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 복을 주실지어다

본문: 시편 128편

설교자: 최종혁

이 시편은 분명 “복”에 관한 시편이다. 1, 2, 4, 5절이 직접적으로 복을 언급하고, 3, 6절도 복의 구체적인 예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을 받는 것이 사람들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라면, 이 시편이 바로 그런 우리를 위한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은 특별히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가정의 달에 잘 어울리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과 앞선 127편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에 포함된 이유는 아마도 많은 순례자들이 가족과 함께 순례길에 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힘든 길에 어쩌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가족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복임을 상기시키며, 더욱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길을 걷는 인생이라는 순례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하는 시편이 바로 시편 128편이다.

128편은 127편과 마찬가지로 지혜 문학으로서 절대적인 약속이 아닌 일반적인 원리를 가르친다. 그런 면에서 이 말씀을 균형있게 봐야 한다. 먼저 1절은 복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를 말하고, 2-3절은 참된 복에 대해서 말한다. 그리고 4-6절은 축복의 말이다.

복 있는 자(1절)

1절은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선포한다.

128:1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복이 있도다”는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익숙한 표현이다. 150개 시편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시편 1, 2편도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말씀이었고, 시편에서만 비슷한 표현이 30번 정도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8복 설교에도 같은 표현이 사용되었다.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은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 참된 행복과 만족을 누리는 사람이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타락한 인간은 그런 복된 삶을 버리고 다른 삶을 찾으려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우리 삶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아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갈급한 우리에게 다른 모든 것은 터진 웅덩이이고, 오직 하나님 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가 되신다. 우리의 복된 삶은 하나님과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1절에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다고 선포한다. 구분을 하자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고(내적인 요소), 그의 길을 걷는 것은 순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외적인 요소). 하지만 사실 상 이 둘은 분리되는 개념은 아니다. 4절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만 언급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길을 걷는 것이 의미 상 제외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둘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만 언급된다고 해도 다른 하나가 항상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진정한 순종은 마음에서 시작되고, 진정한 마음은 순종으로 증명된다.

먼저, 진정 복이 있는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다. “경외”라는 말은 교회 밖에서는 듣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경외는 기본적으로 그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지만, 벗어나고 싶은 공포와는 다르다. 오히려 상상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나 위대함에 압도될 때 느끼는 감정에 가깝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감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알고 그에 압도되어 그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랑과 두려움이 함께 한다. 기쁨과 떨림이 공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에서의 순종이 따라온다. 단지 해야해서 하는 순종이 아니라 하고 싶어서 하는 순종이기 때문이다.

폰 라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삶에서 여호와가 최고가 된다는 의미이며,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로 질서가 잡힌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분이 되시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분이면서 또한 가장 사랑하는 분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의 길을 걷는다.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신 것을 나도 옳다고 하고 그르다고 하신 것을 나도 그르다고 한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한다.

14: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절대 입술의 고백으로 끝날 수 없다. 이렇게 그 삶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하나님의 길을 걷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렇게 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죄책감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경외에는 두려움과 사랑, 기쁨과 떨림이 공존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결코 순종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사회 모든 영역에서 ‘권위’가 사라져가고 있는 오늘날, 교회도 하나님의 권위를 가볍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욱 ‘친근한 분’으로만 소개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 함께 하기 원하시고 우리의 연약함도 이해하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런 면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볍게 만들고, 마치 전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친밀함은 하나님의 권위를 조금도 가볍게 만들지 않고, 따라서 우리의 순종의 의무도 가볍게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순종을 더 무겁게 만들지도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두려움만을 생각하는 경우, 종종 순종을 무거운 짐으로 여기게 된다. 하나님은 매우 가부장적인 엄격한 아버지가 되고, 심지어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순종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이 분노해서 나를 쫓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생각한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뭔가 순종을 통해 인정받아야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애초에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도 그런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사람마다 이 중간 어디 쯤에서 어느 한쪽으로 조금씩 치우쳐 있을 것이다. 죄에 대해서 계속해서 변명이 많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의 이런 연약함은 다 이해하실거라는 생각만 많다면 경외의 ‘두려움’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반대로 순종이 항상 짐이고 불순종 했을 때는 죄책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면 경외의 ‘사랑’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나 인간인 이상 순종하기도 하고 불순종하기도 한다. 이것은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느 때든지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만 생각해서 순종을 가볍게 여기거나, 두려움만 생각해서 순종을 과하게 무겁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다. 그렇게 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이 있다. 여기에는 어떤 경쟁도 없다. 하나님과 나 사이 관계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다른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된다. 내가 하나님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분으로 삼으면 된다. 그래서, 여호와를 아는 바른 지식 가운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기쁘게 걷는 자가 복이 있는 자다. 우리 모두가 이 복을 받을 수 있다.

