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1)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요드: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73-80절)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론적으로만 다루지 않는다. 시편 119편의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음악을 틀어 놓고 여유롭게 창가에 앉아서 커피 한 잔과 함께 가볍게 즐기는 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약간의 깨달음이나 통찰력에 기분좋게 놀라며 나도 그렇게 한번 해볼까 생각하게 만드는 인생 지침서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성경은 낯선 장소에서 유일하게 손에 들고 있는 지도책이었다. 낯선 장소에 갔는데, 내비게이션이 켜지지 않아 당황해 본 경험이 있는가? 심지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그랬다면 더욱 당황스럽다. 한발짝을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럽다.
시편 기자에게는 성경이 그 이상의 절박함을 주는 책이었다. 나그네로서 이 땅을 사는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지침서가 바로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더 나아가서, 전진의 한복판에 낙오된 그에게 생존을 위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생존지침서가 바로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성경은, 잘 알면 골든벨을 울릴 수 있게 되거나 퀴즈를 맞춰서 사탕을 얻을 수 있게 되는 정도의 유익을 가져오는 책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그러해야 한다. 지금 교회 학교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라면, 그런 어린 아이같은 모습에서는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에게 성경이 생명이었고 삶이었다. 우리도 성경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왜 우리가 성경을 알아야 하는지, 왜 성경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지를, 그 중요성을, 그 심각성을 알고 성경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이라고 믿는다면, 그 말씀을 생명을 걸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시편 119편에서 저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혹은 저렇습니다”라고만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난을 언급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박함을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단순히 책을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이 책이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항상 더 배우고 싶어 하고 순종하고 싶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지난 65-72절의 말씀에서 저자는 고난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교훈을 언급했다. 고난 당한 것이 그에게 유익이었다는 교훈이었다(71절). 오늘 본문은 거기서 이어지는 같은 고난에 대한 말씀이고, 고난을 주제로 한 말씀은 다음 본문인 81-88절까지도 이어진다.
전체적으로 보면 뒤로 갈수록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더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 본문은 그 중간에 있고, 76절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구원하심을 구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사실 이떤 면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 앞서 하나님께 확신을 두고 신뢰했던 모습에 비해 덜 성숙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믿음이 있다면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고 꾹 참으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도 고통 가운데 아버지의 구원하심을 구하셨다는 사실이다. 즉, 구원을 바라는 것이 꼭 믿음이 없거나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단지 지금 상황이 싫어서 불평하며 구해달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님도 그렇고, 여기 시편 기자도 그런 태도로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구원을 바라는 기도는 양립할 수 있다. 사실 사람에게 있어 그것이 자연스럽다. 계속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다른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만 하고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고통 중에 우리는 구원을 바라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또한 해야하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이런 면에서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시편 기자는 73-75절까지의 말씀에서는 확고한 진리를 상기하고, 76-80절에서는 의로운 구원을 언급한다. 확고한 진리는 그가 현재 붙들고 있는 것이고, 의로운 구원은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붙들고 있는 확고한 진리(73-75절)
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주권을 언급하며,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구한다.
시 119: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창조주라는 사실을 기억한다. 단순히 그 사실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요성과 의미를 묵상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만드셨다고 말하고 또한 그를 세우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손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창조가 직접적인 하나님의 일임을 강조하는 일반적인 시적 표현이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제외하면 그 이후의 모든 사람들은 ‘자연스러운’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통해 태어났다. 지금 우리가 보는 물질 세계의 모든 것들도 창조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 때의 그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다. 직접적인 창조주이시다. ‘자연적’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그렇게 ‘의도’하셨을 뿐이다. 즉,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두 사람을 창조하신 것 뿐 아니라 한 인류를 창조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그 존재에 있어 하나님이 덜 관여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다”고 아담과 동일하게 말할 수 있다.
욥 33:6 나와 그대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특히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셨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셔서 존재하게 하셨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말씀은 이 다윗의 이 고백일 것이다.
