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4)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104절)

오늘 본문에는 몇 가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핵심 개념들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애정)이다(97, 103절).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지혜다(98, 99, 100, 104절). 또한 말씀을 묵상하는 것과(97, 98, 99절) 순종하는 것도(100, 101, 102, 104절) 계속해서 언급된다. 이 핵심 개념들의 관계를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얻는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지 물으신다. 우리에게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할 것을 요구하신다. 핵심 개념들을 하나씩 살펴 보면서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 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생각해 보자.

사랑(97절)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라고 담담하게 고백하기 보다는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어찌 그리”는 103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어서, 그 정도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충분히 그것을 표현할 수 없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있다.

C. S. 루이스의 책을 보면 그는 종종 일반적으로 당연히 여기는 것에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런 질문이 가장 어려운 질문이고, 그래서 답도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배울 수 있을 때가 많다. 그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법, 규례를 기뻐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질문한다. 법이라면 그것에 동의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고, 그것을 존중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것을 기뻐하고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돈 없고 배고픈 사람이 갓구운 빵 냄새와 커피 향이 진동하는 카페를 지나갈 때, 빵 하나를 슬쩍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둑질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도둑질 하지 않는 것으로 여전히 그 말씀에 동의하고 존중할 수 있고 순종할 수 있지만, 그 명령 자체를 기뻐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루이스의 질문이다.

도둑질이 좀 멀게 느껴진다면, 내가 자주 죄의 유혹을 받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 질문의 의도가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유혹을 이겨낼 수는 있지만, 사실 그런 말씀이 없었으면 혹은 애초에 내가 그런 말씀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여전히 그게 좋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그 마음을 억누르고 말씀에 순종은 하지만, 말씀 자체를 기뻐하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그래서 103절에서는 그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말한다. 그래서 종일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순종하려고 한다. 난 이 말씀이 너무 싫지만 하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다는 뉘앙스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법”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특히 103절에서 “말씀”은 ‘약속’을 의미하는 단어(임라)이기 때문에 여기서 시편 기자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좋은 것’을 사랑하고 기뻐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맥락에서 시편 기자가 특별한 말씀을 생각하고 있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백이 하나님의 말씀 중 일부에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오늘 본문의 맥락 뿐 아니라, 시편 119편 전체의 맥락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이 어떻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전부가 어떻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서 동일한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6절에서 그는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다. 13절에서는 “주의 입의 모든 규례들을” 선포했다고 말했다. 고난 중에 그의 생명도 거의 끝난 것이 아닌가 싶었을 때도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라고 고백했었다(86절).

시 119:128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시 119:151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시 119: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시 119:172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만 사랑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같은 고백을 했다.

그럼 시편 기자는 바리새인과 같은 고백을 한 것일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면서 그냥 겉으로만 ‘나는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자랑하는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그는 정말로 말씀을 사랑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할 때, 여전히 나를 지키면서 사랑을 할 때가 있고, 완전히 나를 버리면서 사랑을 할 때가 있다. 나를 지키면서 사랑을 할 때는 이 관계를 통해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만 한다. 이 경우, 만약 이 관계를 지키기 위해 내가 바꾸어야할 것이 많아지면(손해), 관계를 끊는 선택을 하지 나를 바꾸지는 않는다. 상대방에게 어느 정도는 맞춰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를 바꾸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맞춰주는 일’은 절대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해야할 것만 한다. 그래도 여러 면에서 잘 맞으면 이 관계는 오래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나는 바뀌지 않는다. 오늘날 ‘성격 차이’라면서 이혼이 많아지는 이유도 이런 사랑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나를 버리면서 하는 사랑은 다르다. 앞의 경우와 시작은 비슷할 수 있지만 끝은 다르다. 이 경우는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나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나도 싫어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 자체가 변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하게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이다.

