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두르시리로다
본문: 시편 125편
설교자: 최종혁
예루살렘은 산맥의 능선에 위치해 있지만 주변에서 가장 높은 곳은 아니다. 예루살렘 주변에는 감람산을 비롯한 더 높은 산들이 있고,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그 산들을 넘어가야 한다.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서기 전에 높은 곳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감람산을 넘어 가셨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성에 가까이 가셨을 때 안타까운 마음에 울기도 하셨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순례자들에게 높은 곳에서 보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다른 의미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동안의 힘든 여정을 마무리하고 이제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감격과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시편 125편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묵상하는 시편이다. 121편이 높은 산들을 바라보면서 참된 도움에 대해서 묵상한 시편이라면, 125편은 그런 도움으로 산에 오른 사람의 묵상인 것이다.
그곳에서는 든든한 시온 산 위에 자리 잡은 성전이 보였을 것이고 높은 산들에 둘러쌓인 예루살렘의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순례자 자신 역시 그곳까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올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을 것이다. 그것이 단지 이 순례의 길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순례의 길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삶, 하나님을 믿는 자의 모든 삶에 해당된다는 데까지 이어진 묵상의 결과가 시편 125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시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하심에 대해, 그리고 보호받는 백성의 삶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시 125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확실한 보호(1-3절)
먼저, 이 시편이 누구에 대해서 말하는지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누구를 보호하신다고 약속하시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1절은 이 사람들을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라고 표현한다. 2절은 “그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3절은 “의인들”이라고도 한다. 4절은 “선한 자들”, “마음이 정직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5절은 “이스라엘”로 이들을 특정한다.
결과적으로 이들을 “이스라엘”이라고 통칭해서 말하지만,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절의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도 맥락 상 이스라엘 민족에 속한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백성 중에 있지만 자기 길을 선택하여 결국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하게 될 사람들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은 단지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참된 이스라엘,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특징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 선한 것, 마음이 정직한 것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이것이 이들 삶의 특징인 것이다. 이들이 참된 순례자이고 예배자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선인과 악인에게 모두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이다.
먼저 1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안전함에 대해서 말한다.
시 125: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의지하는 것은 무언가를 온전히 신뢰하여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의심하지 않고 안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대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이다. 우리는 집이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믿고 집에 들어간다. 심지어 수십미터가 넘는 높이의 집에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간다. 아무런 의심 없이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택시를 탄다. 그 안에서 잠도 잔다. 정해진 금액을 내면 원하는 목적지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면 별 생각 없이 악셀을 밟는다. 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마주오는 차가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의 사회 시스템을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들이다.
생각해 보면 조금만 잘못되어도 생명까지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데,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일들을 한다. 이것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버스를 탈 때, 기사님에게 인사는 하지만 엔진오일은 언제 갈았는지, 타이어나 브레이크 상태는 확인했는지 묻지 않는다. 택시를 부르면 난생 처음보는 사람이 오는데도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탄다.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그 바탕에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모습이다. 아는 것 이상으로 믿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 믿음에 따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도 이런 면에서 비슷하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도 그렇다. 경험을 통해 믿음이 더 커지고 견고해질 수 있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할 만큼 다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니다. 이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무엇을 하시든 의심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고, 신뢰하며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랑처럼 보이지 않아도 믿고 따른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분의 일이 불의해 보여도 믿고 따른다. 편한 길이 있어 보여도, 그 길이 하나님의 길과 다르다면 선택하지 않는다. 다 이해되고 납득되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보다 잘 아시고 나보다 지혜로운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한다.
이런 절대적인 의지가 누군가에게는 불안해 보이고 더 나아가서는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믿고 신뢰하고 의지했던 대상에 대해서 실망하는 경험을 항상 해왔다. 사회 시스템 같은 경우도, 그 시스템에 따라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면 남들보다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이 더 편하고 즐겁게 사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에 대한 신뢰도 그렇다. 알면 알수록 경험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한 기대는 언젠가는 무너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습득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실패한 경험들이 하나님께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한다는 말이 좋지 않게 들린다.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말 같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도 사기꾼들이 많이 사용해서 안좋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정말로 다르시다. 성경의 시작에서 선포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천지에 속한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다르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심지어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시간조차도 초월하는 분이심도 알 수 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시다. 하나님만이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셔서 그렇다. 믿을만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특히 “의지한다”는 것은 실제로 내 삶을 하나님께 기대고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이 무너지면 내 삶도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1절 말씀은 그런 사람이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다고 말한다.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비교한 것이 바로 “시온 산”이다.
성경에서 산이나 땅, 바위(반석) 등은 그 자체로서 든든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 자주 사용된다. 꼭 성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땅에 대해서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에는 강산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온 산은 더욱 특별하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시온 산을 언급한 것은 단지 익숙한 산이어서가 아니라 특별한 산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시온 산은 바위 산으로서 다른 산에 비해 더 튼튼하고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시온 산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성전의 터가 되는 산으로서 특별하다(시 87:1-3; 132:13-14). 그래서 다른 산들이 혹시 무너져도 시온 산은 무너질 수 없는 산이다.
