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 17
본문: 시편 119편 121-128절
설교자: 최종혁
아인: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121-128절)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만, 실제 그것을 믿으며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하나님이 선하신 것을 알지만, 삶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단순히 상황에 대한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고 고백하지만 그 말의 진짜 의미를 모르거나 혹은 믿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께 공의를 가르치려고 한다. 내가 재판관이 되고, 내가 법의 집행자가 되는 것이다.
믿음과 현실이 다르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렇게 하기 쉽다. 특히,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때 그런 유혹에 빠진다. 그래도 나름 말씀에 따라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기대했던 것과 다르면 실망하고 더 나아가서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한 때 열심을 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그 열심이 식고 신앙에 점점 무관심해 지기도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무뎌진다. 신앙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지만, 삶의 우선순위에 없는 것은 분명하다. 때로는 열심을 내려는 사람에게 ‘나도 그렇게 살아 봤는데, 결국 다른 건 없더라’는 식으로 낙심하게 하는 말을 한다.
찰스 브리지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이 죽지는 않는다 해도 생명력과 활기를 잃을 수는 있다.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시간이 길게 지속되고, 회복의 의지조차 없다면, 정말로 믿음이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참된 믿음을 가진 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잘 아는 엘리야의 경우가 그랬다. 욥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시편 73편의 아삽도 정확히 그런 낙심과 갈등을 시로 표현했다. 그는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고백한다(시 73:13).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는데(시 73:14), 악인은 형통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시 73:3-12). 심지어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말을 했지만, 그들은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났다.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 없이 죽었다. 아삽은 이런 악인들의 모습과 자신의 상황을 보면서 질투하였고, 거의 넘어질 뻔하였다고 고백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병에도 안 걸리고, 하는 일마다 잘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말씀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 성적도 더 잘 나오고, 고시에도 더 잘 합격하고, 취직도 잘 되고, 승진도 잘 되고, 결혼도 잘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매체를 통해 간증을 들어보면, 열심히 기도만 했더니 하나님께서 의사도 되게 하시고 판검사도 되게 하시고 부자도 되게 하시고 병도 고쳐주셨다는데, 나에게는 그런 간증이 없다. 그 사람들의 믿음이 정말 특별했다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특히 어려움에 직면하면 그렇다. 내가 봐도 신앙 생활에 불성실 했으면, 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머리로 이해는 된다. 나도 잘 한 것이 없으니, 그에 대한 댓가를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했다면,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낙심하기 쉽다. 뭔가 그동안 자신이 믿고 해온 것들을 부정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결과가 이럴 것을 알았으면, 애초에 그렇게 힘들게 살지나 말걸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난은, 특히나 내 입장에서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대에 올려놓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지금 상황에 비추어 믿음을 재고할 것인지, 지금 가진 믿음에 따라 상황을 재고할 것인지 선택하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언제나 후자이고, 후자를 성경은 믿는 자의 ‘인내’라고 말한다.
우리의 믿음을 약하게 혹은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굳이 총칼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총칼 앞에서 믿는 자들은 그 순수한 믿음을 더욱 굳게 지켜오기도 했다. 우리로 인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일상일 때가 많다. 앞서 말한 것처럼 믿음의 삶이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이 땅에서의 일상이 우리의 믿음을 위협한다. 믿음을 포기하라고 강제하지는 않지만,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유혹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위협 가운데 있기도 했고 유혹 가운데 있기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실제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믿음을 버리면 훨씬 더 쉽게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계속되는 고난을 감수하며 믿음을 지키고 있었다. 인내하고 있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시편 기자의 정직한 기도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도 어떻게 인내하며 기도해야 하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시 119:121–128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 122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 123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124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내게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소서 125나는 주의 종이오니 나를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들을 알게 하소서 126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127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고난 중에 합당한 기도(121-126절)
먼저 이 기도에서 주목할 부분은 솔직함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겸손한 척’도 하지 않고, ‘괜찮은 척’도 하지 않는다. 그는 반복해서 지금 자신이 괜찮지 않으니, 지금 이 상황에서 건져주실 것을 구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단 주변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나를 박해하는 자들에게 나를 넘기지 마옵소서”(121절), “교만한 자들이 나를 박해하지 못하게 하소서”(122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있다. 시편 119편 전체 맥락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시편 기자 쪽에서 무언가를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121절에서도 그는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 쪽에서 무언가를 잘못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웃을 대한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어느 정도의 높은 위치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항상 요구하신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로 행하는 것이다. 부자라고 해서 판결을 굽게 해서는 안될 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판결을 굽게 해서도 안된다고 하셨다(레 19:15). 판결은 유익을 따라서 해서도 안되지만 인정에 따라서 해도 안되는 것이다. 공의롭게 해야 한다. 선지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이 종종 있는데, 그때도 항상 ‘공의’롭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당당하게 자신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사오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정말 언제나 절대적으로 정의와 공의를 행하셨나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그렇다고 답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것이 그가 추구한 방향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이렇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비슷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은 126절에도 나온다. 시편 기자는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면에서는 당돌하고 교만하게까지 느껴질 수 있는 말이지만, 시편 기자는 지금 솔직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와 힘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말씀에 전념했다. 완벽하지 않고, 최고는 아닐 수 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했기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의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언약의 삶을 산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 126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자들’이 시편 기자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시편 기자는 이 상황이 괜찮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니 이런 고난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니, 얼마든지 나를 이 상황에 내버려두셔도 나는 만족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지금까지 그는 이 상황을 잘 견뎌왔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했고, 고난 중에도 변하지 않는 기쁨이 그분께 있음을 경험했다. 그래서 그는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난은 여전히 고난이다. 성경은 고난이 유익하니 고난에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고난 받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일하시고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죄악된 것은 아닌 것이다.
