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 하지 아니하시면
본문: 시편 127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27편은 솔로몬의 시로서, 잠언 등에서 볼 수 있는 지혜 문학의 형식을 갖고 있다. 지혜 문학의 특징은 삶의 원리를 간결하고 기억하기 쉽게 가르친다는데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그렇지 않은 때도 있는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외적인 상황은 배제하고 원리를 전달하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10:4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게으르면 다 가난하고 부지런하면 다 부한가? 부는 부지런함에 정비례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역으로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것이고 부한 사람은 무조전 부지런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잠언이 의도한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잠언은 삶의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하면서 부지런히 일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 뿐이다.

성경의 예가 아니라 우리 속담을 봐도 동일하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속담은 말을 곱게 할 것을 말하는 것이지, 가는 말이 고우면 무조건 오는 말이 곱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혜 문학을 읽을 때는 (다른 성경 본문도 마찬가지기는 하지만) 의도를 이해하고 상황에 맞게 잘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시편 127편을 읽어 보자.

127 솔로몬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2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3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4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무엇이 이 시편의 의도일까? 열심히 일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불면증이나 자식이 적은 것은 하나님의 저주다? 아니다. 이 시편의 의도, 전달하고자 하는 교훈은 ‘모든 일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원리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마치 내가 하기에 달린 것처럼 전전긍긍하지도 말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풀어 주신 좋은 것에 감사하라는 것이 이 시편이 주는 교훈이다.

원리: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다(1)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절(그리고 2절도)에서 눈에 띄는 표현은 “헛되다”일 것이다. “헛되다”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전도서를 생각나게 하고, 그 역시 솔로몬의 저작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단어도 다르고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도 있다. 전도서의 “헛되다”는 공허하다 혹의 무의미하다는 의미다. 삶의 즐거움이나 만족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할 때, “헛되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 시편 127편의 “헛되다”도 비슷하게 들리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수고에 따른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면에서 “헛되다”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1절에서 예로 든 것은 집을 세우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이다.

학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건물’인지, 아니면 솔로몬의 시편이니까 ‘성전’을 의미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3절 이후에 가정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니까 ‘가정’에 대한 비유(환유)인지, 아니면 더 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삼하 7:11) 하신 언약을 의도한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지만, 표면적인 의미, 즉 건물로서의 집 이상을 의미한다고 볼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부족하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어떤 집인지가 여기서 강조하는 바도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세운다”는 행위(수고)다. 마찬가지로 이어지는 평행절에서도 중요한 것은 어떤 “성”이냐가 아니라 “지킨다”는 행위다.

수많은 일들 중에 집을 짓는 일과 성을 지키는 일이 언급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할 수 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혹은 올라가서 볼 수 있는 익숙한 모습 중 그가 가르치고자 하는 원리에 적절한 두 가지를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솔로몬 시대이니, 예루살렘에 건축이 활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예루살렘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왕이었던 솔로몬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이런 사실을 묵상하던 솔로몬은 그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의 눈에 열심히 나무를 나르고, 돌을 다듬고, 벽돌을 굽고 하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것을 관리 감독하는 자들도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거의 다 지어져 가는 집도 보였을 것이고, 이제 막 기초를 놓고 있는 집도 보였을 것이다. 또 저 쪽에는 성을 지키는 군사들의 모습도 보였을 것이다. 더운 날 무장을 하고 성을 지키기 위해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군사들이 보였을 것이다.

집을 세우는 사람은 지혜를 다해서 계획을 세우고 최선을 다해 그 계획을 실행한다. 땀을 흘리며 그렇게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의 “수고”다. 성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을 지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훈련을 한다. 특히 모두가 잠자는 밤에도 깨어서 성을 지킨다. 이것도 수고다. 하지만 그 모든 수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하지 않으시면, 결국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것을 솔로몬은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실제 건축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노아 홍수 후에 사람들이 모여서 성읍과 탑을 건설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우리가 잘 아는 바벨탑 사건이다(창 11장). 사람이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막으셨을 때, 건축은 중단되었다.

다윗의 경우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다. 다윗의 의도에는 잘못된 것이 없었다. 하나님도 다윗의 마음을 기뻐하셨다. 하지만, 건축 자체는 하지 못하게 하셨다. 대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다. 이 사실은 다윗보다 솔로몬이 더 뛰어난 왕이라거나, 솔로몬이 다윗보다 더 위대한 신앙인이었음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께서 다윗이 아닌 솔로몬을 통해 성전을 세우기 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성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마리아 성이나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어 그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

왕하 17: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꾼의 손에 넘기시고 마침내 그의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성을 지키려는 수고가 부족해서 함락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포위하여 함락 직전이었을 때, 하나님은 아람 군대로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도망하게 하셨다(왕하 6-7장).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가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기 직전에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고(왕하 19:34), 그 밤에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을 쳐서 죽게 하셔서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셨다.