시 46:2–5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4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5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것이 시온 산의 이미지였다.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는 것이다. 안전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도 이와 같다. 의지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정말로 이런가?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가? 우리가 잘 아는 믿음의 선진들도 항상 이렇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엘리야도 갈멜 산에서의 큰 승리 후에 오히려 하나님께 죽기를 구하기도 했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었다. 바울도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탄식하기도 했다. 구약의 성도든 신약의 성도든 다 흔들렸던 때는 있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럼 1절 말씀은 단순히 희망사항일 뿐일까?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우리는 ‘흔들림’의 주관적 측면과 객관적 측면을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똑같은 비행기를 타도 편안한 사람이 있고 불안한 사람이 있다. 객관적인 사실은 동일하다. 다만 그 상황에서 각 사람이 느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매우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고 어떤 사람은 매우 위험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 느낌과 관계 없이 비행기는 두 사람 모두를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게 할 것이다. 비행기에만 문제가 없다면 그렇다.
1절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은 흔들림의 객관적인 측면이다. 이 사람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의 주관적 상태와 관계 없이 이 사람은 객관적으로 안전하다. 흔들리지 않는다. 그 이유가 2절에 제시되어 있다.
시 125: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안전함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확실하게 의지하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 사람을 보호하시느냐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둘러서 보호하신다. 여기 “두른다”는 것은 허리띠를 두르는 것처럼 몸에 무언가를 휘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둘레에 무언가를 쌓아서 에워싸는 것 혹은 손이나 팔로 감싸는 것을 의미한다. 높은 산에 둘러싸인 예루살렘의 모습이 이런 이미지를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예루살렘을 둘러싼 더 높은 산을 넘어야 했다. 이 말은 예루살렘이 천연 요새였다는 의미다. 침략하는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지형이다. 이 산들은 마치 예루살렘을 보호하기 위해 누가 일부러 그곳에 둔 것처럼 보였다. 시편 기자는 이 모습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사방에서 오는 공격들을 막아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이다. 다윗도 비슷한 이미지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시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이렇게 보호하신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두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성을 둘러싼 성벽처럼, 혹은 아이를 안아서 보호하는 부모처럼, 그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지금도 그렇게 하시고 영원까지 그렇게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있다. 안전하다. 때로 그의 주관적인 믿음은 흔들릴 수 있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열왕기하 6장은 이 사실을 실제로 잘 보여준 사건을 기록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려던 아람은 번번히 실패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계속해서 그들의 매복 작전을 이스라엘 왕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엘리사를 먼저 잡기 위해서 많은 군대를 엘리사가 있는 곳으로 보내서 그 성읍을 에워쌌다.
이 장면을 먼저 본 사람은 엘리사의 사환이었다. 군대가 온 성읍을 에워싼 모습을 보고 그는 절망 가운데 엘리사에게 어떻게 해야하냐고 물었다. 이에 엘리사는 의외의 말을 했다.
왕하 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엘리사와 그의 사환은 똑같은 상황 가운데 있었다. 하지만 사환은 두려워했고, 엘리사는 그렇지 않았다. 사환이 두려워했던 이유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아람 군대 때문이었다. 그럼 엘리사는 왜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아람 군대가 온 것을 몰랐을까? 아니다. 엘리사의 눈에는 아람 군대 외에 다른 것도 보였기 때문이다.
왕하 6: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엘리사에게는 처음부터 그를 둘러싼 하나님의 군대가 보였었다. 그래서 그를 둘러싼 아람의 군대가 두렵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엘리사의 사환도 이 장면을 보게 된 후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정말 좋은 그림이다. 사환의 눈에는 하나님의 보호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두려워했지만, 사실 그때도 하나님은 보호하고 계셨다. 안전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안전하지 않은 사람처럼 두려워했다. 흔들렸다. 이 보이지 않는 객관적 사실을 믿음으로 보면 흔들리지 않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흔들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의지하는 자, 그의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그렇게 하신다.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 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30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31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때로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셔서 내 삶의 어떤 부분에는 관심이 없으실 것 같다.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는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기도를 하고 뭐를 해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고 절망적일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두르고 계시기는커녕 멀리서 보고 계시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느낌이 사실은 아니다. 사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고 보호하신다는 것이다. 들의 풀 하나,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관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 내 삶의 가장 작은 일부도 하나님은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삶의 ‘대부분’에 있어 소홀하지 않으신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전하게 끝까지 하나님의 뜻대로 보호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일부’의 사람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일부’가 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그럴 가능성은 없다.
요 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내 삶에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원하는 모든 일이 잘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200km로 달리다가 사고가 나도 어디 하나 다치지 않을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호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끝까지 인도하신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그 끝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고 약속해 주셨다. 우리는 결국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과정은 우리가 알지 못하게 숨겨두셨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따라간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신뢰하며 그렇게 한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 영원까지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사실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 믿음 가운데 거할 수 있다. 고난 중에도 평안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
욥은 고통 중에 이렇게 고백했다.