시 139:13–18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16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17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18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그의 모든 형질을 이루셨다고 말한다. 그가 존재하기 전부터 하나님은 그를 위한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정확히 그 계획을 이루셨다. 우리는 어쩌다보니 이렇게 생긴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쩌다보니 두 발로 걷게 되고, 어쩌다보니 손을 사용할 수 있게 되고, 어쩌다보니 생각하고 말하게 되고, 어쩌다보니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들고 세우셨다. 견고하게 빚으신 것이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셨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알아”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우리 몸을 모른다.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세우셨기” 때문이다.
“만듦”이라는 존재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창조는 6일에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세움”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만듦”은 창조의 시작일 뿐이다. 하나님은 만들어진 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 가시기 때문이다.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우리를 빚고 계신다.
그렇게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에는 여러 도구가 들려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이런 시간을 하나님이 사용하기도 하신다. 성경적인 찬양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성도와의 교제가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다른 성도의 본이 되는 삶을 통해 일하기도 하신다. 캠프나 선교지 방문 같은 특별한 경험을 사용하기도 하신다. 사실 무엇이든 하나님은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 로마서 8장 28-29절이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아들을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 ‘모든 것’ 중에 ‘고난’이 큰 비중을 차지 한다.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우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한다고 말했다(약 1:2-4). 베드로도 여러가지 시험은 믿음을 연단하여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한다고 말했다(벧 1:6-7). 히브리서의 저자도 징계가 결국은 의와 평강의 열매는 맺는다고 말했다(히 12:10-11). 같은 맥락에서 시편 119편의 저자도 67절에서 고난을 당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었다고 말했고, 71절에서는 고난을 통해 말씀을 배우기 때문에 고난이 유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빚으신다. 모난 부분을 깎으시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신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배우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이 모든 일이 진행되고 있고,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지금 이루고 계신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이해하는 것만큼 현재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시고 세우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행하는 것이 어는 순간이든, 심지어 고난 중에 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그것은 단지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를 넘어서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사느냐의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지 않았고, 혹은 만드셨다고 해도 세우지는 않으신다면(삶을 알아서 살게 그냥 두신다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고난을 통해 스스로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철학자들도 고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고난이 정말 유익한 것이 되려면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어야 하고, 우리가 그 사실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을 통해서 지금도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는 조금 다르다. 하나님께서 그 손으로 나를 만드신 사실, 다른 어떤 피조물과도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창조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믿음이 필요하다. 성경을 제외하고도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만한 합리적인 논리와 근거, 증거들은 있지만, 결국 그 창조 사건 자체를 우리가 재현할 수 없고 다시 경험할 수 없다는 면에서는 순수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만드셨다고 믿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세우신다고 믿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주권자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그 확고한 진리를 붙들고 있다면, 고난 중에서도 그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 하나님의 뜻 알기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② 성도의 참된 교제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이 고난 중에서도 성도의 참된 교제가 있을 것에 대한 기대를 표현한다.
시 119:74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서도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그의 삶을 빚어가고 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깨달아 알 수 있기를 구했다. 고통 중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말씀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가 확신하는 또 다른 진리는 그런 그의 모습을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기뻐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사도 요한은 요한3서에서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라고 말했다(요삼 1:4). 이것은 비단 교회의 영적 인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기쁨이 아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 안에서 행하는 것을 볼 때 기뻐한다. 남이 잘 못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기쁨이다. 경쟁과 시기, 다툼이 있는 세상의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공동체는 그렇지 않다. 서로가 잘 하기를 격려하고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며 함께 기뻐한다. 성도가 고난 중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만들고 세우심을 믿고, 여전히 더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원하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고 할 때, 그 모습을 보는 다른 성도들은 기뻐한다.
시편 기자는 지금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기에 다른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그를 보고 기뻐할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다. 성도 간의 참된 교제에 대한 확신이다.
‘간증’을 나누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는 결과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만 간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기도한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셔야 그것이 간증거리라고 생각하고, 오직 그것이 성도에게 유익이 되고 기쁨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때로 그런 간증은 오히려 기복신앙처럼 들리거나 자기 자랑처럼 들릴 때가 있다. 그래서 그런 간증을 들을 때는 일부러 그런 불편한 마음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들어야 할 때도 있다.
사실 간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기뻐할 것은 하나님께서 결과로서 주신 은혜도 있지만, 결과에 관계 없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태도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고 믿음을 지키는 모습을 볼 때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기뻐한다. 혹은 결과가 원했던 것과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볼 때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기뻐한다. 욥기의 결론이 기쁨이 되기도 하지만, 욥이 고난 중에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할 때(욥 1:21),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기뻐한다는 말이다.