하나님께서 성을 지키셨을 때 성은 안전했고,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 때 성은 함락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1절은 바로 이 원리를 말한다. 모든 일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 집을 세우는 자가 수고할지라도, 결국 집을 세우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파수꾼이 깨어 있어서 성을 지킬지라도, 결국 성을 지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처음에 언급했던 지혜 문학의 특징을 생각해야 한다. 의도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1절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결과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의미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다.

사람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은 세상의 사람들도 다 동의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운칠기삼’같은 말도 있다. 성공에 있어 재능은 3, 운이 7을 기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의 지혜는 아니다. 성경은 운이 아니라 하나님을 말한다. 7정도의 기여가 아니라 하나님은 결과를 전적으로 결정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모든 수고가 헛되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시면 어떤 수고도 헛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 삶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하심을 믿고 행하는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이 결과를 결정하시니, 그럼 일할 필요가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열심히 하면 손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진리는 그렇게 적용되지 않는다. ‘일할 필요가 없다’가 아니라 ‘염려할 필요가 없다’로 적용된다.

교훈 1: 염려하지 말라(2절)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이 말씀을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잠 많은 사람,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성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헛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했으니, 잠자고 있는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중이다”는 식으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지혜의 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2절 말씀은 늦게 일어나고 일찍 자서 잠을 많이 자야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필요 이상으로 잠을 줄여 가면서 과하게 일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이다.

2절이 묘사하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일을 더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것이다. “수고의 떡”이라는 표현이 이런 의미를 분명하게 한다. 수고의 떡은 고된 노동의 결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일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 동산에 두고 거기서 유유자적하면서 놀고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일을 하게 하신 것이다. 일은 죄의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셨던 사람의 삶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일하는 것 자체를 절대 나쁜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게으름을 죄로 말한다. 처음에 언급했던 잠언 말씀을 비롯해서 많은 잠언이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한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던 게으름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살후 3:10–1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일인 것이다. 시편 127편에서 문제 삼는 것은 이렇게 성실하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일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면, 많이 일하는 것도 문제가 아니어야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일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불신의 죄, 염려의 죄, 자만의 죄 등이 결부되어 있다.

죄의 결과로 일이 더 어려워졌다. 일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없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 죄의 결과로 여자와 남자를 저주하실 때, 여기 시편에 사용된 “수고”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3:16–17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수고의 떡을 먹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까지 일하는 것은 결국 이런 죄의 결과를 더 따르고 있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골딩게이는 “휴식 없이 긴 하루 내내 일함으로써, 우리는 죄에 굴복하게 된다”고 말했다(골딩게이, 502).

‘일’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쉽고 즐거운 것이 아닌데, 왜 이렇게 일을 더 하려고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을 더 얻기 위해서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안함이 깔려있다.

6:25–2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결국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등을 얻기 위해 사람은 일한다. 그런데, 항상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더 많이 가지고 있어야할 것 같다. 걱정이 된다. 다른 사람은 저만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이것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좀 더 잘 먹기 위해서, 더 잘 마시기 위해서, 더 잘 입기 위해서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자녀를 위해서도 그래야 할 것 같다. 미래의 불확실함 때문에라도 지금 더 해야할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더 일하려고 하고 그 결과를 보면서 더 일하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이 결국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기 때문이다.

6:31–33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도 오해하여 적용하는 경우가 있다. 일하지 않고 가정을 돌보지도 않고 교회 일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먹고 사는 일은 다 해결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셨지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으셨다.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먹고 사는 것이 전부 나에게 달린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시면, 그 어떤 수고도 헛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에 재물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살지 않기를 원하신다. 계속해서 염려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일해야 한다는 강박 가운데 살지 않기를 원하신다. 성실하게 살되,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안식(잠)을 누리며 살기 원하신다.

완벽한 예는 아니겠지만, 마르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눅 10장).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하고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했다. 하지만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눅 10:40). 그 분주한 마음은 염려와 근심으로 이어졌고(눅 10:41), 동생에 대한 판단과 불평, 더 나아가서는 그런 상황에서도 무심한 듯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에 대한 원망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은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0:42). 분명 마르다가 했던 일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이왕하는거 잘 해야지, 제대로 해야지라는 생각이 때로는 성경적인 삶의 원리에 어긋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어도 그렇다. 잘하고 제대로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성실히 행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그 생각에 지배를 받지 말아야 한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과도하게 일하려고 한다. 필요 이상으로 한다.

‘과도하게’를 정의하는 것은 사실 쉽지 않다. 그래도 두 가지 정도의 질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렇게 일하는 가장 큰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것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염려’라면 어쩌면 나는 과도하게 일하고 있을지 모른다. 염려가 될만한 일에 대해서, 내가 해야하고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주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맡길 것은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성실하면 된다.

