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3)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라메드: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89-96절)

땅이 주는 안정감이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비행기가 안전하고 배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타고 있을 때의 불안감은 어떻게 할 수 없다. 특히 비행기가 난기류를 만나서 오르락 내리락 하거나, 배가 파도 때문에 바이킹을 타고 있는 것 같으면,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그러다가 마침내 땅을 밟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다. 훨씬 더 극적인 상황은 수영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겨우 바닥에 발이 닿은 상황일 것이다. 그때의 안도감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시편 기자는 우리가 앞서 살펴봤었던 (65절부터 이어진) 3개의 연에서 그런 상황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65-72절에서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꽤나 담담해 보인다. 그는 고난이 주는 유익에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73-80절에서는 좀 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하심을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전히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빚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지만, 기도의 내용이 앞 연과는 다르다. 앞에서는 하나님께 “가르치소서”라고 구했지만(66, 68절),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안을 주셔서 살게 하여 주시기를 구한다(76, 77절).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수치에서 벗어 날 수 있기를 구하고(80절), 다른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에게 돌아오게 되기를 구한다(79절). 그 상황 속에서 더 큰 괴로움과 압박,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81-88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거의 한계에 도달했었다. 모든 면에서 한계였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연기 속의 가죽 부대”와 같다고 표현했고(83절), 그의 대적들이 그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87절). 그래서 그는 ‘언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인지를 물었다. “나를 도우소서”라고 외마디 비명 같은 기도를 하기도 했다(86절).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며 언약에 기초하여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88절).

시편 119편의 저자가 이 시편을 기록하면서 실시간으로 경험한 상황은 아마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치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 것처럼 이 시편을 기록했다. 그는 마치 깊은 물에서 빠져 가라 앉으면서 허우적이는 사람과 같았다. 도저히 스스로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물에 빠져들어가던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 때 그의 발이 땅에 닿았다. 아주 단단한 땅에 그의 발이 닿았다. 비로소 그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고, 비로소 그가 처한 상황이 제대로 보인다. 오늘 본문은 그런 상황에서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89-91절에서 시편 기자는 바로 그 ‘단단한 땅’에 대해서 말한다. 그 땅은 영원히 굳게 선 여호와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92절 이후의 말씀은 이제 그 땅 위에 서 있는 시편 기자의 간증과 같은 고백이라 할 수 있다. 92-96절은 말씀 위에 굳게 선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견고함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 그것이 우리 삶, 특히 고난의 상황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119:89–96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90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91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92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93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94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95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96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영원히 굳게 선 여호와의 말씀(89-91절)

예전에 어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제작진이 출연자를 헬리콥터에 탄 것처럼 속이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제작진은 일단 출연자의 눈을 가렸다. 그리고 헬기 소리를 틀어 놓고, 강풍기를 동원하여 바람을 일으키고는 스타렉스에 출연자를 태웠다. 그리고 차를 흔들면서 진짜로 헬기에 태운 것처럼 출연자를 속였다.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고, 귀에는 헬기 소리가 들리고 강한 바람에 흔들림까지 있으니, 출연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헬기에 탑승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TV 예능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충분히 속을 수 있는 상황이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심지어 제작진은 출연자에게 이제 스카이다이빙을 해야한다면서 눈을 가린 채 다이빙을 하게 했다. 출연자는 발버둥을 치다가 다이빙을 한 후에야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3,500미터 상공의 헬기에서 스카이다이빙을 한다는 생각으로 뛰어 내렸지만, 실제로는 스타렉스에서 바닥에 깔린 매트로 비명을 지르며 뛰어내렸을 뿐이었다.

모든 상황을 알고 보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저 재밌기만 한 상황이지만, 그 출연자 입장에서는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모든 상황을 실제라고 받아들이고 있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 몸이 매트에 닿기 직전까지 자신이 3,500미터 상공에서 다이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입장이었다면 속은 것 때문에 화가 나기도 했겠지만, 실제로 3,500미터에서 뛰어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마음이 먼저였을 것 같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제작진은 정반대의 상황으로 같은 출연자를 한번 더 속였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헬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는데, 스타렉스라고 속인 것이다. 출연자는 실제로는 하늘 위에 있었지만 스타렉스를 타고 있다는 생각에 지난 번처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중에 진실을 알고 나서 반대로 무서워했다.