참된 복(2-3절)

그러면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어떤 복을 주실까? 여기서 시편 기자는 두 가지를 언급하는데, 하나는 ‘일’에 대한 복이고, 다른 하나는 ‘가정’에 대한 복이다.

먼저는 일에 대한 복이다.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127편에서도 언급했지만 일하는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일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의도하셨던 인간의 삶의 방식이다. 죄가 가져온 결과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이고(창 3:18),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더 많은 “수고”다. 먹기 위해서 땅에 심은 것은 “밭의 채소”인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함께 내기 때문에 더 많은 땀을 흘려야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단지 땅에서 농사짓는 상황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로서 모든 일에 해당된다. 죄는 모든 일을 더 어렵고 힘들게 만들었다.

시편 127편은 이런 상황에서 마치 모든 먹고 사는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과도하게 일하는 문제를 암시적으로 지적했다.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사람은 자기 손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수고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대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마치 모든 것이 나의 수고와 노력에 달린 것처럼 과하게 일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마치 하나님께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 될 수 없다.

여기 128:2이 묘사하는 일의 모습(“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은 바로 타락 전의 일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하나님은 저주의 결과를 뒤집으시는 것이다. 그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고 형통함이다. 이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좀 아쉬운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그 정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수고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것, 혹은 남보다 더 잘 먹고 사는 것이어서 그렇다. 노력해서 먹고 사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똑같이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하나님의 복이라고 하면 그 이상이어야 할 것 같데, 그렇지 않은데서 오는 아쉬움 혹은 실망감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과거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풍족하게 살고 있는 영향도 있을 것이다. 과거에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정도면 평균적으로 복이라고 생각했다면, 오늘날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평균적인 복이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가치관을 따를 필요는 없다.

사실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한다. 그렇게 더 부요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한 경고다.

딤전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가져야할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딤전 6:6–8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복을 주시는 모습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복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누군가에게는 일을 통한 큰 성공을 거두게도 하신다. 그럴 때 우리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 ‘누군가’가 왜 내가 되면 안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성경이 경고하고 있는 부하려고 하는 마음인 것을 알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그런 특별한 복을 주셔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하시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복을 주시는 방법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복을 주시는 방법은 그 손으로 수고한 열매를 먹게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아는 것 뿐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일했으니까 당연히 그 댓가를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임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것이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다음으로 가정에 대한 복이다.

