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열심이 장애를 만났을 때
본문: 열왕기상 19:1-18
설교자: 최종혁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도 낙심하고 좌절할 수 있을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우울증에 빠질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설교의 황제라고 불리는 스펄전은 평생을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것으로도 유명한데, 목회자 지망생들을 위해 쓴 <목회자 후보생들에게>라는 책에서 “목회자의 사기 저하”라는 제목으로 이 부분을 다뤘다.
스펄전은 먼저 우울증 혹은 낙심의 이유에 대해서 4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단순히 사람이어서다. 사람이기 때문에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육체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육체의 질병은 “우울증의 넘치는 샘”이라고 표현했다.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거기에 사로잡히고 마는 상황과 시간이 있고 만다는 것이다.
셋째로, 스펄전은 “우리의 일을 진지하게 시도하다 보면 우울함의 공격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뭇 영혼들의 무게에 짓눌려 기절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의 회심을 두고 간절히 애타고 있는데,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도대체 언제 이뤄질 것인지?) 우리의 영혼은 불안과 낙담으로 불타기 마련이다. 기대되던 사람이 발길을 돌리고, 경건한 사람이 냉담해지고,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특권을 남용하고, 죄인들이 더욱더 담대하게 죄를 저지르는 것, 이거 참 기가 막힐 일이 아닌가? 우리가 바라는 만큼 하늘나라는 이뤄지지 않고 우리가 애타는 만큼 그 거룩한 이름이 거룩한 대접을 받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두고 울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관심이 없으면 그렇다. 하지만 주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진지할수록, 그 과정과 열매에 더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과 만나면 좌절이나 우울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특별히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도 이런 영역이다. 주님 안의 열심이 장애를 만났을 때, 그래서 낙심이 되고, 그것이 더 나아가서 우울증이 되고, 죄가 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보기 원한다.
넷째로, 교회에서의 위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고 스펄전은 말한다. 특히 목회자 후보생들이 이 강의의 첫 대상이기 때문에, 그는 목회자라는 자리는 외로운 자리고 그래서 더 쉽게 우울증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돌봐야 할 사람, 돌봐달라고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목회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외로움이 찾아오고 그것이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꼭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어떤 책임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더 많은 이유들을 찾을 수 있겠지만, 요점은 그리스도인, 특히 열심히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늘 기쁨을 누리고 평안한 가운데 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정상’이지만, 여전히 죄의 관성이 남아 있고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죄와의 싸움이 있고, 낙심한 마음, 좌절과의 싸움도 계속되는 것이다.
특히 ‘열심’이 있는 그리스도인일수록 이런 위험과 유혹은 더 가까이에 있다. 열심은 곧 기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고 무너질 때, 그 열심도 함께 무너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럼, 그런 열심을 버려야할까? 그렇지는 않다.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성경은 우리에게 열심을 더 내라고 하지, 적당히 하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주님을 향한 열심은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열심이 단지 어떤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주님께 대한 열심이고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드러날 뿐이다. 예수님은 미지근한 교회였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도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열심이 장애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느냐다. 기대했던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 그래서 마음이 무너지고 낙심되고 좌절될 때 어떻게 하느냐다. 열왕기상 19장의 엘리야의 경우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열왕기상 19장에서 엘리야는 두 번이나 하나님께 자신의 열심에 대해서 강조해서 말했다.
왕상 19:10,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이렇게 말할만큼 정말로 열심이 유별했던 사람이었다. 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을 보면 정말로 그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매우 권위있고 용감하고 강력한 선지자, 영적 지도자였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었고, 우리도 그를 ‘기적의 선지자’라고 부를 정도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의 놀라운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왕상 17:1)라고 예언했을 때, 실제로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시내가 말랐다(왕상 17:7). 사르밧의 과부가 마지막 남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으로 엘리야를 대접했을 때, 그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가뭄이 끝날 때까지 떨어지지 않게 되었다(왕상 17:8-16). 심지어는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를 다시 살리기도 했다(왕상 17:17-24).
