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2)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카프: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81-88절)
시편 119편은 각 8행으로 구성된 22개의 연이 있어서, 반을 나누면 오늘 함께 살펴볼 11연이 앞쪽 반의 마지막이 된다. 내용으로는 9연부터 이어진 ‘고난’이라는 중심 주제가 여전히 이어지는데, 앞선 두 연에 비해서 고난 중의 괴로움이 좀 더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셔서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배웠고(65, 68절), 그래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고백했다(71절). 또한 하나님께서 그를 괴롭게 하신 것은 그분의 성실하심 때문이고(75절), 그가 고난 중에 말씀에 소망을 두고 행하는 것이 주를 경외하는 다른 성도들에게 기쁨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74, 79절).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그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또한 그를 세우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그는 확신했다(73절). 그래서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즐거워했다(70, 72, 77). 그래서 더 배우고 그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66, 67, 68, 69, 73절).
고난 중에 있는 성도가 이렇게 반응한다면, 그야말로 더할나위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가 당하는 고난으로 인해서 함께 슬퍼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경건한 반응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고 또한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분위기는 그와는 다르게 어둡다. 스펄전은 이 부분을 시편 119편에서 가장 어둡고 캄캄한 한밤중에 해당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만큼 오늘 본문의 분위기는 어둡다. 마치 욥기 3장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욥기 3장은 욥기를 처음 읽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1, 2장에서의 욥은 그야말로 우리가 기대하는 의로운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극심한 고통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찬양했다. 그런데, 3장에서 그는 너무나 뜻밖의 말을 한다.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는 것이다. 자신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태어났더라도 바로 죽었어야 했다고 말하는 욥의 모습은 1, 2장과는 너무 대조가 된다. 그 뒤로 계속 이어지는 욥의 말들도 1, 2장과는 거리가 있게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욥의 말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욥이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도록 그에게 도전하셨지만, 오히려 욥의 말은 옳았다고 말씀하셨다(욥 42:7, 8). 욥은 1, 2장에서 뿐 아니라, 3장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던 것이다.
때로 고통 중의 탄식 자체를 죄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도 계속 ‘괜찮은 척’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탄식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믿는 자라면 괜찮아야만 한다고 생각해서 그렇다. 하지만 탄식은 우리 몸에 상처가 날 때 비명을 지르거나, 우리 몸이 아플 때 신음하는 것처럼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욥의 탄식도 우리는 그런 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다윗이 기록한 많은 탄식의 시편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탄식은 그들의 믿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들은 믿음 가운데 탄식했고, 결국 그 탄식은 그들을 더 하나님께로 이끌었다. 탄식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탄식한다. 하지만 그 믿음은 여전히 굳건하다. 그래서 이 고난을 통해 더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본문에는 믿음의 고백과 고통의 탄식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 둘을 나누어서 살펴보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생각해 보자.
고통의 탄식
고통의 원인
먼저 이 고통의 원인은 앞선 말씀에서도 봤던 것처럼 대적하는 사람들이다.
시 119:85–86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웅덩이를 팠나이다 86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시편 기자의 대적들은 교만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시편 기자와는 다르게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싶은데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실수하고 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86절은 이들이 시편 기자를 “이유 없이” 핍박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아무런 이유없이 그냥 장난 삼아 시편 기자를 핍박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 “이유 없이”는 78절의 “거짓으로”와 같은 단어다. 즉, 핍박을 할 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이들은 거짓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가지고 시편 기자를 공격했다. 85절에서는 이들의 공격을 “웅덩이를 판 것”으로 표현한다. 함정을 만든 것이다. 마치 사냥꾼이 함정을 파서 사냥감을 잡는 것처럼, 이들은 시편 기자를 모함하여 함정에 빠뜨렸다. 우연찮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계획을 세워 시편 기자를 무너뜨릴 계획을 세웠고, 지금까지는 그것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이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아니라 적대적인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시편 기자가 이들의 죄악됨을 경고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니엘과 비슷한 경우였을 수도 있다.
