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10)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테트: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65-72절)

시편 119편은 알파벳 시편으로서 히브리어의 자음을 순서대로 각 연에 부여했다. 각 연은 8절로 구성되어 있고, 그 8절의 첫 단어의 시작이 해당 자음이다. ‘3행시’ 같은 것을 해본 사람은 이런 식의 규칙을 가지고 시를 짓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시편 119편의 경우 얼마 전에 살펴봤던 41-48절이 히브리어 자음 ‘와우’로 시작되는데, 히브리어에는 와우로 시작되는 단어 자체가 별로 없다. 사전을 찾아봐도 대략 10개 정도 밖에 안되고 그나마 제대로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단어는 5개도 되지 않는다. 그조차도 일반적으로 시에 적합한 단어들이 아니다. 그래서 다른 알파벳 시에서는 와우를 제외하기도 했다.

반면에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자음은 ‘테트’인데(9번째 자음), 시에 사용하기 적합한 테트로 시작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토브’다. 토브는 ‘좋다. 선하다. 아름답다.’ 등의 의미를 가져서 시에서 범용적으로 사용하기 좋은 표현이다. 오늘 본문의 여덟 절 중 다섯 절이 바로 이 단어로 시작하고, 68절에서는 2번 사용되기도 했다. ‘토브’가 오늘 본문의 핵심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뭔가 좋고, 선하고, 아름답고 한 것들만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실제로 본문을 읽어 보면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선하신 행실을 찬양한다(65, 68절).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달라고 구한다(66절). 또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좋다’고도 고백한다(72절). 이런 식으로만 해도 충분히 내용을 채울 수 있는 단어다.

그런데, 이런 좋은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표현이 하나 있다. 바로 고난이다. 고난은 67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되었고, 69, 70절도 고난의 상황을 표현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71절은 고난과 앞서 말한 ‘토브’가 함께 나온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일반적으로 우리는 고난과 좋은 것을 연관 짓지 않는다. 연관지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고난은 나쁜 것이다. 그래도 굳이 연관을 짓는다면 ‘고난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것이 있었다’ 정도일 것이다. 고난이 지나고 나서 할 수 있을 법한 말이다. ‘고난은 없는 것이 더 낫지만, 그래도 유익한 면도 있다’ 정도인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고난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다는 것이 오늘 시편에서 드러난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고난’을 말하기에는 가장 적절하지 않은 단어인 ‘토브’가 핵심인 연이지만, 오히려 그 역설을 통해 고난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 역설을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복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은 크게 둘로 나눠볼 수 있다. 65-68절은 확신의 기도이고, 69-72절은 기쁨의 다짐이다. 시편 기자의 기도와 다짐을 통해 앞서 언급한 고난과 토브의 역설을 함께 생각해 보자.

확신의 기도(65-68절)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대하셨다고고백한다.

119:65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

“선대”했다는 것은 잘 대해줬다는 의미다. 본래 그렇게 할 것이 아닌데 그렇게 해주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은혜). 하나님께서 시편 기자에게 그렇게 선대하셨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시편 기자는 그것을 경험한 것이다. 경험에 따른 증언, 간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표현하여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겸손은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자신을 그렇게 낮췄다는 의미가 아니다. 실제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인식했다는 의미다. 시편 기자는 언약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왕이시고 자신은 하나님의 종임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언약에 따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마치 당연한 나의 권리인 것처럼 여기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대하신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약속은 상호 간에 무언가를 하기로 합의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은 주로 그렇지 않다. 특히 ‘언약’이라고 불리는 약속은 더욱 그렇다. 언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사람이 어떻다고 해도, 상황이 어떻다고 해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바로 언약인 것이다. 사람의 어떠함이나 행위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언약을 주시고, 사람은 그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나의 어떠함이나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어떻게 하셔야 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언약의 관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하신 일에 대해서 마땅히(당연히) 할 일을 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고대 왕의 절대적 위치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 자체가 종의 입장에서는 감사해야할 일이었다. 하물며 그 왕이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시라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지 않으시는 이상, 우리는 무엇도 하나님께 마땅히 바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선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착하고 선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느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는 부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고통의 문제는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 올바른 질문은 왜 하나님을 배반한 악한 죄인들이 지금 지옥에서 불타고 있지 않고 아직 이 땅에서 숨을 쉬며 살고 있는가이고, 그에 따른 올바른 답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이 선하셔서 심판의 때를 늦추시고 그 때까지 내가 삶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내가 숨쉬고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증명된다. ‘고통의 문제’라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호의가 계속되니, 이제는 그것을 권리로 여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 뿐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렇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특별한 언약으로 자신을 우리와의 관계에 묶어 두신다. 그래서 58절과 같이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감히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 말씀에 대한 주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이 주신 약속들 안에서 마치 빚진 자와 같이 우리 앞에 서 계신다.” 하나님 스스로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런 하나님을 경험했다. 시편 34:8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다. 그래서 65절과 같이 고백한 것이고 또한 이렇게 기도한다.

