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5)

본문: 여러본문

설교자: 최종혁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인지를 드러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악함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선포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회개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가상칠언 중 두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인을 대속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임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조롱한 자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던 말씀을 살펴봤었다. 실제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는 중요한 두 요소가 있었다. 회개와 속죄였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의 그 사람들 뿐 아니라, 누구든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먼저 죄인은 자신의 죄를 알고 인정해야 한다. 사람들은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롬 1:21).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이 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렘 2:13).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자기가 원하는 길로 행하는 것이 죄인 줄 알지 못한다(사 53:6). 우리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엡 2:3).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임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죄 사함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죄 사함에 꼭 필요한 요소는 실제로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는 속죄다. 하나님의 죄 용서와 진정한 화해는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한히 커서 사람으로서는 그 댓가를 치를 수 없다는 점이다. 스스로 속죄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하셨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속죄를 하나님께서 대신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대속’이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인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고, 하나님은 이 대속에 기초하여 회개한 자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이다.

3:23–2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의로우신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신 것, 그래서 죄인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대속의 핵심이고, 오늘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핵심,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27: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정오를 기점으로 어둠이 세상에 임해서 3시까지 지속되었다. 이 어둠은 초자연적인 어둠이었다. 한낮에 어둠이 임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은 일식이 유일한데,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유월절은 보름(달-지구-태양)이기 때문에 일식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지구-달-태양)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일식은 길어봐야 몇 분으로서, 이렇게 몇 시간 동안 지속되지 않는다. 이 어둠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의도를 가지고 하신 일이다.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이 어둠을 통해서 사람들이 무엇을 알기 원하셨을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차마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보실 수 없으셔서 어둠을 임하게 하셨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예의를 표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영화를 찍는다면, 그런 의미로 어둠을 연출할 수도 있었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영화가 아니라 역사다. 하나님께서 이 인류 역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럼 감성 한 스푼을 더하시려고 굳이 이 상황에 개입하셨다고 보기 어렵다. 성경 전체의 맥락, 그리고 그 어둠의 끝에서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처음으로 하신 말씀은 어둠의 의미를 명확하게 한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13:10–11 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1내가 세상의 악과 악인의 죄를 벌하며 교만한 자의 오만을 끊으며 강포한 자의 거만을 낮출 것이며

2:3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3:14–15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심판의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15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그 빛을 거두도다

5:18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냐 그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라

5:20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8:9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날에 내가 해를 대낮에 지게 하여 백주에 땅을 캄캄하게 하며

1: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

24: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잠깐 먹구름이 지나가서 어두워졌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람들로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어둠을 임하게 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다. 역사 상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보다 더 큰 육체적인 고통을 경험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예수님보다 심한 모욕을 당한 사람도 있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에서 죽을만한 죄를 범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면에서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때 그 곳에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쏟아졌다는 면에서 특별하고 유일하다. 하나님은 어둠을 임하게 하셔서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셨고, 이 어둠의 끝에 예수님은 이렇게 소리치심으로써 이 사실을 확증하셨다.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해서 경험하신 가장 큰 고통이다. 아버지와의 친밀함 교제가 깨진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버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고통을 시편 22:1의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공생애 기간동안 예수님은 정신없이 바쁜 사역 중에서도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시기 위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혹은 밤 늦은 시간에 기도하셨다. 예수님께는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와 함께하는 그 시간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그리고 그런 예수님의 기도에 하나님은 항상 응답하셨던 것도 알 수 있다.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 하나님은 예수님의 기도에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진노하셨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사역 기간 동안 함께 하셨고, 능력으로 많은 이적을 행하게 하셨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사들도 예수님을 섬겼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홀로 되셨다. 버림 받은 자가 되어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실 때 항상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셨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 다른 호칭을 사용하신 경우는 여기가 유일하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도 부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거나 한 것은 아님도 분명히 하셨다. 시편 22편은 1절로 끝나지 않고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고, 예수님도 그렇게 예언의 말씀을 성취할 것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이 어둠 속에서 예수님께서 경험하신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심판은 “어찌하여”라고 물을 수 밖에 없는 고통이었던 것이다.