시편 기자도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건져 주시기를 구한다. 자신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지 않기를 구한다. 이것이 그의 솔직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솔직하지 못할 때가 있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하는 상황이라면 그들을 고려할 필요도 있지만, 하나님께 일대일로 드리는 기도라면 우리는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의 감정, 나의 생각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잘한 것은 잘했다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기대하는 것, 원하는 것도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
이런 어린 아이같은 기도를 ‘애같은’ 기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있지만, 성경의 기도를 보면 믿음의 선진들도 이렇게 솔직하게 기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 시편 기자의 기도 뿐 아니라 시편의 많은 기도가 그렇다. 느헤미야의 기도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어린 아이같은 면이 있다. 잘못된 기도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솔직하게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길 원하신다. 하나님께 구하기에 너무 큰 것도 없고 너무 작은 것도 없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너무 이기적인 것도 없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솔직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자녀의 특권이다.
다음으로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정당성이다. 때로 우리는 염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무조건적으로 구할 때도 있다. 그럴 때도 구하지 않는 것 보다는 구하는 것이 항상 옳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우리 기도의 정당성을 하나님께 호소할 수도 있다. 바로 앞에 읽었던 요한복음 15:7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면, 그 기도에 정당한 기초가 놓여진다고 할 수 있다.
시편 119편의 저자도 이런 정당성을 호소한다. 121절에서는 자신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면, 122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강조한다: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복은 언약에 따른 복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순종하는 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신 그 복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따라 지금 나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이 이 기도 뒤에 숨겨진 논리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렇게 자신의 정당성 때문에 하나님이 반드시 자기 기도를 들어주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언약의 관계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것이 때문이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사실 ‘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24절에서는 이렇게 기도한다: “주의 인자하심대로 주의 종에게 행하사”.
이렇게 보면 기도의 ‘정당성’이라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실 것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가 보였던 모습에서 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바알의 선지자들은 최선을 다했다. 바알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단 주위에서 뛰놀았다. 그들의 규례에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다. 어떻게든 바알이 응답하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알이 응답해야만 할 정당성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떻게 해도 우상인 바알이 그들에게 응답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신학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한만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엘리야는 제단을 쌓고 거기에 번제물을 올리고 물을 부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다.
왕상 18:36 저녁 소제 드릴 때에 이르러 선지자 엘리야가 나아가서 말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신 것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
엘리야가 강조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가 아니었다. 지금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백성이 하나님께 정당성을 호소하는 이유다. 확신의 표현인 것이다.
이런 언약의 관계에 기초한 정당성의 호소는 시편 기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주의 종”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으로도 드러난다(122, 124, 125절). 이는 자신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 안에 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거기에 더하여 이 표현은 사랑의 관계도 나타낸다. 언약의 관계는 곧 사랑의 관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종이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부모가 자녀들에게 “내가 네 종이냐?”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해서 하는 행위와 종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가 비슷하다. 사랑은 내가 아닌 상대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인데, 종이 된다는 것도 그렇기 때문이다. 차이는 자발성에 있다. 종이 되는 것은 강제적으로 되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종이 되는 것은 상대에게서 시작되지만, 사랑하는 것은 내 쪽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결국 드러나는 모습은 비슷하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랑과 순종(헌신)은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 된다고 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이런 사랑의 언약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계속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124-125절과 같은 기도를 하는 것이다. 여전히 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고 깨닫기 원한다. 계속해서 그 말씀에 따라 살기를 원한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시편 기자가 고난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서 말씀을 통해 무언가를 배우기를 구한다는 것이다. 고난은 하나님의 학교라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렇게 배우는 것들이 성경과 다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같은 데, 배우는 내용이 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드러내신 것을 우리 삶을 통해, 고난을 통해 배우게 하신다. 반대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하신다. 시편 기자는 주의 종으로서 마땅히 이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종에게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의 복을 베풀어 주실 것을 확신 가운데 구한다.
