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5)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눈: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105-112절)
우리는 종종 무언가를 결심한다. 특히 새해가 되면 그렇게 할 때가 많다. 다이어트를 결심하기도 하고, 성경 읽기나 개인 묵상 시간을 결심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결심’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결심’하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은 대개 ‘실패’다. 성경 읽기는 으레 레위기나 구약의 예언서 쯤에서 실패할 것을 생각한다. ‘다이어트는 항상 내일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심지어 ‘담배 끊은 사람은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그만큼 결심을 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결심을 하고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운 이유는 애초에 지키기 어려운 것을 결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키기 어렵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결심을 하지 않는다. 그냥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려운 것을 하려고 하니까 결심을 하는 것이고, 그러니 실패도 많은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가 결심하고 하려는 그 어려운 일은 대부분 좋은 것들이다. 나쁜 것들은 굳이 결심하지 않아도 잘 한다. 그냥 우리가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 우리가 편한대로 의자에 앉으면 그것이 곧 나쁜 자세인 것처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나쁜 습관을 들일 수 있을까, 나쁜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나쁜 건 배우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잘 한다.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타락한 우리에게 그런 결심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좋은 것은 자연스럽게 되지 않기 때문에 결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결심을 해도 자꾸 실패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책하게 되고, 그런 실패가 반복되면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어차피 안될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포기하면 마음이라도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살 좀 찌면 어때 먹고 싶은거 먹으면서 행복하게 사는게 최고지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대부분의 영역에 있어서는 너무 극단적으로 흐르지만 않는다면 이 정도의 태도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이어트 자체에 지나치게 강박을 가지는 것도 아예 그런 문제에 신경쓰지 않는 것 만큼이나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는 그런 태도가 전혀 합당하지 않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어차피 안될 일’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사람이 빛보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느냐의 문제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사람이 새처럼 하늘을 날 수 있느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열심히 훈련을 하면 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있어 100% 죄가 없는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기도 하다.
또한 구원 받은 자가 반드시 부활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지금의 몸 그대로 천국에서 살아간다면 천국은 천국이 아니게 된다.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단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몸은 더 이상 죄의 영향력 아래 있지 않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그런 부활의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는 그런 죄의 영향력 아래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100% 죄 없이 순종의 삶을 산다는 것은 정말 ‘안될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이고 인정해야 할 한계이기도 하다. 이것을 부정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책감만 남거나, 반대로 자기가 세운 기준에 만족하는 자기 의만 남게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살면 편하다고 성경이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확히 그 반대를 말하고 있다. 안되면 되게 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마땅히 그 목표를 향해 가야 할 것을 말한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고 말한다. 날마다 죽으라고 말한다.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라고 말한다. 강하고 담대하고, 견실하고 흔들리지 말라고 말한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다. 군사로서 싸우라고 한다.
나약하게 굴지 말라는 것이다. 실패 했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초에 쉬운 삶이 아니다. 죄에 넘어지는 것이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이상한 것도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나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을 따라 푯대를 향하여 계속해서 걸어가는 삶이다. 넘어진 사람이 나약한 것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나약한 것이다. 실패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시 결단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영적 성숙이 중요하지만, 지금 얼마나 성장해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성장하고 있느냐다.
이것을 ‘굳세게 인내한다’는 의미로서 ‘성도의 견인’이라 부른다. 구원의 안전함(구원은 잃을 수 없음)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영원한 구원’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성경은 동전의 다른 면인 ‘성도의 견인’에 대해서 동일하게 강조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히 구원 받은 자들을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견고하게 보호하시는 그들은 당연히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선한 싸움을 싸운다.
이런 삶에서 중요한 것은 결단이다. 말씀을 묵상하고 깨닫고 감동받는 것에 그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행동하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바른 것을 알고, 바른 것을 소원하는 것을 넘어,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거룩하라고 하네, 거룩해야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나를 거룩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어떻게 정리할지를 결정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용서하라고 하네, 용서해야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용서를 생각하고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결단 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 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지 않고는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소극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하나님이 하실거니까’라는 말 뒤에 숨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어차피 안될 일’이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어떤 목사님의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실한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결단’이다.
