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본문: 말라기 4:1-6
설교자: 조정의
히브리어 성경은 본문을 4장으로 구분하지 않고, 3장 18절에 이어서 19-24절로 분류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과 악인에 관한 약속과 경고가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이라는 소제목이 달린 것은, 본문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특별한 날에 관하여 명백히 예고하기 때문이다(5절). 본문은 이 특별한 날을 가리켜 “용광로 불 같은 날”(1절). “이르는 날”(1절), “내가 정한 날”(3절),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5절)이라고 한다.
고대 마야 문명부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지구 종말에 관한 염려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첨단 기술의 개발과 과학의 발전은 인류가 멸망할 것이란 우려에서 지금껏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다. 지금도 지구온난화와 같은 환경 오염이나, 국제 정세에 따른 세계 전쟁 등으로 종말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불안감과 공포심은 괜한 것이 아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분명히 종말을 경고하셨기 때문이다. 이 땅과 인류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 그래서 확실히 그날을 대비해야 한다.
1. 종말의 특징: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먼저, 종말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보자. ① 첫째, 종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일으키신다: 종말은 환경 파괴나 세계 전쟁으로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만군의(군대, 큰 진영, 욜 2:11) 여호와께서 이르신 말씀대로(1, 3절) 이 땅과 대적을 심판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이날을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불렀다(5절; 욜 2:31). 여호와께서 크고 두려운 일을 모든 원수에게 친히 행하실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날을 가리켜 “내가 정한 날”(3절)이라고 하셨다. 마지막 때를 정하시고, 크고 무서운 심판을 내리실 분이 하나님 당신이기 때문이다.
② 둘째, 종말은 이미 정해진 사건이고 곧 일어날 현실이다. “정한 날”(3절)의 문자적 의미는 ‘행하는 날’, ‘이루는 날’이다. 과거에 계획하신 것을 강조하기보다는 정하신 날에 반드시 행하실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만큼 종말은 확실히 정한 사건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을 가리켜 “그 이르는 날”이라고도 하셨다(1절). 나중에 언젠가 기회를 봐서 하나님이 하실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시간의 끝을 향하여 신속하게 쏟아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의 날도 우리에게 순식간에 임할 것이다.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계 16:15).
③ 셋째, 종말에 크고 무서운 심판이 내려질 것이다. 이천 년 전에 하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2:47). 그러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불리는(5절) 종말에 하나님은 구원이 아니라 오직 심판을 위하여 이 땅을 찾으실 것이다.“용광로 불 같은 날”이라고 불릴 정도로, 크고 두려운 심판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원수에게 내려져 그들을 진멸하고 극심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영원히 가둘 것이다. 그러면 그날에 누가 무서운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인가?
2. 심판의 대상: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
종말에 하나님께 심판받을 자를 가리켜 본문은 “악인”이라고 부른다(3절). 1절에서는 같은 대상을 풀어서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라고 했다. 이 표현은 악인의 내면과 외면의 특징을 잘 요약한다. 그들은 ① 교만하다(내면). 스스로 자만하여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자신을 두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다(6절). 그들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 적대적이고 그분의 뜻에 반항적이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4).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품어야 할 겸손한 마음과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다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무시한다면, 그가 바로 악인이다.
악인은 또한 ② 악을 행한다(외면). 내면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쌓는 사람은 그 악을 밖으로 내는 것이 자연스럽다(마 12:35). 이 말은 악인은 도무지 선행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남들이 볼 때,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선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 된다.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다고 하셨다(마 7:22).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악인일 수 있을까? 있다!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셨다(마 7:23). 악인은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동기를 찾아볼 수 없고, 명백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도 거리낌 없이 반복적으로 행한다.
종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악인을 최종적, 영구적으로 벌하시는 날이다. 말라기는 불의 이미지로 진노의 심판을 묘사하는 데(1절),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사용했던 방식이다: “…그의 진노가 불붙듯 하며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듯 하며 그의 입술에는 분노가 찼으며 그의 혀는 맹렬한 불같으며”(사 30:27). 종말에 하나님의 맹렬한 불같은 진노가 악인을 진멸할 것이다. 1절의 두 가지 표현, ① “다 지푸라기 같을 것”, ②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 악인에게 미칠 파멸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① 지푸라기(쭉정이, 겨)는 가연성이 매우 높은 물질이다. 빠르고 무섭게 타서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마 3:12). ② 뿌리와 가지는 생명, 성장, 번영을 상징한다(시 80:9-11). 그것을 남기지 않는다는 말은 회생할 가능성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한다는 말이다. 3절에 보면 그들은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라고 했다. 이 말은 종말에 악인의 영혼이 소멸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당할 형벌이 영원할 것이고 그것이 잠시나마 멈추거나 일시적으로라도 좋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고(유 1:7),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막 9:48), “영벌” 가운데(마 25:46),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라고 무섭게 경고한다(마 22:13).
