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본문: 시편 129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29편은 후반부의 내용으로 인해서 ‘저주의 시편’으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109편만큼 그 정도가 심하지는 않지만, 대적들이 수치를 당하고, 그들이 풍요를 누리지 못하기를 구하는 내용은 분명 저주에 합당한 기도라 할 수 있다.
저주의 시편은 읽는 사람을 매우 당황하게 하거나 반대로 안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안심하는 경우는 이렇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복수심을 가지면 안된다는 얘기만 들었는데, 성경을 보니 다윗 같은 사람도 이렇게 다른 사람을 미워해서 저주하는구나하는 생각에 안심하는 것이다. 반대로 당황하는 경우는 이런 말씀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경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양쪽 다 저주의 시편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해석이 아니다.
예전에 저주의 시편을 다루면서 몇 가지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첫째로 저주의 시편 내면에 있는 동기는 개인의 복수심이나 증오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에 대한 증오이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에 대한 확신이다. 화자는 개인보다는 국가나 사회 차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
둘째로 저주의 시편은 내가 그대로 갚아 주는 것을 방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행하시는 것을 방법으로 생각한다. 셋째로 저주의 시편은 억울함을 푸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정리하면, 저주의 시편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이기적인 방법으로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저주의 시편은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 중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에 해당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가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의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하고 악인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 저주의 시편은 심판을 바라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시편 129편은 사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두 결과를 모두 언급한다. 1-4절이 바로 구원에 대한 말씀이고, 5-8절이 심판에 대한 말씀이다.
129편은 여전히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이 소품집의 처음에 언급했었던 것처럼 공동체의 예배와 예배자의 삶에 관련된 주제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또한 이는 순례의 관점에서 조명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에 대한 말씀들도 많다.
129편도 내용적으로 보면 이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의 128편 끝에 보면 (또한 125편 끝에도)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는 축복의 기도가 있는데, 이를 반대 측면에서 풀어썼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심판하실 때 이루어진다. 시편 129편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계속해서 또한 궁극적으로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한다.
그 기억과 기대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억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확신할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확신이 앞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게 한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듯이, 오늘날의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먼저는 시편 129편 본문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이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 그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억(1-4절)
시 129: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도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이라는 표현은 124편의 시작에서처럼 분명 찬양으로의 초대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배하자는 표현이다. 124편에서는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찬양했다. 124편에서도 사람들의 핍박이 짧게 언급되었지만(시 124:2,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전체적으로 강조한 것은 가정에 기반한 가상의 결과였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아니셨다면 이렇게 되었을텐데,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모든 차이를 만들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129편도 비슷하지만,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괴롭힘을 당한 일을 기억하면서 그것을 노래하라고 한다. 심지어 그 고통을 비유적으로 꽤나 생생하게 언급하기도 한다(3절). 간단히 말해, 우리가 얼마나 괴로웠는지를 생각해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의미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1절의 표현에서 특이한 점은 ‘괴로움’ 자체에만 집중하지 않고 그 괴로움을 준 자들도 함께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때 우리가 참 괴로웠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은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핍박이었던 것이다. “여러 번”은 횟수를 말할 수도 있지만 정도를 말할 수도 있다. 우리말의 “많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많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3절은 이 괴로움을 은유적으로 생생하게 표현했다.
시 129:3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
“밭 가는 자들”은 1절의 “그들”이고, 4절의 “악인들”이다. 5절에는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라고도 표현되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미워한 자들이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땅(밭)에 비유되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마치 밭 가는 자가 밭을 갈아 고랑을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이스라엘의 등에 고랑을 만들었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꽤나 소름끼치는 장면이다.
사람의 등에 어떻게 고랑을 만들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채찍질’이다. 채찍질은 주로 등에 하고 등에 길쭉한 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노예나 죄수, 전쟁 포로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3절의 고랑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따라서 반복되는 채찍질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길게”라는 표현은 “밭 가는 자들”이 이 일을 꽤나 열심히 했음을 강조한다. 밭을 가는 사람은 고랑을 만들기 위해 땅을 간다.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열심을 다한다.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자들의 모습이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은 긍휼을 베풀지 않았다. 동정하지 않았다. 최대한 아프지 않게 이 일을 하지 않았다. 마치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목적인 것처럼 그렇게 핍박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특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릴 때부터”라는 표현에 가장 적합한 것은 애굽이라 할 수 있다.
호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애굽은 야곱의 가족이 이스라엘 민족으로 탄생하는 어머니의 뱃속 같은 역할을 했다. 하나님은 당대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을 사용하셔서 야곱의 가족을 안전한 가운데 번성하게 하셔서 하나의 민족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애굽에 있었을 때가 민족적으로 이스라엘은 “어릴 때”였다.
물론 애굽이 원해서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정말로 보호해 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출애굽기 1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숫자가 늘어나면서 강성해져 갈 때 애굽은 이스라엘을 핍박했다.
