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연합의 기쁨

본문: 시편 133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서 “연합”에 대한 노래다. 이 시편에는 어떤 기도도 없고 명령도 없다. 순수하게 영적 공동체의 하나됨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다윗”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 4편이 다윗의 시편인데, 이 시편이 그 중 마지막이다.

다윗은 사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분열과 갈등을 많이 경험했던 사람이다.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던 다윗은 사울과 싸워야 했다. 사울의 사후에 다윗은 유다의 왕이 되어서, 나머지 지파의 왕이 되었던 이스보셋과 싸워야 했다. 다윗이 이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대적들의 사후에 그가 보인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윗은 사울을 죽였다고 주장했던 아말렉의 청년을 죽이고 사울의 죽음을 애통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살해한 자들이 자랑하듯 그에게 와서 보고했을 때에 다윗은 그들을 처형하고 이스보셋을 잘 장사해 주었다. 그후 다윗은 아들들 사이의 갈등을 경험했고, 압살롬의 반역도 경험했다. 세바의 반역도 있었다.

다윗이 생애의 어떤 시점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시점에서든 다윗은 형제의 연합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바라보고 그 가치를 노래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다윗과 같은 마음이 있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이든 단체든 기본적으로 연합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합은 쉽지 않다. 세 사람만 모여도 편이 나뉘기가 싶고, 사실 두 사람도 하나가 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연합할 수 있는 부분만 연합하기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향은 과거보다 오늘날 개인주의적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더 강해진 것 같다. 과거에는 회사도 협동, 단결과 같은 얘기를 많이 했지만, 지금은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더 하는 것 같다. 물론, 회사의 경우는 어차피 이윤 추구가 목적이니 별 문제될 것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문화가 교회 안에 자리 잡는 것은 큰 문제다. 교회는 그 본질에 하나됨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하여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에베소서 2장은 개인의 구원에 대해 말한 후에(1-10절), 곧 공동체적인 측면에 대해서 말한다.

엡 2:14–15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민족적인 관점에서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의 피는 개개인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개개인끼리도 가까워지게 했다. 여기에 교회의 본질이 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의 노래 시편 133편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노래가 되어야 했고, 오늘날 교회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이 기쁨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를 보는 사람들이 이 노래와 교회의 모습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노래가 되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이 시편을 지은 다윗도 그렇고, 이 시편으로 노래하며 성전에 올라갔던 많은 예배자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연합의 기쁨을 이미 누리며 노래했던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예수님의 말씀처럼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서 형제를 찾아갔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마 5:23-24). 어쩌면 주일 아침 바쁘게 준비하면서 냉냉해진 상태로 같은 차를 말 없이 타고 가는 우리네 가족처럼, 긴 순례길에 서로에게 쌓은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시편 133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노래할 뿐이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할 기쁨을 노래할 뿐이다. 말씀을 통해 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함께 보고, 우리도 그 기쁨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합의 의미(1절)

시 133: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시편에 명령이 없다고 했는데, “보라”는 명령어가 아닌가 싶을 수 있다. 명령어와 같은 역할을 하지만, 문법상으로는 감탄사다. 우리말의 “자!”와 유사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표현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들어보라는 것이다. 듣고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형제”는 가족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시편 133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인 것을 고려하면, 여기서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영적인 가족들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 시편은 가족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을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을 기록한 다윗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한 장소에 모여서 조화롭게 거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보다 더 높고 깊의 의미의 영적인 연합을 바라보고 있다.

그 연합을 바라보며 다윗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며 감탄한다. 그 선함과 아름다움의 정도를 표현할 말이 “어찌 그리”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백마디의 형용사보다 외마디의 감탄사가 더 그 진심을 잘 전달할 때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렇다. 물론 2-3절에서 이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에 대해서 더 설명을 하지만,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바라본 다윗의 첫반응은 정말 좋다, 정말 아름답다였다. 그 모습을 설명하기 보다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이 “보라”로 시작한다.