둘째는 우선순위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르다처럼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다면 과도하다고 할 수 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계속해서 내 삶에서 뒷순위가 된다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일을 그렇게까지 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 지혜의 교훈에 순종하기 어려운 이유 중 큰 것은 오늘날의 일이 내가 원하는대로 양을 조절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을 것이다. ‘일 조금 덜하고 덜 벌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다. 이런 면에서 오늘날 사탄은 꽤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하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속에서도 우리는 이 시편의 지혜에 따라 살 수 있다. 실제로 더 바빠지지 않기 위해서 진급을 포기하는 성도들도 있다. 일 자체에서도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이다. 아마 조금 더 가깝게 빨리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시간 사용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일 때문에 바쁜 것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바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바울의 이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7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고, 내가 할 일만 하는 것이다. 자라지 않는 것 같으니까 어떻게든 더 심으려고 하고 물을 더 많이 주고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염려를 내려놓아야 한다.

교훈2: 감사하라(3-5)

3-5절은 결과적인 측면에서 1절의 원리를 적용한다.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1절의 원리는 2절에서는 과정에 적용되어서, 그렇기 때문에 염려를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며 성실하게 일하라는 교훈으로 이어졌다. 3-5절은 결과적인 측면에서, 그렇기 때문에 자랑하지 말고 감사할 것을 교훈으로 말해준다.

127: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이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는 것이다.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자랑이 자식 자랑이고, 이는 고대에는 더욱 심했다. 자식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더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을 자랑하면서 자신도 함께 자랑했다. 마치 자신이 대단해서 그런 자식을 얻은 것인 것처럼 그렇게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고, 자식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솔로몬은 지금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이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면 당시의 가정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가정은 그야말로 운명 공동체였다. 단순히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모든 삶을 공유하면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신분적으로 가족은 하나였다. 부모가 귀족이면 자녀도 귀족이고, 부모가 평민이면 자녀도 평민이었다. 부모의 명예가 자녀의 명예가 되기도 했고, 자녀의 명예가 부모의 명예가 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부자면 자녀도 부자고, 부모가 가난하면 자녀도 가난했다. 부모가 하던 일을 자녀는 자연스럽게 이어서 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아이들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했다.

사회적으로 법이나 공권력이 강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 편에서 싸워줄 사람도 가족 뿐이었다. 그것이 물리적인 싸움이든, 논리적인 싸움이든, 어떤 형식의 싸움이든 가족은 언제나 힘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든든한 일이었다. 4-5절은 이런 배경에서 하는 말이다.

127:4–5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5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특히 여기서 솔로몬은 “젊은 자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젊을 때 낳은 자식을 말하는 것이다. 젊을 때 낳았으니 가정의 상황을 잘 알고 그렇기 때문에 믿을만한 든든한 자식이다. 그런 자식들은 마치 전쟁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무기와도 같다고 표현한다. 물론 5절은 실제로 전쟁을 하는 상황이 아니라 원수와 담판을 하는 상황을 말하지만, 의도한 바는 다르지 않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의도를 잘 읽어야 한다. 3-5절의 말씀은 자녀가 적거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선포하지 않는다. 다만, 자녀가 부모에게 얼마나 “복”인지를 말할 뿐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자녀가 곧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그들의 수입이기도 했고, 의료 보험이기도 했고, 노후 준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은 자식을 의지하기도 하고 자랑하기도 했다. 특히 자식이 많은 것은 그런 면에서 부러움을 사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1절의 원리에 따르면 그 역시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3절을 보면 자식을 “여호와의 기업”, “그의 상급”이라고 표현한다. 자식은 내가 만들어 낸 최고의 작품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 자랑처럼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자식을 나하고 상관 없는 존재로 취급하면 될까? 아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다. 상급이다. 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사해야 한다.

여기서 좀 더 확장에서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자녀 뿐 아니라 우리 삶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으면 내 삶에 없었을 것들이기 때문이다. 배우자도 그렇고, 부모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 지금 일을 할 수 있는 건강도 그렇다. 무엇이든 내 삶에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모든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 달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들은 내 노력으로 이루어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고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얻어낸 결과들은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극단적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이 있다. 바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다. 그는 자신의 왕궁에서 바벨론 성을 내려다 보며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고 감탄했다(단 4:30). 자신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모두 자신의 공로로 돌렸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들짐승과 같이 살게 만드셨다. 그러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이 사건을 통해 느부갓네살 왕은 자랑하지 않고 감사하게 되었다. 우리도 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셨으면 내 삶에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치 내가 이룬 것처럼 자랑하지 말고, 모든 것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도전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시편 127편과 같이 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여호와께서 하지 않으시면, 나의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과정에 있어 불평하지 말고 기도로 맡기고 내가 할 일을 해야 하고, 결과에 있어 자랑하지 말고 감사해야 한다.

어찌 보면 참 쉬운 삶의 원리다. 하지만,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학생들은 아마 공부하지 않고 교회에 와 있으면 불안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직장인들, 사업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뭔가 하고 있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고 불안할 수 있다. 또한 좋은 결과에 대해서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참기 어려울 때도 많을 것이다.

그때, 이 시편을 기억하라. 결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안식을 누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라. 무엇을 시작할 때든, 무엇을 성취했을 때든, 우리는 이것이 우리의 한결같은 고백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하지 않으셨으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셨을 때, 혹은 하나님께서 주지 않으셨을 때, 언제든 우리가 이렇게 고백하며 안식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이 우리 삶의 예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