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22

본문: 시편 119:161-168

설교자: 최종혁

신/쉰: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161-168절)

시편 119편은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8절씩 각 연이 구성되어 있다. 20시간 동안 한 연씩 살펴봤고, 이제 두 연만 남아 있다. 시편 119편 설교의 제목을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이라고 했는데, 이는 시편 119편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는 선포이기도 했고, 다짐이기도 했고, 때로는 절규에 가깝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기도 했고,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 사실을 지금까지의 시편 119편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직접적인 표현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가 고난 중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 땅을 살아간 그리고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좋은 본이 되었다.

오늘 본문인 161-168절은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본을 모아 정리한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오늘 본문은 시편 119편의 마무리로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완벽한 마무리 보다는 보다 현실적인 마무리를 원했다. 그 부분은 다음 주에 다루게 될 것이다. 오늘은 가장 이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갈 때에 가져야 할 삶의 태도와 확신할 수 있는 결과, 그리고 합당한 동기에 대해서 본문을 통해 살펴보자.

119:161–168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64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5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6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7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가져야 할 태도(161-164절)

두려움의 대상(161절)

먼저 시편 기자는 자신의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을 분명히 말한다.

119:161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여기 “경외하나이다”로 번역된 단어는 기본적으로 ‘두려워하다. 무서워하다’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 대상이 “주의 말씀”이기 때문에 “경외하다”로 번역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즉, 시편 기자는 그 어떤 권위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23절에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시편 기자에게는 높은 지위에 있는 대적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짓으로 혹은 특별한 이유 없이 부당하게 시편 기자를 핍박했다.

이런 상황은 두려운 상황이다. 기본적으로 말에는 힘이 있다. 그런데 영향력 있는 사람의 말에는 더 큰 힘이 있다. 그 힘으로 거짓을 진실로 만들 수도 있다. 시편 기자를 공격하던 사람들이 고관들이었다는 것은 분명 이런 면에서 단순히 그를 비방하고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고관들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다. 요즘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군에 있으면서 이런 비슷한 경험을 종종했다. 때로 고참들이 서로 다른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있다. 한 사람은 평소에 잘 대해주던 사람이고, 한 사람은 조금만 잘못해도 화를 내고 벌을 주던 사람이라면,  대부분은 후자, 즉 ‘더 무서운(두려운)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된다. 두려움은 사람의 선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려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은 상황에서 어떤 사람은 평소에 잘 대해주던 사람의 말을 따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벌을 받고 매를 맞는 두려움보다 자신에게 잘 해주었던 사람을 배신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더 크기 때문일 수 있다. 어떤 두려움을 더 크게 보느냐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에게 두 두려움이 있었다. 고관들의 핍박으로 인한 당장의 현실적인 두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어떤 두려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가? 사실 그리 계산이 복잡하지는 않다. 사람과 하나님 중에 누가 더 두려운 존재인지는 언제나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명확한 선택을 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람이 언제나 하나님보다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람의 두려움은 지금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진다.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때 내가 볼 손해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신다. 게다가 하나님은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다고 해도 받아주고 용서해 주실 것 같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잘해주는 고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더 두려워하여 사람의 말을 따른다.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우리가 순간 순간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이유는 제대로 알지 못해서다. 정말로 믿지 못해서다.

다니엘의 친구들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좋은 본이 된다. 그들 눈 앞에 절대 권력자인 왕이 있었고, 뜨거운 풀무불이 있었다. 왕이 세운 금 신상에 절하지 않는 그들에게 왕은 한번의 기회를 더 주겠다고 말했고,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지겠다고 위협했다.

그런 왕의 제안을 다니엘의 친구들은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단 3:16). 그들에겐 왕이 두렵지 않았을까? 풀무불이 뜨겁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 고민할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 했다. 그들은 순종을 선택했고,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것으로 보상해 주셨다.