여기 사용된 “선하다”와 “아름답다”는 단어는 성경에서 함께 사용될 때도 많고, 서로 대신해서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의미를 엄밀하게 구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들 안에 객관적인 요소와 주관적인 요소가 있음에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선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요소로서 본질적인 성격을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본래 그래야 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옳다’는 의미가 그 안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인 요소다. 본질적인 성격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보여지는지와 관계되어 있다. 관찰자가 원하는 모습, 즉 그랬으면 좋겠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스럽고 기쁨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플 때 먹는 약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옛말에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있다. 요즘에는 그래도 그렇게 쓰지는 않지만, 어쨌든 약이 맛있지는 않다. 앞서 말한 기준에서 약은 선하지만 아름답지는 않다고 할 수 있다. 약은 좋아서 먹는 것이 아니라 좋아지려고, 먹어야하기 때문에 먹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들은 어떤가? 맛없는 음식을 칭찬해야할 때, 우리는 건강한 맛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정말 건강하게 맛있는 음식도 있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맛있는(자극적인) 음식은 건강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건강에는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음식을 먹는 이유는 하나다. 맛있어서. 선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도 좋은 사람은 재미가 없고, 재밌는 사람은 좋지가 않은 경우가 많다. 어쩌면 이것도 죄의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본질적으로 좋은 것, 즉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는 것을 우리는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 여기저기서 드러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실제 가족 간에도 투닥거리고 좀 싸우기도 해야 사는 재미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연합의 가치를 알았던 사람이었고, 또한 그 모습을 간절히 보기 원했던 사람으로서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정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감탄했던 것이다.

그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바른성경, “형제들이 연합하여 함께 사는 것”
새번역,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현대어, “형제 자매 오손도손 아껴주며 사는 것”
한글킹제임스, “형제들이 하나되어 함께 거하는 것”
우리말, “형제가 함께 한마음으로 사는 것”
쉬운성경, “형제들이 함께 다정하게 살고 있을 때”
쉬운말, “형제가 서로 어울려 한 마음으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
새한글, “형제자매가 함께 사는 것”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연합”의 의미를 좀 더 감성적으로 이해한 번역이 있고 좀 더 이성적으로 이해한 번역이 있다. 혹은 그 정도에 대한 이해도 조금씩 다른 것이 느껴진다.

일단, 연합과 동거를 따로 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연합은 하나됨인데, 이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큰 목적에 있어 뜻을 같이 하는 것을 연합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당시 ‘연합군(UN군)’이 있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예, 필리핀, 콜롬비아 등의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의료 지원, 물자 지원으로 함께한 나라들을 포함하면 60개가 넘는 나라들이 함께 했다. 이들은 각자 여러 목적이 있었을 수 있고, 나라 대 나라로서는 좋지 않은 관계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대한민국을 돕겠다는 큰 목적에서 연합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연합은 대개 일시적이고, 혹 그 기간이 길어지면 갈등과 균열이 생겨서 결국은 갈라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이는 연합도 있다. 이런 연합은 배타적인 연합이라 할 수 있다. 연합을 방해할 요소를 차단하는 것으로서 연합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연합이 좀 더 쉬울 수 있다. 처음부터 연합이 가능한 사람만 이 그룹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동호회가 좋은 예다.

비슷하게, 획일화된 연합도 있다. 모든 것을 똑같이 맞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배타적인 연합을 통해 획일화된 연합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혹은 어떤 강력한 교육이나 힘을 통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창세기 13장에 기록된 아브라함과 롯의 연합은 연합을 위해 분리를 선택한 독특한 연합의 모습이다. 아브라함은 목자들 사이의 갈등을 막기 위해서 분리를 선택했고, 이후 롯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연합을 위한 분리의 필요를 언급하면서 했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창 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즉, 동거가 그들이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연합에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연합을 지키기 위해 동거를 포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연합과 동거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다. ‘동거’라는 것은 결국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꼭 같은 집에서 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삶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연합에 그런 동거가 방해가 될 수 있다. 하나됨에 있어 함께 있는 것이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삶을 공유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면 하나됨이 더 쉬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연약함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단지 땅의 크기(자원)의 문제였을 수 있지만, 삶을 공유하는 것은 사실 여러 방면에서 생각하지 못한 이슈를 만들어 낸다. 서로의 다름이 계속해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안에 우리가 가진 죄성이 서로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 같이 살지 않으면 항상 정돈된 모습만 보게 되지만, 같이 살면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보게 되고 보여 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다 사랑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이것은 단지 겉모습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결혼한 사람은 이 말의 의미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래서 결혼 후에 자기 신앙의 바닥을 봤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 전에는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내 신앙에 지하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바닥보다 더 낮은 곳이 드러난다. 그럴 때 남탓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면 신앙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여튼, 동거는 이런 면에서 연합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실제로도 적절한 거리가 있는 인간 관계가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감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치부를 보지 않아도 되고, 나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서로 달라서 부딪치는 것을 굳이 맞추려고 하거나 참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연합하여 동거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예로 들었던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된다. 같이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편한 것을 생각하면 적당한 거리를 두면 더 좋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살고 싶다. 왜인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랑하기로 언약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부가 연합하여 동거함은 정말로 선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그렇게 형제가, 자매가, 하나님의 백성이, 교회가 연합하여 동거함도 정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없이 불가능한 것이 바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이다. 여기에 어떠한 분명한 목적 의식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비슷한 성향이나 배경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생각을 맞추려는 노력도 도움이 될 것이다. 때로는 어떠한 강제력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은 사랑의 문제다. 나머지 요소는 일시적인 혹은 표면적인 연합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지속적인 연합은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럼, 이 사랑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나님에게서 온다.