어려움 가운데 성도들에게 기도 요청을 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성도들의 마음이 부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려움 가운데 기도 요청을 하는 것이 그렇게 부담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의 참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일이 된다. ‘이런 어려움이 있지만, 이렇게 주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주님께서 어떤 결과를 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말씀을 바라고 주님을 신뢰하며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라고 요청한다면,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그 괴로운 상황 자체에 대해서는 함께 괴로워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믿음으로 인해서 참된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우리가 원하는대로 들어 주시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 우리가 지금 가져야할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고 기다리며 순종하는 것이다. 결과에 관계 없이 그렇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다른 성도에게 기쁨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성도의 참된 교제의 기쁨에 대해서 가져야할 확신이다. 이 확신을 붙들고 더 말씀 안에 소망을 둘 때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③ 하나님의 의로우심
셋째로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붙들고 있는 또 다른 확고한 진리가 있다. 바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다.
시 119: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이는 그야말로 시편 기자의 믿음의 고백이다. 지금 그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이 전혀 의롭게(옳게)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면 안될 것 같은 상황이다. 78절을 보면 69절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그를 치려하고 넘어뜨린 상황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빌미가 되어 남에게 공격을 당해도 우리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여기 시편 기자는 자신의 잘못과 관계 없는 거짓으로 공격을 당했다. 객관적으로 억울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주의 심판”, 즉 판단(결정)이 의롭다(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런 일이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면 하나님께 따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그를 괴롭게 하시는 것이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전혀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나님은 의롭지 않으시고, 그 약속에도 성실하지 않으셔서 이런 일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시편 기자의 모습을 보는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그랬고, 그에 대한 일반적인(세상의) 판단은 하나님은 의롭지도 성실하지도 않으시다가 된다.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자의 고난은 하나님의 의롭지 않으심과 성실하지 않으심의 증거가 되는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무능함의 증거인 것 같다.
이때 눈에 보이는 것을 따를지, 아니면 믿음을 따를지, 하나님의 백성은 시험대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참된 하나님은 백성은 보이는 것으로 행하지 않고 믿음으로 행한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그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믿음에 따른 고백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가 배운 것, 순종을 통해 그가 경험한 것에 따른 고백이다. 지금 보이는 것은 다르게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가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순종을 통해 경험하기도 했다. 따라서, 지금 보이는 상황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판단이 옳고, 지금 하나님은 나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 믿음의 고백은 76절부터 이어지는 구원을 바라는 기도의 핵심적인 기초가 된다.
고난 중에 시편 기자가 붙들고 있었던 확고한 3개의 진리를 살펴봤다. 창조주 하나님의 절대 주권, 참된 성도의 교제,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진리였다. 시편 기자는 이 진리를 지금 붙들고 있다. 그래서 지금 그 믿음을 지키며 말씀에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진리들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삼위일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도 아니다. 사실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믿을 때부터 누구나 알고 받아들이는 어떤 면에서는 기초적인 진리하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모르는 성도는 없다. 믿음 가운데 행하는 것이 성도의 기쁨이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성실하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당연하고 기초적인 진리를 우리가 괴로울 때에도 여전히 굳게 붙들고 있느냐는 것이다. 가끔씩 주일 학교 찬양을 듣다 보면 마음에 감동이 될 때가 있다. 너무 당연한 얘기, 뻔한 얘기, 잘 아는 얘기를 쉬운 언어로 때로는 직설적으로 풀어 놓은 것 뿐인데,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 것처럼 마음이 동할 때가 있다. 사실 우리의 믿음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교리를 이해하는데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말씀을 지금 나를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우리 신앙의 성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이 믿음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을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의 단순한 진리가 우리의 괴로운 상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혹은 우리의 괴로운 상황이 이런 진리를 부정하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럴 때 보는 것으로 행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행할 것인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참된 언약의 백성의 선택이다.