이 관계의 단절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있다. 바로 죄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를 가져오는 것은 언제난 죄이기 때문이다.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그럼 예수님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아무 죄도 짓지 않으셨다. 그럼 왜 하나님은 십자가 위에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시고 예수님을 버림받게 하셨는가? 예수님의 죄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신 죄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셨다. 그 죄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를 갈라 놓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그냥 고개만 돌리지 않으신다.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3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2:5–6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진노하신다. 그래서 공의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단 하나의 죄도 그냥 넘기지 않으신다. 십자가 위에 임했던 어둠은 바로 그 시간이 심판의 시간이었음을 보여주었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 받으심을 크게 소리쳐서 외치심으로써 실제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셨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십자가는 그래서 그야말로 형벌의 장소였다. 예수님은 아담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끝에 마지막 사람이 지을 죄까지 “형벌 받을”(사 53:8) 자기 백성의 허물을 대신 담당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것이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 우리 죄에 대한 죄책, 즉 형벌을 받아야할 책임을 예수님에게로 옮기셨다. 그리고 그 죄를 심판하셨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십자가 위에 거대한 깔때기가 놓여졌고, 그 위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쏟아졌다.

내가 미워한 것에 대한 형벌, 내가 분노한 것에 대한 형벌,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형벌, 내 입에서 나온 합당하지 않은 말 하나에 대한 형벌, 내 마음에 품은 아무도 모르는 죄악된 생각에 대한 형벌까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에서 가장 작은 죄까지, 우리가 이미 잊어 버린 죄까지, 우리는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죄까지, 그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예수님 위로 쏟아져 내렸다. 예수님은 기꺼이 그 일을 하셨다. 단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던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시면서까지 그렇게 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는 가장 날카롭게, 가장 선명하게, 이 땅 위에 선포되었다.

이것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시고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이다. ‘대속’이다.

이런 대속의 원리는 구약 성경에서 계속해서 나타났다. 욥은 혹시라도 자기 아들들이 죄를 범했을 것을 염려하여 번제를 드렸었다(욥 1:5). 아브라함은 이삭을 대신해서 숫양으로 제사를 드리기도 했다(창 22:13). 유월절에는 장자을 대신하여 양이나 염소가 희생되었다.

특별히 율법 아래서 드려진 제사는 이런 죄에 대한 대속의 원리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제물은 흠 없는 것으로 준비해야 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제물에 안수하여 자신의 죄책을 전가했다. 제물이 제사자의 죄를 담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물은 피를 흘리고 죽었다. 죽음으로 죄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 모든 제사 과정이 드러낸 것은 (1) 죄는 하나님과의 문제를 만들고, (2) 죄에 대해서는 형벌이 필요하다는 것, (2) 그리고 생명의 죽음(피)이 그 형벌이며, (3) 다른 존재가 그것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런 제사가 계속해서 드려진다는 것을 통해, 짐승의 제사로는 사람의 죄에 대한 속죄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히 드러났다.

10:3–4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구약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실체에 대한 사실은 이것이다. 우리 죄에 대해 하나님은 형벌을 요구하시고, 그 형벌을 우리 스스로 감당할 수 없으며, 우리를 대신할 무언가가 아닌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 ‘누군가’가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신 예수님이신 것이다.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예수님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부르짖음이 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이 우리가 받을 형벌을 받는 중에 부르짖는 소리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할 것이다. 그 때라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진 관계이고 회복될 수 없는 관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에 대한 답은 명확할 것이다. 나의 죄로 인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나에게서 영원히 등을 돌리시고 내 죄에 합당한 진노를 쏟아부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영원한 형벌이 내려지는 중에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는다고 해도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렇게 부르짖지 않게 하시려고 나의 자리에 대신 서신 것이다. 의인으로서 불의한 나의 자리에 서셨다. 부요한 자로서 가난한 나의 자리에 서셨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다. 내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나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셨다. 내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말한다.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버림 당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버림 당하지 않게 되었다.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로이드 존스, <십자가>, 125-126, “바울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십자가에서 자신의 아들에게 지우시고 어떤 형벌도 아끼지 않고 그를 벌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독생자이기 때문에 형벌을 감해 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벌하는 것을 좀 미루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 하나님은 벌하겠다고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아들에게 실행하셨습니다. 조금도 지체하거나 머뭇거림이 없이 형벌을 가하셨습니다. 죄악을 향한 모든 진노의 대접을 사랑하는 아들에게 쏟으셨습니다.
… 하나님이 이 같은 일을 수행하심은 우리가 그 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고통과 불행을 당하는 비참한 자리에 거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듣는 이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하는 십자가의 영광이며, 인류가 형벌당하지 않도록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댓가를 내가 받게 되는 것을 정말로 억울하게 생각한다. 단지 누군가가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견딜 수 없어 한다. 그런 우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다는 것은 정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은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이 상상할 수도 없는 억울함을 참으시고 견디신 이유를 ‘사랑’ 외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날카롭게 실현된 곳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렇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치셨을 때 당연히 그 아래 있던 사람들도 이 소리를 들었다. 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이러했다.