그리고 18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바알 선지자들과의 갈멜 산에서의 대결이 기록되어 있다. 이 대결에서 엘리야는 그야말로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모든 백성들을 불러 모아놓고서 벌어진 공적인 대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수치를 당했다. 엘리야 자신도 그들을 대놓고 조롱하기도 했다.
왕상 18: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반대로 엘리야는 모든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엘리야는 허세를 부리기까지 했다. 그냥 번제물을 두고 기도해서 불이 내려오기만 구했어도 됐는데, 엘리야는 그 주변에 도랑을 파고 제물에 물을 가득 부어서(3번) 도랑까지 물이 가득차게 했다.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불을 내리셨다. 그리고 그 결과로 백성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왕상 18:39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이 모습에 엘리야가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그리고 엘리야는 우상 숭배의 주동자들이라 할 수 있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잡아서 처형했다. 드디어 엘리야의 열심이 제대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오랜시간 기대했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림이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그런데, 엘리야의 이야기는 18장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지 않는다.
왕상 19:1 아합이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하니
이 모든 일을 지켜본 이스라엘 왕 아합이 그 일을 자신의 아내인 이세벨에게 가서 말한다. 굳이 왜 자기 아내에게 가서 이런 얘기를 할까 싶을 수 있지만, 이유가 있다. 이세벨이 바로 이스라엘에 바알 숭배를 부흥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왕상 16: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이세벨은 단순한 바울 숭배자가 아니었다. 엘리야 하나님께 열심을 가지고 헌신했던만큼, 이세벨은 바알에게 열심을 가지고 헌신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바로 앞인 열왕기상 18:4, 13을 보면 이미 이세벨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학살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이세벨이었기 때문에 아합은 이 일을 이세벨에게 전했던 것이다.
이세벨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 만이 참 신이시고 바알은 그저 우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우상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세벨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헌신된 바알의 숭배자로서 이세벨은 분노했을 뿐이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왕상 19:2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바로 이 순간부터 우리는 지금까지의 엘리야를 볼 수 없게 된다. 엘리야는 여전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지만, 그는 더 이상 권위있고 용감하고 능력있고 열심있는 엘리야가 아니다. 그는 약해져 있다. 낙심해 있다. 좌절해 있다.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울증에 빠져서 멈춰버린 것이다.
이 사람이 어쩌면 나일 수 있고 여러분일 수 있다.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우리는 때로 17-18장에 나오는 엘리야와 같지만, 때로는 19장의 엘리야와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우리의 열심이 장애를 만날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볼 것이다. 사실 특별할 것은 없다. 하나님을 바로 보는 것이 해답이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특별히 우리가 그런 상태에 있을 때 주목해야 할 하나님의 세 가지 특성을 살펴 볼 것이다. 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주목할 때, 우리는 계속해서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열심을 내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최고의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3-8절)
연약해진 하나님의 사람 – 때로 우리는 연약해진다(3-5a절)
사실 2절의 이세벨의 반응은 그렇게까지 예상 외의 반응이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반응이 큰 승리를 거뒀던 엘리야에게는 매우 특별했다. 3절은 엘리야가 “이 형편을 보고”라고 말한다. 무슨 형편을 본 것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엘리야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특별한 사람이었다.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기적으로써 자신이 참 선지자임을 증거하였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그 자신을 드러내려 했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위해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으로 그 모든 일을 했다.
갈멜산에서의 놀라운 승리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야는 단지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싶어서 그 모든 일을 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개인적인 복수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18:21에서 엘리야는 이 부분을 분명히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엘리야는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했고, 그것이 그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갈멜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정면으로 대결하여 승리하였을 때, 그래서 백성들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고백했을 때, 엘리야는 그야말로 이제는 때가 되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 동안의 노력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지금 보고 있는 “형편”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바알의 추종자 이세벨은 여전히 확고했고, 오히려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엘리야의 반응은 이러했다.