시 119:105–112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106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107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8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9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11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112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이렇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기를 원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결단하면서, 그 결단을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심지어 그것으로 인해 해를 당하고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실제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결단의 3가지 이유를 살펴볼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기 때문이고(105-106절), 둘째는 인도를 따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107-110절). 그리고 셋째는 그럼에도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111-112절). 결단의 이유들로 인해서, 우리도 함께 이렇게 결단하기로 결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유 1: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한다(105-106절)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으로 시작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발의 등과 그의 길의 빛이라고 선언한다. ‘발’, ‘길’은 앞선 말씀들에서도 살펴봤었던 것처럼 삶에 대한 비유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걷는 것’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면, 발은 그 삶의 순간 순간을 의미하고, 길은 그렇게 살아간 자취 그리고 살아갈 삶의 목적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삶의 순간 순간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야할 삶을 밝혀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앞의 비유는 밤을, 뒤의 비유는 낮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밤에도 낮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편 기자가 그것을 의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삶의 어두운 곳을 비추어 준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이 비유는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인도한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했던 불 기둥이나 예수님의 탄생 시에 동방박사를 인도했던 별과 같은 것이 아니다. 즉, 말씀이 우리를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라고 지시한다는 의미에서의 ‘인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도덕적인 판단에서는 그렇게 말씀이 우리를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살인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성경은 살인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미워하는 것과 미워하지 않는 것, 용서하는 것과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밝히 말해 준다.
하지만 성경은 내가 누구와 결혼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어느 직장을 선택해야할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좋은지, 이사를 해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누구와 친구가 되어야 할지, 어떤 영화를 봐야 할지,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등도 말해주지 않는다. 내가 선교를 나가야 하는지, 간다면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구체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따라야할 지침을 줄 뿐, 하나 하나 어떻게 해야할지 지시하지는 않는 것이다. 우리가 결정해야할 것들을 성경이 대신 결정해주지 않는다. 그렇게 살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종종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그렇게 나를 인도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지, 그 말씀을 지금 읽고 있는 나에게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하신 말씀은 호세아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지 그것이 그대로 다른 누군가에게 해당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성경이 그렇게 나를 인도해주기를 바랄 때가 많다. 그 마음은 참 귀하고 본받을만 하지만, 애초에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런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나도 그렇게 성경을 읽으면 안된다. 성경이 그렇게 나에게 지시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과 빛으로 비유한 것은 일반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밤에 길을 걸을 때 등이 필요하다. 등이 나를 직접적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등은 앞 길을 비춰줄 뿐이다. 빛이 길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 다만 보이지 않던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드러낼 뿐이다.
그렇게 해서 마땅히 우리가 가야할 길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등과 빛이 ‘인도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 그것들이 하는 일은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길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길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어느 길로 갈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다.
어느 직장에서 일을 해야할 것이 고민이 된다면, 하나님께서 올라가라고 하시는지 내려가라고 하시는지 동쪽 혹은 서쪽으로 가라고 하시는지를 성경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오히려 그 직장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내가 그 직장에서 일할 때 신앙 생활은 어떠할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가장이라면 단지 편하고 쉬운 일이 아니라 가정의 경제를 부양할 수 있는지도 따져봐야할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관을 통해 고민하고, 옳은 선택을 담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을 밝히 볼 수 있게 한다. 그러니 그 빛이 보여주는대로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시 119:106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의로운 규례들”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의로운 규례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의로와서 의로움의 기준이 된다. 시편 기자는 그런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근데 그는 마치 맹세 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굳게 정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우리가 중요한 계약을 하거나 조약을 맺을 때는 그것이 위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또 위조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여러 차례 서명을 하고 때로는 봉인도 하는 것처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자신의 결단이 진실이며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맹세하고 굳게 정했다”는 표현으로 확실하게 한 것이다.
사실 이런 맹세 혹은 결단에 대해서 우리는 약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두 부류가 있다.
