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6)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최종혁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 물론 부활하신 후에도 얼마동안 이 땅에 머무실 것이었지만,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 갈릴리 나사렛의 예수로서의 삶은 이제 곧 끝날 것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은 아니었다. 한 사람 예수님은 모든 형벌 받을 백성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고후 5:14).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받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이 형벌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7마디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셔서, 십자가를 통해 결국 이루실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하셨다.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은 ‘속죄’를 이루실 것이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는 말씀은 실제로 회개한 죄인에게 예수님의 속죄에 근거한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할 것임을 확인해 주셨던 말씀이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다 하셨던 말씀이었다. 또한 이 말씀은 마리아 역시 구원자가 필요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음도 드러냈다.

이 세 말씀 후에 낮 12시가 되었을 때 세상에 어둠이 임했다. 자연적인 어둠이 아닌 하나님께서 특별히 개입하셨던 초자연적인 어둠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어둠에 사람들은 당황했겠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당시의 사람들이 이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수 많은 죄수 중 하나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죽음이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통쾌한 죽음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그때에 다 이해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어둠을 통해 예수님의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졌음을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본 세례 요한은 이렇게 말했었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눅 22:19).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그 죄에 대한 심판을 쏟아 부으셨다. 형벌 받아야할 죄, 깨끗해져야할 죄, 용서받아야할 죄에 대한 심판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그 어둠이 끝날 무렵이었던 오후 3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다(마 27:46). 그 십자가에서 실제적인 심판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 줄 아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셔서(요 19:28), 신포도주를 받아 드심으로 성경의 예언을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곧 이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다 이루었다”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여섯번째 말씀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말이라기보다는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하나의 선언이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사용하신 표현은 헬라어로는 “테텔레스타이”라는 한 단어다. 이 단어는 28절에서 이미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셨다.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신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크게 소리내어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고통의 부르짖음도 아니고, 패자의 절규도 아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아셨던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도 알도록 선포하셨던 것이다.

“테텔레스타이”는 본래 “텔레오”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 완료 수동 직설법의 형태다.

이 동사의 의미는 “끝에 이르게 하다. 완료하다. 완수하다. 성취하다.”이다.  단순히 어떤 일의 ‘끝’을 의미하기 보다는 ‘마무리’, ‘완수’, ‘성취’의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12: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18: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15: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20:3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즉, 무언가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하루를 잘 마무리하면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종들이 맡겨진 임무를 잘 마무리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고,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도 이 단어를 사용했다. 특별히, 지불해야 할 대금 혹은 빚을 다 지급했을 때, ‘완납’의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지금 예수님은 단순히 무언가의 ‘끝’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완성, 성취’를 선포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1인칭 단수(나)가 아닌 3인칭 단수형(그것)으로 말씀하셨다. 즉, “나는 끝났다. 나는 이제 죽는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닌 것이다. 물론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이제 곧 죽으실 것이고, 그 죽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완성’과 관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죽음 자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의 완성을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의 완성을 선포하신 것일까? 구약의 예언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율법의 모든 요구를 예수님께서 이루셔서 이제는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혹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예수님의 고난이 이제는 충분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고, 이 모든 것들이 상호배타적이지도 않다. 즉, 의미 상 연결되어 있어서 충분히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예수님께서 단수형을 사용하신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그것들은 하나의 중요한 핵심 개념으로 묶여 있다. 예수님은 그 하나를 마음에 두시고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할 것은 십자가의 맥락이다. 십자가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뜻하지 않으신 일을 사람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했던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런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시는 분이시다(사 46:10).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이루신다는 말이다. 하물며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욱 그렇다. 아담부터 시작된 인류의 모든 역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 달려왔고, 이후의 모든 역사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류 역사의 한 가운데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 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다 이루었다”는 말씀도 그 맥락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왜 달리셨는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는 자신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정오가 되었을 때, 땅에는 어둠이 임했었고, 어둠이 의미했던 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었다. 그 어둠의 끝에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외치심으로써 실제로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음을 나타내셨다.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남김없이 받으셨다. 하나님의 진노는 끝났다. 예수님은 ‘대속(속죄)’의 완성을 “다 이루었다”라는 말로 그 죽음 직전에 세상에 선포하셨던 것이다.

다시 ‘테텔레스타이’ 헬라어 문법으로 돌아가 보자. 이 동사는 단순히 ‘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 성취’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3인칭 단수로 말씀하셔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받으신 사명이었던 ‘대속’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수동형의 표현을 사용하셨다. 속죄는 저절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이 문법을 그대로 반영해서 번역하면 “다 이루어졌다”가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의 경우 이렇게 번역하면 오히려 모든 일이 저절로 된 것 같은 뉘앙스를 주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모든 일들은 저절로 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아래, 그분의 무한한 지혜로, 그리고 예수님의 최후까지 낮아지신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일이었다. 오직 하나님께서 완성하신 일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 일이다. 여기에 우리는 관여한 것도 없고 관여할 것도 없다.