루이스가 하나님의 법을 사람이 사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것은 첫번째처럼 사랑하는 것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죄를 원하는 사람이 선을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두번째처럼 하나님을 사랑했다. 나를 지키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면서 사랑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도 사랑해주시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 대한 태도로 드러난 것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하나님의 법이 즐겁지는 않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단 것이 아니라 약보다 더 쓰다. 때로는 독약처럼 느껴진다. 이 말씀대로 살면 내가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고,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악한 우리가 선한 하나님의 법을 좋아할 수 없다.

여기서 첫번째 사랑을 하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는지를 계산할 것이다. 그래도 지옥가지 않으려면 순종해야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순종하면 뭔가 보상이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도 안하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라는 생각을 한다. 만약 순종하지 않고 지옥도 가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혹은 동일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순종하기를 택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순종의 유일한 이유라면 사실상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유익을 원할 뿐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 먼저는 선한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자책의 마음이 생길 것이다. 그러면서 어떻게든 순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래야해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어서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나도 정말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겠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은 점점 그 마음이 하나님을 닮아간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된다. 내가 즐거워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처음부터 모든 면에 있어 그렇게 되지도 않고, 어느 순간 완벽하게 나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함이 일치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이렇게 역사하심을 말했다.

빌 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올바른 소원도 주신다는 말이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이 말씀에서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는 약간의 의역인데, 문자적으로는 “이루어”가 빠져야 한다. 즉, “네 마음의 소원을 주시리로다”인 것이다. 물론 ‘소원하는 바’를 주신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문자 그대로 이해해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빌립보서 말씀처럼 올바른 마음의 소원도 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라고 고백할 수 있게 하시고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라고 고백하게 하신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옳습니다.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순종합니다”라는 고백 외에 “사랑합니다”라는 고백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 속의 대부분의 원리가 그렇듯,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실 것이니 우리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했다.

묵상(97-99절)

시 119:97–99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98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묵상)고 97절과 99절에서 반복해서 말한다. 단지 혼잣말로 중얼중얼 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무언가를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단어는 때로는 ‘불평한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우리가 누군가나 무언가에 대해서 불평할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불평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계속해서 마음에 담아두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담아두고 계속 생각한다. 여러가지 상황들을 그것과 연결시킨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그래서 그랬던 것 같고 저것도 그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러면서 불평할 것이 확장된다. 그러면서 그것을 혼자 말하기도 하고 남에게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정확히 성경이 말하는 ‘묵상’의 의미다. 반복해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묵상이다.

시편 기자는 불평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97절에서는 “종일” 그렇게 한다고 표현했다. 하루 종일 말씀을 펴두고 읽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 마음에는 계속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펼쳐져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98절에서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있는 하나님의 말씀이(89절) 오늘 여기서 나와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마음에 담아둔 사람, 묵상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다.

한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원어에서 시편 기자는 동사 “묵상하다”가 아닌 명사 “묵상”을 사용했다. 그 뉘앙스를 살리면 97, 99절의 해당 표현은 “그것이 나의 묵상입니다”가 될 것이다. 의미 상 큰 차이는 없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뉘앙스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 마음에 둡니다’보다는 ‘제 마음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저자는 말한 것이다. 그에게 다른 묵상거리가 있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는 말이다.

가끔 무언가에 푹 빠져있는 사람이 있으면, 무슨 얘기를 해도 자꾸 그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가 그것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마음에 두고 묵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 그와 관련된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묵상이다.

<천로역정>으로 유명한 존 번연에 대해서 스펄전은 이런 말을 했다. “그의 어떤 글을 읽어보아도 마치 성경 자체를 읽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어 그의 영혼 깊숙이까지 성경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의 글에는 시적인 아름다움이 넘치지만, 산문체 시 중 가장 감미로운 <천로역정>을 읽을 때 ‘이 사람은 살아 있는 성경이야!’라고 말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그를 어디든 찔러보십시오. 그의 피는 ‘성경적’입니다. 성경의 정수가 그 안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유튜브 얘기를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누구 험담을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스포츠 얘기를 하지 않으면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나의 묵상이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 말씀을 마음에 담아두고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것을 말한다.