119:66 내가 주의 계명들을 믿었사오니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전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전혀 믿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대로 자신을 선대하신 것을 지금 이렇게 경험을 통해 알게 되자, 그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이 그의 확고한 믿음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 확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었다. 그래서 그는 “좋은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오늘 본문에는 두 개의 기도가 기록되어 있는데, 둘 다 “가르치소서”다(66, 68절). 말씀에 따른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니, 말씀에 대한 확신이 생겼고, 그러니 말씀을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가르치소서”는 낯설지 않다. 이미 여러차례 시편 기자는 같은 기도를 했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말씀을 사모하여 계속해서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66절이 특별한 것은 68절처럼 일반적인 표현인 “주의 율례들로(을) 가르치소서”가 아니라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치소서”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명철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분별력을 말하고 지식은 그 바탕이 되는 정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세상은 이런 것들로 가득하고 많은 것들이 “내가 좋은 명철과 지식”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주장들이 서로 다 다르다는 것이다. 누구는 커피를 먹으면 큰 일 난다고 하고, 누구는 커피를 마시면 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심지어 각자가 그런 주장을 하는 근거를 삼는 연구 자료도 다 있다. 한쪽 말만 들으면 그게 다 맞는 것 같다.

요즘에는 ‘유튜브가 선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유튜브 영상을 통해 ‘명철과 지식’을 얻는다. 영상은 특히 자기 얼굴을 걸고 하는 것이니 더 믿을만한 것처럼 보인다. 박사 학위까지 있는 사람이 저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보니 틀림 없이 맞는 말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똑같은 확위와 확신을 가지고 전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럼 무엇이 진짜 명철이고 지식일까?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알고 있고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지가 그 말의 진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설령 그 말이 진실이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거나 잘못된 선택일 수 있다. 거짓으로 고객을 속이면 당장에 이윤을 더 남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에 가지 않고 시험 공부를 하면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고, 그 결과로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더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많은 돈을 벌 수 있겠지만 (항상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에게는 ‘좋은 명철과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야 올바른 선택을 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것이 아니고, 유튜브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여 그 말씀에 대한 확신을 얻었고, 그 확신에 기초하여 하나님께 좋은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67절은 어떻게 그가 그런 확신에 이르렀는지를 말한다.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참 의외의 말씀이다. 어떤 기도의 응답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행하신 기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복 때문에 하나님의 선대하심을 경험하게 되고 그렇게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내용이 이어질 것 같은데, 시편 기자는 자신이 그릇 행하였는데 고난을 당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선대하신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이어지는 68절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119: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을 행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을 주신 것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삶에 하나님께서 오직 고난만 주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시편 기자가 언급하는 하나님의 선대하심은 고난을 주신 것이었다는 말이다.

67절에 따르면 그는 그릇 행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그릇 행했다는 것은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읽는 우리에게 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시편 기자에 대해서 받았던 인상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대적들로 인해서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했지, 그릇 행하고 있지는 않았었다. 그래서 한 주석가는 이것이 시편 기자의 ‘흥미로운 폭로’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그릇 행하는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 일부러 그릇 행하는 것이다. 완악하고 고집 센 마음, 반역하는 마음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무지해서 혹은 무관심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만약 시편 기자가 전자의 경우, 즉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행한 삶을 지칭한 것이면, 그것은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전의 상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죄악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셔서 깨닫게 하시고 회심하게 하신 것이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시편 119편에서 그가 말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던 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상을 따랐다기 보다는, 무관심해서 무지하여 자신의 명철과 지식에 따라 잘못된 길로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의 구원 받은 사람들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는 겉으로 봤을 때는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도 분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아마 시편 기자의 경우는 후자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용된 단어도 그릇 행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보다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상황을 지칭하는데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쪽이든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던 것은 맞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그를 돌아오게 하셔서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게 하셨다.

