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18)
본문: 시편 119:129-136
설교자: 최종혁
페: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129-136절)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했는데(약 1:19), 오늘날 우리는 듣기 보다는 말하기를 더 속히 하는 것 같다.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충고했는데(약 3:1), 어쩌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선생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말을 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다.
오늘날 사람들은 한마디로 모두가 ‘왕’이다. 모든 것에 있어 중심은 ‘나’라는 말이다. 따라서 내 기준이 중요하고 내 기분이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자꾸 말하고 싶다. 가르치고 싶다. 그게 아니라고 하고 싶고, 이게 맞다고 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예전이라고 사람들이 이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결국은 죄의 본성에서 나오는 특징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다만 예전에는 그런 것들이 사회적으로도 잘못되었거나 혹은 주의해야한다는 식으로 인식이 되었다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그렇게 하기를 격려하는 사회가 오늘날의 사회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진짜 왕이 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의 준행자인 우리에게 율법의 재판관이 되지 말라고 했는데(약 4:11), 지금은 재판관으로서 말씀을 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더 나아가서는 재판관도 아니고 입법자가 되어 있다. 순수하게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넘어서, 말씀 자체를 판단한다. 내가 동의할 수 없으면 이 말씀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결과, 어느새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늘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특히 성경을 학문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순진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로 치부한다.
그래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말씀의 해석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에 주입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종, 말씀의 종은 찾기 힘들고, 말씀의 재판관과 말씀의 선생들만 많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시편 119편의 저자는 말씀에 대해서 전혀 다른 태도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려다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아래 엎드린 사람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씀이 반드시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래서 말씀을 더 배우기 원한다.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 말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원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시 119:129–136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130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131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132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33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134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135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136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시편 119편 전반에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1절에서 선언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그는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사랑했고, 계속해서 말씀의 길을 선택하여 걷기를 소원했다. 고난 중에 있을 때도 이 길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을 더 깨닫게 하시고 배우게 하셔서 말씀 위에 굳게 서기를 원했다. 이 모든 것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확신을 몇가지 찾아볼 수 있다. 확신과 그에 합당한 반응을 살펴보자.
놀라운 말씀에 순종하라(129, 133, 134절)
시 119:129 주의 증거들은 놀라우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먼저 시편 기자는 “주의 증거들이 놀랍다”라고 확신한다. 18절에서도 그는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었고, 27절에서도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놀라운 것들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놀라운 말씀이다.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 상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 압도적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어 온 것이 성경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성경을 읽었다. 그들은 성경을 공격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은 실패했다.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말씀에 따라 살면서 성경이 진리임을 체험하고 증명하고 있다. 이 말씀이 말하고 있는대로, 말씀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성경은 문학적으로 놀라운 것이 아니라, 우리 입장에서 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이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놀랍다.
어떤 사람도 이런 책을 쓸 수 없다. 성경 외의 그 어떤 책도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공격을 받으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성경은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책’이다. 그 저자가 초자연적이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놀라움은 곧 그 저자이신 하나님의 놀라움에 기인한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도 놀라운 것이다. 시편 기자의 성경에 대한 확신도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한다. 하나님이 놀라운 분이시기 때문에 성경도 그에게 언제나 놀랍다. 하나님에 대한 경이가 그치지 않는 이상 성경에 대한 경이도 그치지 않는 것이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백성들의 반응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호 8:12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이들은 말씀을 놀랍게 여긴 것이 아니라 이상한 것으로 여겼다. 왜 그랬을까?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호세아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을 놀랍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다른 우상들과 다르지 않게 여겼다. 하나님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도 특별할 이유가 없다. 더 이상 하나님이 놀랍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놀랍지 않은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놀랍지 않고 특별하지 않다면, 하나님도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말씀하고 상관없이 여전히 나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고 경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말씀을 주의깊게 보라.
호 8:4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하나님과는 상관 없는 일을 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을 특별하게 여기고 말씀에 놀라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잘 섬기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말씀에 내가 놀라며,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통해서 점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에 대한 확신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반응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129절은 그래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라고 말한다. 시편에서 “내 영혼”이라는 표현은 주로 진짜 나를 의미한다. 나의 중심, 진실된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내 몸은 말씀을 지키지 않고 내 영혼만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마음을 다해서, 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고대의 여러 좋은 말들 중 하나로 본다면 이렇게 반응하지 않느나.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특별한 것을 알 때 이렇게 반응한다.