128: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아내와 자식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래서 시편 128편은 특별히 아버지를 위한 시편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이 시편을 보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에게 하나님은 일에서의 복을 주실 뿐 아니라 가정에서의 복도 주신다. 먼저는 그의 아내다. 그의 아내는 “집 안방에” 있다(2절). 이것은 집 구석(?)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으른 모습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의 중심이 가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잠언 7:11은 음란한 여인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의 발이 집에 머물지 아니하여”라고 표현했다. 음란한 여인은 가정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아내는 이와는 전혀 반대되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시는 아내를 풍성하게 열매 맺는 포도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이 표현 바로 뒤에 자식들이 언급되기 때문에 여기서의 열매를 자녀로만 보는 경우도 있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자녀가 포함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결실한 포도나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은 잠언 31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이다. 사실 잠언 31:10-31에 묘사된 여인에게 “현숙한”이라는 수식어는 그리 적절하지 않다. 현숙하다고 하면 의미 상 마음이 어질고 조용한 사람인데, 잠언에서 강조하는 여인의 모습은 그렇게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성품(순종적 태도)을 가진 사람이겠지만, 잠언이 강조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이다. 굉장히 활동적이다. 집 밖에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일을 하는 모습이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입을 것을 준비한다. 밭을 살피고 포도원을 일군다. 가난한 자를 돌보기도 한다. 27절이 이 모습을 간단히 정리했다.

31:27 자기의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나니

이런 여인에 대해서 잠언 말씀은 이렇게 칭송한다.

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31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결실한 포도나무인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남편이 밖에서 수고하여 그 열매를 먹는 것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아내도 안에서 수고하여 그 열매를 먹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서로에게 주시는 복이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식탁에 둘러 앉은 어린 감람나무같은 자식들이 있다. 127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인 것이다. 감람나무는 포도나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나무들이었고, 따라서 그 풍성함은 하나님의 복이었다. 시편 기자는 그런 이미지를 가져와서 자녀를 복된 존재로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어린 감람나무는 천천히 자라서 주의 깊게 돌봐야 한다면 면에서 자녀에 대한 좋은 비유라 할 수 있다.

2-3절에 묘사된 모습을 생각해 보면, 가정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의 복이 됨을 알 수 있다. 남편에게는 아내와 자녀가 복이다. 아내에게는 남편과 자녀가 복이다. 자녀에게는 그의 부모가 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가정의 복을 주신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성경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은 이런 가치관에서 정말로 멀어져있다. 길지 않은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달라졌다.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과거에도 일을 ‘돈 벌이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일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도 많았다. 생산적인 일을 통해 사회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에 사람들은 보람을 느꼈다. 그래서 직업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근면 성실’을 기본적인 가치로 여겼다. 성실하게 일하고 그에 합당한 댓가를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다르다. 손으로 수고하여 먹고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지 할 수만 있으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되었다. 직업 선택의 기준은 그냥 ‘돈’이다. 그래서 공부 좀 한다는 사람은 모두 의사, 판사가 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은 부모를 잘 만나는 것이고, 그 의미는 돈 많은 부모, 물려줄 재산이 많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다. 아니면 소위 말하는 뭔가 ‘대박’이 터지기를 사람들은 바란다. 복권, 주식, 코인, 부동산 등 나의 수고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결과를 얻는 것을 모두가 바라고 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죄가 아니고, 주식이 잘되거나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되는 것도 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만 복으로 생각하고 그것만 바라는 것은 문제가 있다. 손으로 수고해서 먹고 사는 사람을 능력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3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가정의 모습은 어떤가? 요즘 사람들은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겨우 찾아내는 것이 ‘늙어서 외로울 때 누가 옆에 있어야 한다. 특히 아프면 어떡할거냐’ 정도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이유다.

실화인지 만들어 낸 이야기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런 얘기가 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물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결혼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지?” 기대한 답은 아마도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와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만들어 낸 이야기이겠지만, 이것이 오늘날 결혼을 보는 사람들의 잘못된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람들은 결혼을 알지 못하고 하는 잘못된 선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을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20대 중반 혹은 후반이 되어서 결혼을 하려고 하면 “왜 이렇게 빨리 결혼하려고 하냐?”는 말을 한다. 젊을 때 즐길 것이 많은데, 굳이 왜 스스로 얽매이는 그런 선택을 하느냐고 묻는다. 결혼해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있다.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그 생각은 틀리지 않다. 그러니까 겨우 찾아낸 이유가 늙으면 외롭다 정도인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18:22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아내를 얻는 것, 결혼 자체가 하나님의 복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장단점을 따져보고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하고, 그래서 결혼에 대해서 더 안좋게 생각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