또한, 예수님은 직설법을 사용하셨다. 직설법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다 이루어질지어다라고 하지 않으셨다. 다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다. 다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하지 않으셨다. 다 이루어졌어야 했는데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이 선언에는 어떤 조건도 없고 바람도 없다. 단지 다 이루어졌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완료형을 사용하셨다. 완료형은 동사의 시제를 말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것 뿐 아니라, 그 결과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을 강조한다. 즉, 예수님은 ‘대속’이 다 이루어졌고, 현재도 여전히 다 이루어져있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다 이루어진 상태로 있을 것이다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정리해 보자.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테텔레스타이”는 어떤 의미인가? 예수님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남김 없이 모두 받으셨다는 의미다. 더 이상 죄에 대한 심판은 남아있지 않다는 의미다. 이것이 사실이며, 앞으로 절대로 바뀔 수 없다는 의미다. 속죄가 완성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뒤에서 보겠지만) 누구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죄와 사망은 그 힘을 잃었다. 사탄의 머리는 상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혹시 하나의 단어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단어의 깊은 의미를 다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찰스 스펄전, “이 한마디 말씀 속에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 그것은 가히 측량할 수 없는 말씀이다. 너무 높아서 나로서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 너무 깊어서 헤아릴 수 없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 높이와 깊이를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성경은 그래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준다.

10:9–18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여기 말씀에 대조되는 부분에 주목하라. 폐하여진 첫째 것이 있고, 세워진 둘째 것이 있다(9절). 폐하여진 것은 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율법을 따라 드리는 제사다. 이 제사는 4절이 말하는 것처럼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오히려 3절이 말하는 것처럼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한다. 제사를 드리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것인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약의 제사는 그것이 궁극적인 효과가 없다는 것, 즉 죄에서 사람을 정결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인간의 죄가 가져온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지만, 범죄한 후로는 그 동산에서 쫓겨났고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거할 수 없음을 하나님은 그렇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셨지만,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올 수 없었다. 죄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드려야했다. 희생 제물이 필요했고, 제사장이 필요했다. 백성들은 제사장을 통해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짐승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들 죄의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었던 또 하나가 바로 성막의 구조다. 성막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죄가 만들어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분리를 보여주었다. 성막은 바깥 뜰이 있고 그곳에서 제사가 드려졌다. 제사자들은 실제로 성막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분리다. 성막 안에는 두 개의 공간이 나누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이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있었고, 그 안쪽에는 지성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둘은 두꺼운 휘장(커튼)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두신 곳으로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성막의 구조가 보여주었던 것은 바로 ‘분리’다. 죄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었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게 된 것이다.

9: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즉, 율법 아래의 제사가 보여주었던 것은 이런 죄로 인한 분리의 문제였고, 그에 대한 해결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가 문제이고 피흘림, 즉 죽음이 해결이다. 그런데,

10:4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짐승의 제사는 실제로 사람의 죄를 없이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제사는 계속 드려졌다. “이제는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다! 끝났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2-3절).

그런데, 이것과 대조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리신 바로 그 제사다.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 히 10:12도 동일하게 말한다.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성막에는 의자가 없다. 제사장은 언제나 서서 일을 했다. 죄를 위한 제사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제사장들은 하루하루 자기 일을 마칠 수는 있었겠지만, 죄를 위한 제사는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의미했던 것은 불완전한 제사함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앉으셨다. 일이 끝났기 때문이다. 제사는 계속되지 않는다. 단번에 영원히 드려졌다. 하나님은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다(17절).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진 것이다.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시고 죽음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속죄가 대신 이루어졌다. 단번에. 영원히. 완전하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고 번복되지도 않는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셨다.

레이 프리차드, “예수께서 모든 것을 지불하셨다면, 당신은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구원을 위해 지불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그분이 모든 것을 지불하셨다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두 명제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구원을 판매하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구원을 반값에 제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분과 비용을 나누거나 할부 방식으로 당신의 죄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구원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계십니다. 테텔레스타이가 의미하는 바가 이것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도록 예수께서 완납하셨습니다.”

아내가 가끔씩 음식을 주문하고 픽업을 부탁할 때가 있다. 그럴 때 항상 물어보는 것이 “결제는 했어요?”다. 아내가 결제를 했으면 나는 할 필요가 없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결제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이미 결제가 되어 있다. 그러면 내가 할 일은 포장된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것 뿐이다. 계산대의 직원은 나에게 결제를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빨리 나가라고 눈치만 줄 뿐이다. 이미 결제되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결제되었으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완전히 결제되었다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아무 돈도 내지 않고 음식을 가지고 나온다. 이미 완전히 결제되었기 때문이다.