다니엘은 뛰어난 사람이었고, 왕은 그를 인정해서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로 삼고자 했다(단 6장). 그러자 그를 시기한 다른 총리와 고관들은 다니엘을 무너뜨릴만한 구실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럴만한 구실을 찾지못한 그들은 왕 외의 다른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는 형벌을 받게 하는 법을 세우자고 왕에게 구했고, 왕은 그들의 말에 따라 법을 세웠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그가 하던대로 하루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다. 결국 이로 인해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지게 되었다. 만약 시편 119편의 저자가 다니엘이라면 아마도 이 사건이 오늘 본문의 가장 적절한 배경일 것이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로 왕실에서 일하면서 아마도 이런 일을 계속해서 당했을 것이다.
어쨌든,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교만한 자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는 시편 기자는 그냥 둘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시편 기자를 거짓으로 핍박하고 계획을 세워 그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시편 기자의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표현을 보면 그렇다.
끝났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카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본문에서 세 번 사용했고(81, 82, 87절), “연기 속의 가죽 부대”라는 아주 흥미로운 비유도 사용했다. 먼저 동사 ‘카라’를 보자.
시 119: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
시 119:82 …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시 119:87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
같은 단어인데, 번역이 전혀 다르게 되어 있다. ‘카라’의 기본 의미는 ‘끝에 다다르다’이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서 이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하고 부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로 “끝났다”라고 말하면 때로는 무언가를 성취했다거나 완성했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되지만, 때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이 소진되었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되기도 한다.
81절에서 시편 기자는 그의 영혼이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다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랐다.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그를 해하려고 모든 거짓을 동원할 때, 그는 똑같이 더러운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지켰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처럼 선과 악의 싸움은 항상 법을 지키지 않는 악이 더 유리하다.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 있다.
다니엘의 상황에 빗대자면, 사자 굴에 갇힌 채로 계속 시간만 간 것이다. 감옥에 갇혔던 요셉의 상황도 여기 시편 기자의 상황과 비슷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데, 그 날이 오지 않는다. 요셉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의 성취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상황에 그는 계속 있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고, 노예로 팔려간 그곳에서 인정 받으면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르자 주인의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서는 바로의 신하 중 하나인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 줄 것을 부탁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복권된 후에 요셉을 잊었다.
요셉은 하나님의 구원을 바랐고, 때로는 그 구원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구원은 현실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때 요셉이 자신의 심정을 글로 남겼다면, 여기 시편 기자처럼 “피곤하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왔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렸지만, 이제는 그 기다림이 끝에 다다른 것 같은 것이다. 기다림이 끝나고 현실이 된다는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난 이제 끝났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상황이 눈 앞에 다가온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가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다”고 말하고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다”고 말할 때의 의미가 이것이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고 말씀을 바라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다. 하지만 그의 영혼은 이제 지쳤다.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기에 눈도 너무 피곤하다. 그리고 87절의 말처럼 그는 지금 세상에서 거의 멸한 것 같다. 끝난 것 같다. 그의 대적들에게 이 단어는 “성취”였고, 그에게 이 단어는 “멸망”이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기다림’
특히 이 고난에서 견디기 힘든 것은 ‘기다림’이다. 핍박 자체가 힘든 것도 맞지만, 여기서 시편 기자는 특히 기다림에 대한 고통을 표현한다. ‘피곤하다’는 표현 자체도 고통의 시간이 길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시간 때문에 이제는 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82절에서는 직접 이렇게 하나님께 묻는다.
시 119: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
84절도 때에 대한 질문이다.
시 119:84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제가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87절의 말씀과 맞물려 생각해 보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 얼마나 이 고난이 더 계속되는겁니까? 이러다 정말 죽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죽기를 원하십니까?”의 의미로 한 말일 것이다. 81, 82절의 말처럼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를 구원하실 그 때가 언제인지 묻는 것이다.