이 출연자가 실제 상황과 반대로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실제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느끼는 감각은 실제 상황과는 다른 정보를 주었다. 스타렉스에 탑승했을 때는 헬기에 탑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헬기에 탑승했을 때는 스타렉스에 탑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결정적인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말과 그가 느끼는 것이 동일했기에 그는 속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35cm 되는 높이의 스타렉스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내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연기일 수 있다!)

고난 중에 탄식했던 시편 기자의 상황이 어떤 면에서는 이와 같았다. 그는 진짜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가짜 현실에 속았다. 그것이 너무나 현실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이 가짜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 모든 경험을 다르게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그가 보고 있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는 끝없이 바닥으로 가라 앉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의 발 아래는 단단한 땅이 있었다. 그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만 주변에서 자신의 믿음과 반대되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고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것도 기대와는 다를 때, 그리고 그 시간이 길어질 때, 점점 시야가 좁아지고 봐야할 것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 봤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그런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말씀에 소망을 두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시편 기자가 봐야 할 것을 보게 하셨다. 진짜 현실을 보게 하신 것이다. 마치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여셔서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신 것처럼(왕하 6:15-17), 시편 기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다. 그가 봐야할 것은 그의 눈으로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던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었다(82절). 그 말씀이 그가 디딜 수 있는 단단한 땅이었다. 이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얼마나 그 말씀이 단단한지를 노래한다.

119: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먼저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섰다는 사실을 찬양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한 기초이며 잘 세워진 기둥과 같다는 것이다.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어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 외부의 힘이나 혹은 내부의 약함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다.

저자는 두 가지 표현으로 이 사실을 더욱 강조했다. 하나는 그 말씀이 “하늘에” 굳게 섰다는 것이다. 우리말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은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는 재난적인 상황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에게 있어 하늘은 변하지 않는 것(안전한 것)을 의미하고, 여기 시편 기자도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하늘에” 굳게 섰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땅과 대조되는 하늘의 특징은 범접할 수 없다는데 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아무나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안전하다. 어떤 도전으로부터도 안전하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여 거짓됨을 증명하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다.

말씀의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영원히”를 문장의 가장 앞에 두기도 했다. ‘영원히’는 정말로 ‘영원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의미다. ‘영원’이라는 표현이 잘 와닿지 않는다면 ‘항상’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굳게 선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든지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 없다. 심지어 내가 그것을 믿고 있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 진리로서 굳게 서있다.

40:7–8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5:17–18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견고한 진리다.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 ‘언제’ 하나님께서 일하실지 질문하며 그의 눈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했었지만, 이제 그는 ‘항상’ 견고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안심한다. 바닥이 없는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발 아래는 견고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이제 그는 그 위에 발을 올려 두었다.

90-91절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영원히 견고할 수 있는 이유를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다.

119:90–91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91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여기 ‘성실’에 해당되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아멘’과 어근이 같다. 어근의 기본 의미는 견고함 혹은 확실함이다. 즉, 하나님이 견고한 분이시기에 그분의 말씀도 그렇게 견고한 것이다.

90절에서 시편 기자는 “땅”을 예로 들어 그 사실을 증명한다(“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땅을 세우셨고, 그리고 그 땅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땅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변화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질까봐 불안해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땅이 견고하다고 믿고 있다면, 그 땅을 세우신 하나님의 견고하심도 믿을 수 있다.

