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21
본문: 시편 119:153-160
설교자: 최종혁
레쉬: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153-160절)
시편 119편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시편 119편은 하나의 긴 기도다. 이 기도를 통해 저자는 특정 진리를 가르치거나 교훈을 주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고충을 하나님께 아뢴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만큼 그분이 주신 말씀도 사랑했다. 이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이 참된 삶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렇게 살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그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살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 땅에서 나그네였다. 이방인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 둘러쌓여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적대적이며 그를 핍박한다. 이것이 그가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이었다.
그럼,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 밖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을 당할까?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이 땅까지는 그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 땅의 왕이시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인 시편 기자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이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 시편 기자는 신음했다. 시편 1편에서 말하고 있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은 풍요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지금의 현실에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다. 시편 119편은 뒤로 갈수록 이런 시편 기자의 간절함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그 간절함 속에서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난 중에서 말라기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냐고 따졌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의 시야가 좁아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졌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정확히 그 반대의 반응을 보인다. 고통스럽고, ‘왜’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생기지만, 결국 해답도 하나님께만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한다.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좋은 본이 된다.
하나님께 구한다(153-156절)
145-152절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시편 기자의 기도의 간절함이 짧은 명령형의 표현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153절),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절). “살리소서”는 156절과 159절에서도 반복되고, “보시고” 역시 159절에서 반복된다. 시편 기자의 간절한 요청이 8개의 명령형으로 표현된 것이다.
먼저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라고 구한다(153절). 여기 사용된 ‘보시고’는 일반적으로 눈으로 ‘본다’는 의미이지만, 이어지는 ‘건지소서’를 고려하면 단순히 봐달라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가 줄넘기를 하면서 “여기 좀 봐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그냥 봐달라는게 아니고 칭찬해달라는 의미인 것과 마찬가지다.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따로 있고 그것을 위해 먼저 나를 봐달라고 하는 것 뿐이다.
시편 기자는 “나의 고난”을 봐달라고 하나님께 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실 것이라는 전제가 있다. 15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런 확신 가운데 “보다”(히, 라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을 오를 때, 이삭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있느냐고 아브라함에게 물었었다. 그 때 아브라함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답했는데(창 22:8), 여기서 “준비하시리라”가 히브리어 ‘라아’로서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보시리라”가 된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준비하셨음을 알게 된 후에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는데(창 22:14), ‘이레’가 바로 라아의 미완료형으로 문자적으로는 “여호와께서 보실 것이다” 혹은 “여호와께서 보신다”는 의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시면 합당하게 움직이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사용한 “보고 건지소서”의 가장 적합한 예는 출애굽 사건일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출애굽의 인도자로 부르시면서 반복해서 백성들의 고난을 보았고 그래서 그들을 건져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출 3:7–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후에 모세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을 때 백성들의 반응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출 4: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즉, 출애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고난을 보시고 그들을 고난에서 건져주신 사건이었다. 시편 기자는 출애굽을 직접 경험했던 사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기대할 수 있고 구할 수 있다. 개인의 삶에서 크고 작은 출애굽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라고 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의 고난을 보시고 건져주셨던 그 출애굽 사건처럼, 나의 고난을 보시고 동일하게 건져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변호”를 요청한다(154절). 그는 지금 자신의 상황을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대신하여) 변호해주어야 상황’, 즉 억울하게 정죄를 받고 있는 상황으로 보는 것이다. 반복해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시편 기자가 경험하는 어려움의 근원은 육체의 질병이나 재정적 어려움 같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심신의 고통을 모두 호소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대적들로 인한 어려움이었는데, 대적들은 물리적으로 핍박했던 것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핍박했다. 비방과 멸시가 있었다. 조롱이 있었다. 특히 그들은 거짓으로 시편 기자를 핍박했다(참고, 161절).
물리적 폭력이라면 어떻게든 방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칼을 들고 오면 (되든 안되든) 나는 방패를 들 수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어 폭력은 어떻게도 대항할 수 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인지하는 순간 이미 어떻게 손쓸 수 없는 상황이 많다. 아무리 명백한 거짓이나 오해라고 해도, 또한 그것이 후에 밝혀진다고 해도, 이미 무너진 신뢰는 다시 쌓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들이 이런 일을 당해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목격한다.