그가 경험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69-70절은 교만한 자들로 인한 고난을 묘사하지만, 이것이 그가 67절에서 말하는 고난과 같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67절의 고난은 “그릇 행한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씀에 따라 살지 않고 그릇 행했다면, 교만한 자들은 그를 괴롭히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만한 자들은 말씀에 따라 바르게 행하는 자들에게 고난이 된다. 하나님은 다른 형태의 고난을 통해 시편 기자를 돌아오게 하셨을 것이다.

다윗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다윗은 형통할 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살해하는 죄를 범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드러내셨을 뿐 아니라 죄에 대한 결과를 감당하게 하셨다. 범죄하여 태어난 아이가 죽었고, 그의 집에서 칼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고난을 통해 다윗은 낮아지게 되었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그를 저주하고 조롱했던 시므이에 대한 태도다. 다윗이 압살롬에게서 도망할 때 시므이는 다윗을 “피흘린 자”라고 부르며 저주했는데, 다윗은 그런 시므이를 죽이겠다는 아비새를 오히려 만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하 16:11–12 …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12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형통할 때 하나님을 잊고 죄에 빠졌던 다윗이 고난을 당할 때 오히려 다시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고난을 통해 선대하시는 모습이다.

이런 고난을 히브리서의 저자는 ‘징계’라고 표현하면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징계하지 않으시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부모는 마땅히 그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징계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모도 그렇고 하나님도 그렇고 자녀를 괴롭게 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 자체를 하나님이 좋아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 더 유익이 될 때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목적에 대해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덧붙였다.

12:10–11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부모는 때로 잘못된 이유로 징계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는 고난의 연속이었지만, 동시에 겸손을 배우고 하나님 의지하기를 배웠던 배움의 연속이기도 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에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 내시고 다시 종살이를 하게 하셨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분노를 쏟아 내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따라 그렇게 행하셨던 것이고, 다시 언약에 따라 그들을 돌아 오게 하셨다.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만이 참된 신이심을 깨닫게 되었다. 고난이 궁극적으로 선을 이룬 것이다.

이것이 고난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는 풍요의 역설도 함께 있다. 우리는 풍요 가운데 있을 때,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있을 때, 그릇 행하기 쉽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주신 집에 살고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들을 먹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잊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잊는다. 누릴 것이 많아질수록 이 유혹도 더욱 커져간다. 반대로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풍요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도 괜찮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 모든 풍요를 마치 내가 이루어 낸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에 빠지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왕국을 보며 그런 착각에 빠졌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다. 고난은 그런 우리의 뺨을 때린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진실을 보게 만든다. 때로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시고, 그렇게 방황하는 자녀를 돌아오게도 하신다. 그냥 두면 끝없는 멸망을 향해갈 자에게 선을 베푸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실까?

119:68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이것이 고난을 통해 시편 기자가 확신하게 된 사실이다. 하나님은 본래 선하셔서 선을 행하신다. 사랑하는 자녀가 죄악된 길을 걸으며 참된 복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것을 그냥 두실만큼 하나님은 나쁜 분이 아니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 이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확신 가운데 기도한다.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선을 행하신다. 그분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선이다. 고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여 그 말씀을 배우고 지키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반응이다.

우리는 고난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신데, 왜 이런 일을 나에게 허락하시냐고 따진다. 하지만, 고난과 하나님의 선대(은혜)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고난에도 좋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 그 자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고난이 끝나고 나서만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도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난 중에도 주의 말씀을 배우길 기도하고 지키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기쁨의 다짐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쁨의 다짐(69-72절)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또 다른 고난에 대한 반응이 달라진다.

119:69–70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교만한 자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매우 생생한 단어로 표현했다.

먼저 교만한 자들은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다고 표현했다. 마음이 아주 둔하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다. 말씀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따르려고 하지도 않는다. 말씀을 통해 명철과 지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교만한 자들이다.

