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본문: 시편 124편
설교자: 최종혁
만나서 가벼운 인사만 하면 모두가 큰 어려움 없이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나만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는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이야기 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어려움, 저마다의 고난을 가지고 살아간다. 위로와 소망에 관한 말씀과 찬양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우리에게 그런 삶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고, 관계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다. 돈이 없어서 어려운 사람, 돈이 너무 많아서 어려운 사람도 있다. 과거의 일 때문에 괴로운 사람도 있고 미래의 일 때문에 괴로운 사람도 있다. 차마 드러내고 누구와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많다. 우리 삶은 이런 고난의 연속이다.
시편 124편은 그런 우리에게 참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진다. “만약에”라는 가정이다. 시편 124편도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고, 저자는 다윗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들을 통해서 우리는 특별히 순례자로서 그리고 예배자로서의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교훈을 얻게 된다. 내용을 보면, 성전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묵상, 예배에 대한 묵상,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대한 묵상이 주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124편도 그런 묵상이다. 내용 상으로는 거의 123편에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123편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만 그 결과가 없고, 124편은 그 결과만 기록한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123편의 1절과 124편 마지막 8절은 121편의 1-2절의 내용과도 유사하다. 이 시편들이 비슷한 상황에 대한 묵상의 결과이고, 그것을 하나로 묶은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위에 말한 것처럼 시편 124편은 “만약에”라는 가정으로 시작하는 묵상이다. 이런 고난의 삶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것이 이 시편의 묵상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말씀을 들으면서 혹은 듣고 나서 같은 묵상을 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 삶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는 중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시 124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 2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3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4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6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8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이 시편은 쉽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5절과 6-8절이다. 1-5절은 “만약에”라는 가정을 통해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6-8절은 “하지만”이라는 접속사를 통해 가정을 부정하고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이 대조를 통해 우리 삶의 진짜 주권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에 어떻게 우리가 합당하게 반응해야 하는지를 말한다.
만약에: 일어났을 수 있는 일들(1-5절)
1절 말씀을 다시 보면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이라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해야할 말이 이어진다. 기호를 넣자면 쌍따옴표가 “여호와께서” 앞에서 시작하여 5절의 “삼켰을 것이라”에서 끝난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고백을 할 수 있고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이 시를 지었을 것이고, 성령님께서는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할 수 있는 고백이고 해야할 고백이기에 성경에 기록하셨다.
다윗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2절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라고 말한다. 매우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표현이다. 따라서 우리도 이 시편이 다윗 생애 중 어떤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지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표현에 적합한 여러 성경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시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당연히 다윗이 경험했던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났던 상황”도 고려해 봐야 한다.
1-2절은 이 시편의 핵심이 되는 가정을 반복한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이라는 가정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난 상황에서,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이 가정은 곧 이 시편으로 찬양하거나 이 시편을 읽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 가끔 우리도 이런 가정과 질문을 할 때가 있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운전을 하다가 크고 작은 사고를 당해본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사고라는 것은 정말 순간에 벌어지는 일이어서 더 그렇다. 그래서 집에서 조금만 일찍 나왔다면 어땠을까, 그 노란 신호등에서 멈췄다면 어땠을까와 같은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어느 하나만 달라졌어도 사고는 없었을텐데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왜 하필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잘 맞아떨어졌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자기 탓도 하고 남 탓도 한다. 사고 같은 경우는 아마 최대한 남 탓을 하려고 할 것이다. 나쁜 일에 내 책임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좋은 일에 대해서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없었으면 이 일이 이렇게 잘되지 않았을거야라고 말하고 싶어 한다. 사고를 당한게 아니라 가까스로 사고를 면했으면, 내가 순발력이 좋아서 살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애초에 순발력을 발휘할 상황을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은데도 그렇게 말한다. 자기 중심적이어서 그렇다.