출 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
출 1:13–14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을 엄하게 시켜 14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
이 정도로도 통제가 어렵자, 애굽 왕은 이스라엘의 새로 태어나는 남자 아기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을 보내라는 말을 전했을 때도 애굽 왕 바로는 이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면서 오히려 노동을 더 무겁게 만들기도 했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심판을 견디지 못해서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냈지만, 애굽은 끝까지 그들을 추격해 왔고 홍해에서 그 군사들이 몰살 당하기까지 했다. 애굽은 분명 이스라엘을 어릴 때부터 많이 괴롭혔던 자들이었다. 특히 그들을 건축 노예로 삼았던 부분은 3절의 표현에 잘 들어맞기도 한다.
하지만, 애굽만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에게 평화의 시대는 많지 않았다. 그들 주변에 있던 나라와 민족들을 크든 작든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사사 시대에는 주변에 있던 블레셋, 미디안, 모압, 암몬과 같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약탈하며 괴롭혔었다. 사울,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진 통일 왕국 시대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주변국들과 비교하여 군사적 우위를 점했지만, 솔로몬 이후 분열 왕국 시대에는 아람과 에돔, 모압 등과 끊임없는 전쟁을 치뤄야 했었고, 그러다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읽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편 129편이 언제 기록되었는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모든 시대의 이스라엘은 다 동일하게 1절과 같은 고백할 수는 있다. 심지어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헬라 제국에 의해, 로마 제국에 의해 압제를 당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로 인해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물론 모든 경우에 이들이 억울하게 핍박을 당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사사 시대나 바벨론 포로기는 오히려 이들의 죄의 결과로 성경에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언제나 ‘참된 이스라엘’이 있었다. 사사 시대에도 보아스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고, 바벨론 포로기에도 다니엘과 친구들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그야말로 까닭 없이 고난을 당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편 129편은 이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고난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 고난을 기억(회상)하면서 찬양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 괴로운 기억 속에 하나님의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시 129:2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고난을 당한 것은 맞다. 괴로웠던 것도 맞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패배하지는 않았다. 나를 괴롭혔던 자들은 나를 이기지 못했다. 왜일까?
시 129: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
이런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다고 표현한다. “줄”이 악인들의 무기였던 것이다. 여기서 줄은 3절의 밭 가는 은유가 이어져서 소의 멍에의 줄을 의미할 수 있다. 멍에의 줄이 끊어져서 더 이상 밭을 갈 수 없게 된 상황인 것이다. 혹은, 단순히 노예를 속박하는 줄이 끊어진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가 여기서는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하는 일, 즉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드셨다는 의미는 동일하다. 그 줄이 어떤 줄이든, 악인의 손에 들려서 하나님의 백성을 속박하고 박해하는 모든 줄을 하나님께서 끊으셨다.
그들은 잠시 이스라엘을 괴롭힐 수 있었고, 그들의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스라엘을 영원히 노예로 삼는다든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말살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줄을 끊으셔서, 완전히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하게 만드셨다.
이것 때문에 시편 129편의 저자는 그 괴로움을 말하라고 하는 것이다. 기억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경험했던 괴로움은 마치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역사 상 그런 괴로움을 경험했던 나라들은 다들 패배했다. 사라졌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은 넘어졌지만 아주 엎드러지지는 않았다. 괴롭힘을 당했지만 완전히 패배하지 않았다. 회복의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루터기같이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이스라엘을 이기지 못했다. 괴로움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을까?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하나님이 의로우셔서 이런 의로운 일을 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 쪽에 어떤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항상 심판의 대상인 사람들에게 그 이유가 있다. 하지만 구원은 항상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에게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자기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괴롭힘을 당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 사실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대하는 것이다.
또한 반대 측면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심판에 대한 기대로 이어진다. 이것이 5-8절의 말씀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씀은 개인적인 복수심에 기반한 증오의 기도 같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심판을 통해 나타나기를 바라는 기도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기대(5-8절)
시 129:5 무릇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여 물러갈지어다
이 기도의 대상이 “무릇(모든)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라는 것도 이것이 개인적인 감정에 따른 기도가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지금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있는 대상은 시온,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장소, 더 나아가서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미워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이 “악인들”이다(4절).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이들이 “수치를 당하여 물러”가기를 구한다. 이들이 패배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들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구하는 것이다. 6-7절은 비유로 이 기도의 의미를 생생하게 그린다.
시 129:6 그들은 지붕의 풀과 같을지어다 그것은 자라기 전에 마르는 것이라
그들이 지풍의 풀과 같이 되기를 바란다. 이 비유의 핵심은 이 악한 자들이 잠시 번성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곧 그조차도 사라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붕의 풀”은 말 그대로 지붕 위에서 자란 풀을 의미한다. 시골의 집들을 보면 지붕 혹은 옥상에 바람 등에 날려온 흙이 쌓이고, 거기에 마찬가지로 바람 등에 날려온 풀이 자라는 경우가 많다. 고대 이스라엘의 집들은 나뭇가지와 흙 등을 섞어서 평평한 지붕을 만들었고, 그곳에는 쉽게 얕은 흙이 쌓였다. 그리고 그곳에 씨앗은 쉽게 뿌리를 내렸다.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돌밭과 같은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흙이 얕기 때문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쉽고 싹도 금방 올라온다. 하지만 자라기 전에 말라버린다. 깊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따라서 지속적으로 수분을 공급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풀들은 무성하게 자랄 수 없다.