자녀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자녀를 짐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많아졌다. 부모들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 단절을 걱정한다. 양육의 기쁨은 없고 육아 스트레스만 남아있다. 마치 하기 싫은 일을 떠맡은 사람들처럼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하라고 한다. 이런 이유로 결혼은 했지만 자녀를 갖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혹은, 자녀 양육과 관련된 일들을 외주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부모도 늘고 있다. 자녀 양육을 사회와 교회에 일임하는 것이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교회에 보내면, 부모로서 해야할 일을 다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가 양육하는 사람이 아니라 양육을 맡긴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학습에 대한 책임은 학교나 학원 선생님에게 묻고, 영적인 책임은 교회 선생님에게 묻는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복이라는 성경의 진리에서 멀어졌기 때문에 나타나고 있는 기이한 현상들이다.

복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만큼이나, 무엇이 참된 복인지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이 추구하는 복을 추구한다면, 잘못 찾아왔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복을 추구한다면, 잘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범해 보이지만 좋은 것들을 복으로 여기고 감사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복되고 형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제 4-6절은 이 평범해 보이는 가정의 모습이 하나님의 복임을 다시 확인하고, 그런 복이 지속되기를 비는 축복의 말이다.

축복의 말(4-6절)

128:4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1-3절의 간략한 요약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이런 일상의 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이 사실에 기초하여 축복의 말을 전한다.

128:5–6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6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이 축복의 말에서 두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첫째로, 복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시온에 계시고, 그곳에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하나님을 경외 하지 않는 사람이 2-3절에서 말하는 복을 누린다면, 그 복은 그가 얻어냈거나 혹은 그가 믿는 다른 신이 준 것이 아니라, 그 역시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면 더욱 이런 복을 구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면 그 길에 있는 복을 자연스럽게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이 복된 길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가정의 복은 사회의 복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의 번영이스라엘의 평강을 언급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때, 그들이 속한 공동체도 복을 받는 것이 된다. 또한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복을 주시는 것은 곧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레미야는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할 것을 말했다.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같은 원리가 신약에서 바울이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할 때도 적용되었다.

딤전 2: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즉, 5-6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리고 이 시편으로 노래하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의 삶에 필요한 평범한 복을 주시기를 구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복주신 경건한 가정들을 통해 사회가 번영하고, 사회의 평안으로 인해 가정의 안전이 보장되어, 자식의 자식을 볼 때까지, 혹은 그 이상으로 이 땅에서의 삶을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로 걸을 수 있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야말로 복된 삶이다. 뭔가 대단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이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가득한 삶이다. 우리도 이런 삶을 추구하고, 또한 서로가 이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

도전

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복을 원하면서도 복으로 가는 길은 거절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그 복에 대한 정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의 조건을 고려해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길로 걷는 것은 그 복에서 오히려 멀어지는 일이지 가까워지는 일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사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길로 걷는 자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이 되어 자기 길로 걷는 자가 행복하다고 사람을 속였고, 사람들은 그런 사탄의 거짓말에 속았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의 길을 걷는 것은 복을 얻는 길이 아니라 손해보는 길처럼 보인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분명하게 말한다.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이 보기에 바른 길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바른 길로 가야한다. 그 길이 정말로 나와 내 가족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미 이 길을 선택한 성도의 입장에서 이런 말씀들은 위로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것이 옳다고는 생각하는데, 당장에는 뭔가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내 입장에서는 복이라고 느낄만한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주위를 보면 그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사람은 정말 그런건가 싶을 정도로 잘 사는 모습이 보인다.

이런 갈등은 사실 오래된 갈등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기 때문에, 그 나라를 향해 걸었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갈등 가운데 살았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37:1–7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히브리서의 저자를 통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결국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내가 바라는 복이 이 땅에 속한 복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복이라면, 반드시 그 복은 나의 것이 된다. 그러니 앞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초조해 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