속죄의 핵심은 죄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댓가를 치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짊어지셨다. 그리고 그 모든 죄의 댓가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남을 미워한 나의 죄의 댓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음행한 나의 죄의 댓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불순종한 나의 죄의 댓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게으른 나의 죄에 댓가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원망, 불만, 시기, 교만, 험담, 비난, 거짓말, 폭행 등 무엇이든 떠오르는 죄의 이름을 나열해 보라. 그 모든 죄의 댓가에 대해서, 형벌에 대해서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치를 댓가가 없게 하셨다. 우리가 받을 형벌이 없게 하셨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다. 누구도 우리를 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소할 수 없다. 사실 사탄은 여전히 그렇게 한다. 사탄은 참소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모든 고소에 대해서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무죄를 선고하신다. 이미 그 죄에 대한 댓가가 치뤄졌기 때문이다.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요일 2:1–2 …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지금 범하는 죄에 대해서도, 앞으로 범할 죄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테텔레스타이”의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사실이 하나있다. 다시 로마서 말씀을 보라. 성경은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다(롬 8:1).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고발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롬 8:33).

따라서 여전히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1:18). 하나님을 알면서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1:21). 썩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상으로 바꾸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1:23). 같은 일을 하면서 남을 판단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2:1).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2:5). 율법의 행위로 의로우려고 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3:20).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있다(롬 3:22).

앞에 돈을 지불하는 예를 가져와서 말하면 이렇게 할 수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 대금을 완납하신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거부하는 사람이다. 나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심에 감사하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과 여전히 그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애초에 내가 받을 형벌 같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 죄의 값을 치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이 나의 것이 되지 않으면, 내가 그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 형벌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 뿐이시라는 사실이다. 나조차도 내 죄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당신은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 사역을 하셔야 했는데, 그 일을 이제 마치셨다.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이루어졌다. 죄에 대한 댓가는 지불되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떠나신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시편 31:5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31:5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분명한 차이는 “속량”에 대한 부분을 빼신 것이다. 예수님은 속량하셨지 속량을 받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의인으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시고 숨을 거두셨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스스로 숨을 거두셨음을 명확히 한다. 예수님은 생명이 다해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살 수 없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아직까지 크게 소리칠 수 있을 정도의 상태셨다.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다른 강도들이 예수님의 죽음 후에도 살아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아직은 그 육체가 버틸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을 이루셨고,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은 스스로 숨을 거두셨다.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생명을 빼앗기셨던 것이 아니다. 빌라도에게 빼앗기셨던 것도 아니다. 로마 군병들에게 빼앗기셨던 것도 아니다. 인간으로서 십자가의 모든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시고, 죄에 대한 모든 형벌을 받으시고,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에,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의지하시면서 스스로 생명을 버리셨다. 그리고 이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심판의 시간이 끝났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되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시고 기꺼이 생명을 놓으신 그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로서 제사장들이 유월절 양을 잡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별일이 없었다면 그들은 도살 준비를 마치고 3시가 되면 첫 양부터 도살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루살렘에는 12-3시까지 어둠이 임했기 때문에 3시가 되어서야 바쁘게 준비를 하고 도살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참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죽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 밖에서,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으셨지만, 바로 그곳에서 유일한 온전한 제사가 드려졌고, 온전한 속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성전 안에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7:50–51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분리를 의미했던 성소의 두꺼운 휘장이 찢어졌다.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휘장은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휘장은 완전히 찢어져 둘이 되었다. 다시 합쳐지지 않는다. 다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리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양이 필요하지 않다. 제사장이 필요하지 않다. 성전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예수님,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사역이면 충분하다.

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셨다. 그리고 그 죽음으로 우리를 위한 생명의 문을 여셨다. 그 문으로 들어가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언제나 새롭고 살아있는 길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그 길로 걸어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로 오라고 하시고, 예수님은 그 길을 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 예언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그 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셨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기를 원하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 일을 하셨다. 그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시고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셨고,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기도하시고 정확한 시간에 숨을 거두셨다. 우리가 죄 사함을 얻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그렇게 열렸다.

이것은 전능하고 모든 지혜를 가진 신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할 때,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영웅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함을 나타내셨다(고전 1:25).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무능하고 어리석게 보였겠지만, 그 누구도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셨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셨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은 모두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이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나의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미 하늘에서 드려지는 예배에 동참하는 것이다.

5:9–13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11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수많은 천사도 이 노래를 부르겠지만, 그들은 우리만큼의 감동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그 피로 산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그 직접적인 이유가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생각하면 왜 찬송가에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라는 가사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 사형틀인 이 십자가를 붙들고 사랑한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왜 십자가로 충분하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 찬양이 우리 모두의 찬양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