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

본문: 누가복음 9:57-62

설교자: 최종혁

 

오늘 본문에서 중요하게 다뤄야하는 개념은 “따르다”(57, 59, 61절)다. 이는 제자가 스승을 따라 다니면서 스승에게 배우고 스승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표현에서 주목할 것은 ‘지속성’이다. 따른다는 말 자체가 지속적으로 그렇게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비가 고장나서 앞차를 따라가야 한다면, 지속적으로 그렇게 해야지 잠깐씩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한번 따르기를 멈추면 다시 따라갈 수 없다. SNS에서 ‘팔로우’도 그런 개념이다. 한번씩 어떤 사람의 사진을 보거나 동영상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을 ‘팔로우’라고 하지는 않는다. 팔로우는 계속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따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런 지속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오해하기 쉬운 것은 믿는 것을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건만 생각한다. 물론 칭의의 측면에서 구원은 일회적 사건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그것이 믿음, 혹은 구원의 전부는 아니다. 즉, ‘예수님 믿었다. 그래서 구원 받았다.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구원 받는 믿음은 우리가 믿음의 대상이 되는 실체를 볼 때까지 이어져야 한다. 구원도 그 완성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영생은 죽고 나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삶이다.

그런 면에서 구원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으로 이해하면 많은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예수님을 사랑하여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닮아가려고 하는 사람이 참된 구원 받은 사람인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이 마치 행위 구원, 즉 예수님을 잘 따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또 다른 오해를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구원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때 궁극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얼마나’ 그 사람이 예수님을 잘 따르냐는 아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는 그 마음의 진실함이다. 그리고 믿는 자는 바로 그런 올바른 마음의 동기로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했지만, 결국은 따르지 않았던 사람 셋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고,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다.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했던 사람들이다.

분명히 할 것은, 이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지만, 더 헌신을 하고자 했었던 사람들이 아니다. 성경은 그런 개념에서의 제자를 말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믿음과 구원을 순간의 사건으로만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이 사람들을 보려고 한다. 그들은 믿고 구원만 받은 사람이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헌신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 성도가 있고 더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성도가 있고 세속적인 성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분류다. 겉으로 볼 때 세속적인 성도가 있는 것도 맞고 덜 헌신하는 성도가 있는 것도 맞다. 하지만 성경는 그런 사람을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믿음을 점검해 보라고 한다. 참된 믿음이 있음을 삶으로 증명하라고 한다. 선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혹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받았는데, 제자는 아닌 사람은 없는 것이다. 구원은 받았는데 예수님께 헌신하기는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 수 없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제자로서 더 훈련을 받아야 하고 성장해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구원 받은 자 중에 더 훈련을 받고 성장하는 제자가 있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오늘 본문 끝에도 보면 예수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 상을 적게 받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 구원 받지 않은 사람,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실 여기 등장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 이후에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맥락 상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다는 마음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보여 주신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혹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믿음의 시험대를 놓았을 때, 그들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의 모습은 특히 교회에 나오고 있으면서 여러 이유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강력한 경고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정말로 따르기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알려준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보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 1: 잘못된 기대(57-58절)

눅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7-62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길에 있었던 일이다(눅 9:51 참고). 예수님은 굳은 결심으로 십자가를 향해 가고 계시는 중이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마태복음 8:19에 따르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다. 서기관들은 우리가 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통칭하는 부류(바리새인, 사두개인, 대제사장, 서기관, 율법사 등) 중 하나로서, 예수님의 생애 동안에 계속해서 예수님께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든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장사 지냈던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 의원이었다. 서기관 중에서도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라는 예수님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사람도 있다(막 12:34). 물론 그 서기관의 경우 결국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하나님 나라에 가까이 갔기 때문에 가장 안타까운 사람 중 하나가 되기는 했을 것이다.

여기 예수님께 나온 서기관도 예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관은 율법의 전문가였다. 따라서 이 서기관은 그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을 유심히 듣고 고민해 봤을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율법의 지식에 따라 비판적인 사고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예수님께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서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당시에 제자들이 랍비를 따르며 배웠던 것처럼 그도 예수님을 따르며 더 배우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은 바로 그의 마음을 살피게 하신다.

눅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머리 둘 곳”은 편안히 쉴 곳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정해진 쉴 곳이 없으셨다. 바로 앞의 상황만 봐도,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가서 머무시려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로 가셔야했다. 어쩌면 지금 이 길이 그렇게 다른 마을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이었을지 모른다.

예수님은 어느 곳에서든 환영 받으셨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예수님을 거절했고,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배척 당하셨다.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권능을 행하셨지만 회개하지 않았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도 결국은 예수님을 떠났다. 물론 반대로 영접하고 섬겼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이 정해진 거처에서 편하게 쉬시지 못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의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단지 그런 거처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거처로 대변되는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삶은 편안하고 안락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따라서 그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그런 삶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고 말씀하셨고,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15:18, 20). 제자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스승의 길을 그대로 걸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시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더 따르면 좋은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예수님은 그런 제자의 ‘숫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생각에는 어쨌든 제자로 삼고 따라다니게 하면 좋은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특히나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무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이단은 아니라는 인상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여기 서기관처럼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의 의미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고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장애물을 놓듯 시험대에 올리신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부자 관원 청년이었다. 이 청년은 이미 자기 의로 가득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찾아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다(눅 18:18). 그에게 예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다(눅 18:22).