전도할 때, 영원한 심판을 말하지 않는 것이 배려 또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무서워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사로잡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영원한 형벌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영혼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을 이유가 없다. 지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하여 오래 참고 계신다. 당신이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성경은 “하늘과 땅”이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고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셨다고 말한다(벧후 3:7).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지만, 영원히 참지는 않으신다. 언젠가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올 것이고,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날 것이다(벧후 3:10). 은혜받을 기회는 사라지고 그 모든 경고와 권면을 거부한 죄까지 가중되어 영원한 대가를 치를 날이 닥칠 것이다.
3. 구원의 대상: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
누가 종말의 크고 두려운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 본문엔 두 번의 “보라”가 있다. 먼저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심판을 주목하라는 경고(1절), 그리고 그 전에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겠다는 약속: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5절). 선지자 엘리야는 대다수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로 보내심을 받아 회개를 부르짖은 광야의 선지자였다. 그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닌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여 이 땅을 떠났는데(왕하 2:12), 그래서 유대인은 대대로 메시아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때, 엘리야가 재출현할 것을 기대했다. 그는 구원의 소식을 알리는 전령이다. 그가 와서 할 일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6절). 모든 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합당한 마음으로 돌이키게(회개) 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심판에 앞서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선지자 엘리야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세례 요한이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아들의 출생을 예고한 주의 사자는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라고 선포했다(눅 1:17). 주의 백성에게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막 1:4),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역할이다(눅 1:77).
그런데 요한의 역할은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알게 하는 것까지였다. 악인이 실제로 죄 사함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다고 인정받는 구원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라고 칭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요 1:15). 예수님을 자기 죄를 사하신 구원자요, 자신을 값으로 주고 사신 주님으로 믿는 자는 종말에 악인과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2절).
먼저,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로 구별된다(내면). 그리고 그들은 4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한다(외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며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는 자다. 성경은 이런 자를 ‘의인’이라고 부르는데, 종말에 그들의 의가 영원히 완전해질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공의로운 해는 은혜와 영광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참고. 눅 1:78-9).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의인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의 의로움을 완전하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능히…보전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의 영광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이다(유 1:24). 우리를 “자기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빌 3:21). 그러면 우리는 외양간 밖으로 나온 살찐 송아지 같이 넘치는 생명력으로 뛰며 즐거워할 것이다. 영원토록!
종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다음 명령에 철저히 순종해야 한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4절).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법), 모든 절대적인 법칙과(율례) 구체적인 적용(법도, 판례)을 온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신명기 독자에게 13번이나 하나님의 법을 ‘기억하라’라고 명령했다(신 5:15; 8:18). 잊지 말고 기억하고 순종하고 따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 경험이 셀 수 없이 증명하는 건 하나님의 거룩하신 기준을 우리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만족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느새 우리는 하나님의 법에서 멀어져 있고, 그분의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있다. 마음이 나뉘고, 생각이 불순해지며, 정욕에 휘둘리고, 의지가 사라진다. 그럴 때 호렙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또 다른 종 엘리야가 나선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계속해서 경고하며 촉구한다. 바른 생각을 갖게 하고, 정신을 차리게 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살도록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그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분을 가리킨다.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온전한 의를 우리 대신 이루셨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인이 치러야 할 영원한 죗값을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대신 치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엘리야가 촉구한 회개를 본질적, 실질적으로 일으키는 분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끝까지 돌이키는 삶을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살게 하신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해 같이 그 얼굴이 변화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중에 나타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관하여 이야기 나눈 것은 그래서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참 의미 있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구원에 관한 대화였기 때문이다(마 17:1-8; 막 9:2-8; 눅 9:28-36). 날마다 복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를 생각하라. 그리고 믿음의 싸움, 경주를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6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이켜 의인으로 살다가 종말에 하나님께 영원한 축복을 받을 기회는 무한하지 않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 땅을 불로 저주하러 오실 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돌이키지 않은 모든 사람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한다. 그날은 지금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크고 두려운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이고, 지금은 구원의 날이지만(고후 6:2), 기억하라.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은 지금도 신속하게 다가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