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배는 절망에서 시작된다
본문: 시편 120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20-134편까지 15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공통된 표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 중 4편이 “다윗의 시”, 그리고 1편이 “솔로몬의 시”라고 저자가 명시되어 있다. 공통된 표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 시편들이 목적을 가지고 수집된 하나의 소모음이라는 의미다. 누가 모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표제와 내용을 통해 목적은 추론해 볼 수 있다.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성전에”는 번역에서 추가된 표현이고 본래는 그냥 “올라가는(올라가는 것들의) 노래”다. 그래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기되었다. 음악적인 요소로서 계속해서 음이 높아진다는 의미로 보는 경우도 있고, 혹은 내용이 뒤로 갈수록 고조된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주제가 끝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성전에 있는 15개의 계단과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의견들은 추론일 뿐이고 근거가 부족하며, 결정적으로 말씀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날은 대부분 여기 추가된 번역에서 의도한 것처럼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노래들(의 모음집)’로 이해한다.
성전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 위치해 있었고, 예루살렘도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은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항상 올라간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나아가는 예배자의 마음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들은 예배자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아직 예배의 자리에 도착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드릴 예배를 사모하며 이미 드리고 있는 예배의 노래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곳에 있는 성전을 생각하며, 그곳에 거룩한 임재를 두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부르는 노래인 것이다. 물론 성전에서 함께 부르기도 했을 것이다. 이 노래들은 결국 예배 자체가 아니라 그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노래들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였다. 이 순례자들은 특별히 더 간절함과 기대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며 이 노래들을 불렀을 것이다. 사실 당시 순례길은 오늘날의 편안한 가족 여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친척들이 모여 함께 이동했다.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이런 면에서 자연스럽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은 순례하는 예배자의 노래들이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며 예배하는 사람들의 노래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편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에 대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조금 더 확장하여 생각해 보면, 우리는 궁극의 예배의 자리인 하늘 나라를 향해서 가고 있는 순례자들이다. 이 시편들은 순례자로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도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120편을 보면 조금은 의아하다. 뭔가 희망차고 긍정적인 내용으로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시편에서 우리가 종종 봤던 탄식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의아함을 해결해 보자.
확신 중에 하나님을 찾음(1-4절)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시작한다.
시 120:1–2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1절에서 시편 기자는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환난 중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셨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어떤 특별한 사건을 하나 생각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반복적으로 그가 경험한 진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확신이다.
특히 그는 “환난 중에”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 환난이 어떤 환난인지를 특정할 수는 없다. 아마도 이어지는 기도의 내용과 관련이 있겠지만(거짓, 속임), 전혀 다른 종류의 환난일 수도 있다. “환난”이라는 단어 자체는 좁은 장소를 의미한다. 감당할 수 없는 압박으로 인해 답답한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만나는 어려운 일들은 항상 우리에게 압박으로 작용하고 답답함을 만들어 낸다.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뭐가 되었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보이면 좋겠는데 그렇지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시편의 내용을 보면 시편 기자는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을 토로한다. 자신은 화평을 원하지만 그들은 싸우려고 할 뿐이다. 앞에서는 괜찮은 듯 말하지만 뒤에서 비방을 일삼는다.
아마 살면서 비슷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알 것이다. 답답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는 없다. 무엇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된다. 나의 의도는 왜곡되고 나의 말은 또 다른 비방의 재료가 된다.
그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 91:14–15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했고, 그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경험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돕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먼저 해야할 질문은 이렇게 믿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냐는 것이다. 정말로 ‘부르짖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냐는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한 고민보다 이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신다. 따라서 기도가 없다면 그에 대응하는 응답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정상이다.
마음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기도 하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고 찾으라고 하신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예수님도 명확히 말씀하셨다.
마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일반적인 방법이다. 기도가 먼저고 응답은 다음이다. 구하는 자에게 주신다. 찾는 자에게 찾게 하신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게 하신다.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기도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를 구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경험이었다. 유다서 말씀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순종하여 말씀 위에 자신을 굳게 세웠다. 그리고 지금 다시 또 다른 환난을 만난 상황에서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시 120: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여기서는 지금 당하고 있는 환난의 상황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시편 기자는 거짓과 속임수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생명을 건져 주소서”라는 기도가 나올 정도의 고통이다. 이것이 상황에 따라서는 실제로 목숨을 위협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일 수도 있고, 혹은 앞서 언급한 그런 답답함이 극에 달해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나오는 기도일 수도 있다.