예수님의 말씀을 고려해 보면, 이 청년은 어느 정도 예수님을 따를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줄 정도까지의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고 결국 영생을 얻지 못했다.

지금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당차게 말했던 이 서기관도 마찬가지다. 그가 생각했던 “어디로 가시든지”와 진짜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너도 그것을 각오하고 나를 따라오겠냐고 그를 시험대 위에 두신 것이다.

서기관이 생각했던 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율법을 더 잘 배우는 것 정도였을 것이다.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권위와 지혜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면서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을 만들기 원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시험대 위에 두셨다.

이 서기관처럼 어디든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특히 안전한 곳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면 환영 받는 곳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할 때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음악에 멋진 조명, 그리고 심금을 울리는 설교만 있으면,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게 할 수 있다. 내 삶을 드린다고 울부짖게 만들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을 포기하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라고 그렇게 할 수 없으셨을까?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아니고 제자됨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면서 순간의 감정 때문에 혹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 뿐, 실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진심으로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도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위해 살 각오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 때문에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고, 예수님 때문에 사랑 못할 사람을 사랑할 각오를 하는 것이다. 예수님 때문에 때로는 오해를 받고 손해도 보고 수치도 당할 각오를 하는 것이다. 그 길이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 길로 예수님을 따른다. 이것을 기대하지 않고 “어디든지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길이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 2: 잘못된 우선순위(59-60절)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한 사람을 먼저 부르셨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이 사람은 이렇게 답했다.

눅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앞선 서기관의 말처럼 이 사람의 말 자체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있다. 아마도 여기 기록된 사건들은 한 장소에서 연이어서 벌어졌을 것이다. 즉, 이 사람은 예수님께서 서기관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어떤 평안함이나 안락을 기대하지 말고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음을 이미 인지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다만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먼저 가서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이었다. 일상 중에서 ‘부모의 장례’만큼 우선순위에 있는 일도 없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상을 당하면 만사를 제치고 상을 치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본인 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이 내건 조건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게다가, 하나님은 ‘부모 공경’을 십계명에서 사람 사이 관계에 있어 최우선에 두실만큼 중요하고 근본적인 명령으로 주셨다. 따라서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 사람의 말은 합리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생각해 보자.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는 이 말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지금 이 사람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아버지의 시신이 지금 그냥 집에 있는 상황이었을까? 그렇지 않은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만약 실제로 지금 이 사람의 아버지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 사람은 이 자리에 있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께 와서 아버지 장사를 끝내고 따를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이 사람이 지금 막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뜨려고 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꽤 낮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이 사람의 아버지가 연로하여 언제든 돌아가실 것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일단 아버지 장사는 끝내야 자신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단 며칠이 될 수도 있지만 몇 달 혹은 몇 년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사람은 유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 장사를 치르고 유산을 받을 때까지는 자기가 집을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사람은 얼마가 될지 모르는 그 시간 뒤에야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 중에 굳이 이 사람을 지목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신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58절에서도 예수님은 실제 거처의 문제보다 안락하고 편안한 삶에 대한 기대의 문제를 의도하여 드러내셨던 것처럼, 여기 60절에서도 예수님은 단순히 부모의 장사의 문제,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됨의 우선순위를 긴급성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시려고 지금 이 사람을 지목하여 말씀하고 계시다. 즉,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지금’ 해야할 일이지,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최우선의 자리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당연히 실제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할 수 없다. 앞의 “죽은 자들”과 뒤의 “죽은 자들”은 의미가 다르다. 뒤의 죽은 자들은 육적으로(실제로) 죽은 자들이고, 앞의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는 장사 지내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서 “자기의 죽은 자들”이라고 표현하셔서 영적으로 죽은 자와 영적으로 산 자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셨다.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자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산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은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참된 제자라면 시간의 우선 순위를 두어야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모님의 장사도 지내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4장에서는 더 극적으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눅 14: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말씀이 실제로 부모나 처자, 형제, 자매를 미워하고 증오하라는 말씀인가? 그럴 수 없다. 예수님을 최우선에 두어야한다는 말씀이다. 다른 모든 것들을 먼저하고 예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앞에 예수님을 두어야 한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사실 누구보다 부모를 공경하고 처자를 사랑하고 형제, 자매와 돈독한 사람이 된다.