다니엘도 동일한 선택을 했고 동일한 경험을 했다. 다니엘을 시기했던 고관들은 계략을 세워서 왕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게 기도하는 자를 사자 굴에 던져넣는 금령을 왕의 도장을 찍어 조서로 선포했다. 다니엘은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전에 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다(단 6:10). 다니엘에게 있어서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도 그랬다. 예수님을 전한다는 이유로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핍박을 받을 때 사도들은 이렇게 답했다.

4: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5: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을 비롯한 다른 믿음의 선진들도 동일했다. 여러 고민거리가 그들에게 있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이냐, 아니면 사람의 말을 따를 것이냐는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이들은 실제로 권세를 가진 고관들에게 핍박을 받았다. 그들의 목숨이 위협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선택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이다.

시편 기자도 그런 동일한 선택을 했다. 하기 싫은 선택을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었던 그의 대적들과는 다르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있고, 아무리 큰 힘을 가진 사람이 있어도,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가장 능력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세상이 보기에는 어리석은 선택이고, 누군가가 보기에는 힘든 선택이겠지만,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보게 될 것이다. 우리와 같은 길을 그들이 선택할 수도 있고 혹은 끝까지 조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이런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즐거움의 대상(162절)

두려움이 사람의 선택을 좌우하는 중요한 한 요소라면, 다른 측면에 있는 것은 즐거움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두려움 뿐 아니라 즐거움의 대상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119:162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14절에서도 비슷하게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했다고 고백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재물을 기뻐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162절에서는 좀 더 특별한 재물을 언급한다. 바로 ‘탈취물’이다.

‘탈취물’이라는 단어 자체가 좀 부정적으로 들린다.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표현은 그런 부정적인 뉘앙스를 빼고 승리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하면 좋다. 그런 면에서 ‘전리품’ 정도가 적당한 번역일 것이고, 영어의 ‘트로피’가 우리가 이해하기 좋은 표현일 것이다.

스포츠 선수들은 트로피를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경쟁한다. 사실 트로피 자체가 굉장히 값어치있는 무언가는 아닐 수 있다. 많은 선수들이 자기 돈으로 그런 트로피를 만들어서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트로피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얻어낸 승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승 세레머니를 보면 트로피를 치켜들면서 다 같이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결국 그것을 위해 그동안 힘든 훈련을 해왔다. 남들이 잘 때 일어나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한걸음을 더 뛰었다. 듣기 싫은 소리도 들어가며 모든 것을 희생했다. 그 모든 것이 우승 트로피로 보상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땀과 눈물과 인내를 기쁨으로 바꾼다.

시편 기자가 말하는 많은 탈취물을 얻는 자들의 기쁨이 바로 이런 기쁨이다. 자신의 모든 것, 심지어 목숨까지도 잃을 것을 감수하면서 싸웠고 마침내 승리했을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말하고 있다. 이 기쁨은 인내로 고난을 이겨내고 끝까지 싸운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그런 기쁨을 누린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남는 시간에 재미로 읽는 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 말씀은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이 시편 기자가 노아였다면, 비 한방울 오지 않을 때, 산에 방주를 지어야 했다. 이 시편 기자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자식 하나 없는데 남들에게 자신을 ‘아브라함(많은 무리의 아버지)’이라고 소개해야 했다. 이 시편 기자가 다윗이었다면, 눈 앞의 거인에 맞서 싸워야 했고, 자신을 죽이려 하는 사울을 눈 앞에 두고도 살려 주어야 했다. 이 시편 기자가 다니엘이었다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다.

그런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앞서 말씀에 순종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당연하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순종이 쉬운 것은 아닌 것이다. 분노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하면 쉽게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훨씬 어렵게 해야하기도 한다. 거짓말 하나면 해결될 일을 정직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어렵게 해결해야 하기도 한다. 그러니 유혹도 많다. 편하고 쉬운 길의 유혹이 많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결국 이런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그 승리의 기쁨을 맛본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노아는 마침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셨을 때 그 기쁨을 누렸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때까지 인내한 시간이 길수록, 감내한 고통이 클수록 순종한 사람들이 누렸던 기쁨도 함께 커진다.