왕상 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이 상황을 보고 엘리야는 일어났다. 그리고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했다. 이제 그의 사역이 아무 것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낙담한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한 것이다. 수백명의 바알 선지자들 앞에서도 그렇게 담대했던 엘리야는 이제는 자신의 사역이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한명의 선지자 앞에서 도망하고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까지 도망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분열왕국 시대로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눠져 있었고, 아합은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기 때문에 유다 땅으로 넘어간 것만 해도 안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엘리야는 브엘세바까지 더 남쪽으로 내려갔다.
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이었다. 18:46에서 엘리야는 이스르엘, 즉 아합의 왕궁이 있는 곳까지 갔었다. 사마리아보다 더 북쪽인 이스르엘에서 유다의 최남단인 브엘세바까지는 약 160km가 된다. 직선 거리가 그러니 실제 도보 거리는 훨씬 더 된다고 봐야 한다. 건강한 사람이 하루에 잘 걸어도 40-50km를 걸을 수 있다면, 엘리야는 거의 4-5일 이상을 정신 없이 걸어서 브엘세바에 도착했을 것이다.
단순히 안전을 위해 도망한 것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 거리를 도망한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거기서도 멈추지 않았다. “자기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엘리야는 “생명을 위해” 도망했지만, 이제는 단지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 형편을 보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목숨을 위해 도망을 시작했지만 지금 그는 그저 부서지고 좌절한 마음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질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 자신이 거기에 투자한 시간이 길면 길수록, 그 노력이 크면 클수록, 그 상실감과 좌절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성도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이웃을 위해, 구도자를 위해 정말 헌신적인 삶을 살고, 또 잘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무 열매도 없었다는 것을 알게되는 그런 상황이다. 여기 엘리야가 바로 그 상황에 있다.
그래서 엘리야는 가장 먼 곳까지 도망한 후에도 혼자서 하룻길을 더 걸어 광야로 들어갔다. 부서지고 좌절하고 지친 마음에 이제 그는 육체적으로도 완전히 지쳤다. 그리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하나님께 기도한다.
왕상 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그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한다. 이유는 자신이 그 열조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무슨 말인가? 그의 열조, 그의 선배 선지자들, 하나님의 사람들도 모두 그와 같은 목적으로 일을 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서 바로 인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히 실패하였다. 엘리야는 자신은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기적의 선지자, 담대한 선지자로서 자신은 자신의 사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 엘리야는 자신 역시 가치없는 자라고 하며, 더 이상 이 땅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워 잠들었다.
왕상 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하나님”하고 말한 것이다. 다시 눈을 뜰 때는 로뎀나무가 아닌 하나님의 품이기를 바라며 그는 잠에 들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엘리야는 그 곳에서 그냥 멈춘 것이다. 이것이 깊은 좌절, 우울증에 빠진 사람의 특징 중 하나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삶을 멈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 엘리야처럼 말이다. 이런 일들이 엘리야 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에게도 일어난다. 때로 우리는 이렇게 연약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성경은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긴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5절 말씀이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말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5절의 “누워 자더니”와 “천사가” 사이에는 “보라!”라는 단어가 있다. 무엇을 보라는 걸까? 이 연약해진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좋은 것을 주셔서 그를 채우신다.
채우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언제나 좋은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다 (5b-8절)
왕상 19:5–8 …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이런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 그와 함께 계셨다. 엘리야는 하나님을 마치 그가 조롱했었던 바알신처럼 대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님이 그의 상황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잠깐 나간 것처럼, 잠이 든 것처럼 엘리야는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곳에 계셨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던 하나님은 부서지고 좌절한 엘리야와도 함께 계셨다.
그 엘리야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먹이셨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떡과 물을 주셨다. 왜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으셨을까? 엘리야가 원했던 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육신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았다. 부서지고 좌절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멈춰섰다. 잠을 잔 것은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멈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그분은 엘리야를 잘 알고 계셨다. 엘리야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셨다. 엘리야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계셨다. 그분이 그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그를 붙들고 계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엘리야의 아버지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에 그 육신의 필요를 먼저 돌보셨다.