이런 모습은 우리 삶에 대한 평가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우리말 속담에서는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내 삶의 좋은 일은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된 것이고, 내 삶의 나쁜 일은 다른 누구 혹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사람에게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다윗은 묻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편이 아니셨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를 생각해 보라고 묻는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 주요 요인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는 좋은 방법이다. 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요 요인이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 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시 124:3–5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 채로 삼켰을 것이며 4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5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여기서 다윗은 두 가지 이미지를 사용한다. 하나는 포식자이고, 다른 하나는 홍수다. 둘의 공통점은 거대하다는 것과 공격적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압도적이다. 그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3절의 포식자에 대한 표현을 보라. 이 포식자는 화가 나있다(“노여움”). 그냥 화가 나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맹렬”하게 화가 나있다. 마치 영화에 나오는 괴물과 같은 모습이다. 현실에서는 맹수라고 해서 항상 화가 나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무조건 공격하고 그렇지는 않다. 자연 다큐같은 것을 보면 사자가 다른 동물들과 평온하게 잘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 나오는 맹수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조건 공격하고 찢으려고 한다. 멈추지 않고 계속 쫓아온다. 여기서 다윗이 그리고 있는 포식자의 이미지가 그렇다. 이 분노의 포식자는 그 먹잇감을 그냥 삼켜버릴만큼 거대하고, 눈에 보이면 산 채로 삼킬만큼 급하다.
4-5절의 홍수에 대한 표현도 비슷하다. 이 물도 화가 나있다. 5절의 “넘치는”은 “성난”으로 번역하면 더 적절할 것이다. 성난 물결인 것이다. 4, 5절에 나오는 “삼키다”는 지나간다는 의미다. 홍수 때에 감당할 수 없는 급류가 마구 쏟아져 나와 이곳 저곳을 휩쓸고 지나가는 이미지를 다윗은 그리고 있다.
이 두 이미지 모두 다윗에게 익숙했을 것이다. 목동으로 일하면서 다윗은 성난 맹수가 얼마나 두려운지 잘 알았을 것이다. 홍수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에는 ‘와디’라는 것이 있다. 우리말로 적절하게 바꾸면 ‘간헐하천’ 정도로 할 수 있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데 비가 내리면 순식간에 많은 물이 와디로 쏟아져 들어와서 홍수가 되어 물이 흐른다. 우리나라의 계곡과 비슷하지만, 와디는 평소에는 아얘 물이 없다가 갑자기 많은 양의 물이 흐르고 또 멈춘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와디에서 물에 휩쓸려 사망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곳은 날씨가 맑아도 상류에 내린 비 때문에 여기서 홍수가 나기 때문이다. 비가 오면서 차츰 차츰 수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른 땅으로 걸을 수 있었던 땅에 불과 1-2분 만에 홍수가 나서 자동차를 떠내려가게 할 정도의 엄청난 물이 흐른다.
오늘날처럼 일기 예보가 전혀 없었던 예전에 이런 홍수를 만나는 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손쓸 수 있는 방법도 없고 시간도 없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사람들이 그들을 치러 일어났을 때, 그들은 이와 같은 상황에 있었던 것과 같고 즉시 멸망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은 포식자 앞에서 도망가지도 못하는 먹잇감 같이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홍수에 휩쓸려서 떠내려가서 그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사람같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저 다윗의 망상이었을까? 다윗이 지나치게 과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실제로 선지자들이 이런 이미지를 통해 이방 나라의 침입을 묘사하기도 했다.
사 8:7–8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
애 2:16 네 모든 원수들은 너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벌리며 비웃고 이를 갈며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삼켰도다 우리가 바라던 날이 과연 이 날이라 우리가 얻기도 하고 보기도 하였다 하도다
다윗은 여기서 가상의 상황을 전제로 이런 이미지를 사용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편에 서기를 멈추셨고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은 포식자처럼 홍수처럼 그들을 집어삼켰다. 3-5절의 말씀은 단지 가정에 따른 상상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발생할 수도 있었던 일이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편에 서지 아니하셨더라면, 이것이 다윗의 역사도 되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윗의 편에 서지 아니하셨다면, 골리앗에게 덤벼든 다윗은 용기의 본이 아니라 만용의 본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만큼 말도 안되는 싸움이었다. 골리앗이 사자라면 다윗은 양이었다. 골리앗이 홍수라면 다윗은 홍수에 휩쓸려다니는 조그만 모래알에 불과했다. 그 전장에 널부러진 시체의 주인은 골리앗이 아니라 다윗이 되었을 것이다.