시편 기자도 그동안 그런 영적인 승리의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승리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승리의 기쁨을 알고 있고 그 기쁨을 계속해서 누리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인내하며 계속해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함도 알고 있다. 시간의 문제일 뿐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은 기쁨의 트로피를 들어올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지금의 인내를 조금은 쉬워지게 한다. 미래의 확실한 기쁨이 지금의 고난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내가 바라는 즐거움은 세상이 주는 짧고 작은 것이 아니어야 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즐거움을 소망하며,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의 대상(163절)

셋째로 시편 기자는 보다 실제적으로 지금 그가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그가 미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을 대조하여 말한다.

119:163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시편 기자가 미워하는 것은 거짓이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그는 거짓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특히 그가 거짓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미워하고 싫어한다”는 중첩된 표현을 통해서 강조했다. 정말로 싫은 것이다. 거짓으로 그가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거짓이라는 것 자체가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대척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은 동시에 거짓도 사랑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수록 거짓은 그만큼 더 미워진다. 앞선 158절과 159절에서도 시편 기자는 같은 삶의 기준을 피력한 바 있다. 그는 말씀을 지키지 않는 거짓된 자들을 역겹게 여겼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짓밟는 모습을 보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시편 기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거짓’은 단순히 이론적인 참과 거짓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수학 문제를 잘 못푸는 사람을 미워했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모든 것이 거짓이다. 즉, 모든 죄가 여기 시편 기자가 말하는 거짓이다.

우리는 어떤 죄에 대해서는 시편 기자와 같은 기준을 가지고 있다. 미워하고 싫어한다. 그런데 어떤 죄에 대해서는 좀 더 너그럽다. 찰스 브리지스는 “‘거짓’을 여러분의 원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로 알고 “미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했다(브리지스, 742). 정말로 그렇다. 우리는 죄를 미워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죄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 알아야 한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 자신도 죄인으로 태어나 살면서 죄에 대해서 무뎌진 면이 있다. 그것이 그냥 상식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시대에 세리들은 부가된 것 이상으로 세금을 걷는 것이 상식이었다. 군인들은 사람들에게서 무언가를 빼앗는 것이 상식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지배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주인은 종을 원하는대로 부리는 것이 상식이었다. 구원 받은 후에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진리’로 순식간에 대체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랬다면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이 지금 우리가 가진 것과는 다른 내용으로 채워졌을 것이다. 하나님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을 통해서 그런 죄악된 상식을 무너뜨리셔야 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해야 했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 모든 것을 계속해서 비추어 보면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얼마나 사탄이 좋아하는 것인지, 반대로 얼마나 하나님을 슬퍼하시게 하는 것인지를 봐야 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일부러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말씀을 읽으면 부담만 커지고 죄책감만 늘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예 성경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자주 넘어지는 죄와 관련된 말씀을 읽지 않거나 그런 주제의 설교는 듣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같은 이유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결국 우리는 거짓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씀으로 내 삶을 빚어가려면 내가 가장 읽기 싫은 말씀, 가장 듣기 싫은 말씀을 들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그 삶을 다듬어갔다. 그래서 자신이 사랑할 수도 있었던, 혹은 전에 사랑했었던 거짓을 이제는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생각을 바꾸고 마음을 바꾸고 삶을 바꾸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추구해야할 삶의 태도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당장의 편안함이나 즐거움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기쁨을 소망하며 즐거워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모든 거짓된 것을 미워해야 한다. 이 믿음, 소망, 사랑의 길에는 고난이 함께 한다. 고된 길이다. 하지만 164절의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라.

119:164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고백한다. “하루 일곱 번씩”이라는 표현은 그가 매번 찬양할 때마다 숫자를 센 것은 아닐 것이다. 항상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한 것에 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지만, 오히려 그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것이 기쁨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정말로 원했던 삶이기 때문이다.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는 삶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도 본받아야 하는 예배의 삶이다.

확신할 수 있는 결과(165-166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에 고난이 있음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그것이 최종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실하다. 먼저 시편 기자는 그 길에 평안이 있음을 말한다.