그래서 133절과 같은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오기도 한다.
시 119:133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삶의 방향이었고, 삶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렇게 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발자취를 보면 그 방향성이 분명하지만, 순간 순간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33절과 같은 기도를 한다. 계속해서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오늘날 우리의 표현을 따르면 성화의 삶을 위해서 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를 한번은 긍정적인 표현으로 한번은 부정적인 표현으로 한다.
긍정적인 표현의 기도는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순간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조차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지, 그것이 본질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말씀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그 영혼으로 말씀을 지키려는 사람은 그런 순간의 벗어남 혹은 미끄러짐에 관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워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어차피 미끄러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부정적인 표현의 기도는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이다. ‘죄’가 어떤 인격체는 아니지만, 성경은 죄는 기본적으로 우리를 주관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분명히 말한다. 가인의 경우, 하나님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을 때, 그의 마음 속에는 분노의 죄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명령하셨다(창 4:7). 분노의 죄가 가인을 마치 종처럼 주관하려고 할 때, 반대로 가인이 그 죄를 주관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실패했고, 죄의 종이 되어 동생 아벨을 살해했다.
로마서 6장도 이런 죄의 경향을 전제로 말씀한다. 믿는 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서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롬 6:6). 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해야할 것에 대해서도 분명한 명령을 준다(롬 6:12). 로마서 7장에 기록된 바울의 내적인 싸움과 같은 싸움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싸워야 하는 이유는 죄가 계속해서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죄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편기자도 이렇게 주관하려는 죄가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시면 죄의 힘을 우리가 이길 수 없다. 그 세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말씀에 따라 살려면 반드시 이 기도가 필요하다.
또한, 이런 면에서 보면 처음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라는 기도는 이런 공격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다. 어떤 경우 우리는 미끄러져 놓고 “공격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요”라고 너무 쉽게 핑계를 댄다. 갑옷도 입지 않고 전쟁에 나갔다가 맞지 않아도 되는 화살을 맞아 놓고는 “화살이 날아오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핑계되는 군인과 같다. 심지어 옆의 군인에게 왜 나를 보호하지 않았냐고 원망하는 군인과도 같다. 같은 공격에도 넘어지지 않는 군인도 있다. 그러니 공격 전에 말씀에 굳게 서기를 구해야 한다.
부정형의 기도에서 또 하나 주목할 만한 표현은 “어떤”이다. 시편 기자는 어떤 죄는 나를 주관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죄가 나를 주관해서는 안되고, 그래서 어떤 죄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구한다. 사람마다 연약한 부분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유혹조차 느끼지 못하는 죄의 영역에서 어떤 사람은 너무 쉽게 넘어진다. 그런 죄에 대해서 때로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할 때가 있다. 그렇게 어떤 죄를 허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가고 어려운 길은 어쩔 수 없고라는 태도로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놀랍고, 놀라운 힘이 있다. 그 확신 가운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박해를 받을 때도 이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시 119:134 사람의 박해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박해가 있지만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것을 포기하기는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원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시편 기자의 기도를 보면, 이는 조건적인 기도가 아니다. 구하는 것과 그 결과가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하시면 법도를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있는데, 나를 구원하시면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129절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고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이 말씀의 길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놀라운 말씀이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말씀의 길이 옳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확신한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순종이다. 우리가 할 일은 이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다. 말씀 위에 굳게 설 수 있기를, 그리고 죄악이 우리를 그 말씀에서 벗어나게 주관하지 못하기를 하나님께 구하며 이 길을 걷는 것이 우리의 합당한 태도다.
깨닫게 하는 말씀에 겸손하라(130, 135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깨닫게 한다는 확신을 표현한다.
시 119:130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깜깜한 곳에 빛이 비추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실내에 등이 있어서 아무리 밖에 깜깜해도 실내는 밝을 수 있다. 잠을 잘 때도 너무 어둡지 않게 취침등을 켜두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인들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실내는 그야말로 깜깜했다. 창문이 없다면 낮에도 실내는 깜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문을 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실내에 있는 것들이 드러난다.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열면”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런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문이 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우둔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우둔한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할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우둔하다’는 것을 지식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이 다른 사람보다 부족한 사람에게만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든 사람의 지식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지식을 포함하고 있다. 바로 하나님의 지식이다. 그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우둔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런데 ‘우둔하다’는 것을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 겸손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만 깨달음을 주는 것이 맞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깨달음을 받지 않고, 그렇지 않고 우둔한 사람이 그것을 받는다고 해야할 것이다.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은 말씀을 판단한다. 하지만 우둔한 사람은 말씀으로 나를 판단한다. 그런 면에서 말씀의 빛을 경험하는 사람은 우둔한 사람, 겸손한 사람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4:3–4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지금 사탄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은 교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광채가 그들에게 비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다들 지혜로와서 빛을 깨닫지 못한다.