이 싸움을 준비할 때 다윗은 사울의 갑옷과 칼을 거부했다. 몸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그가 갑옷과 칼이 아니라, 막대기와 매끄러운 돌, 물매를 선택한 것이 승패에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그가 선택한 돌이 아니라 다른 돌을 선택했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다윗이 평소에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과 싸웠던 경험이 없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아니다. 심지어, 다윗이 아니라 요나단이 골리앗과 싸웠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구든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의 편에서 싸웠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승리를 주셨을 것이다. 반대로, 골리앗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골리앗은 승리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추었지만, 그에게 한가지가 없었다. 바로 하나님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의 편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승리할 수 없었다.
골리앗과의 싸움 뿐 아니라, 다윗은 계속해서 전쟁을 치르면서 하나님께서 그의 편에 계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배웠다. 그래서 그의 삶에 대한 고백으로 그는 이렇게 찬양했다.
삼하 22:1–3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2이르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3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
이 원리를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바로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가 미디안 연합군에게 승리한 사건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시면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하셨는데(삿 6:12), 기드온은 이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지금 상황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 상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이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고 계신 상황이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셨고, 이제 다시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을 나타내실 것이었다. 기드온은 그 하나님을 믿고 싸워야 했다. 하나님은 유명한 양털 시험에 응답하심으로 기드온에게 확신도 더하셨다.
미디안과 싸우기 위해서 모인 이스라엘의 병력은 3만 2천명이었다. 그리고 미디안 연합군은 13만 5천명이었다. 기드온 입장에서는 이조차도 터무니없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1:4로 병력 자체가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이 너무 많다”고 하시며 숫자를 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이유도 분명히 말씀하셨다.
삿 7:2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 말씀으로 두려워 하는 사람을 돌려 보내서 1만명이 남았다. 1:13.5의 전쟁이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조차도 많다고 하시며 숫자를 줄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물을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핥아 마신 사람 300명만 남았다. 300명의 정예 군사만 남은 것이 아니다. 그냥 물을 그렇게 마신 사람 300명이 남은 것이다. 이제 전쟁은 1:450의 싸움이 되었다.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용사가 300명이어도 불가능한 상황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 300명으로 하나님은 미디안에게 승리하게 하셨다. 이 300명이 했던 일은 왼손에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는 나팔을 들어 불면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친 것 뿐이었다(삿 7:20).
이 300명이 다른 300명이었으면 패했을가? 이들이 나팔을 잘 불거나 목청이 좋아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기드온이 아니었다면 이들이 패했을까? 하나님은 마치 기드온이 아니면 안될 것처럼 그를 설득하면서 미디안과 싸우게 하셨는데, 정말 기드온이 아니면 안되어서 그랬을까? 아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스라엘에게 알게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상황이다. 구원은 이스라엘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함에서 온다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 뿐이다. 창조하는데 하나님께 굳이 6일이 필요하지 않았었던 것처럼, 미디안을 무찌르는데 굳이 300명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침략에 고통당한 것은 300명의 군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에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1-5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우리 편에 계시지 않았더라면 일어났을 일들에 대해서 말했다. 그리고 다윗의 이 가정은 역사를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승리를, 평안을,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라.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들(6-8절)
시 124:6–7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7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여기서 다윗은 그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을 언급한다. 이들은 그 포식자의 이에 씹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두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7절에서는 또 다른 이미지를 사용한다. 사냥꾼과 새의 이미지다. 새는 사냥꾼의 올무에 걸렸었다. 하지만 그 올무가 끊어졌고 새는 안전하게 도망할 수 있었다. 올무에 걸리면 발버둥 칠수록 더 갇히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올무를 끊어서 도망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치러 일어났을 때 다윗이 경험한 일들이었던 것이다. 지금 다윗은 승리자로서 그가 경험한 승리의 요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생각해 본 것이고,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차이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차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과 나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의 차이를 제대로 봐야 한다. 여기 다윗처럼, 이 순례자들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는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고 홍수의 희생자가 되었을 것이다.
