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19)

본문: 시편 119:137-144

설교자: 최종혁

차데: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137-144절)

지난 시편 119편 본문(129-136절)에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확신과 그에 합당한 반응에 대해서 살펴봤다. 오늘 본문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말씀의 중요한 특징은 ‘의로움’다. 그리고 그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편 기자의 반응은 열정, 사랑, 기쁨과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 의로운 말씀을 의지하는 삶에 대한 기도로 마무리 된다.

119:137–144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38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139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140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141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42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143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144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

본문은 시작과 끝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고 고백한다.

119:137 …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19:138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은 의롭고 …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

137절의 “옳으니이다”는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의미 상으로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의로움이 곧 올바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곧은 것,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 그래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 그 기준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고, 혹은 기준에 맞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레위기 19:36에서는 이 단어가 “공평한 저울”, “공평한 추”와 같이 번역되었다. 그 자체로서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는 바른 저울과 추라는 의미인 것이다.

성경에서 의로움은 특히 도덕적 혹은 법적인 측면에서 자주 사용된다. 죄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 혹은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의는 그 기준에 이르는 것, 부합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포되는 것도 법적인 의미에서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우리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 형벌을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게 하셨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더 이상 정죄할 것이 없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고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음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66권의 성경을 지칭하는 ‘정경’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카논’인데, 이는 ‘측정하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셈족어 ‘카네’에서 유래되었다. 모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자, 유일한 저울이 성경임을 하나님의 백성들은 처음부터 믿어왔고 그렇게 고백해 왔던 것이다.

이런 믿음은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도출해 낸 합의 같은 것도 아니다. 본래 성경이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 뿐이다. 성경의 ‘의로움’은 본질적인 특징이고, 왜 그런 특징을 가지는지는 그 기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성경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의롭다.

137-144절에는 성경을 지칭하는 다양한 표현이 매절 마다 등장하는데, 그때 마다 성경이 누구의 말씀인지가 언급된다. 성경은 “주의 판단”이고, “주의 말씀”이다. “주의 법도”, “주의 율법”, “주의 계명”, “주의 증거”다. 여기서 “주”는 137절의 시작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와”다. 즉, 여호와의 말씀인 것이다. 138절은 더 분명하게 “주께서 명령하신 증거들”이라고 표현했다.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이라고 할 때(딤후 3:16) 의미하는 것도 바로 성경의 이런 신적기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특징을 반영한다. 시편 19:7-9에서 다윗은 성경의 몇가지 특징을 찬양하는데, 그 특징은 하나님의 특징이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완전하다. 확실하다. 정직하다. 순결하다. 정결하다. 진실이고 의롭다. 오늘 시편 본문도 성경의 의로운 특징은 하나님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한다.

119:137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

119:142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하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도 의롭다. 모세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서 이렇게 찬양했다.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하나님이 의로움의 기준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운 일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도 모두 의롭다. 말씀은 모든 옳고 그름를 분별하는 기준이 되지, 그 반대가 되지 않는다.

사실 성경의 이런 특징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모두에게 어려움을 주기도 한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너무나 독단적이고 배타적이고 편협하게 들린다. ‘나만 옳다’는 말은 과거에도 환영 받지 못했지만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지, 그것을 틀렸다고 하거나 바꾸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상이 상식이 되었다. 나의 진리, 너의 진리가 있을 뿐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믿는다.

분명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옳은 것은 옳은 것이다. 옳은 것이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순간 옳은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1+1의 답은 2이고 3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적이거나 배타적이거나 편협한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일 뿐이다.

믿는 사람에게도 성경의 의로움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다. 머리로는 인정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선택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아도 내가 감수해야 하는 손해가 클 수도 있다. 혹은 마주하는 현실이 전혀 옳게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흔히 말하는 “좋은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생긴 상황”이 그렇다. 그럴 때 성경의 의로움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렇게 하라는 말은 폭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 몇 년을 준비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학생,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으로 고통 받는 자에게 성경이 의롭다(옳다)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관계 없이 성경은 본질적으로 의롭다. 시편 기자는 이 의로움과 관련된 몇 가지 다른 특징도 언급한다.