시 129:7 이런 것은 베는 자의 손과 묶는 자의 품에 차지 아니하나니
여기서는 수확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손으로 풀을 잡고 낫으로 벤다. 그렇게 벤 풀들을 품에 모아서 단을 만든다. 그런데, 지붕의 풀들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손에 찰 만큼, 품에 찰 만큼의 풀이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지금 이 장면을 시온을 미워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여 물러가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한 때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면서 자신들의 뜻을 이루어 번성하는 것 같지만, 곧 사라지는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시편 기자는 바란다. 그리고 이어지는 8절은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지 않음을 명확히 선언한다.
시 129:8 지나가는 자들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거나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 하지 아니하느니라
앞서 수확의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연장으로 보면, 이 장면은 수확하는 자들이 서로 인사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추수 때에 풍성한 수확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서로에게 축복하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다만, 이런 인사는 상황에 따라서 어느 정도의 진심을 가지고 인사하느냐는 달라질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인사조차도 악한 자들에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악한 사람에게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줄 수는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그들 영혼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를 구할 수는 없다. 그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들의 계획은 실패해야 한다. 그들은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합당하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그들에게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심을 최후 심판 전에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악한 계획이 모두 잘 이루어지면 절대로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이 저주의 기도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위한 축복의 기도일 것이다. 가끔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다. 마음이 완강해서 계속해서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의 마음이 낮아지기를 기도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나쁜 일이 생기기를 기도하지는 않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계기는 그가 원했던대로 일이 되지 않을 때에 만들어진다. 건강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그런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일반의 복마저 거두셨을 때, 오히려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시편 기자가 그런 의도로 악인의 멸망을 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가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악인에 대한 심판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의인에 대한 구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전
이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 1-4절의 말씀에 적용되는 성경의 원리는 이렇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안전하다. 반대로, 5-8절에 적용되는 성경의 원리는 이렇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적들은 지금 번영하는 것 같더라도 결국은 멸망한다.
129편의 말씀은 사실 좀 더 큰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게 한다. 계시록 12장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아이를 배어 해산하는 “여자”로 묘사한다(계 12:2). 그리고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은 “용”으로 묘사되어서,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려고 한다(계 12:4). 그 “아이”가 바로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계 12:5),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다. 사탄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방해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아이는 하나님 앞으로 올려간다(계 12:5). 하지만 사탄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이를 낳은 여자를 박해한다(계 12:13).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 여자를 양육하고 보호하신다(계 12:6, 14).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핍박을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을 그렇게 여러 가지로 핍박했던 것이다. 거기에 많은 나라와 왕들이 도구로 사용된 것이다. 그들이 다 귀신들린 사람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욕심에 따라 그렇게 했겠지만, 그것이 사탄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신 계획을 이루신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데 있어 ‘장애’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장애를 극복해가시면서 그 뜻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생각하는 ‘장애’는 이미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도 순례자로서 이 땅을 살면서 박해를 받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행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이렇게 박해를 받는 이유는 분명하다.
요 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예수님을 따른다면 박해는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세상에서 박해 받지 않고 사랑을 받으면 그것은 교회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교회는 다른 이유로 세상의 미움을 받으면 안된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는 언제나 미움을 받는다. 그것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공격했듯이 교회도 계속해서 공격한다.
벧전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어떻게든 교회를 무너뜨릴 기회를 엿보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 개인을 공격하고, 교회를 공격한다. 사탄도 하나님의 큰 계획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여전히 작은 승리를 이뤄낼 수 있다는 사실에 사탄은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삼킬 자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우리도 괴로움을 당한다. 하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4:8–9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그리고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박해나 고난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이나 의로우심이 더 잘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면 전도도 훨씬 더 쉬워질 것 같다. 그래서 이런 박해나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그 의문에 대한 구체적이고 온전한 해답은 아마도 끝까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나님처럼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이루신 일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있다. 고난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고, 따라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의 등에 패인 고랑, 그 머리의 가시 면류관, 그 손의 못자국, 그 몸의 창자국이 아니었으면, 이 모든 일이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도 그와 같은 일을 하심을 우리는 믿을 수 있다. 나의 고난을 통해 누군가를 구원하기도 하실 것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기도 하실 것이다. 누군가를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누군가를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다 좋은데, 꼭 내가 괴로워야할까요?’라는 생각이 여전히 들겠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결국 그 모든 일을 내가 아닌 하나님이 하셨음을 그 괴로움이 증명하여 하나님을 높일 것이다. 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임을 분명히 선포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는 괴로움을 당하겠지만 결국은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고백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셔서 그 모든 일을 하셨음을 고백하며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 우리가 드릴 합당한 예배를 드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