어떤 물리력이 있어야만 사람의 목숨을 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말로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비방의 말, 수군수군하는 말과 같은 것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 뜨리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지를 보아왔다. 익명성이 보장된 인터넷 커뮤니티가 발달하자,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재미 삼아 던지기 시작했고, 그런 말들은 날카로운 칼과 화살이 되었다. 이 무기들에는 거짓과 진실이 뒤섞여 있었다. 공격하는 사람은 많지만 누구인지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당하는 사람은 대응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 사람이 무너지면 또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일이 우리 사회에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새롭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 중에 있던 일이 인터넷이라는 좋은 도구를 만난 것 뿐이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더 많은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것 뿐이다. 유명한 사람만 타겟이 되지 않는다. 교실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사람들은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다른 사람의 인격을 공격한다. 때로는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그렇게 하고, 때로는 재미로 그렇게 한다. 혹 그 사실이 드러나도 자신은 그런 의도로 했던 말이 아니라며 책임을 회피한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그렇게 남을 해치는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시 57:4 내 영혼이 사자들 가운데에서 살며 내가 불사르는 자들 중에 누웠으니 곧 사람의 아들들 중에라 그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 64: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잠 25:18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
시편 120편의 저자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시편을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묘사한 시편들이 많은데, 대부분 다윗의 시편이다. 그래서 시편 120편의 저자를 다윗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로 다윗이 저자일 수도 있지만, 그렇든 아니든, 이런 일은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따르는 이 세상에서 흔한 일이고, 따라서 누구든 경험할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구한다. 그의 확신에 따라 하나님을 찾는다. 찰스 스펄전은 이 말씀에 대한 주석에서 이것이 “사람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길”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찰스 스펄전, <시편 강해 11상>, “비방의 문제로 동료에게 호소하는 것은 별로 쓸모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문제를 휘저을수록 그것은 더 멀리 퍼지기 때문이다. 비방하는 사람들의 명예에 호소해 봐도 전혀 쓸모 없는데, 그들에게는 명예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의를 바라는 애처로운 요구는 그들의 악의를 가중시키고 그들이 새로이 모욕하게 그들을 자극할 따름이다. 속이 시커먼 비방자에게 간청하는 것은 표범과 늑대에게 호소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 호소하면 우리의 약점이 될지라도, 하나님께 호소하면 우리의 힘이 될 것이다. 아이가 아버지 말고 누구에게 울부짖어야 하겠는가? 비열한 거짓말 때문에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다면, 거기서도 선한 것이 나오지 않겠는가?”
시편 기자는 이 지혜로운 길을 선택했다. 그에게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뢰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신뢰다.
시 120:3–4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이 말씀은 언뜻보면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3절은 수동형으로 되어 있다. 즉, 제대로 번역하자면 “무엇이 너에게 주어지며 무엇이 너에게 더해지겠느냐?”라고 수사적인 의문을 던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번역하려면 3절에 주어 ‘여호와께서’를 넣으면 된다. 속이는 너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느냐는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거짓과 속임수의 화살을 쏘고 있다. 시편 기자는 공격을 당하고 있고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날카로운 화살과 뜨거운 숯불로 갚으실 것이다. ‘로뎀 나무 숯불’은 오랫동안 불길을 머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지금은 그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고 공의를 나타내실 것을 시편 기자는 확신한다. 이 순간 시편 기자가 구체적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 자신도 어떤 확신 가운데 언제 어떻게 해달라고 구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다만 그가 확신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그가 이 땅에서 볼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 기도로 맡기고 하나님께서 합당히 행하시길 신뢰하는 것 뿐이다.
신약 성경은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라고 한다.
롬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베드로는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보여주신 본이라고 한다.
벧전 2:21–23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사실 예수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44). 박해하는 자에 ‘대하여’ 기도하는 것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도 말씀하셨다.
마 5:10–12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시편 120:3-4절의 톤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된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저주하거나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말씀에 기초한 확신에 따라서 그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복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며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고 원수를 위해 경고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있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다. 남들이 볼 때는 그가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로 인해서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지만(실제로 자신도 그렇게 느껴졌을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패배하는 것은 욥의 아내 말처럼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것이다. 경우는 좀 다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낸 후에 광야에서 죽었다. 그것이 환난 중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혹은 맞대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우는 것도 패배하는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로 나도 그들을 공격하는 것, 그들이 나에게 행한 대로 갚아주는 것이 패배다. 그렇게 하면 한편으로 마음은 시원할지 모르나, 그것이 우리가 승리하는 방법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어쩌면 상황을 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8:3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이 싸우지 않으셨던 이유는 예수님의 나라가 여기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세상의 방식으로 싸우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하나님을 찾았다. 원망과 불평의 말을 넣어두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도우심을 구했다.
