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본문: 시편 119 편 169-176절

설교자: 최종혁

타우: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169-176절)

161-168절은 시편 119편의 마무리로서 손색이 없다.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길로 행하며 경험하게 되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그리고 아직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구원이 임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고 즐거워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구원을 소망하며 계속해서 순종의 걸음을 걷는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라며 확신의 고백을 한다. 시편 119편이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하나님의 복된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의 기도라고 할 때, 이것으로 시편 119편이 마무리 되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조금 다른 방식의 마무리를 선택했다. 누군가에게는 약간은 김빠지는 마무리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계속되는 기도가 161-168절에서는 멈췄었는데(간구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음), 오늘 본문에는 다시 기도가 나오기 때문이다. 마치 드디어 성장을 이룬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제일 마지막 절의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는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110절에서는 악인들이 올무를 놓았어도 자신은 주의 법도들을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했는데, 여기서는 자신이 방황한다(떠난 상태)고 말하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약해진 것 같은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비슷한 혼란을 주는 신약의 인물이 바울이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까지 말한 사람인데(고전 4:16), 동시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전 9:27). 로마서 7장에서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며 탄식하기도 한다(24절).

뭔가 모순이 되는 정보가 주어지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이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현실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들은 높은 이상을 추구한다. 그들의 아버지가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함을 추구한다. 하지만 스스로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스스로 완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찾은 양’이기 때문에 절대 다시 방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의 표현에 따르면 ‘선 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를 믿고 살지 않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 길을 완주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아는 사람이다. 바로 완전하신 하나님이 필요하다. 시편 119편의 마지막 연은 바로 이런 언약의 삶에 대해서 말해준다.

119:169–176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0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1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172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173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6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기도로 나아간다(169-170절)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다.

119:169–170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0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결과적으로 구하는 것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봤던 것처럼 여기서도 시편 기자는 자신이 처한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기를 구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한다. 기도의 근거, 기도 가운데 가지는 확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다.

기도의 내용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다. “나의 부르짖음”이라는 표현이나 이어지는 간구의 내용을 보면 여기서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깨닫게 해주세요’는 아닐 것이다. 특히 표현도 “주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가 아니라 “주의 말씀대로(말씀을 따라) 나를 깨닫게 하소서”다. 즉, 시편 기자가 구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 대한 말씀에 따른 통찰력이다.

때로 우리도 상황에서 건짐을 받는 것 이전에 이런 영적인 통찰력을 간절히 원할 때가 있다. 쉽게 말해 상황에 대한 이해를 원할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욥이 그러했다. 고난 가운데 욥은 육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알지 못함의 고통’도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을 그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래서 욥은 반복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말하고 싶다고 하기도 했고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기도 했다(욥 31:35).

시편 73편의 아삽의 경우는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한다. 악인들은 풍족하고 심지어 죽을 때도 고통이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죄를 멀리하는 그는 종일 재난을 당하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73:16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알지 못하는 것이 그에게 심한 고통이 되었다. 하지만 그가 성소에 들어가 “깨달았을 때”에 그는 오직 하나님이 그의 복이 되심을 찬양하게 되었다.

상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으면 나는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어느날 눈을 떴는데 사막 한복판에 있다면 어떨까? 아무 것도 모르고 걷기만 하면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로 가는 길에 사막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소망을 가질 수 있고 지금의 고통을 견뎌낼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지금의 상황에 대한 깨달음을 하나님께 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자신의 이해가 아니라 말씀에 따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기를 하나님께 구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기도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건져주심을 구하면서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기도를 보라: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그는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기를 구한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사용한 단어를 고려하면, 그는 지금 마치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는 듯이 자신의 기도를 묘사한다고 할 수 있다.

구약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제사 제도를 통해서였다. 말라기의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단순히 제물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문제였다. 멀어진 마음의 결과로 가져온 눈 먼 제물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제물을 가져오지 못하게 성전문을 닫기를 원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으셨다. 그들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제물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다. 절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은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또한 놀라운 특권으로 인해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나아갔을 것이다.

지금 시편 기자는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씀대로 기도하며 하나님께 나아간다. 일반적으로 이런 이미지는 기도보다는 찬양을 묘사할 때 사용되지만,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기도 역시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갈 수 있는 제물로 보고 있다. 이 기도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부모는 자녀가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을 기뻐하기도 하지만, 부모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하는 것도 기뻐한다. 자녀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의 도움을 구하며 나를 의지하는 것 자체가 나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쁨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면 서운하기도 하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올바르게 하나님께 구했고, 따라서 담대하게 그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이르기를 바랐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언약의 삶이라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 핵심이 바로 기도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주신 분명한 말씀이 있다.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에게는 은혜의 보좌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 이른다. 그러니, 언제든 기도로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

찬양을 기대한다(171-172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기대를 표현한다.