우리는 무엇이든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그렇다. 신앙과 관련된 일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사용하고, 직장(학업)과 관련된 일, 가족과 관련된 일, 나 자신과 관련된 일 등에 어느 정도의 시간을 사용하는 균형잡힌 삶을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적인 균형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어떤 일을 하든 예수님이 최우선에 있는 것이 성경적인 균형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족을 버리고 교회 일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직장 생활에서도 예수님을 최우선에 두고 주께 하듯 모든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셨듯 아내를 사랑하고, 교회가 예수님께 그렇게 하듯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영적인 것과 이 땅에 속한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먼저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고 그래서 긴급하다고 생각하는 그 어떤 우선순위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앞선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은 이런 면에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아버지 장사를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지금이 아니라 나중으로 미루고 있다. 예수님은 그것이 제자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은 특히 교회에 다니면서 ‘언젠가는 예수님 믿지 않을까’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기 싫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한다.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사실 상 이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구실을 찾아서 변명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내가 교회를 안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도 아닌데, 지금은 그저 마음의 준비가 안됐고 상황이 좋지 않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한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죽은 자들로 자기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세상의 어떤 일들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한다.

또한 이 말씀은 마음 속에 다른 우선순위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알람을 울린다. 마음 속에 다른 우선순위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능할까? 어떤 면에서는 가능하다. 그 ‘다른 우선순위’가 실제로 예수님과 부딪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하지만 둘이 부딪히는 순간이 오면 “죽은 자”는 예수님보다 그것을 우선순위에 둔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다. 지난 주일에 나눴던 것처럼, 중요한 순간의 선택에서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도 연약함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선택이 내 삶에서 패턴처럼 나타난다면, 그것은 연약함의 문제가 아니라 분명한 우선순위의 문제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예수님을 잘 따랐으니까 괜찮다고 말할 수 없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따르는 것”는 지속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 순간에 잘못된 것을 더 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 3: 잘못된 마음(61-62절)

이 상황을 지켜보던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께 말했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은 직접 자신의 입으로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평안함과 안락함을 포기하고, 오히려 핍박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을 알고 있다. 삶에서 어쩌면 가장 긴급해 보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예수님보다 앞설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사람도 “그러나 먼저”를 덧붙였다. 먼저 가족과 작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앞서 아버지의 장례를 요청한 경우도 그랬지만 이 경우는 훨씬 더 납득이 된다. 이제 예수님을 따라가면 가족들을 언제 어떻게 다시 만날지 모르니 작별 인사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은 지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쟁기”는 이제는 아마 민속촌이나 농업 박물관 같은 곳을 가야 볼 수 있을 텐데, 논밭을 가는 농기구다. 앞에서 소가 끌고 뒤에서 사람이 잡는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앞만 보고 밭을 갈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랑이 빼뚤어질 수 밖에 없다. 뒤를 돌아보면서 쟁기질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나온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한 마디로 집중할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마음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만 생각하면 사실 이렇게 ‘마음이 나누어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는 무리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셨다. 그에게 작별 인사는 아마 그가 포기해야할 것에 대한 ‘미련’이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상황이 엘리사가 엘리야를 따를 때 있었다.

왕상 19:19–21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20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21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이 이야기 속에서 엘리사는 부모와 작별 인사할 시간을 요청했고 엘리야는 그의 요청을 들어 주었다. 그런데, 엘리사가 한 일을 보라. 그는 자기 소를 잡고 농기구를 불살랐다. 그리고 그 고기를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엘리야를 따랐다. 엘리사의 작별 인사는 그야말로 작별이었다. 부모와 작별했고, 그동안 그가 해왔던 일과도 작별했다. 함께 했던 사람들과도 작별했다. 그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현했다. 만약 엘리야가 작별 인사를 하지 말라고 했다면, 아마 엘리사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엘리야를 따르겠다는 하나의 마음으로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께 가족과 작별할 시간을 달라고 했던 이 사람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마음에는 그가 버릴 것, 포기할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마치 바로의 궁을 나온 모세가 거기에 두고 온 재물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그래도 얼마라도 챙겨서 나올 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한 바울이 그 배설물에 미련을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을 내려 놓아야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내려 놓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인 것이다. 엘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다른 것들에게는 작별을 고해야 하는 것이다.

존 맥아더 목사는 여기서 ‘흥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마지막 사람은 예수님과 흥정을 했던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장사 지내는 것이 안되면, 작별 인사 정도는 괜찮지 않나요라고 예수님께 제안한 것이다. 물론 작별 인사도 좋고, 사실 장사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나눠져있는 마음이다. 온전히 예수님을 원하지는 않는 그 마음이 문제다. 그래서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도 이런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것도 못하게 하는 건 너무 한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며 예수님과 흥정하는 것이다. 계속해서 붙들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이것 저것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봐야 한다.

도전

제자됨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우리가 볼 때 좀 극단적으로 말씀하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가족을 미워하라는 말씀이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봐도 그렇다. 하지만 예수님을 극단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무뎌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가. 우리가 무뎌져 있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우리가 집을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부모의 장례를 치르면 안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가족과 연을 끊고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평안하면 안되고 항상 핍박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그런 것을 당연한 것처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 어떤 것보다 예수님을 최우선에 두고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택의 순간에 항상 예수님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포기하는 것들에 미련을 두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이를 악물고 아득바득 노력하면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그렇지는 않다.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할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지, 가치있는 분이신지를 알면, 그분을 위해 고난 받는 것도 특권임을 알게 된다. 그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모든 것을 얻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된다. 우리 믿음의 선진들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랐고,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른다. 그렇게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의 참된 제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