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6)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싸메크: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13-120절)

이전 연(105-112절)의 핵심 단어가 “결단”이었다면, 오늘 다룰 연의 핵심 단어는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113, 119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기로 결단했고, 그로 인해 그 생명이 위기 가운데 있을 때도 그 결단에 따른 선택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단지 의무나 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즐거워 했다(111절). 오늘 본문은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의 결단에는 “사랑”이 바탕에 있었다.

세상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할 때, 그들이 의도하는 의미는 불교가 ‘자비’를 베풀면서 살 것을 강조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때로는 기독교인들도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만 생각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회 정의나 사회 공헌에만 지나치게 집중하여 참된 복음의 의미를 희석하기도 한다. 마치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웃 사랑의 종교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맞다. 이웃 사랑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고, 이웃 사랑이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다만, 하나님 사랑이라는 기초 위에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나님 사랑이 첫째 계명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남에게 전하기 전에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교도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신을 섬기는 것이나, 무언가 더 좋은 것을 위해 희생해야한다는 말은 하지만, 신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살아계시는 신이시며, 그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고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명하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 중에서 하나님은 사람과만 이런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다. 하나님은 이 사랑의 관계 안으로 사람들을 부르신다.

이것이 시편 119편 설교를 시작하면서 언급했던 ‘언약’이다. 언약은 단지 뭐를 하면 복을 받고 뭐를 하면 화를 받고에 대한 계약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의 서약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으로 시작되었고, 언약의 백성들은 그에 화답하여 사랑의 선택을 해야 하다. 그것이 곧 언약의 삶이다. 그 언약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언약의 말씀과 관련하여 시편 119편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언약의 삶에 있어 언약의 말씀이 왜 중요할까? 언약의 삶은 사랑하는 삶이고, 그 사랑을 언약의 말씀이 정의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일상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단어지만, 그 의미는 정의하기 나름이다. 사랑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 있는데, 그 중에서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각자가 느끼는 것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때로 나는 사랑을 했는데, 상대는 사랑을 받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반대로 나는 딱히 사랑하지 않았는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있는 경우도 있다. 사랑에 대한 각자의 정의, 각자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랑을 주고 받고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경우에는 상대가 생각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고 상대가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단지 내 기준에 따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수는 없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고, 따라서 그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올바른 삶이다. 그래서 율법의 핵심을 정리한 신명기에서 모세는 율법을 지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여호수아도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했고(수 22:5), 느헤미야도 그의 기도에서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했다. 예수님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요 14:21).

이 모든 말씀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어서 문맥에 따라 거의 동일한 표현으로 사용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계명에 따라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따라 무엇을 하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따라 산다는 의미일 뿐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면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씀을 사랑하는 자였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그렇게 언약의 말씀에 따라 언약의 삶을 사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을 말해준다. 이 특징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첫째는 자발적 선택이고(113-115절), 둘째는 전적인 신뢰이며(116-117절), 셋째는 참된 두려움이다(118-120절).

자발적 선택(113-115절)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자발적인 선택이고 즐거이 하는 선택이다. 앞서 살펴봤던 ‘결단’도 결국은 선택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사랑의 선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결단에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주로 원하는 결과와 관련되어 있다. 다이어트를 위해서 식단을 조절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다. 이 경우 식단을 조절하지 않아도 충분히 다이어트를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 선택을 한다. 식단 조절은 그 자체로서 하고 싶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의 선택은 조금 다르다. 이 경우는 사랑 자체가 선택의 이유가 된다. 그렇게 해야해서 하는 선택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선택인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 둘은 혼재되어 있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때로는 여전히 내 눈에 좋아 보이는 어떤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 모든 선태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 119:113–115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114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115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선택을 말한다. 그는 두 마음 품는 자는 미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기를 선택했다. 그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은신처와 방패로 의지하기로 선택했다. 그는 행악자들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선택했다.

먼저 113절에서 시편 기자는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사랑과 미움이 대조된다. 사랑이 선택이라면 미움은 거절이다. 사랑이 끌어 당기는 것이라면 미움은 밀어내는 것이다. 사랑이 연합이라면 미움은 분리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다. 그래서 말씀을 최대한 가까이 하려고 했다.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종일 읊조리며 마음에 담아 두었다. 그래서 그는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한다”고 고백할 수 있었다(98절).