119:171–172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172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개역개정 성경은 이 부분을 마치 시편 기자의 다짐처럼 번역했지만, 사실은 이 부분도 기도로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게 하소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현재는 그의 입술에는 고통의 부르짖음이 있고, 그의 혀에는 간구의 말이 있다. 그의 부르짖음과 간구가 하나님 앞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구원을 이루실 때, 그는 그의 입술과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

즉, 우리가 앞에서도 살펴봤었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단순히 지금의 고통이 싫어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예배하는 그 삶을 바라고 있다.

특히 여기서 그가 사용한 표현을 보면 그 의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게 하소서”라고 구했는데, 여기서 “찬양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기본적으로 무언가가 쏟아져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큰 비가 내린 후의 강물이나 샘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모습이다. 오늘날은 어쩌면 수도관이 터져서 물이 사방으로 쏟아지는 상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 단어가 말과 관련되어 사용되면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구 지껄이는 것이 된다. 입에서 무언가가 나오는 것이면 토해서 쏟아낸다는 의미가 된다. 무언가 그 안에 가득 차 있어서, 풍성하게 넘쳐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르치신 율례에 대해서 그는 그렇게 되기를 구하고 있다.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게 하소서”에 사용된 “노래하다”는 주로 함께 즐거워하며 노래하는 것, 즉 예배를 의미할 때가 많고 여기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이 의롭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진리가 그의 삶에서 증명되기를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서 그가 다른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 지금은 시편 기자가 전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도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배웠고 하나님의 말씀이 의로움을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한다. 다만 그가 하나님께 구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셔서, 그 구원의 기쁨이 그에게 가득하여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고, 그로 인해 다른 성도들과도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예배로 만족하지 않고 더 풍성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에 대한 태도도 이러해야 한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있다. 우리는 젖은 장작에 겨우 불이 붙는 것 같은 예배를 드리면서 할 일을 다한 것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매주 별 생각 없이 교회에 나오고 남들이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다 간다. 만찬 예배를 드려도 정말로 예수님을 기억하지 않는다. 설교를 들어도 내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만 정작 말씀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매주 드리는 예배에 아무런 문제 의식을 갖지 않는다.

혹은 더 좋은 예배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 반주가 이랬으면 좋겠고, 선곡이 이랬으면 좋겠고, 설교가 이랬으면 좋겠고 하는 생각만 가득하다. 물론, 특별히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이 더 좋은 예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기본적으로 내 안에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자는 훌륭한 반주에 익숙한 찬양을 드리고 좋은 설교가 선포되는 곳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이다. 더 좋은 예배가 드려지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좋은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로는 그렇게 더 좋은 예배자가 되기를 갈망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평소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지 않으면 사실 하나님을 예배할 것도 없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지 않는다는 말은 결국 내 삶을 내가 만들어낸 나의 노력의 결과로만 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감사할 것이 없다. 찬양할 것도 없다. 형식적인 감사는 하지만 정말로 그 속에서 홍수처럼 터져나오는 감사는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기대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시면, 그것이 그가 하나님께 드릴 새로운 구원의 노래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새노래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자가 되길 소원해야 한다.

말씀을 선택한다(173-174절)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과정 중에서 시편 기자는 말씀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119:173–174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그의 도움이 되게 해달라고 구한다. 지금까지 반복해서 구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아직 임하지 않았고,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기실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만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멈추고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구해야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의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삶에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 쉽다. 특히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 때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이 믿는 것과 다를 때 그렇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높은 성벽과 장대한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그 말씀을 잊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광야를 지날 때도 이런 저런 일로 계속해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다.

하지만 여기 시편 기자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법도들을 택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올바른 선택이고,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증거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여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173-174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언약에 호소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면서 하나님께 은약의 은혜를 나타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의 이 기도를 통해 지금 내 삶의 선택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면 내 기도의 동기는 무엇이겠는가. 그 기도의 동기는 이기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하나님은 어떤 기도든 들어주실 수 있으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지만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만 구하는 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의 태도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용당하지도 않으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의 삶에서 계속해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것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내 삶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언약의 백성은 그렇게 언약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 맡긴다(175-176절)

끝으로 175절과 176절은 오늘 본문의 결론이자, 시편 119편의 최종 결론이기도 하다. 언약의 삶이 어떤 삶인지에 대한 요약이라 할 수 있다.