하나는 맹세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맹세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해당 맥락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이 맹세를 이용해서 거짓을 진실인 척 속이며 이득을 취하는 문제를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도 맹세로 말씀하신 적이 있고, 예수님도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고 맹세하셨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다 맹세의 한 형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맹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부담스러워하는 경우다. 사실 이 경우에 해당되는 그리스도인들이 상당히 많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런 결단은 어려운 것에 대한 것일 때가 많기 때문에 지레 실패할 것을 두려워하여 아예 결단하지 않은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물론 섣부르고 가볍게 맹세하고 결단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잘못된 맹세는 주로 계약과 같은 것이 된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주시면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식이다. 때로는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런 맹세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맹세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우는 이런 맹세를 생각해서 일 것이다. 하지만 믿는 자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자신의 삶을 드리겠다는 헌신의 맹세는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제가 믿음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말씀에 순종하겠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세요’라고 구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피해야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올바르지 않은 태도다.
비슷한 맥락에서 맹세나 결단을 ‘인위적인 것’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순종하게 되는거지 무슨 결단이 필요하냐고 말한다. 성령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셔야 순종하는거지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인위적이고 위선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우리는 진실되지 않은 마음으로 어떤 목적을 위해 겉으로만 우리 자신을 꾸밀 수도 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 대해서 회칠한 무덤이며 평토장한 무덤 같다고 말씀하셨던 이유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결단하는 것을 악한 것으로 부정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죄악된 우리에게는 애초에 결단 없이 순종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직장의 어떤 동료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마음의 분노가 잠잠해 지는 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라면, 그 전까지는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맞을까? 그렇지 않다. 내 마음에서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고 그것을 표출하고 싶으냐를 떠나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잠 29:11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분노를 드러내지 말라고 지금 내 발에 등을 두셨다. 그럼 분노하지 않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하다. 때론 정말 큰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단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마음이다. 죄악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하려는 마음을 자연스러운 마음이 방해한다.
많은 경우 결단하지 않거나 결단하기를 주저하는 진짜 이유는 ‘그렇게까지’ 살고 싶지 않아서다. 실패에 대한 부담이라고 겸손하게 포장하거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고 성숙한 척을 할 뿐이지, 실상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빛을 비추시는데 그 빛 가운데로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미숙함과 나약함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고 내 길에 빛이라고 믿는다면, 그 길로 행하겠다는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 시편 기자처럼 그렇게 마음을 정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의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겠다고 맹세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고, 우리가 그동안 살펴봤던 그의 순종은 그 결단의 결과였던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순종의 결단이 필요하다.
말씀을 따르겠다는 결단이 필요한 두번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유2: 인도를 따르는 것이 쉽지 않다(107-110절)
쉽지 않은 첫째 이유는 앞에서 조금 이야기 한 것처럼 나에게 있다.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다. 세상이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동안 시편 119편에서도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여기서도 다시 한번 그 이야기를 꺼낸다.