하지만 “두 마음을 품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미워하기로 선택했다.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기를 거절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을 밀어내고 함께 하지 않았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사용한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이란 표현은 다른 데서는 사용되지 않은 독특한 단어지만, 그 의미는 열왕기상 18장에서 엘리야가 했던 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엘리야는 바알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 있던 당시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왕상 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어느 한 쪽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두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두 마음을 품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경우다. 전자는 결정하지 않는 것이고, 후자는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엘리야의 말을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도 이 두 부류가 다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다신론 사상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는 동시에 바알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움이 된다면 그게 바알이든 하나님이든 상관 없다는 실용적인 생각이 (실제로는 실용적이라는 착각이지만) 그 기초에 있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생각에 불편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비롯해서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 우왕좌왕 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결정을 하지 않았든 하지 못했든 결과적으로 이들은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이다. 시편기자가 113절에서 말하는 “두 마음을 품는 자들”도 두 부류의 사람이 다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두 마음을 품게 되는 이유는 결국 하나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로 충분히 만족한다면 또 다른 것을 원할 이유가 없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다(시 23:1). 그런 다윗에게 만족을 줄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114절에서 시편 기자도 비슷하게 고백한다.

시 119:114 주는 나의 은신처요 방패시라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하나님이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그것으로 충분하니 다른 은신처나 방패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란다. 하지만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또 다른 은신처와 방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무엘을 찾아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필요하면 하나님께 구하기도 할 것이었다. 두 마음을 품은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우상 숭배와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삼상 8: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들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왕이신 것을 부인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영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자리를 다른 어떤 존재와 함께 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두 마음을 품는 것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한 분 만을 사랑하기 원한다.

한편, 시편 기자는 그런 면에서 자신의 연약함도 알고 있었다.

시 119:115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 나는 내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리로다

앞서 두 마음을 품는 두 가지 경우에서 후자에 속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쉽게 결정하지는 못한다. 가장 큰 이유는 주변의 영향이다. 앞서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모든 나라와 같이”, “다른 나라와 같이”라고 말했었다. 그들은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라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이 영향을 받은 것은 말씀이 아니라 다른 나라들이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도 비슷하다. 안타깝지만 악을 행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을 놓고 비교해 보면, 악을 행하는 쪽이 선을 행하는 쪽에 영향을 주기가 훨씬 쉽다. 어떤 목사님은 이것을 의자 위에 선 사람과 의자 아래 있는 사람이 서로를 끌어 당기는 것에 비유했다. 의자 위에 있는 사람이 끌어 올리는 것보다 아래 있는 사람이 끌어 내리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고린도전서 15:33의 말처럼, 악한 동무가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쉽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너희 행악자들이여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산속에 들어가서 우리끼리 따로 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영향에 대해서 과소평가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잠언은 성적인 순결을 지키는 것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시 119:115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서야 어찌 그의 옷이 타지 아니하겠으며 28사람이 숯불을 밟고서야 어찌 그의 발이 데지 아니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든 사람과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가치관에 동조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말로 가까이 하지 말아야할 관계가 있다. 그 사람이 끌어 올려 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끌려 내려가고 있다면 그 관계를 멀리 해야 한다. ‘전도’나 ‘선한 영향력’ 같은 좋은 말로 그런 파괴적인 관계를 정당화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애초에 내가 그들을 따라 가고 있으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모순이다. 시편 기자는 행악자들에 대해서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 그들을 존중하지 않거나 경멸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기를 선택한 것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사랑은 결국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은 미워해야 한다. 어떤 것은 떠나야 한다. 이 선택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한 선택이다. 강요에 의한 선택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는 두 마음을 버리고 악에서 떠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고후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내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들이 있고, 내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이 가득한다.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 말한다. 누가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다.

나의 선택을 점검해 보라. 나로 하나님을 더 사랑하지 못하게 막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용납하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 보라. 어떤 사상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세상적으로 성공한 혹은 행복해 보이는 어떤 친구가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즐겨보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이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나의 인터넷 접속 기록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나는 어떤 만족을 추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만족과 비교해 보라. 그리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라.