욥 23:8–9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9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하나님께서 나를 두르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온 사방을 둘러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욥의 이어지는 말은 이렇다.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시고 바르게 인도하고 계시다는 확신의 말이다. 8-9절이 사실인가, 10절이 사실인가? 우리 육신의 눈에는 8-9절이 사실이다. 우리 감정도 8-9절이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진짜 사실은 10절이다. 이 사실을 계속해서 붙드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나의 대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그 중간에 계신다. 나를 위협하는 것과 나 사이에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이 나를 두르고 계신다. 언제나 그렇다.
그런데 나의 감정은 이 사실을 잘 보지 못하게 한다. 욥도 앞의 말씀에서 8-9절의 감정과 10절의 사실 사이에서 갈등했을 것이다. 감정이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이 감정을 따르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유진 피터슨, “이 시편에서 믿음의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바위산 … 아무것도 그것을 움직일 수 없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나는 움직인다. 어느 날은 믿음으로 가득 차 있다가 다음 날은 의심으로 텅 비어 있다. … “아무것도 그것을 움직일 수 없다”고? 나에게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거의 모든 것에 의해 움직일 수 있다. 슬픔, 기쁨, 성공, 실패. 나는 날씨에 따라 오르내리는 온도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시편 125:1-2보다 이 고백이 더 친숙할지도 모른다. 이 고백에 더 ‘아멘’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모습은 아니다. 감정에 따라, 순간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해주는 진리를 믿고 살아야 한다.
시 139:7–12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9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11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12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우리는 엘리사의 사환처럼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오히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나를 공격하고 무너뜨리려는 적들 뿐일 수 있다. 다윗의 말처럼 흑암이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11절).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의 가장 어두운 순간이라도 하나님에게서 나를 숨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나를 보시고 보호하신다. 그리고 끝까지 인도하신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이 사실에 집중할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3절 말씀은 그래도 의심하는 연약한 자를 위한 말씀이다.
시 125: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규”는 ‘통치자의 지팡이’이기 때문에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은 “의인들의 땅”에서는 악인의 통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 의인들의 땅은 어디일까? 궁극적으로는 모든 악이 제거된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할 것이다. 악의 권세는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 나라다. 하지만, 여기서는 현재적 의미에서의 의인들의 땅을 생각해 봐야 한다. 뒷부분의 말씀이 의인들이 죄악에 손을 대지 않는 것(여전히 가능한 죄)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인들의 땅”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의인이 악인의 땅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의인들의 땅이라고 불릴 수 있는 곳이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그러해야 했고, 지금 교회가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금 이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고 있는 곳은 의인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실제적인 영토의 개념이 아니라 삶의 개념이다. 지금 우리 삶에는 악인들의 통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통치가 계속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의인들이 죄악에 손을 대게 되기 때문이다. “손을 대는 것”은 살짝 건드리는 것 같은 어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강한 표현이다. 죄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하여 굽은 길로 치우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나안 민족을 몰아내고 가나안 땅을 점령했던 이스라엘이 스스로 가나안 민족과 같이 되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말한다. 악인의 권세 아래 있을 때, 그 권세에 굴복하여 그 길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죄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떠나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신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보호하시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일어났었을 일들, 그로 인해 믿음을 떠날 수도 있었던 일들을, 하나님은 믿는 자의 삶에 허락하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게 지키신다. 그 믿음을 지키게 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두르신다는 말의 의미다. 그럼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보호받는 백성의 삶(4-5절)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시 125: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확신에 대한 말씀은 우리를 불필요한 나태함으로 이끌지 않는다. 즉, 하나님께서 다 보호하신다고 하니까 난 그냥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 없겠다와 같은 생각으로 이끌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마음대로 사는 것’이 “선한 자”, “마음이 정직한 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확신에 대한 말씀은 말 그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확신을 두게 한다.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기도하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첫번째 반응이 되어야 한다.
둘째로 바른 길로 행해야 한다.
시 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직한 길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실 것이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자기의 굽은 길”로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실 것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심판하시는 사람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의 보호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경고의 말씀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자기의 굽은 길로 행하려고 하면서 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길로 가기 원하는 사람이다. 그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기꺼이 그 길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며 푸른 풀밭 뿐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호 받는 백성의 삶이다.
도전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두르신다. 안전하게 보호하신다. 이 시편의 끝에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며 시를 마친다(5절).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있기를 구하는 축복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기도는 두 부류의 사람에게 다르게 적용된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이스라엘이라면, 악으로 인해 핍박이 있고 유혹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에 집중하며 이런 평강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여전히 자기의 굽은 길로 행하는 거짓된 이스라엘이라면, 그 길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선행되어야 이런 평강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게도 하나님의 평강이 있기를 기도한다. 회개가 필요한 자들은 회개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 자들은 신뢰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평강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 교회만 나온다고 해서 이 평강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는 그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가득하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