27:47–49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이것은 또 다른 조롱이었다. 이들은 성경에 익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예수님께서 시편 22편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부러 예수님이 “엘리야를 부른다”고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했다. 메시야가 그의 나라를 세우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는 예언을 이용한 것이다(마 17:10). 즉 그들의 말은 “이 다 죽어가는 자칭 메시야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엘리야나 찾고 있구나”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한다(48절). 이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다음 말씀 때문이었다.

“내가 목마르다”

19:28–29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내가 목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다섯 번째 말씀이다. 지금까지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오면서 예수님의 육체적 고통에 대해서는 우리가 예상했을 뿐이지 직접적으로 언급된 것은 없었다. 성경은 ‘예수께서 고통스러워하시더라’와 같은 표현을 전혀하지 않았다. 전에도 말했던 것처럼, 성경은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동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갈증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다. 예수님은 많은 피를 흘리셨고, 제자들과의 유월절 식사 후 제대로 음식이나 물을 섭취하지도 못한 상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못에 찔리는 고통, 숨을 쉴 수 없는 고통을 그대로 느끼셨던 것처럼 갈증도 그대로 느끼셨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혈과 육”을 지니셨다(히 2:14). 그 죽음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몸이 되셨던 것이고, 그래서 목마르셨다.

그런데 요한의 기록은 흥미롭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 말씀을 하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았는데, 목마르다고 하셨던 것은 아니다. 다만 예수님은 의지적으로 성경의 말씀을 응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든 삶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십자가의 길에서 성경은 예언의 성취를 자주 언급한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배신 당하셨는데, 이는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이 도망했던 것도 스가랴 13:7의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조롱당하신 것은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의 성취였고, 그 겉옷을 나누고 속옷을 제비 뽑는 것은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의 성취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시 22:16), 죄인들과 함께 못 박히신 것(사 53:12)도 모두 예언된 내용이었다. 이 뒤에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고(시 34:20), 부자의 무덤에 묻히시는 것(사 53:9)도 그대로 성취된 예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모든 예언의 성취에 있어 사람들은 아무 생각도 없었다는 것이다. 누구도 구약의 예언을 생각하며 행동하지 않았다. 모두 자기 욕심대로, 자기 유익을 위해, 자기가 원하는대로 했을 뿐이다. 심지어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조롱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성경이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했던 것들이고,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예언을 그들이 성취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르셨다.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신경쓰지 않고 있는 이 상황에서 오직 예수님 만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계셨고 의지로 그 뜻을 이루고 계셨던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이 진노의 잔을 끝까지 마시셨다. 편하게, 고통 없이, 명예롭게 등은 생각하지 않으셨다.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다.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순종 중 하나가 바로 이 목마름에 대한 부분이었다.

시편은 메시야의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했다.

22:14–15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극심한 갈증이다. 이 갈증은 “내가 목마르다”고 말을 하든 하지 않든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굳이 그 말을 하신 이유는 이 말씀 때문이다.

69:21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 “내가 목마르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 하나가 예언의 말씀처럼 신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게하여 예언을 성취하였다.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을 보면(요 19:30), 이것이 메시야의 죽음에 대한 예언의 마지막 조각이었고 예수님은 “내가 목마르다”는 말로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목마르다”는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의 자리를 대신 하셨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바로 우리가 영적으로 목마른 자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처럼 지옥에서 괴로워하며 물 한 방울을 구걸해야할 사람들이 우리들이기 때문이다(눅 16:24).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람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목마르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바로 그 영원한 갈증으로 고통 받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목마르셨던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목마르지 않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셔서 우리가 누리는 은혜인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목마르셨다. 이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한 사랑의 관계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친밀한 교제가 그 가운데 존재한다. 그런데 그 교제가 끊어진 것이다.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목마르셨다. 이 상황이 얼마나 모순인지를 알지 못하면 십자가의 의미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순을 설명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다는 그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셨기에 발생한 일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학자들의 표현대로 ‘위대한 교환’이 일어난 곳이다. 그리스도의 의와 우리의 죄의 교환이 일어났다. 우리는 죄를 그리스도에게 드렸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를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평화를 누린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음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 대속에 근거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후 5:20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22: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누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셨으니, 하나님과의 화목의 기쁨을 누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목마르셨으니, 이제는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그 풍성함을 누리라는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이 속죄와 용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본 것이었고,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로서 응답된다. 이 창조주의 초대 앞에서 주저하지 말라.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신 이 사랑 앞에서 더 이상 주저하지 말라. 그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그리고 이 초대에 응했다면, 이 말씀에 주목하라.

고후 5:14–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니,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살아야 한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자리에서 죽으셨으니, 이제는 내가 예수님의 자리에서 사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런 삶을 강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