119:175–176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6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길이 참된 삶의 길이다. 그 길로 가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살게 해달라고 구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돕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씀을 잊지 않고 순종의 삶을 산다. 고난이 있더라도 이 길을 걸어간다. 이것이 우리가 시편 119편에서 반복해서 살펴봤던 언약의 말씀에 신실한 언약의 삶이다.

참 신실한 삶에 대한 고백이다. 그런데 그 중에 눈에 띄는 기도가 있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여기서 시편 기자가 갑작스럽게 숨겨왔던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금까지 고난의 이유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로서만 언급했는데, 사실은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있었다는 반전은 아닌 것이다. 아마도 자신이 경험한 모든 상황들을 통해서 시편 기자는 겸손히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을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찾지 않으시면 잃은 양 같이 방황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잃은 양에 비유하며 오직 하나님이 찾으셔야 살 수 있음을 고백한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최선을 다해 신실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결국 그 신실함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셔야 함을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이것이 신실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가져야할 삶의 태도다. 내가 신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가 필요하다.

어떤 기독교 카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성전에 올라간 세리와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읽고 있었다. 그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세리를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다. 자신은 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님에 대해서 감사했다. 이 말씀을 읽은 사람은 그런 바리새인을 보며 ‘나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다’는 생각에 감사를 하다가, 문득 그것이 곧 바리새인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이런 함정에 빠질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죄만 보다가 마치 나는 의로운 사람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그렇지 않아’라며 안심하고 자만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럴 수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 것이다.

바리새인의 문제는 ‘자기 의’였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다. 스스로 의로우니, 사실 그에게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았다. 반면에 세리는 하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다. 스스로 의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다.

세리와 같이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는 때로 바리새인처럼 자기 의로 이 삶을 살려고 할 때가 있다. 마치 이제는 하나님이 없어도 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따르는 삶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삶이다. 때로 우리는 내 삶이 좋아 보일 때가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안정되어 있고, 이렇게만 살면 되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지 않다. 어느 때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 없을 때는 없다. 우리는 어느 때라도 넘어질 수 있고, 언약의 길에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골딩게이는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Psalms 90-150, 445).

골딩게이, “나는 여호와의 길을 따라 걷는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걷도록 도우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 전심의 헌신은 필수적이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나는 올바른 길을 걷겠다는 결심이 필요하지만,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내 발걸음을 인도해야 하지만, 그 발걸음을 견고히 세우시는 분은 여호와시다. 나는 내 마음을 여호와의 말씀에 기울여야 하지만, 그 마음을 기울이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시다.”

바리새인과 같지 않음에 감사하는 또 다른 바리새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구원 받을 때 필요한 세리와 같은 겸손한 마음은 지금 나에게도 필요하다.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라는 시편 기자의 마지막 기도가 우리 삶이 되어야 한다.

도전

처음 시편 119편을 시작하면서 함께 성경의 에베레스트를 정복해보자고 했었는데, 마침내 그 끝에 이르렀다. ‘말씀을 정복했다’는 표현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여튼 쉽지 않은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 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살펴봤다.

시편 119편을 멀리서 봤을 때는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가까이서 보니 삶에 대해서, 특히 고난의 삶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 것 같다. 전반적으로 보면 시편 기자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거의 매절 ‘하나님의 말씀’을 언급했다.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그렇게 했을까? 고난이 곧 우리의 삶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할 한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말씀의 필요성이다.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정말 ‘필요’를 느껴서 그런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시편 기자의 말씀에 대한 사모, 사랑, 즐거움, 갈급함 등은 결국 그가 말씀을 정말로 필요로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구하고 깨닫게 해달라고 구한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그런가? 어쩌면 우리는 말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고 있으면서 의무감에 읽으려고만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조금만 읽어도 지루하고 읽기 싫어진다. 금방 포기하게 된다. 읽어야할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성경 시험을 본다고 하면 더 열심히 읽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할까? 필요하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봤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하다면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성경도 당연히 나에게 필요하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이러하길 원한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고 싶다면, 성경은 우리의 유일한 나침반이고 지도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아야 한다. 내 마음에 담아두고 작은 소리로 읊조리고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그 모든 일에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살아야 할 언약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