119:138 … 지극히 성실하니이다

“성실하다”는 주로 사람에게 사용하는 표현이어서 좀 어색하게 느껴지는 번역이다. 단어의 기본 의미는 “확고함”이다. 그래서 안정됨 혹은 평안함을 의미하기도 하고 주로 성실함, 신실함, 진실함을 의미한다. 성경의 변하지 않는 성질을 의미하고, 나아가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흔히 말하는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가 성경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론, 성경의 원리가 시대나 상황에 맞게 적용되어야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는 말씀은 그 시대에도 모든 문화권에서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은 아니었다. 하지만, 성도가 친밀한 인사를 나누고 교제해야 한다는 원리는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 이제는 사람들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졌고, 따라서 집단 보다는 개인을 우선시 하기 때문에 더 이상 교회도 모여서 교제하는 것을 강조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이런 변하지 않는 성질을 저자는 “지극히”라는 표현으로 더욱 강조했다.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다.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

순수하다는 것은 그 안에 다른 어떤 것이 섞여 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 역시 ‘변하지 않는 특성’과 연관되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순수한 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순수해서 변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는 순수성 그 자체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고 할 때, 그 안에 의롭지 않은 요소가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에 옳은 것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옳은 것만 있다는 의미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되었기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이것 저것이 섞여있지 않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말씀의 순수함은 말씀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용된 단어 자체는 금 같은 것을 제련하거나 연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금을 얻기 위해서는 연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불순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시험’이다. 금인지 아닌지를 시험하는 과정이고, 그 과정을 거치면 순수한 금만 남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객관적인 면에서 이미 순수하지만, 주관적인 면(개인적인 면)에서는 그런 시험을 거쳐 순수성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금을 정제하는 것처럼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것만 남은 것이 아니라 제거할 것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말이다. 오랜 시간 많은 공격에도 성경은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성경을 믿는 개인들의 삶에서도 성경은 그 순수성을 입증해 왔다.

예전 성도들은 성경의 여백에 “T. P.”라는 약자를 써놓곤 했다고 한다. 해당 말씀이 ‘시험 후 입증되었다(Tried and Proven)’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성경의 기도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의 기도 노트를 본적이 있는데, 교수님은 기도를 적고 그 여백을 남겨두셨다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면 그 응답을 여백에 적으셨다. 교수님의 기도 노트는 응답된 기도와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기도로 가득했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구했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은 곧 성경에 대한 입증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면,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말씀(창 15:4) 옆에 T. P.라고 적었을 것이다. 물론 신약의 예수님에 대한 말씀에도 모두 T. P.라고 표시해 두었을 것이다. 요셉이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로마서 8:28 옆에 T. P.라고 적었을 것이다. 다윗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는 말씀에(삼상 2:30) T. P.라고 적었을 것이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나서 그렇게 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을 때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범죄한 후 칼이 그의 집에서 떠나지 않아 고생할 때도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며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시편 37:25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다(“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조금 더 나아가면 마태복음 6: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에 대해서도 T. P.라고 쓸 수 있다. 시편 23:1도 마찬가지다. 히브리서 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과 디모데후서 3:15-17도 마찬가지다. 요한복음 14:13-14(“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도 그렇다.

아마 우리의 간증을 모으면 성경의 대부분에 “시험 후 입증됨”이라고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에 대해서도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시험대이고, 그 결과는 언제나 “순수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경험하는 것 뿐이다. 말씀에 따라 살 때, 우리는 더욱 말씀이 순수하게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19:142 … 주의 율법은 진리로소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오늘날은 ‘진리’라는 말이 많이 왜곡되어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절대적으로 믿고 따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하는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그분의 말씀인 성경에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그리고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의롭다. 142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영원한 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영원히 의롭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있다(시 119:89).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눅 21:33). 성경의 의로움은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

성경은 과거에도 옳았고, 지금도 옳고, 앞으로도 옳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도 옳고, 미국, 영국에서도 옳고, 우리나라에서도 옳다. 아브라함에게 옳았고, 요셉에게 옳았고, 다윗에게 옳았다. 다니엘과 친구들에게도 옳았고 욥에게도 옳았다. 나에게도 성경은 옳다. 그래서, 이 시편 기자와 같이 우리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실합니다. 순수합니다. 진리입니다. 영원히 의롭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이고 선포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고백은 합당한 반응으로 이어져야 한다.

의로운 말씀에 합당한 반응

열정

119:139 내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정이 나를 삼켰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대적들의 반응에 둔감하지 않았다. 그들이야 어떻게 하든 나만 말씀에 따라 잘 살면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136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중 받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의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흘렀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그의 열정이 그를 삼켰다고 표현한다. 삼켰다는 것은 파멸을 의미한다. 그만큼 말씀을 향한 열정이 강렬했던 것이다.