우리 기도에도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 우리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런 확신의 표현이다.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이런 확신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기초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측면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 순종의 삶을 산 것이 확신을 더한다. 특히,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라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게 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혹은 그때 그때 기분에 따라 우리를 대하는 분이 아니시다. 고난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더욱 확신 가운데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 있을 때, 마음이 낙심되면서 말씀에서도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지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 분명히 배우는 것은, 그것은 최악의 반응이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온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괴로울 때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고 그 상황에서 더욱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기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고, 또한 확신 가운데 평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끝으로 이 기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간절함이다. 이 간절함은 시급함과도 연결되어 있다. 123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라고 고백한다. “피곤하다”는 말은 앞에서도 다루었던 단어인데, 이제는 끝에 다 왔다는 말이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려왔는데, 이제는 한계라는 의미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솔직한 마음이다.
사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곧 ‘포기’를 의미한다. 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지 않겠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시편 기자의 경우는 포기가 아니라 기도의 간절함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개입이 시급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다 했고,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이제는 정말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126절에서는 이렇게 당돌하게 혹은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말한다.
시 119:126 그들이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께서 일하실 때니이다
시편 기자는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세우려고 했지만, 그의 대적들은 단지 그를 대적하고 박해했던 것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폐하였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행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구한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이 불의를 바로 잡아 주셔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를 때마다 즉각 심판하지는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노아의 때도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때도 그랬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기도 했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죄인이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시편 기자도 그것을 생각하며 지금까지의 고난을 버텨왔을 것이다. 아마도 대적들에 대해서 자신도 오래 참으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계라고 여겼고 그래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 대한 의심도 없다. 다만 그가 구하는 것은 “지금” 그렇게 해달라는 것 뿐이다. 시편 기자는 마치 예수님의 비유에서 자기 원한을 풀어달라고 계속해서 재판장을 찾아가서 요청했단 과부와도 같다. 그는 “끝”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도 포기하기 않고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끝”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은 지금이든 언제든 동일하게 일하실 수 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으로 인해서 소망을 가지고 기도로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고난 중에 선택한 삶(127-128절)
고난 중에 드리던 기도는 갑자기 이렇게 이어진다.
시 119:127–128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128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금보다 더 사랑하고 그 모든 것을 바르게 여기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는 이 내용도 어떤 면에서는 갑작스럽지만, 127절과 128절 처음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도 당황스럽다. 사실 내용만 놓고 봤을 때는 우리가 시편 119편에서 반복해서 접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새롭지는 않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지금까지 기도의 결론(“그러므로”)이 될까?
먼저, 127절은 시편 기자를 박해하는 사람들, 주의 법을 폐하는 사람들에 대한 시편 기자의 결론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법을 폐하는 쪽에 서는 것이 편한 삶이 되겠지만, 시편 기자의 결론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기로 결론을 내렸다.
다음으로 128절은 일하시는 하나님과 관련된 결론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지금은 일하실 때라고 분명한 간구의 기도를 드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하나님께서 일 잘 하시나 지켜보고 있어야할까? 시편 기자의 결론은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옳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생각들이 절대적으로 틀렸음을 믿고, 계속해서 이 믿음의 길을 가겠다는 결론이다.
이 낙심되는 상황에서 낙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사랑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할 것을 미워하겠다고 한다. 바르게 여길 것을 바르게 여기겠다고 한다. 고난을 통해서 사탄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이 반대의 결론이다. 우리가 사랑하던 것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던 것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바르게 여길 것을 바르게 여기지 않고 틀린 것으로 여기게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처한 고난의 상황을 통해,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그것이 옳다고 우리에게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시편 기자는 선을 행하면서 낙심할 상황에 이르렀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쏟아 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구했다. 그리고, 언약의 확신 가운데 거했다. 그렇게 했을 때 사탄이 원했던 결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도 되어야 한다. 고난이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하고, 더 하나님의 길로 나를 행하게 만들어야 한다. 믿음을 포기한 삶이 절대 더 낫지 않다. 지금 편한 삶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결코 더 나은 삶이 아니다. 언젠가는 후회할 삶이다. 지금 선택해야할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한다.
도전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
사 30:18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사 30:2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이 약속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결국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우리가 경험하는 상황과 사건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할 때가 있다. 이런데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를 묻는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 기다리는 모든 자의 수고를 하나님께서 보상하실 것이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께 의구심을 던지지 말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지금을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보상 받지 못하는 일상이 우리의 믿음을 위협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믿음을 지킨다면 우리 믿음의 실체를 세상 가운데 선포할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어, 세상이 진실로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세상 가운데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원한다면, 지금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성경을 열고 그 말씀을 사랑하여 순종하라. 고난 중에 하나님을 선택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