마 7: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자녀가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아버지는 없다. 하물며, 자녀가 돌을 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아버지는 더더욱 없다. 아버지는 자녀를 돌보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엘리야를 돌보셨다. 그리고 우리가 연약해져 있을 때도 그렇게 돌보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신다.
사람이라면 나한테 필요한 것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정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다.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그렇다면 그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는 믿음인 것이다.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이렇게 보이지 않을 때가 분명히 있다. 하나님께서 정말로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이렇게 연약해져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지금 상황이 이런데, 이것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서, 허락된 일이라는 말이 전혀 와닿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말들이 오히려 더 폭력적으로 들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다. “빛 가운데 명확했던 것을 어둠 가운데 의심하지 말라.” 빛 가운데 있을 때 내 앞에 벽이 있었다면, 어둠 가운데도 내 앞에 벽이 있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벽은 어디가지 않기 때문이다.
빛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았다. 그분이 얼마나 선하신지,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의로우신지 보았다. 빛이 사라졌다고 해도 하나님은 어디가지 않으신다. 여전히 동일한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내 아버지께서 주신 가장 좋은 것이다.
어떤 환경, 어떤 상황 때문에 약해져있든, 만약 그런 상황에 있다면 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분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를 수 있지만, 나의 필요는 분명 채워질 것이다.
자, 이제 본문 말씀을 더 살펴보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육적인 필요를 채우셨지만, 엘리야는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그의 사역을 계속하기 위해서 무언가가 더 필요했다.
왕상 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먹고 마신 후에 엘리야는 40주야를 더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다. 그 산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던 거룩한 산이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이제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고 있다. 그곳에서 그가 만난 하나님은 그의 방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방법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9-13절)
의심하는 하나님의 사람 –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한다(9-10절)
먼저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물으신다.
왕상 19: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께서 직접 엘리야에게 나타나셔서 물으셨다. 하나님이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엘리야 스스로가 생각해보도록 묻고 계신 것이다.
“네가 어찌하여(왜) 여기 있느냐”는 이 질문은 엘리야에게 있어 생소했을 것이다. 그동안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어느 곳이든지 갔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낙심하고 이세벨의 위협 때문에 도망했기 때문에 여기 와 있었다. 그 사실을 생각하고 엘리야는 이렇게 하나님께 답했다.
왕상 19: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말을 보라. 그는 지금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열심이 유별하고, 나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상황을 자기 입장에서 왜곡하여 말한다. 그는 “그들(이스라엘 자손)”이 그의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한다고 말한다. 지금 엘리야의 생명을 찾는 사람은 이세벨이지 이스라엘 자손이 아니다. 엘리야는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확대/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현재 자신의 상황에만 집중을 하고 그 상황을 과대 해석한다. 세상에서 나 같이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기 엘리야를 보라. 그는 첫째로 자신은 자신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있다. 자신은 열심이 유별해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고 위험 가운데서도 살아 남았다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두번째로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잘못됐다라고 하고 있다. 마치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우상 숭배에 빠진 것처럼 말한다.
세번째로 그는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하고 있다. 자신이 그런 생명의 위협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여기까지 도망해 온 것이라고 하고 있다. 자신은 하나님께 신실했는데, 하나님은 아무 열매도 보여주지 않으셨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금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심하고 있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확신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그에게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생각대로, 엘리야의 방법대로 일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일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11-13절)
하나님은 이 사실을 흥미로운 방법으로 알려주신다.
왕상 19:11–1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굴 안에 있었던 엘리야에게 그곳에서 나가서 서 있으라고 하셨다. 그곳에는 강한 바람이 있었고 지진이 있었고 불이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 그 전조로서 사용되었던 것들이다 (출 19:16; 삿 5:4-5; 삼하 22:8-16; 시 18:7-15; 68:8; 히 12:18).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엘리야는 이러한 강력한 자연 현상을 보면서 당연히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했다.