요일 3:14–16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15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 4:19–21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이 사랑을 가진 자들은 각자의 다름을 연합의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골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 모든 개인의 정체성이 무의미해 진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은 여전히 유대인이고, 헬라인은 여전히 헬라인이다. 그리스도 안의 유대인, 그리스도 안의 헬라인이 되었을 뿐이다. 여전히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여전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다름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이 함께 하는 우리에게 때로는 여전히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장애물을 뛰어 넘어 연합을 이루게 한다.

노래로 비유하자면, 우리는 제창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합창을 한다. 다 똑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내지만, 그 목소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나의 노래가 되는 것이다. 소리를 내기만 하면 알아서 화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음정과 박자를 연습해야 한다. 남이 내 소리에 알아서 맞춰주기만 바라서도 안된다. 함께 맞추는 것이다. 대충 내 기준으로 이 정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위대한 지휘자이신 예수님의 지휘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1절에 말하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이다.

이런 연합은 가장 먼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된다. 사랑으로 하나되어 하나의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연합의 정의이고 근본이다. 그리고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발견된다. 다윗은 그 모습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감탄했던 것이다. 그 모습이 옳고, 그 모습이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렇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그 희귀한 연합을 볼 때, 우리는 감탄할 수 밖에 없고 또한 기뻐할 수 밖에 없다.

연합의 묘사(2-3절)

2-3절은 이런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을 두 개의 ‘액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하나는 기름이고 다른 하나는 이슬이다. 아마 우리에게 연합을 비유해보라고 하면, 기름이나 이슬을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주로 앞서 언급했던 합창이나 혹은 신약의 건물과 같은 것을 생각할 것이다. 그럼 다윗은 이 두 액체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함께 살펴보자.

기름(2절)

시 133: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일차적으로 다윗은 형제의 연합이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과 같다고 말하고, 그 기름이 흘러 내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아론이 언급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손님의 머리에 향기나는 기름을 뿌리는 모습이 그려지지만, 아론이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는 대제사장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거룩하게 구별하여 직분을 행하게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에 대한 율법의 명령은 출애굽기 30:22이하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 기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정확한 제조법을 알려주셨고, 이것을 다른 용도를 위해 만들거나 다른 사람에게 사용하지 말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오직 이 기름은 거룩한 관유로 사용되어야 했다. 성막과 그 안의 기구들에 이 기름을 발라야 했고, 또한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그렇게 해야했다.

출 30:30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의 이 명령에 따라 모세는 아론에게 기름을 부었다. 이 기름은 머리에 부어졌지만, 그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머리를 타고 흐른 기름은 아론의 수염을 따라 내려왔고 그의 옷에까지 흘러내렸다. 수염을 따라 내려온 기름은 가장 먼저 그의 어깨와 그의 가슴팍을 적셨을 것이다. 아론의 어깨에는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보석(호마노)이 있었다(출 39:6-7). 그리고 그의 가슴팍에 있는 흉패에도 12보석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다윗은 단지 지금 예배하기 위해서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그곳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된 예배의 모습을 보며,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다. 처음 아론에게 기름이 부어졌을 때, 그 기름은 단지 아론만 거룩하게 구별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대표했었던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모두 하나님께 속한 백성으로 구분했다. 기름은 아론의 머리에게 수염을 통해 그의 옷깃까지 내려갔다. 즉, 모두가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보배로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여든 예배자들을 보면서 다윗은 그들을 하나되게 한 기름을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2절의 비유가 강조하는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움 특징은 ‘확장’ 혹은 ‘포용’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합은 누군가를 배척하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고 오히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누군가를 배척하는 것으로도 연합은 이룰 수 있다. 사실 연합에는 그런 요소가 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기도하실 때도 말씀으로 하나되는 것,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을 강조하셨다. 연합은 무조건적인 포용, 죄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움은 그 진리 안에서의 포용으로 드러난다.