또 하나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은 순종이다.

순종(100-102절)

시 119:100–102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101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102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게 하지만, 말씀은 그곳에만 머물지는 않는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으면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달라질 뿐 아니라, 실제 우리의 행동이 달라지고 삶이 달라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마음에 떨어졌는데, 어떤 변화도 없는 경우는 딱 하나다. 그가 생명이 없는 죽은 자인 경우다.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말씀은 순종의 열매를 맺는다.

시편 기자는 생명이 있는 자로서 순종의 열매를 맺었다. 그는 주의 법도들을 지킨다고 말하고(100절),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는다고도 말한다(101절). 또한 주의 규례들에서 떠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102절). 시편 1편에 나오는 복있는 자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 시편 기자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으로서 걸어야할 길을 정확히 알고 그 길로 걸은 것이다.

그는 자신이 걸어야할 길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않았고 말씀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도 어떤 길은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길은 악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필요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길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법도를 따랐다.

이 모든 것을 억지로 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싶었다.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길을 걷고 싶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순종은 ‘하기 싫지만 그래도 해야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순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더 정확히 말하려면 순종은 단순한 문제지만 쉬운 문제는 아니라고 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기 원했고 그것을 위한 치열한 영적 싸움을 했다.

대표적으로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그런 싸움을 잘 묘사했다. 그는 얼마나 악을 원하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말했다.

롬 7:18–20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은 여기서 자기는 죄에 대한 책임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이 죄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게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는 자신을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서 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며 탄식하기도 한다(24절).

탄식하는 바울과 기뻐하는 시편 기자의 공통점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어렵든 쉽든 마찬가지다. 그들은 말씀으로 머리만 채우려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말씀을 사랑하고 그래서 말씀을 묵상할 뿐 아니라 순종한다.

여기에 생각해 볼 만한 것이 있다. 시편 기자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순종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랑하기 위해서였을까? 둘 다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한다. 그렇게 자신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즉, 묵상과 순종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의 고리와 같다. 순종이 억지로 하는 것 같아서 하지 않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을 더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순종이 더 어려워진다. 중요한 것은 어디서든 일단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말씀에 대한 사랑으로, 묵상으로, 순종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지혜’로도 이어진다.

지혜(98-100, 103-104절)

본문의 마지막 핵심 단어는 “지혜”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함으로 얻을 수 있는 지혜의 가치를 다른 지혜와 비교하여 강조한다.

시 119:98–100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99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100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

여기 비교 대상은 원수, 스승, 노인이다. 원수는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스승과 노인은 좀 과한 자신감이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시편 기자는 스승들보다 자신이 더 통찰력이 있고, 노인들보다 자신이 더 분별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자신의 지혜, 통찰력, 분별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다. 즉 그가 비교하고 있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지혜와 그렇지 않은 지혜다. 당시 문화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인정 받았던 스승이나 노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지혜로워진 자들이 더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핵심은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지혜의 차이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자는 가장 어리석은 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하는 자보다 더 지혜롭다. 당연히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 수학 시험을 보면 항상 더 좋은 점수를 받고, 스마트폰을 만들면 더 좋은 스마트폰을 만들고, 주식 투자를 하면 무조건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사업을 하면 항상 올바른 선택만 해서 많은 이윤을 남긴다는 의미에서 더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사람이 참된 지혜의 삶을 산다는 말이다.

성경의 지혜서의 핵심 문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모든 지혜와 지식이 하나님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 전도서에서 전도자의 결론은 이러했다.

전 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지혜, 통찰력, 분별력은 결국 바른 정보가 그 바탕에 있어야 한다. 세상을 만들고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심판하실 하나님을 배제하면 그 어떤 지혜와 통찰력, 분별력도 무의미해 진다.