평안(165절)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말하는 평안은 ‘샬롬’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어떤 어려움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 어려움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그 마음의 고요함이다.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올 때, 모세는 불안해 떨고 있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누군가는 이 말을 듣고서도 여전히 불안해 하며 떨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그런 상황 중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상황과 관계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평안을 누린 것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굉장히 역설적인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볼 때 평안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시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우리는 상황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편리한 핑계에 불과하다. 상황은 우리 마음에 영향을 주지만 주장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평안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들에게는 장애물이 없으리이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장애물은 완전히 넘어져서 쓰러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를 그렇게 보호하고 보존하신다는 의미다. 세상에서 우리는 미끄러질 수 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셔서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가게 하실 것이다.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다. 우리의 결말은 고통이 아닌 평안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소망(166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이 길을 걸으며 가질 수 있는 소망을 말한다.

119:166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앞서 말한 평안의 이유가 동일하게 구원을 바라는 소망에도 적용된다. 결국 하나님은 구원하실 것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모습으로 올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하심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그래서 그 확신 가운데 시편 기자는 “주의 계명들을 행”하고 있다. 이것이 정말로 소망을 가진 자의 모습인 것이다.

미래의 소망이 지금의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그 소망은 참된 소망이 아니다. 아무리 그 입으로 소망을 말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는 사람은 오늘 그 말씀을 행한다. 반대로, 오늘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행하는 사람은 참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보이든 상관없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확신 가운데 오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합당한 동기(167-168절)

끝으로 이 삶에 대한 두 가지 올바른 동기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랑(167절)

119: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무엇보다 우선되고 중요한 동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15).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말했다(고후 5:14). 무엇을 강권한다는 말일까?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강권한다. 그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순종의 길로 걸으려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순종에 대해서 이상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하기 싫은데 하는게 순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길로 행했다. 이것이 올바른 동기에서 나오는 올바른 행위다.

하지만, 이 동기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별로 사랑스럽지 않으면(?) 순종할 필요가 없다 혹은 순종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발적인 마음이 없으면 순종은 율법주의가 된다고 말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첫째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발적인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 어떤 상황에서 지치고 힘들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여전히 순종하고 싶다는 마음은 있다. 단지 그 마음을 따르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마음이 없는 것과 마음을 따르는 것이 어려운 것은 구분해야 한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순종을 통해 오히려 자발적인 마음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162절에서 말했던 것처럼, 어려움 가운데 순종하는 것을 통해 오히려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말씀의 길로 행하기 어려울 때, 우리를 움직일 수 있는 동기가 168절에 언급되어 있다.

보상(168절)

119:168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다고 말한다. 즉,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하나는 약간은 부정적인 측면이다. 마치 경찰이 눈에 보이면 속도를 줄이고 신호를 잘 지키는 것처럼,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서 그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시편 139편에서 다윗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했을 때처럼(시 139:1) 긍정적인 측면을 의도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진실을 아시니, 자신은 계속해서 순종의 삶을 살아 왔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 두 측면이 우리에게는 다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니 마치 계시지 않은 것처럼 행할 때가 있다. 다른 성도 한 사람만 그 상황을 보고 있어도 하지 않을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한다. 악한 일이든, 선한 일이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순종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낙심한 마음에 힘을 주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정확히 보상하실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하나님의 길로, 말씀의 길로 행해야 한다.

도전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결국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게되든 상관 없고, 어쨌든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만 들어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점검해 봐야할 것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어떻게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서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무익한 종으로서 살아서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엇을 줄 때는 그 가치를 따지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다. 아무리 가장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가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며, 항상 찬양하는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으로 내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말씀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 그 길이 마땅히 우리가 걸어야할 길이고, 또한 걷기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길을 걷는 우리에 평안을 주실 것이고 우리를 마침내 구원하실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결혼 생활로 힘들어 하던 성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길어봐야 50년입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목사님은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었고, 사실 이 말은 위로가 되어야 했다. 영원에 비하면 50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그네로 이 땅을 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그래봐야 70-80년이다. 하나님은 이 시간을 믿음과 소망, 사랑을 가지고 순종의 삶을 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삶에 합당하게 보상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하루하루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