시 119:107–110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08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 109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110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난이 매우 심하다고 고백한다. 109절의 표현처럼 그의 생명은 위기 가운데 있었다. 그가 뭔가 크게 잘못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로 맹세하고 결단하고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악인들은 그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다. 몰래 계략을 세워서 시편 기자를 사로 잡으려고 했다는 말이다. 다윗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고, 다니엘의 삶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환란을 당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다. 심지어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벧전 3:17).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때 고난을 받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그네의 삶이 편안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전쟁 중에 있는 군인이 공격을 받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고난 받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고난이 괴롭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여전히 고난은 괴롭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07절에서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구했다. 108절에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서 “공의를 가르쳐 주시기”를 구했다. 지금은 공의가 없는 것 같은 상황이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는 고난을 받고 있고 악인은 오히려 그런 의인을 괴롭히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잊지 않고(109절), 하나님의 법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110절). 하나님의 법을 잊고 그 법에서 떠나는 것이 편안해질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그 편한 길이 옳은 길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빛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기를 선택했다. 고난 중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다. 결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를 만든 영국의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는 일생일대의 선택 앞에 서 있었다. 당시 영국은 ‘피의 메리’라고 불리는 메리 여왕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메리 여왕은 즉위하자마자 로마 가톨릭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종교개혁자들과 추종자들을 탄압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화형에 쳐했다. 토마스 크랜머도 바로 그 화형대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그는 화형대를 앞두고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 받았고,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믿고 가르쳐왔던 것이 모두 잘못되었으며 가톨릭의 교리가 맞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과 함께 그 문서에 서명하지 않기로 결단했던 두 동료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 모습을 보고 크랜머는 자신이 서명했던 문서를 다시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왜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그 문서를 찢어 버리고 싶어서”라고 답했다. 결국 화형대에 선 크랜머는 자신의 오른손을 먼저 불 속에 넣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나를 배신했으니, 먼저 불태워질 것이다.”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의 믿음 때문에 화형을 당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조롱을 당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다. 우리의 믿음 때문에 많은 손해를 볼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다. 그 손해는 금전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관계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친구를 잃기도 하고, 명예나 평판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될 것을 몰라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알면서도 이런 선택을 한다. 세상에서 볼 때는 너무 어리석은 선택이다. 크랜머는 그 서명 하나로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말씀에 따르기를 결단했다. 목숨을 잃고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다. 확신하는 것은, 그가 하늘나라에서 그의 선택을 조금이라도 후회하지 않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가 후회할게 있다면 그가 처음에는 서명을 하는 선택을 했었다는 부분일 것이다. 더 일찍 결단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른 형태의 위협이 가득하다. 유혹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 속에서 말씀에 따르는 삶이 쉽지 않기에, 우리에게는 결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유3: 그럼에도 즐거움이 있다(111-112절)
마지막으로 시편 기자는 이런 결단의 삶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보상이 우리에게 결단이 필요한 세번째 이유다.
시 119:111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영원한 기업”이 되었다고 말한다.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기준에서는 어리석게 보이고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말씀에 따르는 삶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 10:29–3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말씀에 따르는 삶에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보상이 반드시 있고, 사실 그 자체로서 이 땅에서도 많은 복을 누릴 수 있다. 부부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부가 함께 최선을 다해 순종한다면, 그 부부는 다른 어떤 부부보다 더 큰 사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부모와 자녀에 대한 말씀에 부모와 자녀가 최선을 다해 순종하는 것도 그렇다. 분노에 대한 말씀, 말에 대한 말씀, 돈에 대한 말씀 등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우리는 그 자체로서도 많은 복을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111절에서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라고도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그 자체로서도 즐거움이 되지만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으로 인해서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끝으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시 119:112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
“기울였다”는 것은 그곳으로 마음을 향하게 했다는 말이다. 생명의 근원이 나는 그 마음을 지킨 것이다. 결단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히 행하기로 결단한 것이다. 고난이 있지만 그와는 비할 수 없는 기쁨이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길을 가도록 길을 밝히 비춰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나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면, 그들은 어떻게든 그 말씀의 의도를 벗어날 궁리만 했던 것 같다. 안식일에 대한 말씀, 이혼에 대한 말씀 등 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그렇지 않은 것,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씀을 다르게 해석하고 적용했다. 겉보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로서 말씀에 따라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하고 있을지 모른다. 매주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기도 하지만, 정말 그 말씀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지는 않는다면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하지 않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침례식을 할 때도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따라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로 결단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 서약을 그냥 예식의 일부로만 여기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결단을 가볍게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 때로는 결단하지 않는 것을 더 성숙한 신앙으로 여기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실패할 것을 두려워해서 결단하기를 미뤄서도 안되고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 결단하지 않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말씀 앞에서 우리는 결단해야 한다. 실패해도 계속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하나님 앞에서 섰을 때 순종하지 않았던 나의 입술, 나의 눈, 나의 손, 나의 발 때문에 후회하지 말고, 바울처럼 우리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그것이 말씀 앞에선 우리의 유일한 반응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