스펄전,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교구나 민족이나 분파나 연령의 경계선을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인가? 그러면 그는 한 몸에 속해 있으며, 나는 그에게 영원한 사랑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나 가장 덜 신령한 사람이나 덜 매력적인 사람인가? 그러면 그는 옷깃과 같아서 나의 마음의 사랑은 틀림없이 그에게도 떨어져야 한다. 형제애는 머리에서 나오지만, 발까지 떨어진다. 그 길은 내리막이다.”

연합은 틀림이 아닌 다름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고 이는 많은 경우에 나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으로 실현된다.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해서 모두가 그 권리를 주장하면, 결국 머리에 있던 보배로운 기름은 머리에만 머물고 말 뿐, 옷깃까지 흐르지 못한다.

17세기 신학자인 멜데니우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기독교 격언이 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교회가 비본질인 주일 애찬 메뉴나 벽돌 색깔 때문에 연합의 기쁨을 잃는 일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움은 내 주장을 다른 사람이 인정하게 만드는데서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인정하고 용납하고 받아주는 관용에서 드러난다. 이것이 기름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연합의 모습이다.

이슬(3절)

시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헐몬은 이스라엘에서 북부에 위치한 가장 높은 산이다. 꼭대기에는 만년설이 있고, 헐몬에 내리는 비와 눈, 이슬은 주변 지역의 중요한 물 공급원이다. 특히 비가 오지 않는 기간에 이슬은 동식물 모두에게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

다윗은 연합의 아름다움을 이런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과 같다고 말한다. 시온의 산들은 남쪽에 있고 헐몬에 비해서는 낮고 건조하다. 하지만 헐몬의 이슬이 실제로 시온의 산들에 내릴 수는 없다. 헐몬의 이슬이 모여 흘러가면 아래로 내려가기 때문에 다시 시온의 산으로 오를 수는 없다. 시온의 산이 헐몬에 비해 낮다고는 해도, 주변 지역에 비하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이 하고자 하는 말은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린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시온에는 헐몬의 풍성한 이슬로 인해서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가끔 어느 한 지역은 가뭄이 계속되는데, 다른 곳에는 비가 많이 올 때가 있다. 그럴 때 그런 생각을 해볼 것이다. 저 비가 여기에 내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비 피해도, 가뭄 피해도 없다.

다윗이 보고 있는 연합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었다. 특히 그는 남쪽 유다 지파 출신으로서, 북쪽의 지파에 속한 예배자들이 시온에 내려와서, 한 곳에 모여 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모습이 마치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린 것 같은 풍성함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따라서, 3절의 비유가 강조하는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운 특징은 ‘나눔’으로 인한 ‘풍족함’이라 할 수 있다.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을 때, 연합의 모습이 정확히 이러했다.

행 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나누었을 때, 그것이 모두에게 풍족한 삶을 가져왔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연보에 대해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후 8:13–15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14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15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것은 꼭 재물에만 국한된 원리는 아니다. 성령님께서 교회에 주신 모든 은사가 이렇게 작동한다. 은사는 각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교회를 위해 사용된다. 그렇게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간다. 함께 풍성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가장 좋은 본은 예수님이셨다.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윗은 바로 이런 선하고 아름다운 나눔의 연합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복을 명령하셨다고 말한다. 어둠 가운데 빛이 있으라고 하셨던 하나님께서, 갈등과 분열이 가득한 세상에서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명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고,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그 복은 영생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참된 삶이다. 하나님은 하나된 자들에게 풍성한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서로 나눌 때에 가능하다. 이것이 이슬 비유가 보여주는 연합의 모습이다.

도전

시편 133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동거하는 가운데 연합하는 모습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지를 노래한다. 그들은 사랑으로 그렇게 한다. 포용과 나눔으로 그렇게 한다. 그 안에 하나님은 풍성한 삶을 명하시고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

어쩌면 시편 133편이 말하는 이런 연합은 ‘바라보는’ 현실이기 보다는 ‘바라는’ 현실일 때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이 불가능한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완벽한 모습은 좀 더 후의 얘기가 되긴하겠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그 맛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가. 경험하고 싶지 않은가. 이 시편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보라고 한다. 여기가 우리의 목적지가 되어야 한다.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되기 원하고 또한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됨을 지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 안에 있는 연합의 선하고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특히, 우리에게 인간의 모습으로서 완벽한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봐야 한다. 그 사랑의 본을, 그 포용의 본을, 그 나눔의 본을 보고 닮을 때에, 우리는 선하고 아름다운 연합을 경험할 수 있고, 그 연합에는 정말로 큰 기쁨이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연합의 기쁨이 이 세상 가운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