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서는 하나님께

본문: 시편 130편

설교자: 최종혁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를 두신 곳이기 때문에, 성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바로 그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시편들에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묵상, 예배에 대한 묵상 등이 가득하다. 성전으로 향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삶 가운데 함께하시며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복주셨음을 묵상한다. 그 사실에 감사하기도 하고 계속해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고난에 대한 묵상도 있다.

시편 130편은 어쩌면 그렇게 성전에 올라가는 예배자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큰 질문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시편 15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물었다.

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리고 시편 15편에서 이어지는 말씀은 의인으로서 합당한 삶에 대한 것이었다.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59:1-2의 말씀처럼 오직 우리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았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여전히 죄는 하나님과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

성전(성막)의 모습은 이 문제를 경험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었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하기 원하시고,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있는 죄가 문제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가릴 수 있도록 제사 제도를 마련해 주셨다. 사람은 자신을 대신하여 짐승의 피를 흘림으로서 그 죄를 가리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두신 지성소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제사장도 성소에만 들어갈 수 있을 뿐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 번 있는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나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제사장이라고 해서 죄에 있어 자유롭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 자신을 위해서도 제사를 드리고 지성소에 들어가지만, 여전히 그 자신이 죄인이라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그 자신도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 가운데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수행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예배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죄는 더욱 선명해 진다. 하나님의 빛이 우리 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드러난 죄는 순간 예배자를 멈칫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도 괜찮은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죄책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이 죄책감은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이제 어떻게 하느냐다. 시편 130편은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훈을 준다. 그 때에 하나님을 부르고 기다리라고 한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가 죄 용서와 회복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을 부르라(1-4절)

먼저 1-2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130:1–2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2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반복해서 부른다. 1절에서는 “여호와여”라고 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강조하고, 2절에서는 “주여”라고 하여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강조한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1절에서는 자신이 한 일을 말하고, 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 할 일을 말한다.

그가 한 일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 부르짖음에는 다급함이 있다. 마치 베드로가 물에 빠져 가면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다급하게 외친 것과 같다(마 14:30). 여기 시편 기자도 자신의 상황을 그렇게 묘사한다. 그는 “깊은 곳”에 있다. “깊은 곳”은 성경에서 종종 바닷속 깊은 곳을 의미하는데, 시편 69편에서 다윗이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은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69:1–2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에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2나는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물에 빠져가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정말로 물에 빠져본 사람이 이 다급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바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신의 위험에 대해서 길게 설명할 수도 없다. 그저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르짖음이 누군가의 귀에 닿기를,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돕기 위해 움직여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그저 아무나 와서 그를 도와주기를 구하지는 않는다.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주께, 부르짖으면서, 내 소리를 들어달라고,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비슷한 기도가 시편에서는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시편 기자는 어떤 외부의 상황으로 인한 어려움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한다. 원수의 공격이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시편에서는 그런 이유가 분명히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3절 이후의 말씀이 죄와 용서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외부의 어떤 공격으로 인해서 깊은 곳에 내려가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자신의 죄로 인해서 깊은 곳에 내려가 있다. 물론 이 둘이 복합적으로 시편 기자를 괴롭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된 요인은 고난이 아닌 죄다. 그 죄가 시편 기자를 깊은 곳으로 끌어내렸고, 그 깊은 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구체적인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시편 기자는 죄의 무게를 아주 무겁게 느끼고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런 모습이 누군가에게는 나약함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성경은 이것을 구원 받은 자의 특징으로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그 죄인 중에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그렇지 않은 죄인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셨다(눅 18장). 바리새인은 자신이 남들과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감사했다. 반대로 세리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18:13)라며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했다. 둘 중에 누가 “깊은 곳”에 있었겠는가? 세리다. 그 마음이 답답했을 것이고, 그 자신을 정죄하는 양심의 소리에 괴로웠을 것이다.