진화론은 아주 정교한 이론을 만들었지만, 문제는 그 전제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들이 모여서 이론을 만들고 그것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바른 지혜가 될 수 없다. 심리학도 마찬가지다. 들어보면 그럴싸하고 흥미롭다. 말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그들의 전제에도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인간의 죄 문제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도 없다. 심리학도 참된 지혜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모든 학문, 문화, 종교도 마찬가지다. 사상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지혜롭게 보인다. 그 안에는 당연히 지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빠져있고, 그런 지혜는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지혜가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끝에서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집 자체가 얼마나 튼튼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집의 기초에 무엇이 있느냐였다. 모래 위에 지은 사람은 뛰어난 건축자로서 모든 자연 재해를 고려하여 튼튼하게 집을 지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에 반해,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은 그냥 평범한 집을 지었다고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집만 보면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훨씬 지혜로워 보인다. 하지만 비가 오고 홍수가 났을 때, 사람들은 누가 진짜 지혜로운 사람인지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 기초에 무엇이 있느냐였다.

극단적인 예는 또 다른 예수님의 비유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다. 부자는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파티를 즐기며 살았다. 반대로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먹고 살았다. 세상의 기준에서 부자가 지혜로운 자고 나사로가 어리석은 자다. 하지만 죽음 후 나사로는 천사들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고, 부자는 고통 중에 음부에서 눈을 떴다.

부자가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될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살았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최소한 자기 형제들은 자신처럼 이 고통의 장소에 오지 않게 나사로를 보내서 경고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알았다면, 그의 선택은 달랐을 것이고 그의 삶도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살았을 때 그는 그 모든 것을 배제했기 때문에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세상에서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았을지 모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경이 우리를 지혜롭게 한다. 하나님이 계신 진짜 현실을 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모든 것의 가치를 바로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라 바르게 분별할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이 세상을 정말로 지혜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다. 우리의 선택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선택이 어리석다고 말하는 내 친구가 훨씬 더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나조차도 그게 더 좋아보이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참된 지혜임을 믿고 사느냐다.

시편 기자는 이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그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증거들이 그를 모든 스승보다 명철하게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법도가 그를 노인보다 명철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희망이 아니라 간증이다. 그는 말씀을 묵상했고 순종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도 고백한다.

시 119:103–104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104주의 법도들로 말미암아 내가 명철하게 되었으므로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의 말씀에 대한 정리라고도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도 더 달고 맛있는, 그래서 늘 더 원하는 음식과 같았다. 그 음식과 하나님의 말씀 중에 고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골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그것이 참된 명철과 지혜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거짓 행위는 미워하며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그 선순환의 고리 안에 들어온 것이다.

음식을 먹는 프로그램에 유행할 때, 맛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가 예능인들 사이에서 꽤나 중요했던 때가 있다. 그런데 사실 아무리 설명을 잘 해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 먹어본 사람은 그 설명이 딱 맞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내가 말씀을 먹어 보지 않으면, 묵상하고 순종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이 말씀이 나를 죄에서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은, 그렇게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성경이 읽고 싶지 않아도 순종하고 싶지 않아도, 성경을 펴고 내 몸을 복종 시켜서 순종해 보면, 이 말씀이 정말로 꿀보다 더 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모든 좋은 약보다 나에게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말씀을 좀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 모든 것이 내 방에서 먼지가 쌓여가고 있는 성경책을 펴는데서 시작된다.

도전

하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성도는 없다. 성도는 그 정의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제보다 오늘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다면 오늘 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참된 삶의 지혜가 있음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내 삶에 복 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고 더 사랑할 수 있게 된다.

때로 우리는 정말 싫어하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다. 그래도 먹어야 하니까, 건강을 위해서 먹는 음식처럼 그렇게 말씀을 대하는 것이다. 이 나쁜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 시편 기자의 고백에 진심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 119:97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시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