궁금한 것은 ‘언제’다. ‘지금’이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지금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언제’ 하나님께서 나를 안위하시고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심판하실지는 알고 싶다. 끝을 아는 기다림도 쉽지 않은데, 끝을 알지 못하는 기다림은 더욱 어렵다. 그 기다림이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고통의 인내라면 더욱 그렇다.
참고로, 지옥의 고통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끝나지 않는 시간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해도 그 끝이 언제인지를 알면 어떻게든 희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다. 설령 언제인지를 몰라도 어쨌든 끝나기는 한다는 사실을 알면 희망을 가지고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다. 예수님께서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막 9:48), 구더기도 죽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은 곳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즉, 끝나지 않는 고통의 장소가 지옥이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죽음은 모든 것을 끝낸다고 생각한다. 욥이 욥기 3장에서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하지만 지옥은 그런 죽음의 소망마저 없는 극한의 고통의 장소인 것이다.
연기 속의 가죽 부대
언제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지 알 수 없는 이 상황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비유했다.
시 119:83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불길 속의 가죽 부대라면 금방 타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연기 속에 있는 가죽 부대는 그렇지 않다. 열기로 인해 수축되고 서서히 말라간다. 연기로 인해서 검게 그을르기도 할 것이다. 볼품 없어지고 쓸모도 없게 된 상태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을 그런 모습으로 보고 있다. 아마 실제로도 그렇게 마르고 기운이 없는 상태였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육신보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혼이다. 그의 영혼이 그렇게 말라 버렸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느껴진다.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이 더 이상은 남아 있지 않다고 느껴진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태에서 시편 기자는 탄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탄식이 그저 자신의 내면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 끝을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다. 때로 이런 상황에서 빨리 포기하는 것이 더 현명할 때도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희망만 품고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 될 때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잘 안돼서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노력을 하다가 어느 순간 ‘근데, 왜 이걸하고 있지?’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생길 때가 있다. 애초에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굳이 고생해서 한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기다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기다리고 참는다고 해서 다 의미 있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빨리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성도의 기다림, 인내는 그렇지 않다. 결과를 모르고 무작정 희망만 품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탄식 중에 언제냐고 하나님께 물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안위하실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고 언제 그렇게 하실 것인지를 물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를 몰라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때를 알지 못하는 것 뿐이고, 그래서 지금이 고통스러운 것 뿐이다. 기다림 자체는 헛되지 않는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시편 기자의 믿음을 볼 수 있는 말씀도 많다.
믿음의 고백
지금 시편 기자는 끝에 와 있다고 표현했지만, 그렇다고 이제는 포기하겠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있다.
시 119:81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시 119:82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
시 119:83 내가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나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방금 읽은 이 말씀들은 앞뒤가 거의 모순되는 것처럼 들릴 정도다.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여 주의 말씀에 더 이상 소망을 두지 않고 내 눈을 거두었다고 말해야 맞는 것 같다. 나는 연기 속의 가죽 부대 같이 되었으니 이제는 주의 율례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해야 맞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살아 왔는데, 그 결과가 이러하니 더 이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지 않겠다고 해야할 것 같다. 탄식의 말만 모아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이를 것만 같다.
하지만 시편 기자의 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난 중에 그는 그야말로 코너에 몰렸고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시 119:86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
여기서 시편 기자는 “모든”을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이 신실하다고 말하지 않고 “모든” 계명이 신실하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변하지 않고 믿을 수 있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상황과 관계 없이 그렇다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경험으로 교리를 만드려고 한다. 글로 기록된 말씀보다는 지금 내 피부에 와닿는 경험이 더 진리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경험은 중요하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경험은 주관적이며 내가 잘못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경험이 교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리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이 순서가 바뀌면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님을 만들어 섬기게 될 것이다.