시편 기자도 아마 그런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변호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이 일을 맡긴다. 변호인을 선임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변호하시는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찰스 스펄전, <시편 강해 10권 하>, 87. “그분은 경건한 자에 대한 비난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밝히 드러내시며, 그리하여 그의 송사를 실제적으로 변호해 주실 수 있다. 그분은 경건한 자를 위해 친구들을 보내사 그의 결백함을 밝힐 때까지 그들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게 하실 수도 있다. 또는 그분이 대적들의 심령을 치사 그들로 자신의 거짓을 자백하지 않을 수 없게 하실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의인은 자기 손으로 대적을 치지 않고서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방법이 아니더라도, 결국 하나님은 억울함을 풀어 주신다. 공의를 세우신다. 하나님의 변호는 실패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이렇게 하나님께 맡긴다.
이어지는 “나를 구하사”도 비슷한 맥락에 있는 요청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가 요청하는 “구하소서”는 한번쯤 들어봤을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 ‘고엘’의 동사형인 ‘가알’이다. ‘고엘’은 주로 구속자로 번역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는 친족 구속자로 번역하기도 한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친족을 도와 다시 일으켜줄 책임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이 단어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주었던 사람이 룻기에 등장하는 ‘보아스’다. (룻기에서는 이 단어가 ‘기업 무를 자’로 번역이 되어 있다. 개역개정 기준.) 룻과 나오미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약자라고 할 수 있는 과부들이었다.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었기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가 없었다. 그런 룻과 나오미의 기업을 보존하고 살 수 있게 해준 사람이 보아스였다. 그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원하지 않아서 고엘이 되기를 거부했지만, 보아스는 기꺼이 고엘의 책임을 다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단어는 그렇게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자를 건져내어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편 119편의 저자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이런 구원이다. 스스로 변호할 수 없어 하나님의 변호가 필요하다고 구했던 것처럼, 스스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것이다. 룻이 보아스를 찾아가 그 발치 이불을 들고 누웠다가 보아스에게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구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갔던 것처럼,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 그렇게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겸손히 구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잠언 23:11은 이렇게 말한다.
잠 23:11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그가 너를 대적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이 말씀 바로 앞에는 약한 자(고아)의 소유를 빼앗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 이유로 주어진 것이 그들의 ‘구속자’(고엘)가 강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실 것(변호)이라는 사실이다.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라고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렇게 해 줄 존재가 그에게 필요하기 때문이고, 오직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때 그가 살 수 있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154절). 여기서 시편 기자가 생각하고 있는 “주의 말씀”은 언약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말씀이다.
그래서 153절에서 그는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라고 언급했다.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자랑하기 위해 하는 말도 아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없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말씀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뿐이다. 155절은 언약의 또 다른 측면이다.
시 119:155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진다는 말이나 악인들이 구원에서 멀어진다는 말이나 결과적으로 의미는 동일하다. 하지만 여기서 시편 기자는 악인이 구원에서 멀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구원이 악인에게서 멀어진다고 말한다.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더욱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율례를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지 않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어 주면 하나님은 구원 하셔야만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이 구원에서 멀어진 것이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구원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스스로 구원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얼마든지 우리 마음도 완악하게 하실 수 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서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우리는 반감이 생긴다. 나의 주권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그렇게 말해야 하는 생각도 한다. 그냥 하나님은 우리를 다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 받기 원하신다는 정도로만 말해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가 있다. 첫째는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함이다. 그리고 셋째는 우리로 하나님을 겸손히 찾게 하기 위함이다.
잠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니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겸손한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영혼 구원의 은혜 뿐 아니라 매일의 은혜도 동일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말씀을 찾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구원은 가까이 있기를 바랄 수는 없다.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자에게서 구원을 멀리하신다.
시편 기자는 그런 면에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순종의 삶을 살았던 신실한 백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백성으로서 언약에 따른 긍휼을 하나님께 구했다.
시 119: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
자신의 신실한 삶을 언급하면서 나를 살리셔야 합니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종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한 것 뿐이고, 그것이 마땅한 태도다. 지금 그가 이렇게 담대하게 “나를 살리소서”라고 요청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과 그분의 긍휼하심이다.
특히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많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많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분량이고, 다른 하나는 그 횟수다. 때로 우리는 한번에 많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하심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게 크신 긍휼까지는 필요하지 않은데, 계속 긍휼하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매일 매일 살아갈 때가 그렇다.
그런 모든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많다”고 확신할 수 있다. 분량에 있어서든, 횟수에 있어서든,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언제나 많다. 풍성하다. 부족할 일이 없다. 그래서 언제든 구할 수 있다. 겸손히 구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대 할 수 있다.
