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 외
설교자: 조정의
성경은 “불평하지 말라”(시 37:8),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한다(빌 4:6). 그런데 이 두 가지 금지된 행위는 성격이 조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둘 다 사람이기에 본성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불평은 더 적극적인 죄처럼 보이고, 염려는 어쩔 수 없는 반응처럼 느껴진다. ‘불평이 나오는 걸 어떡해?’라는 말에는 ‘쳐서 복종시켜’라고 권면하고 싶은데, ‘염려가 되는 걸 어떡해?’라는 말에는 ‘두려워하지 마’라고 위로하고 싶은 차이다.
사실 염려는 논리적 순서상 불평보다 앞선다. 사람들은 불평하다가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가 되기 때문에 불평한다. 예로, 광야 이스라엘 백성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는 현실에 불평했는데, 그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했기 때문이다(원인). 그러면 염려하는 마음 그 자체가 죄일까? 성경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선을 이룬다고 말한다(고후 7:10-11). 대표적인 예는 바울 속에서 날마다 눌리는 일,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고후 11:28).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마 26:38). 선한 염려는 반드시 선한 열매를 맺는다(회개, 구원).
그러나 성경은 “세상 근심”에 관하여 경고한다.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성경이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할 때, 그것은 세상 근심을 말하는 것이다. 문제는, 부패한 우리 마음속에서 선한 염려도 악한 염려로 쉽게 변질된다는 것이다. 가령, 교회를 인도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성도의 영혼을 경성한다(히 13:17). 성경은 그들이 즐거움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명령한다. 성도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은 즐거운 부담이지만, 세상 근심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저 성도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대로 염려하는 것은 좋지만, 그 염려가 악화되면 구원과 회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열매를 낳게 된다(예: 불평).
1. 염려하는 마음 말씀으로 진단하기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염려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염려가 아니라 육신적인 염려라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가장 뚜렷이 발견되는 증상은 바로 ‘불신’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로 자주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다(창 26:24; 수 1:9; 시 23:4; 사 41:10; 렘 1:8). 그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두려움을 일으키는 염려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시면서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6:31-2). 그들이 일용할 양식에 관하여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필요를 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염려한다면, 그것은 그 필요를 알고 공급하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알지 못하는 것보다는 믿지 못하는 것의 문제다. 아는 것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하는 불신 문제다.
왜 알면서도 믿지 못하는 것일까?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 물 위를 걷다가 그만 물속에 빠져버렸다. “바람을 보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를 붙잡아 건지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다(마 14:30-31).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눈앞에 문제가 크게 보이자, 방금까지 그를 물 위로 걷게 하신 전능하신 주님에 관한 믿음이 급격히 작아졌다. ‘예수님이 방금 나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것을 알지만, 이렇게 무서운 바람 가운데서도 지키실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몰라서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보는 것이 아닌 눈앞에 닥친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에 믿음이 들어설 마음의 자리가 없는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싼 것을 보고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부르짖으면서 두려워할 때, 엘리사는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해달라고 구했다(왕하 6:14-17). 언제 사환의 염려가 사라졌을까? 보이지 않던 것을 믿음으로 보았을 때다. 그러므로 염려란 우리 마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두는 믿음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염려하든지, 우리는 결국 보이는 것에 믿음을 둘 것인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믿음을 둘 것인지의 전쟁을 치른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 마음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둘 수 있을까? 염려로 요동치는 마음을 평안히 잠재울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이 일이 가능하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굳게 약속한다.
2. 염려하는 마음 말씀으로 처방하기
빌립보서 4장 6-7절은 염려를 치료하는 성경의 처방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6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본문은 우리가 해야 할 부분과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으로 나뉜다.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는 일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6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7절).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 중에 첫 번째,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어에 주목하라. 작고 보잘것없는 염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심각한 염려도 포함한다. 능동형, 현재형 명령어는 우리가 적극적, 지속적으로 염려와 싸울 것을 요구한다. 때마다 ‘나는 이것으로 염려하지 않겠다’는 결단, 염려가 생길 때마다 그것이 내 마음을 온통 차지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마르틴 루터가 ‘새들이 머리 위로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을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는 순간적으로 마음에 침투하는 염려를 막을 순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을 완전히 차지하고 통제하려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일 그 두 번째는 “다만”으로 시작한다. 염려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따라오는 이 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첫 번째는 소극적은 대처, 두 번째가 적극적인 대처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모든 일에”라는 말로 다시 한 번, 모든 염려가 이 말씀에 해당된다는 걸 확신할 수 있다. “기도와 간구”를 애써 구분할 필요는 없다(딤전 2:1, “간구, 기도, 도고, 감사”). 전심으로 모든 기도의 방편을 통하여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흥미로운 표현은 명령어인 “아뢰라”이다. 원래는 ‘알리다,’ ‘드러내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수동태 명령어로 ‘알게 하라,’ ‘알려 주라’라는 뜻이 된다. 현재형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일을 알려드리라는 명령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 않는가? 그런데도 알려드릴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염려할 때, 모든 일을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는 이유는 그분이 모르는 우리 마음과 상황을 알려드리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문제에 둔 우리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맡긴다. 그래서 기본적인 신뢰가 감사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이야기를 모두 들으실 것과 나의 염려를 모두 맡아주실 것,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거나 그 문제를 통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는 마음이 감사로 표현되는 것이다. 단발의 기도로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어떤 염려는 오랜 처방이 요구된다. 육신적인 염려의 본질적 문제인 불신이 사라지고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 아뢰어야 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에 동산에서 심히 근심하여 죽게 되셨을 때, 그분은 염려의 마음을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아버지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셨다. 세 번 아버지께 나아가 기도하셨기 때문에, 대략 세 시간 정도 소요되었을 것이다(마 26:40). 예수님의 염려는 결코 작거나 보잘것없지 않았다.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지고(눅 22:44)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할 만큼 크고 깊었다(히 5:7). 그 길고 집중된 시간에 주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염려하는 마음을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고, 아버지께서 그 마음을 평안으로 지키시도록 계속해서 내어드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감사함으로 구하신 것이다“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막 14:36). 아버지의 지각 안에서 평강을 얻고 그 마음을 지키신 것이다. 주님께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면, 작은 믿음으로 항상 염려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약속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눈을 뜨게 하셔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뜻을 알게 하실 것이다.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실 것이다. 폭풍 가운데서도 평안하게 바다를 걸을 수 있는 평강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염려에 빠진 성도가 하나님이 알려주신 처방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염려가 되는데 말씀이 귀에 들어오겠어요?’, ‘이렇게 근심이 가득한데 기도가 되겠어요?’라는 식으로 말한다. 어떤 심정인지 인간적으로는 동정할 수 있지만, 사실상 그런 말은 그들의 마음을 지키시는 유일한 치료자를 만나지 않겠다는 말이다. 환자는 의사를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기 증상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그런 과정 없이 치료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의 염려를 하나님께 가지고 가라. 당신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염려를 대신 지시고 평강으로 마음을 지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