내가 아닌 남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사는 것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136절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일차적으로는 이것이 그 사람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기 보다는 말씀 자체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누군가는 무시하고 소홀히 하고 조롱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까지는 이 말씀에서 알 수 없다. 하지만 ‘열정’이라는 표현은 항상 행동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편 기자가 말씀을 변호하기 위해 어떤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고통 당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우리는 성경을 ‘기독교 경전’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책처럼 대한다. 사람들이 성경을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당연히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고, 당연히 성경을 고대 문헌 중 하나라고 말할 것이라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을 지키고 성경의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일일 뿐이지, 그들과는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존중 받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의롭다고 고백해야할 말씀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합당한 반응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열정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당당하게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를 위해 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대적들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도 괜찮은 것 처럼 살지는 않는지도 점검해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의롭다는 것은 그 말씀을 잊고 사는 삶은 의롭지 않은 삶, 옳지 않은 삶이라는 의미도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 삶의 살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해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랑

119:140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시편 기자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말씀이 주는 유익이 분명히 있지만, 그 이전에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는 사랑했다. 특히, 여기서는 말씀의 순수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옳지 않음도 섞여있지 않다. 스크로기는 이 말씀에 대한 주석을 이렇게 달았다. “섞이지 않은 말씀은 나뉘지 않은 마음에 대한 권리가 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에 옳음과 그름이 섞여 있다면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른 옳음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게 의롭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다.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기쁨

119:141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119:143 환난과 우환이 내게 미쳤으나 주의 계명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는 미천해서 멸시를 당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가치 없고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에게 환난이 있었고 그것이 어려움이 되었다. 여기서 그 이유를 명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편 119편의 맥락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그에 합당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그 말씀에 따라 열정을 가지고 살았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는 모습도 견디기 힘들어 했다.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멸시의 이유가 되었고, 그를 괴롭게 할 이유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143절에는 “미쳤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다르게 번역하면 “찾아냈다”라고 할 수도 있다. 마치 숨어있던 사냥감을 찾아내는 것처럼 환난과 우환이 그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았다. 고난이 적극적으로 그를 찾아왔다. 하지만, 고난 때문에 선을 행하기를 그치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잊었어도 그는 잊지 않았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즐거움이 되었다. 그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었다. 말씀을 기억하고 그에 순종하고 싶었다.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기쁨이 그를 찾아오는 모든 환난과 우환보다 더 강력했다. 그 모든 고통을 잊을 수 있게 했다. 말씀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지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더 큰 기쁨, 궁극적인 평안을 주셨던 것이다.

고난의 상황은 말씀의 의로움에 의구심을 던지게 만든다. 이것이 정말 옳은지 질문을 하게 한다. 그래서 말씀을 잊고 다른 것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의로우시다. 영원히 옳다. 그러니, 고난의 때일수록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옳은 길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설어걸 때,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그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운 말씀에 대한 마지막 합당한 반응은 이런 기도다.

기도

119:144 주의 증거들은 영원히 의로우시니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사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옳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더 확실하거나 더 믿을 수 있는 다른 말씀이 필요하지 않다. 그 어떤 계시가 더 필요하지 않다.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는 힘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의로운 것을 압니다. 나로 하여금 그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제가 참된 삶을 살게 하소서. 이것이 말씀의 의로움을 확신하는 우리가 계속해서 드려야할 기도일 것이다.

도전

성경의 어떤 진리에 대해서 우리는 반복적으로 질문할 때가 있다. 성경의 답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정말로 의로우신가?’라는 질문도 그런 질문 중 하나다.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말한다. 성경에 대한 배경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성경을 읽어 보게 하고, 성경이 하나님을 의롭다고 말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모두가 다 그렇다고 답할 만큼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명확하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자꾸 이 진리에 물음표를 던지게 한다. 하나님은 정말로 의로우신지 모르겠는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불의한 것 같은 상황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한결같고 단호하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롭지 않으시다고 말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 질문했던 욥에게 하나님은 물으셨다.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욥의 경험은 욥이 아닌 우리가 봐도 불의해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시는 만큼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보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욥과 같이 그 앞에서 입을 가려야 한다.

이 말이 마치 하나님이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면,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해야한다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빨간색을 빨간색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희미한 불빛 아래서 보고 있는 우리가 빨간색을 파란색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눈에는 죽어도 파란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봐도 불의해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틀리신 것 같다. 그래서 자꾸 질문한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것이 맞느냐고…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이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내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보이는 것이 다르다고 해도, 말씀에 따라 판단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믿음의 삶이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되지 않는 이상,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전부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성경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그가 하시는 모든 일도 의롭다고 선포한다. 그러니, 하나님 주신 성경을 믿고 안심하며 옳은 길을 걷자. 그 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자. 그렇다면, 우리 삶의 끝에 우리 성경의 마지막 장을 펴고 “모두 시험 후 입증되었음”이라고 기쁘게 서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