약궤를 찾아 성전에 오르고 있다.
그럼,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다윗은 어떤 마음으로 언약궤를 찾았을까? 어떤 마음으로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언약궤를 두고 싶었을까?
다윗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편재하심을 몰라서, 하나님께 집이라도 하나 지어드려야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다. 잘 알려진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했다(시 139:7). 다윗의 의지를 이어받아 실제로 성전을 건축했던 솔로몬은 봉헌 기도에서 “하늘과 하늘들을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고 말했다(대하 6:18). 구약의 성도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어느 한 장소에 계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성전과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그 특별한 임재를 두시고 나타내시는 곳,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겠다고 하신 곳으로서의 의미가 있었고, 그들은 그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다윗에게 있어 언약궤는 오래된 조상의 유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언약궤를 둘 성전을 건축하는 것도 단지 건축의 문제가 아니었다. 언약궤에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두신다면, 그 언약궤가 있는 성전이야 말로 왕의 집, 왕궁이었다. 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사무엘의 때에 백성들은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했었다. 다윗은 누가 진짜 왕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언약궤를 찾아 그에 합당한 곳에 두는 것에 헌신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울과 다윗의 분명한 차이였다. 사울에게는 사람이 중요했고, 자신이 가진 왕권이 중요했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중요했고, 하나님의 왕권이 중요했다. 그래서 사울은 언약궤나 성전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다윗은 언약궤와 성전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런 우선순위의 차이는 포로기에서 귀환한 백성들에게서도 드러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은 잘 지어놓았지만 성전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며 건축을 미루고 있었다(학 1:2). 하나님은 이렇게 그들을 책망하셨다.
학 1:9 …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성전이 지어지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태도가 문제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뒤로 미뤘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이 없었고, 그것이 하나님과 관련된 것을 뒤로 미루는 삶의 우선순위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것이 정확히 다윗이 보여준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그은 하나님의 집을 짓는 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었다. 자신이 쉬고 자는 것보다도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고했다. 누구도 몰아내지 못했던 여부스 사람들을 몰아내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그곳으로 하나님의 궤를 옮겨왔다. 그리고 곧 성전을 지으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이에 다윗은 순종했지만, 여전히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에는 최선을 다했다. 성전을 위한 건축 재료를 준비하고, 예배자들을 훈련했다. 성전이 건축되기만 하면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의 예배와 헌신이 회복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다윗은 성전을 지어야해서 지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정말로 성전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그것이 그의 우선순위가 되었고, 그의 헌신이 된 것이다.
다윗 이후에 성전이 건축되고, 그 성전에 오르던 참된 하나님의 예배자들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알고, 같은 마음으로 성전에 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율법에서 최소한 일년에 세 번은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야 집안에 우환이 없을 것 같아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고 섬기기 원하는 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 합당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자들이었다.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에 나아가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마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다.
시 132:7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이것이 다윗의 마음이었을 것이고, 그와 함께 했던 예배자들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또한 그후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던 모든 사람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성전은 물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단지 하나의 건축물일 뿐이다. 그 성전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있다고 해도, 여전히 더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많다. 성전이 중요했던 것은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셨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가장 높으신 왕께 나아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하나님의 보좌라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발받침) 정도가 된다. 예배자는 그 앞에 엎드려 겸손히 예배할 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뿐이다(8-10절).
8-10절의 기도는 역대하 6:41-42에 기록된 솔로몬의 기도와 내용 뿐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거의 동일하다.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성전을 통해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마쳤었다. 그래서 시편 132편도 솔로몬의 기도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예배자는 3가지를 구한다.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8절),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9절),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다(10절).
먼저 8절은 하나님께서 언약궤와 함께 성전에 계속해서 임재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기도다.
시 132:8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이 기도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에 따라 진을 옮길 때, 모세가 드렸던 기도에 기초해 있다.
민 10:35–36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모세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이동 중에는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시기를 구하고 멈출 때는 다시 그들 가운데 계시기를 구하는 내용이다. 이 기도의 내용을 반복하여 예배자는 하나님의 보호와 임재를 구한다.
다음으로 9절에서 예배자는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합당한 예배를 위하여 구한다.
시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외칠지어다”보다는 “외치게 하소서”가 여기 맥락에서는 적절할 것이다. 제사장들이 의를 옷 입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복에 대한 언급은 아니다. 본래 제사장복도 단순히 작업복의 의미는 아니다. 제사장들은 백성을 대표하는 자들로서 구별된 자들임을 드러냈던 것이 제사장복이었다. 당연히 옷만 구별된 옷을 입으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더욱 구별된 삶이 요구되었다. 따라서 여기 예배자의 기도는 예배의 인도자인 제사장들이 그들의 역할에 합당하게 거룩한 삶을 살기를 구하는 기도다. 그때에 성도들도 즐거이 외치며 예배할 수 있다.
이들은 ‘주의’ 제사장들이고 ‘주의’ 성도들이다. 하나님께 속한 자들인 것이다. 이 간구는 이렇게 풀어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 그들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즐거운 예배를 드리기 원합니다. 하나님, 우리 예배를 지켜주소서.” 예배는 혼자만 드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언제나 필요하다.
끝으로 10절에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구한다.