전적인 신뢰(116-117절)

이어지는 116-117절은 시편 기자의 기도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사는 자의 두번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

시 119:116–117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117나를 붙드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고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반복한다. “나를 붙드소서”라는 기도다. 원어 상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그의 은신처이고 방패이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를 붙들어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가 계속 봐왔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원수들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고, 그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그를 붙들어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원수들은 계속해서 그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포기하게 만드려고 한다.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다면서 계속해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그를 원수들은 그냥 보고만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시편 기자가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행악하는자들”에게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그의 주변에는 하나의 마음을 품고 있는 시편 기자를 미워해서 그를 넘어뜨리고 싶어하는 자들이 있었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시편 기자는 앗수르의 침략에 맞선 히스기야 왕과 같은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히스기야는 대국 앗수르가 침략해 왔을 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었다. 그는 백성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니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앗수르 왕은 그의 사신 랍사게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왕하 18:29–32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30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32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 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설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히스기야에게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살고 싶으면 항복하라는 것이다. 항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앗수르 왕은 자신이 히스기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히스기야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었다. 히스기야의 믿음이 고난이라는 시험대 위에 올려졌다.

그 상황에서 히스기야도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은 기도를 했을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붙드셔서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시어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우리로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살게 하소서’라고 히스기야와 그의 백성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시편 기자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 역시 같은 선택의 상황에 놓였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도 이 고난에서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기를 구했다. 진짜 사는 길은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것임을 믿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이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아 주시기를 구했다.

도박 용어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인 ‘올 인’이 여기에 합당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올 인’했다. 그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걸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씀을 통해 배운 하나님, 그가 삶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은 결코 그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것을 그는 확신했다. 히스기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그 자신과 온 나라의 운명을 걸고 그런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히스기야는 도박을 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한 것 뿐이다. 여기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로 전적인 신뢰라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도도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 기도의 절반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나를 붙들어 살게 하소서”, “나를 붙들어 구원하소서”라고는 기도할 수 있지만,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나 “주의 율례들에 항상 주의하리이다”라고는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하며 살지 않았다면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붙드셔서 살려 주시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내 삶이 무너지지는 않는 것이다. 애초에 그렇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다. 만약 하나님이 무너진다면 그들도 무너져야 정상인 것이다. 바울은 부활에 대해서 말하면서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말했다(고전 15:19). 이것이 정상인 것이다. 피할 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아니어도 나에게 피할 길이 있으면 안된다. 언약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 만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모든 소망을 두는 사람이다.

참된 두려움(118-120절)

끝으로 118-120절에서 우리는 언약의 말씀에 따라 사는 자는 참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시 119:118–120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는 주께서 다 멸시하셨으니 그들의 속임수는 허무함이니이다 119주께서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시니 그러므로 내가 주의 증거들을 사랑하나이다 120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앞서 두 마음을 품은 자들, 행악자들이라고 표현되었던 자들이 여기서는 주의 율례들에서 떠나는 자들, 악인들이라고 표현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시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속임수를 그냥 보고만 있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이다.

119절의 표현은 더욱 강력하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실 것이라고 말한다. 찌꺼기는 정제하는 과정에서 제거되는 쓸모 없는 것들을 의미한다. 쓸모가 없고 해가 되는 것은 반드시 버려져야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실제로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고 계신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지만, 죄는 반드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를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성경에는 이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가득하다. 바울은 그 말씀들이 기록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 10:8–11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예수님도 같은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눅 13:4–5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특히 지나치게 ‘친근해진’ 하나님만 강조하고 있는 오늘날은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마치 죄도 그냥 용납해 주실 것처럼 산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것처럼 생각한다. 어떻게 살든 결국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품어주실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은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는 나누어져있지 않다.

시편 기자는 그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두려워 떨었다고 고백한다.

시 119:120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심판을 두려워하나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저 남의 얘기로만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심판은 나하고 상관 없어라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보여준다. 때로 우리는 어떤 분노가 직접적으로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어도 그 분노를 보는 것 만으로도 두려워할 때가 있다. 여기 시편기자가 그렇다. 그리고 그의 두려움은 올바른 반응으로 이어진다. 그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랑했다(119절).

이것이 두려움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두려워서 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하나님 앞으로 나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겁주기 위해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신을 점검해 봐야 한다. 나는 그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도전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양하게 불린다. 성도들, 거룩한 자들 등.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는지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항상 ‘이런 나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만 생각하면서 위안을 삼을 수는 없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삶을 점검해 보자. 나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지,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또한 두려움으로 경외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자. 그리고 말씀에 따라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