삶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가장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구원을 생각해 봐야 한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 7:26–27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은 마귀의 먹잇감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우리 삶은 홍수에 무너지는 집처럼 무너져 버릴 것이다.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 우리 삶이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견고할 수 있는 이유, 우리가 마귀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 때문이다. 지금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지금의 승리는 결코 위험 자체가 별 것 아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해서 골리앗을 동네 어린아이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기드온에게 패한 미디안의 군대가 상대적으로 약했거나 혹은 멍청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약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셨던 것이다.
때로 우리는 결과만 보고 과정을 잘못 판단할 때가 있다. 위대한 승리를 손쉬운 승리로 생각하고, 그러면서 그 대적도 약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10대 0으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상대가 정말 약체였다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내가 했어도 이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진짜 문제가 있다. 앞서 말한 차이, 하나님께서 내 삶에 만들어내신 그 차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내 생각 속에, 또한 내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줄어들고 나의 자리는 커진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애초에 우리가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죄가 가진 방향성이다. 잘된 것은 내 덕인 것이다. 구원에 있어, 영적 승리의 삶에 있어, 마치 내가 대단한 기여를 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애초에 우리가 어떤 상태였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을 따르던 자들이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 죄의 종이었다. 그것이 좋다고 멸망의 길로 행하던 자들이었다. 우리는 선을 행하지도 않고 행할 수도 없는 자들이었다.
그런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이다.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눈을 떠서 진리를 보게 하셨다. 그렇게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게 하셨다.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 내 삶에 조금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있을 때, 그것이 내가 뭔가 잘한 것 같을 때, 이 생각을 해보라.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가능했을 일인가?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요구하는 우리의 반응은 이것이다.
시 124:6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첫째로 하나님이 모든 찬송을 받으셔야 한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면, 그래도 내가 뭔가 잘 한 것같고, 그래도 뭔가 상황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가서 그렇게 된 것 같다면, 질문에 보라.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면 어떠했을지. 생각할 수록 하나님이 모든 찬송을 받으서야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둘째로,우리는 계속해서 그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시 124:8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한다. 나의 도움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여호와의 이름에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이름이 능력의 이름, 구원의 이름, 소망의 이름, 위로의 이름, 승리의 이름, 약속의 이름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니, 나의 소망도 오직 하나님께 있는 것이 당연하다.
도전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1-2절에서 다윗이 사용한 가정법은 ‘불가능’에 대한 가정이다. 즉, 과거에도 일어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일어날 리가 없는 상황을 단지 ‘가정’해서 말한 것이다. 앞에 ‘그런 일은 절대 없지만’이 생략되어 있는 가정인 것이다. 이와 똑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롬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내주셨다는 사실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의 편에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피하는 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편에 서신다.
말씀의 시작에서 우리 삶에 가득한 고난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사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나의 편에 계시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어쩌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남의 사정도 모르면서 이상적인 말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내 삶이 왜 이렇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욥도 그러했다. 욥의 친구들은 바른 말을 했지만, 욥은 그 말을 좋게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욥의 말을 보면 그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이 그를 원수로 여기신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욥 13:24; 19:11). 그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 당시의 실제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나님은 여전히 욥의 편에 계셨다. 만약 하나님의 정말로 욥의 대적이 되셨다면, 그의 고난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묵상 노트의 본문이었던 역대하 18장에 욥기 1-2장과 비슷한 하늘의 회의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 회의에서 하나님은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라고 물으셨다(대하 18:19). 그리고 한 영이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선지자들을 통해 아합을 꾀겠다고 하자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게 하셨다(대하 18:20-21). 하나님은 아합의 편에 계시지 않았다.
하지만 욥의 경우는 달랐다. 하나님은 사탄이 욥을 시험하게 하셨지만, 그의 역할을 제한하셨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욥이 믿음을 증명할 수 있게 하셨다. 욥의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그와 함께 하셨고 그의 편에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그 고난을 끝내시고 다시 그에게 복을 주기도 하셨다.
앞서 읽은 로마서 말씀의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이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다”고도 말한다(롬 8:36). 바울도 날마다 고난을 짊어지고 살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확신한다(롬 8:37). 이것이 순례의 삶을 사는 우리의 확신이며 예배가 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항상 고난 가운데 있지만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나를 지키시고 결국은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조금 더 기다리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지금 드리는 예배임을 잊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