91절은 온 우주의 모든 것들이 질서를 유지하며 오늘까지 존재하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즉, 만물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하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자연의 섭리로 지금의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람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판단한다면 우주가 지금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그런 엄청난 우연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개미가 지나가는 길에 물감을 뿌려두고 수백억년이 지나면 한번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렇게 믿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사람이 그림을 그렸다는 믿음보다 더 합리적일 수는 없다. 이 우주의 질서에는 분명 ‘의도’가 있고, 성경은 그 의도를 하나님의 의도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이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그 말씀에 따라 오늘까지 있는 것이다. 그 무엇 하나라도, 작은 새 한 마리, 벌레 하나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자기가 원하는대로 움직인다면, 지금 세상은 우리가 보는 것과 많이 다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세상을 볼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만물이 주인이신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모든 것이 지금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절대적 주권이 온 세상을 움직이고 있고,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바꾸지 않으시고, 다른 어떤 것이 그 말씀을 바꾸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일무이하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46:9–10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보다 확실한 말씀이 있을까? 이보다 우리가 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말씀이 있을까? 없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 말씀의 이런 견고함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고난 중에 그에게 위로가 되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서는 무너진 것처럼 여기질 수도 있다.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최소한 지금 내 삶에서는 그런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내 삶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더 이상 그렇지 않을 때 그렇다. 내 삶의 많은 것이 변하고, 상수보다는 변수가 많아질 때 그렇다. 그래도 말씀대로 잘 살아온 것 같은데, 나에게 지금 주어진 결과가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 때 그렇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나에게서 눈을 떼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서 있는 그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 하늘이 그대로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땅도 여전히 있다. 여전히 아침에 동쪽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서쪽으로 진다. 때에 따라 계절이 변한다. 계절에 따라 날씨가 변한다. 비가 오고 나무가 자란다. 창세기 8:22를 읽어 보라. 시편 65편을 읽어 보라. 시편 104편을 읽어 보라. 이 말씀들이 오늘날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아주 단적인 증거다. 내 삶에서만 하나님께서 말씀을 세우지 못하실 이유가 없다.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이적들이 한편 전혀 놀랍지 않은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병이 나을 것을 명령하셨고, 귀신을 쫓아내셨다. 하나님으로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다. 그 모든 일을 하시면서 예수님은 피곤하지 않으셨다. 지치지 않으셨다. 물론 인간으로서 피곤하고 지치기도 하셨지만, 그런 하나님으로서의 능력이 줄어들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제하는 능력이 줄어들어서 어떤 피조물이 하나님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일은 없다. 심지어 사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어떤가? 그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놀라실까?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 몰랐는데, 큰 일 났다면서 대책을 세우고 계실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른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그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의지할 수 있다. 이제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말씀 위에 굳게 선 여호와의 백성이 어떤 고백을 하는지 잘 들어보자.

말씀 위에 굳게 선 여호와의 백성(92-96절)

간증(92-93절)

119:92–93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93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그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설득했을 것이다. 계속되는 고통은 그런 말에 설득력을 더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그의 즐거움으로 삼았고(77절),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멸망으로 이끈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끌었음을 이렇게 입으로 간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8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견고함을 강조했던 ‘영원히’를 93절에서 다시 사용하여 그가 배운 이 교훈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부끄러운 선택을 할 때도 있다. 고난 중에 멸망할 것이 두려워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포기하면 편할 것이라는 세상의 말을 듣는다. 용서하기 보다 복수하기를 선택한다. 오래 참기보다 분노하기를 선택한다. 평화를 추구해야할 곳에서 싸우고, 싸워야할 곳에서 평화를 추구한다. 성경이 말하는 결혼 생활을 추구하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서도 결코 손해는 보지 않으려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가정 생활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게 나만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말하는 자녀 양육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아이를 세상에서 낙오자로 만들 것 같다. 그래서 결국 이 모든 일에 세상의 지혜에 귀 기울이고 세상의 방식을 따른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하면 편할 수 있다. 세상과 다르지 않으니 세상에서 살기에 불편함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삶이 이렇다면 우리가 나눌 간증은 무엇이겠는가? 세상에 선포할 우리의 복음은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따르면서 어떻게 세상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따르는 것이 참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실상,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고난 중에 멸망하는 것이 된다.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 중에 멸망할 것이 두려운 것은 우리가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굳게 섰음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확고하고 또한 효력이 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느 때든 그 말씀을 즐거워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합당한 간증을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이 간증은 이제 합당한 기도로 이어진다.