시 132:10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
여기 “다윗을 위하여”는(cf. 1절) “다윗을 봐서”의 의미는 아니다. 즉, 다윗이 하나님께 그렇게 헌신했으니, 그런 다윗을 봐서라도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맹세, 약속이고, 이는 11절 이후에 기록되어 있다. 그 약속에 따라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옵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이 시편으로 노래하는 사람에 따라 지칭하는 대상이 다를 것이다. 솔로몬이 될 수도 있고, 그 후 다윗 왕가의 어떤 왕이라도 가능하다. 그 당시의 왕을 위해 예배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혹은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같은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에 따라 왕을 도우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세워지기를 구한 것이다. 그래서, 이 기도는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야를 기대하는 기도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모든 기도의 바탕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헌신(11-18절)
앞서 언급한 것처럼 1-10절의 기도, 백성들의 헌신에는 하나님께서 먼저 주신 언약이 바탕에 있다. 11-12절은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된 다윗 언약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시 132:11–12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하지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왕위에 둘지라 12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
2절에서는 다윗이 여호와께 맹세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셨다고 말한다. 사실 다윗은 지키지 못할 것을 맹세했지만, 하나님은 반드시 지키실 것을 맹세하셨다. 하나님께는 맹세가 필요없다. 하지만 사람을 위해 맹세하셨다. 이 약속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11절의 예배자들은 각자 다른 환경에서 이 노래를 했겠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하신 맹세가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여기서 말하는대로 다윗의 왕위가 그의 후손을 통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짓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하셨는데, 그 집이 바로 영원한 나라, 영원한 통치, 영원한 왕권이었다. 이 약속에 근거하여 예배자들은 10절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셨으니, 지금 다윗의 자손인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외면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임재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시 132:13–14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온은 다윗이 선택한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 택하고 거처로 삼으신 곳이었다. 특히 하나님은 그곳을 “영원히 쉴 곳”이라 하셨다. 그 동안 언약궤는 정해진 처소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시온(예루살렘)에 머물게 될 것이다. 하나님도 계속해서 시온에 임재를 두실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된 후,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하 7: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이 약속에 근거하여 예배자들은 8절의 기도를 드린 것이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성전에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계심을 확신할 수 있었다.
15-16절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대한 말씀이다.
시 132:15–16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16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을 옷 입히리니 그 성도들은 즐거이 외치리로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실 것이고 영적인 필요도 채우실 것을 말씀하셨다. 9절의 기도가 이 약속에 근거해 있다.
17-18절은 다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말씀이다.
시 132:17–18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준비하였도다 18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 하셨도다
17절의 “뿔”은 능력을 상징하고, “등”은 인도를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인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능력을 더하시며 그를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18절은 확실한 승리를 말한다. 원수는 패배로 인해 수치를 옷 입게 되고,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왕관은 승리로 더욱 빛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10절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이면 의문이 든다. 이 약속들은 모두 성취되고 있는가?
일단 현재 다윗의 자손으로 세워진 왕이 없다는 사실은 이 약속이 모두 성취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11절의 말씀은 거짓인가? 최소한 과장된 것인가?
먼저 생각해볼 것은 12절에 언급된 언약의 조건이다. 언약을 받은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을 지켜야 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복을 누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다윗의 자손으로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모두 다윗과 같지 못했다. 어떤 자들은 다윗의 길을 따랐지만, 어떤 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징계하기도 하셨지만, 결국 다윗 나라는 멸망했고, 더 이상 다윗의 보좌에 앉아 다스리는 자도 나오지 않았다.
렘 22:3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이 사람이 자식이 없겠고 그의 평생 동안 형통하지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의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왕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윗의 왕조는 끝이 났고,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불성실로 인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을 주실 때 그 이상을 바라보고 계셨다. 하나님은 다윗의 나라를 넘어, 그를 통하여 성취될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계셨다. 모든 인간의 실패 끝에 나타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계셨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인 사가랴는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이렇게 예언했다.
눅 1:68–71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69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세례 요한은 다윗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아버지 사가랴가 레위 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 사가랴는 요한이 증거할 메시야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집에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구원의 뿔이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기쁘게 선포하며 시작한다(마 1:1).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먼저는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오셔서 시편 132:8의 말씀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실 것이다. 그때가 되면 13-18절의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가 부족함 없이 성취될 것이다. 다른 여러 다윗의 자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성취를 부분적으로만 경험했다. 하지만 궁극적인 다윗의 자손인 예수님을 통해서는 넘치도록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기다리고 있는 약속의 성취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언약을 지키셨다면, 이 언약도 지키실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위한 헌신이다.
도전
이 시편이 지어진 이후로 많은 예배자들이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각자의 상황은 달랐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금방이라도 실현될 것 같은 때에 있었을 것이다. 솔로몬의 때가 그러했을 것이다.
반대로 어떤 자들은 약속의 실현이 너무 멀게 느껴지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포로로 잡혀갔다고 돌아와서 초라한 성전을 마주했던 사람들이 그러했을 것이다. 과거의 영광스러웠던 성전에 비해 그들이 건축한 성전은 너무나 초라했다. 이런 곳에 하나님이 계실까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 성전에서 예배했던 자들은 시편 132편을 확신보다는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부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제발 이곳에도 계셔주시기를, 제발 이제는 제사장들이 정말로 의의 옷을 입고 성도들이 즐거이 예배할 수 있기를, 제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 약속에 따라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일으켜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 중 정말로 11절과 같이 하나님의 맹세와 변하지 않으심을 믿는 자들은 소망 중에 그 믿음으로 여전히 헌신하며 하나님을 예배했을 것이다.
이것이 시편 132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바를 신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헌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원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소망을 만들고, 그 소망은 지금 믿음의 헌신을 요구한다. 다윗처럼, 혹은 다른 예배자들처럼,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삶의 중심에 두는 헌신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나태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라는 바울의 고백은(딤후 2:13), 그러니까 우리는 신실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우리도 하나님께 신실해야 한다. 하나님이 신실하시기에 우리의 신실함이 결코 헛된 것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 삶을 헌신하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에 헌신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고 헌신하시는 그곳에 나도 내 삶을 헌신하고 있지 않다면, 그 헌신은 지푸라기처럼 타버릴 것이다. 우리 삶이 그렇게 낭비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