시편 기자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은 상황이었다. 계시더라도 최소한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계시지 않은 것 같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지도 않고 그의 기도를 듣지도 않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것인지, 아니면 구할 능력이 없는 것인지, 많은 의문과 의심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의 구원 등은 지금 시편 기자의 경험을 통해 얼마든지 부정될 수 있는 교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라고 고백한다. 그의 경험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그 말씀도 세상에서 그가 거의 멸하게 될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에도 여전히 ‘신실하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탄식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란다. 하나님의 율례를 잊지 않는다. 87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한다.
시 119:87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세상은 그에게 주의 법도들을 버리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생명은 거의 끝에 다다랐다.
만약에 시편 기자가 말하는 ‘구원’이나 ‘안위’가 단지 지금의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면, 그는 충분히 그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구원은 언제든지 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지금의 핍박은 그가 하나님의 법도들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받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를 핍박하는 자들처럼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될 것이다. 그것으로 탄식은 끝날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원하는 구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구원은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안위”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기를 그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잊지 않고, 말씀에 따라 사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고 있다. 시편 기자는 지금 그 참된 구원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 오는 고통도 감수하고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통 중에 탄식했지만, 믿음을 지키고 있다. 타협한 구원보다 차라리 고통을 택하고 있다. 그는 고통스러워 했지만 패배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싸움에서 패하는 순간은 원수에게 핍박을 당할 때가 아니다. 고난을 당할 때가 아니다. 심지어 그 고난 중의 유혹에 잠시 넘어졌을 때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가 패배의 순간이다.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 것, 탄식조차 하지 않는 것이 영적 싸움에서의 패배다.
사탄은 단지 욥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를 시험했던 것이 아니다. 그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겼을 때 욥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그의 건강을 빼앗겼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를 보고 싶어 했던 것이 아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다.
욥 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사탄이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은 욥의 고난이 아니라 욥의 배반이었다. 욥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말을 사탄은 듣고 싶었다. 욥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는 것을 보고 싶었다. 오늘날 사탄은 다른 방식으로 그 목적을 이루기도 한다.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편안하게 한다.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없게 만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게 만든다.
시편 기자의 경우 그의 생명을 위협하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았다. 하나님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진짜로 죽음을 마주하는 상황이 되었다 해도,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면 결국은 그를 살리실 하나님을 믿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처럼 사자 굴로 혹은 풀무불로 향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이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그를 죽이는 것이었겠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 이상을 하시는 분이시다(눅 12:4-5). 결국 두려워할 분, 결국 믿어야 할 분이 누구인지는 명확하다.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시 119:86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 그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오니 나를 도우소서
마지막의 “나를 도우소서”는 마치 물에 빠져들어가던 베드로가 다급하게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모습 같다(마 14:30). 시편 기자는 다급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시 119:88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입의 교훈들을 내가 지키리이다
어떤 상황이라도 참된 삶의 소망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대는 것이 우리의 유일하고 참된 소망이다. 시편 기자는 그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 삶을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갈림길에 놓인다. 하나님과 말씀에서 멀어지는 길이 있다. 하나님을 향한 눈을 감고 그 말씀을 향한 귀를 닫으면, 자연스럽게 고통에서도 멀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길은 고통을 감수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탄식 속에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둘째 길을 선택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마땅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도전
고난은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팀 켈러는 <고통에 답하다>는 제목의 책의 시작에서 “우리가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인생을 잘 꾸려 놓고, 건강과 부, 친구와 가족 관계, 그리고 경력의 성공을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뭔가는 그것을 망가뜨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삶이 우리가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모든 사람이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일을 만날 때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마치 모순처럼 보이는 반응을 봤다. 탄식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때문에 지금 당장의 고통을 감수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실 뿐, 부재하신 분은 아니시다. C. S. 루이스는 “하나님은 기쁨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며, 고통을 통해 소리치신다.”라고 말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려고 고통을 허락하신다. 때로는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을 내려놓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우리를 잘못된 길에서 돌이켜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고 그렇게 하기도 하신다.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다. 고난 중에도 그렇고 고난을 통과한 후에도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이유를 아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유를 가지고 우리의 선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오늘 내일 한걸음 씩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 걸음이 힘겨울 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걸음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길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고 하신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