바라고 있는 의로운 구원(76-80절)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진리를 지금 확고하게 붙들면서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구할 수 있다. 고난 가운데 말씀의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해서, 괴로움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괴로움이 즐겁고 좋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도 아니다. 따라서, 믿음에 따라 행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결과에 대해서도 이렇게 되면 좋지만 아니어도 그만이라는 태도로 구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 하나님에 대해서만 생각하다 보면, 기도의 간절함을 잊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다윗이 범죄하여 태어난 아기를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 간절함으로 구하고 결과가 주어졌을 때도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특히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더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수치를 당할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구원을 구한다. 지금은 하나님이 마치 불의하신 것처럼 드러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으니 그 진실을 하나님께서 드러내 주시기를 구한다. 그 의로우신 하나님의 구원은 그에게는 위로가 되고 생명이 될 것이고, 그를 괴롭게 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될 것이다.
먼저 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에 기대어 구원을 구한다.
시 119:76–77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 77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내게 임하사 내가 살게 하소서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
앞선 시편 말씀에서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아무리 자신이 지금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해도 마치 당연한 것을 구하듯 하나님께 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종’으로 낮추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나타내셔서 위안을 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77절은 이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이 그를 긍휼이 여겨 주셔야 그가 살 소망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손이 그를 쳤을지라도, 여전히 살 소망은 그를 만들고 세우시는 하나님의 손에 있기 때문이다.
“위안”이라는 표현 때문에 여기서 시편 기자가 지금 고난 가운데 내적인 위로를 얻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그는 궁극적인 위로인 실제적인 구원을 바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이런 요청을 분명하게 한다. 시편 기자는 그를 괴롭게 하는 교만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되기를 구한다.
시 119:78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나를 엎드러뜨렸으니 그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수치를 당하는 것은 단순히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많은 시편이 이 표현을 하나님의 심판을 대체하는 표현으로 사용했고 여기서도 그렇다. 지금 고난 중에는 시편 기자가 공적인 수치를 당했다. 그래서 79절이 암시하는 것처럼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그를 떠났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계속해서 그 말씀을 읊조리면서 마음에 두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여전히 신실하게 행한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그에게 임하기를,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대적들에게는 심판이 임하여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선포되기를 구한다.
우리도 이렇게 구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이렇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두 구절에 유념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고 악익들의 심판을 구하는 것은 단지 복수심이나 나의 이기적인 욕심이 동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시 119:79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내게 돌아오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그들이 주의 증거들을 알리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을 통해 시편 기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됐던 것처럼 주를 경외하는 다른 자들도 그렇게 되기를 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간접적인 경험이었겠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는 잘못 생각할 때가 있다. 마치 나의 ‘공적’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들이 알게 될 것은, 내가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듣는 자들이 주의 증거들을 더 알게 될 때, 나의 증언이 바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끝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해 기도한다.
시 119:80 내 마음으로 주의 율례들에 완전하게 하사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온전하기를 구한다. 순결하기를 구한다. 다른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결국은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칭찬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마음이야 어떻든 겉으로 보이는 것만 잘 하면 사람에게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특히 고난 중에는 더욱 그렇다. 마음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경건하고 믿음 좋은 듯이 말할 수 있다. 그런 기도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은 순전함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을 지키며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떠하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도 하나님의 칭찬 받는 종이 된다.
고난 중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한다. 그 모든 과정 중에서 순전한 마음으로 행할 수 있기를 위해서도 구해야 한다. 그래야 모든 것을 통해 결국 하나님이 드러나신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도전
시편 119편의 말씀을 8절씩 강해를 하면서, 해당 본문에서 주축이 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매주 고민한다. 오늘 본문의 경우 76절의 기도가 전환점이 되기 때문에 주축이 되는 말씀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시작 구절인 73절을 주축으로 삼았다. 결국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관자가 되셔서 우리의 삶을 빚어가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76절 이후의 기도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어떻게 끝날지, 우리 중 누구도 알 수 없다. 남의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고, 내 삶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열심히 뜻을 세우고 계획을 세워도 마찬가지다. 삶에는 항상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고 세우신다”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기억하라. 이 삶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나든, 그것을 내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고 세우시는 일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통해 나를 더 하나님께로 이끄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 사실로 만족할 수 있지 않은가. 나를 만들고 세우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이해할 수 없이 복잡한 이 삶을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