기도(94-95절)

119:94–95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95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94절의 “구원하소서”라는 기도도 그렇고 95절에서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라는 전제도 그렇고, 시편 기자는 여전히 고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상태임을 본문은 말해준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견고함을 바라보고 있는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짐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참된 삶이고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아주 자신있게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요청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를 보호하셔야하지 않느냐는 논리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물이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그도 하나님의 종이다. 그래서 만물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처럼 그도 하나님께 순종한다. 그런데, 그 창조주와 피조물 관계를 넘어서는 관계가 하나님과 그 사이에는 있다. 바로 언약의 관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시면서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다(출 6:6-7).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는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라고 말씀하셨다(출 19:5).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이런 언약의 관계 안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사야 43:1에서 그들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선포하기도 하셨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시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억하며 “나는 주의 것이오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난 누구에게도 구속 받지 않아”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조금 낯설 수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사실 우리는 누구에게 혹은 어딘가에 속하기를 원한다. 전쟁이 나면 이길 수 있는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돈이 없으면 부한 집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사랑 받고 싶어하고, 인정 받고 싶어 한다. 모두 어딘가에 속해있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담대하게 구한다. 우리도 이 확신 가운데 거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찾고 생각하는 자가 하나님께 속한 자다. 그런 자가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담대히 구할 수 있다.

끝으로 시편 기자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가 가진 놀라운 확신을 고백한다.

확신(96절)

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한계가 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순간 완전한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결코 그것이 끝없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한계가 없다. 하나님 만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만이 완전하다. 모든 면에서 그렇다. 성경만이 완전하고 충분한 진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언제나 확신을 가지고 늘 의지할 수 있다.

무엇이든 우리는 그 한계를 보게 된다. 아무리 맛 있는 식당도 계속 가다보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즐거웠던 장소도 항상 즐겁지는 않다. 정말 완벽한 것 같은 사람도 계속 보다 보면 한계가 보인다. 심지어 교회도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다. 결국 내가 의지하고 내 발을 디디고 있을 곳은 견고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해 깨달았고, 우리도 같은 교훈을 받아야 한다.

도전

예전에 아들과 함께 수영을 했던 적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은 수영을 했고, 한 사람은 물로 채워진 수조를 걸어다녔다고 해야할 것이다. 걸어다녔던 사람이 바로 나다. 그런데, 걸으면서도 좀 불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이 물의 깊이가 꽤 깊었다. 거의 가슴에서 목 사이 정도의 깊이였다. 다른 상황이었으면 절대 물에 들어가지 않았을텐데, 물놀이를 좋아하는 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갔었다.

그런데 물놀이를 하면서 한번씩 위기가 찾아왔다. 물놀이 공을 잡고 수영을 하다보면 균형을 잃을 때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든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며 그 공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공을 잡고 안심했다.

그런데 수영을 하고 있는 아이를 보니, 아이가 제대로 수영을 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갔다가 점프해서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아직은 오래 수영하지 못해서 그런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물었다. 무섭지 않냐고. 물에 빠지는건데 무섭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바닥이 있는데 왜 무섭냐고 반문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내가 참 어리석게 느껴졌었다. 아이는 작아서 정말 물에 빠질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바닥이 있다는 사실에 전혀 겁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서면 물에 빠질 일도 없는데, 물에 빠질까봐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 마치 내가 딛고 설 수 있는 땅이 없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데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견고하게 서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울 것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든 내가 바로 서기만 한다면 이 말씀이 나를 지탱해줄 것을 안다면, 우리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고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H. B. 찰스는 오늘 본문에 대한 설교의 시작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늘 우리를 인생의 폭풍에서 지켜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 하지 않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엉뚱한 것을 기대하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기대한다면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겐 완전하고 견고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 말씀 위에 우리의 두 발을 힘차게 올려두고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