옆에서 사람이 보기에 바리새인은 죄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고, 세리는 죄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둘 중에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이 남을 정죄하는 것으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도 원래부터 죄인이었다. 다만 그 자신도, 그 옆의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세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서 시작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진짜 죄인과 의인의 차이였던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 이런 죄의식은 정말로 중요하다.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죄인은 이런 죄의식을 부정하려고 애쓴다. 내가 죄인이라고 말하는 양심의 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 열심히 어떤 쾌락을 추구하며 관심을 돌리려고 한다. 혹은 어떤 선한 일을 통해서 죄책감을 덮어보려고도 한다. 혹은 어떤 종교적 수행같은 노력을 통해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다. 어떤 사상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냥 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다 환경 탓이라고 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인다. 다들 그렇게 산다는 말에 위안을 얻는다. 모습은 다양하지만, 결국 목적은 동일하다. 죄의식을 부정하는 것이다. 죄를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의 무게를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성전에 올라간 세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자기 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눅 18:13). 여기 시편 기자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한번 두번만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니다. 5-6절을 보면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직 하나님 만이 그를 이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130:3–4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4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3절은 다시 한번 시편 기자의 죄의식을 드러낸다. 그는 지금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지켜보시고, 그것을 토대로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주했던 이사야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고 탄식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죄를 감추고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하나씩 드러내신다면, 그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그 어떤 변명의 말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있는 그대로 추궁하시면 누구도 그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없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고, 받아들여야할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반응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실상은 우리 중 누구도 하나님께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

143:2 …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9:2–3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3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

침례자 상담을 할 때 항상 물어보는 질문이 있다. 나의 죄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셔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무슨 나쁜 죄인이라고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하냐고 하나님께 따지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다. 억울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게 억울한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직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은 여기 시편기자와 같이 말한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하나님의 공의 앞에는 내가 절대로 설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죄에 대한 인식이 있는 사람,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다. 시편 기자는 이제 하나님을 바라본다.

130: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그러나.”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다. 용서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죄악을 지켜보시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알고 계시지만, 그대로 심판하지는 않으신다. 이것이 세리가 구했던 ‘자비’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모든 죄악을 아시기 때문에, 공의로 그들을 심판하셔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무도 그 앞에 설 수 없게 하신다고 해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 이 말은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용서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실 때,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서 이 사실을 언급하셨다.

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

다윗도 분명하게 이렇게 말했다.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선지자 미가도 이렇게 말했다.

7: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께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말을 오해해서 하나님이 심판하기만 좋아하신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심판하기를 즐거워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악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오히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즐거워하신다. 하나님께 용서가 있다는 말은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용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다.

여기에 또 다른 측면이 하나 더 있다. 오직 하나님 만이 용서하실 수 있으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지붕에서 내려온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막 2:5), 서기관들은 그 말이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죄를 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막 2:7). 신성모독이라는 이들의 결론은 잘못되었지만,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다는 전제는 옳았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범죄했을 때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라고 말했다(시 51:4).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궁극적으로 그의 죄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반역이었기에 이렇게 자백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이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죄는 마치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모든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궁극적인 심판의 권리는 하나님께 있고 용서에 대한 권리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하나님께 있고, 용서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 만이 용서하실 수 있고, 하나님은 용서하기 원하신다. 이 두 사실이 시편 기자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사유하심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하나님께 설 수 있고, 또한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죄를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괜찮다고 주문을 외우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용서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하고,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 있다.

4절은 여기에 흥미로운 말을 덧붙인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셔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용서하시는 목적 혹은 결과를 생각해 보면, 뭔가 더 긍정적인 단어, 즉 평안이나 기쁨과 같은 것이 등장할 것 같은데, 여기서는 ‘경외’, 즉 두려움이 등장했다. 하나님의 용서에는 평안과 기쁨 같은 것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때,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누린다. 하지만, 그 평안과 기쁨은 단순히 죄책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을 낳는다. 용서 받았으니까, 어차피 또 용서 받을거니까, 편하게 죄를 지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낳지 않는다. 용서는 영혼을 “깊은 곳”에서 끌어올릴 뿐 아니라, 하나님 계신 높은 곳을 사모하게 한다. 죄에 대한 무거운 인식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의 죄책감에서 벗어나 또 다른 죄를 짓게 하려고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다.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1-4절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교훈이 있다. 죄책감에 사로잡히려 할 때, 용서는 하나님께 있음을 확신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는 것이다. 죄를 가볍게 생각하거나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기지 말아야 한다. 죄의 해결은 오직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있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 가져오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 즉 구원 받은 자가 기록한 것이지만, 구원 받은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죄의 문제는 하나님께로 가져오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 용서가 하나님께 있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성전의 세리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때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기다리라(5-8절)

5절부터 이 시편의 분위기가 바뀐다. 4절까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부르며 직접 하나님께 말했는데, 5절부터는 하나님을 3인칭으로 표현한다. 하나님께 드릴 말씀은 끝났고, 이제는 기다림의 시간인 것이다.