오히려 이 모든 놀라운 일들 뒤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다. 엘리야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왕상 19: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네가 어찌하여 여기에 있느냐?”는 9절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 이상한 일을 통해서 엘리야가 깨달아야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같은 질문을 하셨다.
엘리야는 이 이상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했다. 그의 당연한 기대와 다른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왜 보여주시는지 이해해야 했다. 하나님은 단지 위대한 기적의 하나님이 아니다. 그 분은 침묵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다. 하나님은 큰 것을 통해서 일하기도 하시지만 작은 것을 통해서 일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언제나 일하고 계시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놀라운 일이 있을 때만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며 기뻐하고 감사한다. 하지만 그와 똑같이 놀라운 일을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도 하신다. 하나님의 조용한 역사인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작은 일들을 당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시고 계획하심으로 결국 놀라운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작은 음성으로도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럼, 언제는 기적으로 일하시고 언제는 섭리로 일하시는지 우리가 알 수는 있을까?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일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다. 내가 정할 수 없다. 우리는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신뢰해야할 뿐이다.
기적의 선지자 엘리야는 이 하나님을 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가 그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그는 좌절했고 하나님을 의심했다.
우리도 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때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으로 내 마음대로 기대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께 불평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분의 신실하심도 의심하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방법으로 일하고 계시며,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엘리야가 이것을 이해했을까? 이해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지는 분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14-18절)
거부하는 하나님의 사람 –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거부한다(14절)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엘리야는 이렇게 답했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이 대답은 흥미롭다. 엘리야는 정확히 10절의 대답을 반복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할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메시지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사역의 분명한 열매, 즉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회개를 원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무조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원하는 아이처럼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겸손히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요”라고 묻는 대신에 자기 상황에 대한 변명만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도 좌절하고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다. 외부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처방은 의외로 간단하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설득하지 않으신다. 그에게 명령하신다. 그렇게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주관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15-18절)
왕상 19:15–17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여기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의 왕 뿐 아니라 아람의 왕이 될 사람에게도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마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현재의 하나님만이 아니심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모든 시간의, 주인이시다. 원하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리고 그 모든 계획을 이루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혼자 남았다는 엘리야의 불평 섞인 말에도 답해주신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후계자를 세우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일을 위해서 7000명을 남기실 것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19절을 보면 엘리야는 이 말씀 후에 바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이었던 것이다.
엘리야의 열심은 장애를 만났지만, 하나님의 열심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여전하시다. 하나님은 여전히 엘리야를 돌보셨고, 여전히 그분의 뜻에 따라 일하셨고, 여전히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왕이셨다. 엘리야의 열심은 장애를 만났을 때, 모든 형편이 달라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엘리야가 이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었다면 그도 달라지지 않은 형편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러지 못했고, 그랬을 때 그는 연약해졌다. 좌절하고 낙심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다시 이렇게 자신을 보여주셨다. 보라고 하셨다. 이 하나님 외에 우리가 믿을 만한 분이 없다. 이 하나님 외에 우리가 바라볼 분이 없다.
환경 때문에 지금 낙심하고 좌절이 된다면, 멈추고 싶다면, 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바라보고 그 분을 신뢰하라. 우리를 부르신 분은 주권자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도전
우울증과 싸웠던 신앙인 중 또 다른 유명인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다. 그 루터가 우울증과 싸우던 어느날 그의 아내가 그에게 왔다. 그런데, 그 아내가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하게 여긴 루터는 아내에게 물었다. 누가 죽었냐고… 그러자 그 아내는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라고 말했다.
삶 가운데서 힘든 일을 만나서 그 가운데서 좌절할 때, 우울함에 빠져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순종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죽은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돌보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은 주권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믿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죽이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고, 언제나 그분의 방식으로 일하시며, 모든 것의 주권자가 되신다. 형편은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 형편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누구를 믿고 있는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가. 초조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자. 그리고 힘을 내어 일어나 다시 걷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