시편 기자의 상황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께 화가 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는 하나님께 신실한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약속을 주셨는지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고난을 보시고 건지시는 분이신다. 출애굽 사건이 이를 증명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공의를 나타내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를 보증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기대어 살 수 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그런 분이실까? 나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이 모든 것을 증명하고 보증한다.
롬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히 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시편 기자보다 더 크고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나를 살리소서”라고 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 우리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구해야 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가까이에 두시고 인도하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길로 행한다(157-160절)
다음으로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시편 기자의 고난 중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면서 계속해서 신실하게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점이다.
시 119:157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의 ‘많은 긍휼’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시편 기자를 핍박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그가 미워서, 그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가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시편 기자가 자신의 믿음을 꺾고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들 중 하나와 같이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탄이 욥을 시험할 때 보고 싶었던 모습이다. 사탄은 욥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욥이 하나님을 욕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욥의 아내가 욥에게 했던 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9)는 그야말로 사탄의 말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있다고 해도 이런 고통을 주는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뭐가 있냐는 것이다.
시편 기자를 핍박하는 자들도 아마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욕하면 살 수 있을지 누가 알겠냐.
하지만 시편 기자는 이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동요하는 마음은 하나님께로 가져갔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자돌로 인해서 그는 슬펐다.
시 119:158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거짓된 자들”은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 기만하는 사람, 반역한 사람을 의미한다. “슬퍼하였나이다”는 안타까움 보다는 뭔가에 질색하거나 혐오하는 감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은 이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이렇게 번역했다.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저 배신자들을 보고, 나는 참으로 역겨웠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런 표현들을 보면 이들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버린 자들, 배교자들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렇게 하는 자들을 핍박하고 조롱하는 자들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들에 대해서 부러움이 아니라 역겨움을 느끼고 있다.
157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대적들은 그들이 하는 말, 시편 기자가 처한 상황 등이 결국 시편 기자에게 유혹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편 기자도 하나님을 버리고 이 땅에서 편한 삶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편 기자에게 어려움은 되었지만 유혹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기도 싫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스펄전은 이렇게 설명했다.
찰스 스펄전, <시편 강해 10권 하>, 89. “그러한 죄인들을 보는 것 자체가 비통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넌더리났고, 그들에 대해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을 느꼈다. 나는 그들에게서 아무런 기쁨도 얻을 수 없었고, 아무리 그들의 의복이 근사하고 입담이 좋을지라도 내게는 그들의 모습이 서글프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매우 쾌활할 때에도 그들의 모습 자체가 내 마음을 무겁게 억눌렀다. 나는 그들이나 그들의 행위에 대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즐겁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보기 좋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와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하나님의 질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곳이 천국 같을지라도 지옥인 것이다.
이것이 정말 성숙한 자의 모습,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자의 모습이다. 그들은 세상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즐거움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자들, 그것을 나에게 권하는 자들도 불쌍할 뿐이다.
그래서 이 고난 중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하고 이렇게 구한다.
시 119:159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그분의 인자하심을 구한다. 그것이 유일한 살 길임을 확신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씀에서 온다.
시 119: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강령”은 머리, 혹은 시작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즉 ‘전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작부터 진리이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이 사실에 자신의 삶을 걸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하나님의 말씀 위에 그의 삶을 세웠다. 지금 비록 비가 오고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고 있지만, 그 삶의 기초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그 역시 흔들리지 않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자들이 누리고 있는 즐거움은 그가 볼 때는 이미 무너진 집에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부러움은 그들의 몫이지,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걷는 길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그 길을 가는 것이 잘못 되었다거나 다른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이 길을 가는데는 어려움이 있고, 그래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계속해서 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도전
교회는 환난 중에 있을 때 가장 순수했다는 말을 한다. 환난이 자연스럽게 참된 믿음과 그렇지 않은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불순물이 섞인 금을 단련하면, 없던 금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금이 아닌 것들이 제거되고 본래 금이었던 것이 남는 것 뿐이다. 성도의 삶에 환난이 하는 역할도 그렇다. 환난은 우리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드러낸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환난을 당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난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분, 아니 유일하게 필요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 환난 중에서 우리가 구해야할 답은 환난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 환난의 답이시니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길로 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자들에게 가깝다. 삶에서 어떤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편하고 쉬운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길 바란다. 그 길만이 정말로 살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