130:5–6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6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하고 싶은 말은 하나다. 그는 지금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어디 가셔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기다림은 진실된 기다림이고 간절한 기다림이다. 저자는 여러가지로 그의 이런 진실된 마음을 강조한다.

먼저는 “기다린다”, “바란다(소망한다)”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다른 단어는 생각할 수 없을만큼, ‘기다림’이 현재 시편 기자의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다. 함께 사용된 “내 영혼”은 시편에서 항상 자신의 진심을 강조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 이 기다림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그저 될대로 되라는 마음이 아니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가 아닌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고, 그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여기에 시편 기자는 파수꾼을 비유로 들어서 그 간절함을 표현한다. 이 파수꾼이 어떤 종류의 파수꾼인지 특정할 수 없다. 시편 기자도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아침을 기다리는 파수꾼을 생각했을 뿐이다. 밤을 지키는 파수꾼에게 아침이 언제 왔으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까? 한 시간 쯤 뒤에 천천히?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고 말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파수꾼의 간절함보다 더 하나님을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을 바라고 있다.

시편 기자가 기다린다고 하는 대상이 “여호와”,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도 여기서 주목할 만하다. 앞의 맥락에서 보면 “사유하심”, 즉 용서를 기다린다고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여호와, 주의 말씀을 기다린다고 표현한다.

이 표현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용서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용서를 받는 것이 시편 기자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즉, 용서 받기 위해서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자기 죄책감을 벗기 위해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기 시편 기자도 죄가 가져온 무서운 결과, 즉 하나님과의 멀어진 관계가 회복되기를 궁극적으로 바라고 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고, 지금은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기다린다. 하나님을 기다린다.

그리고 7-8절에서 그는 온 이스라엘에게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구한다.

130:7–8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8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이런 부분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서 자주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다. 하나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바라보는 것이다. 128편처럼 개인에게서 시작해서 공동체로 사고가 이어지는 경우도 있고, 129편처럼 전체가 공동체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130편은 개인에게 시작하여 공동체로 사고가 이어지는 경우다.

시편 기자는 자신처럼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라고 격려한다. 그 이유는 앞서 그가 언급했던 것의 반복이다. 하나님께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언약의 사랑을 베푸시기를 멈추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의 속량은 풍성하다. 한두 사람을 용서하시고 그만하라고 하지 않으신다. 엄청나게 큰 죄든, 자주 반복되는 죄든, 하나님의 속량은 풍성하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 죄에 비례해서 은혜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해서 어떤 죄든 덮을 수 있다. 하나님의 속량이 풍성하니, 모두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

특히 8절은 예언적인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실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실지를 시편 기자는 알았을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것을 알았을까? 그런 구체적인 내용은 구약에서 다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 시편 기자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선포할 수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둘째로는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언약의 사랑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았다. 그래서 그분께 풍성한 속량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을 바라고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든 하나님의 속량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 기다림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그것을 사모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위해 인내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시며, 그 구원의 은혜를,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도전

시편 130편은 요한이 기록한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요일 1:9–10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첫째로, 우리는 죄를 자백할 때,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만약 죄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한 적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말씀에 우리를 비추어 봐야 한다. 내가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나의 죄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이 나의 특징이 아니라면, 나는 용서 받지 못한 사람이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다. 지금이라도, 나의 죄를 모두 아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아무렇지 않게 설 수 없는 자임을 인정하며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풍성한 속량이 있다. 하나님께서 널리 용서하실 것이다.

구원 받은 자들은 용서가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고, 무거운 죄의 짐을 그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죄에 민감한 것은 필요하다. 죄책감도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감히 하늘을 바라보지 못했던 세리처럼 그렇게 하기도 어려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이 유일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일한 죄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드리는 것이다. 대단한 의인들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이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그런 예배 가운데 하나님께서 높임을 받으신다. 용서가 우리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