이렇게 기도 했을 때,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는 하나님께 달린 문제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이렇게 하나님을 찾는 것 자체가 믿는 자의 승리다. 이것이 환난 가운데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말씀은 매우 흥미롭다. 시편 기자는 이 상황 속에서 자신이 겪는 갈등에 대해서 말한다.
절망 중에 소망을 찾음(5-7절)
시 120: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메섹과 게달은 낯선 이름이다. 이들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를 찾기는 어렵다. 지리적으로 메섹은 이스라엘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거주했던 민족이고, 게달은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유목하던 민족이다. 이방인들이고 호전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한다.
실제로 시편 기자가 이 두 곳에서 살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앞의 ‘머물다’는 말 그대로 잠깐 머무는 것을 의미하고 뒤의 ‘머무는 것’은 좀 더 정착한 상태다. 두 지역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시편 기자는 메섹에 잠깐 머물며 살다가 게달에 살게 되었을 수도 있다. 실제적으로 가능성은 낮다. 아마도 시편 기자는 6-7절에서 그가 말하는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포함하기 위해서 메섹과 게달을 언급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거하는 것에 대한 시편 기자의 반응이다. 그는 그것이 “내게 화로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에게 전혀 좋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시 120:6–7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이유는 그들이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싸움을 원했다. 7절의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는 좀 더 직접적으로 번역하면 “나는 화평인데”가 된다. 나는 화평인데,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전쟁인 것이다. 나는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고, 그들은 싸우고 싶어하는 것이 특징이다.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왜 시편 기자는 화평을 원했을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미움, 갈등, 다툼, 싸움은 죄의 특징이다.
약 4: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런 싸움이 아닌 화평을 추구한다.
마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롬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시 34: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렇게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정확히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주변에는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거짓과 속임수로 그를 비방하고 괴롭혔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선택을 해야 했다. 그는 화평을 추구하기를 멈추고 같이 싸우기를 선택할 수 있었다. 내가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니고, 화평을 추구한다고 해서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싸우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패배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는 맞대응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화평을 추구했고, 그 결과로 고난은 반복되고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또 다시 그에게 선택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 괴로움의 원인을 어디서 찾을 것인지 선택해야 했다.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는다면 그 결과는 원망과 불평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내게 화로다”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마찬가지로 순종을 멈추는 것이 된다.
고난 중에 이런 갈등이 시편 기자에게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괴로움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라고 고백했다. 문제는 자신이 현재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러면 이제 최종 선택이 남는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것인지, 세상의 법을 따라 살 것인지의 선택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을 복으로 선택할 것인지, 세상을 복으로 선택할 것인지의 문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복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로 향했다. 하나님을 찾았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갔다. 이것이 그가 드린 예배였다.
이 과정을 우리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절망했다. 그런데 이 절망은 하나님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상에 대한 것이었다. 이 죄악된 세상은 그가 아무리 화평을 말해도 싸우려고만 한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런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는 것이 그에게 화라는 사실을 그는 인지하고, 그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향했다.
유진 피터슨, “시편 120편은 바로 그러한 사람의 노래다. 세상의 거짓에 신물이 나고 증오에 무너진 사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며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의 노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비명이 아니다. 이 고통은 절망을 뚫고 지나가 새로운 시작, 즉 평화의 삶으로 귀결되는 하나님을 향한 여정을 촉발한다.”
우리는 세상에 실망하고 절망해야 한다. 그래도 이건 좋은 것 같은데, 저건 괜찮을 것 같은데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죄를 따르고 있는 이 세상 자체에 어떤 소망도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 세상 속에서 무언가 소망이 될 것을 찾으려고 한다. 찾을 수 없는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발을 떼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과 벗되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 4:4).
세상의 악함에 절망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의 예배자라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편할 수 없다. 세상 속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 피로감 속에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전히 화평을 원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 속에 이루시는 또 다른 구원의 역사를 기대해야 한다.
절망 속에서 우리가 찾는 소망은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세상의 거짓 소망에 절망해야 참된 소망이 보인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님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계신 참된 본향을 바라보게 된다.
도전
시편 120편이 겉으로 보기에 희망차고 긍정적이지 않은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현실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사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고난이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우리로 진짜 현실을 보게 한다. 바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좋아 보이는 모든 것들이 터진 웅덩이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절망할 때, 우리는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예배는 절망에서 시작된다. 세상에 대한 절망, 나에 대한 절망에서 시작한다. 다만, 거기서 끝나면 안된다.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예배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일주일, 우리의 매일이 되어야 한다. 고난 중에 세상의 소망이 없음을 알며,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 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참된 예배를 바라며 매일 드려야 할 삶의 예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