문제는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 방법이 먹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지혜로와서 눈이 가려져 있다. 말씀의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께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구하지 않는다. 여기 시편 기자는 그렇게 구할 수 있는 은혜 받은 겸손한 자였다.
시 119:135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자신을 “종”으로 칭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 그리고 그 은혜는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130절에서 말하는 “우둔한 사람”이고 그들이 말씀을 깨닫는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는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겸손이다. 그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고 하나님께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겸손히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된다.
약속인 말씀을 사랑하라(131, 132, 136절)
끝으로 오늘 시편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말씀에 합당한 태도는 ‘사랑’이다. 131절은 그 사랑의 갈급함에 대해서 표현한다. 136절은 그 사랑에 있는 안타까움을 표현한다.
시 119:131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이렇게까지 말씀을 기다리고 갈급해했던 적이 있나 싶다. 시편 기자는 마치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저 끝에 보이는 생수 한병을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했다. 그래서 아침에, 저녁에,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폈다. 언제든 말씀을 읽을 수 있을 때 읽었고, 시간을 내어서 읽었다. 물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을 때 물을 간절히 찾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말씀을 찾았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반대의 경험을 할 것이다. 말씀 읽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말씀을 멀리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믿는 자의 합당한 태도는 아니다.
시 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여기서 시편기자는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른다고 표현한다. 이는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그들이(박해하는 자들)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이 눈물에는 두 종류의 사랑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 말씀이 지켜지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아 멸망을 향해 가는 사람에 대한 슬픔(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때, 그래서 악한 길로 행할 때, 우리는 이런 눈물을 흘리게 된다. 우리의 자녀나 부모님이 그렇다면 이런 눈물로 우리는 계속 기도할 것이다. 우리들에게 이런 사랑의 눈물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 시편 기자의 경우는 아마도 첫번째 이유로 인한 슬픔이 더 큰 것처럼 보인다.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 때문에 지금 슬퍼하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은 아니고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그런 마음이 시편 119편에서는 표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그들에 대한 사랑보다는 말씀 자체에 대한 사랑이 더 강조된다고 볼 수 있다.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법이 무시 당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던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그래서 헌신했고, 말씀이 그에게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상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로 인한 고통이나 어떤 불이익 때문일 때가 많다. 하지만 시편기자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에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태도일 것이다.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132절은 그 사랑의 태도의 근간에 있는 사실에 대해서 말해준다.
시 119:132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던 대로 내게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기 “베푸시던 대로”는 판단하시던 대로 혹은 결정하시던 대로라는 의미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애쉬, 242.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그분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에게 항상 은혜를 베푸시며 돌이키시겠다는 심판자 하나님의 확고한 판단을 계시해 준다.”
즉, 이 모든 기도의 근간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하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이 약속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은 내가 언제나 붙들수 있고, 구할 수 있는 말씀이 되는 것이다.
때로 우리가 보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 같을 때가 있다. 욥이 고난 중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나님께서 나의 원수가 되셔서 마치 나를 버리신 것처럼 느껴졌었다. 우리도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 비슷한 생각,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럴 때 그 생각과 감정에 따르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 결론에 이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게 말하고 있다면, 나의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맞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으니,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구하는 것이 나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이다. 이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나의 합당한 태도는 사랑이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게 더 사랑할 때, 우리는 더 큰 은혜를 기대할 수 있다.
도전
‘하나님 말씀은 무엇인가요? 어떤 특징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아마 좋은 말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그렇게 알고 있다라는 것을 넘어서 그에 합당한 태도를 내가 보이고 있느냐다.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고, 그리고 약속인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오늘 배운 올바른 태도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갈수록 우리를 이런 태도에서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들이 가득한다. 나는 말씀 앞에 왕인지, 아니면 종인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말씀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말씀의 기준으로 나를 판단하고 합당한 태도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