그들이 시편 기자를 치려했다. 여기 “치려 하였사오나”로 번역된 단어는 문자적으로 무언가를 덕지덕지 바른다 혹은 칠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가리기 위해서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 위에 무엇을 칠하면 진실은 가려진다. 교만한 자들은 시편 기자 위에 거짓을 발랐다. 그래서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였지만, 교만한 자들은 그를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주의 법을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한다. 나의 참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억울한 마음이 가득하겠지만,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배웠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이 고난이 결국은 나를 더 하나님께로 이끌고 말씀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또한 즐거워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해야지가 아닌 것이다. 온전한 확신이 오히려 말씀으로 인한 고난 중에서도 말씀을 즐거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사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 확신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 말씀에 따라 사는데 오히려 세상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그것을 더 이상하게 여겨야 한다. 한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내게 발길질할 때 비로서 내가 그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알게 된다.” 참된 신자라면 고난을 통과하며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건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71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가 아니라 오히려 유익이라고 고백한다. 좋다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웠다는 것은 정말로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고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시험이라고도 부른다. 정말로 시험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해본 사람은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시험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시험이 없으면 제대로 알고 있는지를 확인해 볼 수 없다. 시험을 봐야 뭐를 알고 뭐를 모르는지를 알게 된다. 물론 시험 문제가 좋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통해 완벽한 시험을 제공하신다. 그래서 우리로 제대로 알게 하시고 배우게 하신다.

용서할 일이 없을 때는 용서에 대해서 안다고 말하기 쉽다. 사랑할 일이 없을 때는 사랑에 대해서 다 아는 것 같다. 유혹의 상황이 없으면 거룩을 추구하는 것도 별 것 아닌 것 같다. 돈이 없거나 혹은 너무 많아 보지 않으면,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굳이 성경에 왜 있을까 싶을 수도 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도 그렇다. 내 삶이 평안하면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고난을 당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시험 기간이 된 것이다. 벼락치기는 소용 없다. 고난의 시험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래서 평소에 얼마나 잘 배웠는지가 중요하다. 잘 배웠다면 고난을 통해 그렇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좌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좌절을 통해 말씀의 참된 의미를 배울 수는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말씀을 배우는게 정말 좋은 일일까? 1-2절 말씀에 따르면 그렇다.

119:1–2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난을 주시는 것이 나를 선대하시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정말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72절에서 그 복을 아는 자로서 이렇게 말한다.

119: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천천 금은”은 셀 수 없이 많은 재물을 의미한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 좋다고 말하는 것이다. 천천 금은이 진짜 복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지고 부동산을 찾아가서 이 말씀이 천천 금은보다 더 가치가 있으니 이것으로 집을 사겠다고 하면 중개업자가 어떻게 반응할까? 바로 쫓아낼 것이다. 가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너무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우리가 이 기준을 헤깔릴 때가 있는 것 같다. 여전히 세상에 속한 가치 기준에 따른 복을 성경을 통해 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에 순종하면 뭐도 잘되고 뭐도 잘되고 할 것을 기대한다. 세상에서 인정 받는 대신에 교회에서 인정 받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하나님을 통해서 만족시키고자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럴 때도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 모든 것의 허무함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무엇보다 (금은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관계가 되었든) 가치있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나에게 준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우리는 오히려 기뻐할 수 있고, 더욱 말씀에 따라 살기로 다짐할 수 있는 것이다.

도전

고난을 좋아할 수는 없다. “하나님 저에게 고난을 주세요”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고난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할 필요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고난은 그 주어진 목적과 다른 결과, 즉 원망과 불평, 의심과 불신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그 자체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지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은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고난을 주기도 하신다. 그렇게 우리의 유익을 구하시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토브와 함께 간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다면, 오늘 이 말씀이 참된 위로가 되기를 기도한다. 고통 때문에 마음이 닫혀있을 수 있지만, 기도로 마음을 열고 이 말씀을 들어 보라. 하나님은 이 고난이 유익이 되길 원하신다. 이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이 선하셔서 선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신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고난 중에 이 확신과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지금 고난 가운데 있지 않다면, 지금 고난에 대해서 잘 배워두길 바란다. 언젠가, 나의 의지와 관계 없이 고난의 학교에 입학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이 학교는 졸업도 없다. 지금 잠시 방학일 뿐이다. 시험 기간을 괴로움으로 보내지 않고 유익한 시간으로 만드려면 오늘 말씀이 필요하다. 늘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고 그 말씀 지키기를 다짐하라.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련하신 정금이 되어 나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