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4)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최종혁
성경의 기록을 보면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7번 말씀하셨고, 이를 십자가 위에서 하신 7개의 말씀이란 의미로 ‘가상칠언’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십자가의 타임라인을 보면 예수님은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오후 3시에 숨지셨다. 그리고 그 중간인 12시(정오)에 어둠이 임했다. 첫 3시간 동안 예수님은 3개의 말씀을 하셨고, 나머지 3시간 동안 4개의 말씀을 하셨다. 이 중 첫 3시간 동안 하신 3개의 말씀을 통해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십자가 위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생각해 보자.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으셨다.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이 재판을 통해 예수님을 공적으로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의 재판 절차와 규례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빨리 정해진 결론에 도달하려고 했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도움을 받아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체포했고, 하루 밤 사이에 모든 재판을 진행했다. 마지막으로 사형을 선고할 만한 결정적 증언이 부족했었는데,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직접 인정하면서 시편과 다니엘의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말하자(마 26:63-64), 기다렸다는 듯이“신성모독”으로 판결을 내리고 즉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빌라도에게 반란죄로 예수님을 고소했다. 빌라도는 이미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이런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정말로 로마에 반역을 꾀하거나 위협이 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심문을 통해 예수님께 그런 죄가 없다는 것을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적당히 채찍질을 하고 풀어주려고 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더 거셌고, 결국 큰 소동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선고했다.
그렇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군병들의 손에 넘겼다. 군병들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흥미로운 죄목을 가진 예수님을 노리개로 삼고 조롱한 후에 골고다로 데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이제 예수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셨다. 그 머리 위에는 “이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었다(요 19:19-20). 유대인들은 이 죄패가 옳지도 않고, 자신들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해서 바꿔달라고 했지만 빌라도는 거부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든 이 유대인들에 대한 그의 작은 복수였다. 예수님이 진짜 유대인의 왕일 뿐 아니라 빌라도 자신의 왕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 그 사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적어 두었던 아이러니가 여기에도 있다.
십자가 상의 예수님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계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보다 높은 곳에서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을 보실 수 있으셨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방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군사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그 모든 과정을 시작하고 주동했던 종교인들, 그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 아래 있었다. 군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여전히 예수님을 조롱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면, 당신이 정말 유대인의 왕이면,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신을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고 조롱하고 있었다.
음행 중에 잡힌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끌고 왔던 적이 있었다(요 8). 그 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고(요 8:7),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났었다(요 8:9). 하지만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이 사람들은 그만큼의 양심있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했다.
그런 그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
“아버지, 이 수모를 기억하소서. 저들의 이 조롱을 잊지 마소서. 저들의 이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소서”가 되어야할 것 같은데, 예수님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 그대로(마 5:44),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던 자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다.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용서를 구하셨다. 무자비한 자들에게 자비를 구하셨다. 이것 역시 예언의 성취였다.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 기도를 오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이들이 죄가 없다고 하거나, 혹은 그냥 죄를 눈 감아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아니다. 특히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이 말이 약간의 오해를 사기 쉽다.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니 죄가 없다는 의미인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용서” 자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서를 구하신 것은 이들이 죄가 있다는 의미다.
그럼, 알지 못하고 하는 일이니 그냥 좀 눈 감아달라는 의미인가? 그렇지도 않다.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헛되게 매달려 계신 것이다. 모두가 저마다 죄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로 인해 죄를 눈 감아줄 수 있는 것이면, 즉 죄를 없는 셈 칠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냥 그렇게 하시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지 않고,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그냥 눈 감아 주실 수 없으시다. 죄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댓가를 치뤄야 한다.
이들은 끔찍한 죄를 범했다. 인류 역사 상 이들보다 더 큰 죄를 범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이들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인 신성모독자들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욕하고 죽인 자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용서의 기회가 없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셨다. 이들도 용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특별히 그 이유로서 이들이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한 것을 언급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죄, 그렇기 때문에 용서 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정한 죄는 아니다. 죄질의 문제도 아니다.
마 12:31–3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히 6:4–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이 두 경우의 공통점은 ‘충분히 아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준을 객관적으로 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 지식적으로 체험적으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계시를 충분히 알면서 그것을 오히려 모욕하고 조롱하고 거부한 자에게 더 이상의 회개와 용서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때가 있음을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에 긍휼을 입었다고 말했다(딤전 1:13). 베드로는 더 직접적으로 십자가를 언급하며 같은 원리를 말하기도 했다.
행 3:13–19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 17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모르고 했기 때문에 여전히 회개의 기회가 있고 용서의 기회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의 기도도 같은 맥락에 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했던,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었던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했다. 자신들이 온 우주의 왕을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자신의 구원자를 때리고 그에게 침 뱉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자신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들에게는 아직 용서의 기회가 있었고, 예수님은 이들을 위해 하나님은 그 용서의 은혜를 구하셨던 것이다.
그럼 실제로 이들은 어떻게 사함을 받을 수 있을까? 두 가지가 필요하다. 회개와 속죄다.
먼저는 회개다. 이들은 모르고 했던 그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알고 인정해야 했다. 몰랐으니까 죄가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 그냥 넘어가 달라고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이 몰랐던 그 죄를 알아야 했다.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도 기도하셨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그들의 죄를 알고, 그들의 구원자이신 예수니을 알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시기를, 그래서 용서 받을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여전히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 죄에 대한 댓가는 반드시 치뤄져야 한다. 즉, 속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속죄”의 사전적인 정의는 “지은 죄를 물건이나 다른 공로 따위로 비겨 없앰”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모욕하고 핍박하고 죽인 죄를 어떤 물건이나 어떤 공로로 비겨 없앨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많은 돈으로도 불가능하고, 많은 선행으로도 불가능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이 불가능한 속죄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속죄는 자신을 위한 속죄가 아니기 때문에 대속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으로 죄인의 죽음을 대신하셨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하나님은 죄인을 대신하여 아들을 징벌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이 속죄에 기초하여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했던 자들에게 이런 용서의 은혜가 내리기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있었던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이들과 우리의 차이는 그들은 그 자리에 있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 없었던 차이 뿐이다. 사람의 악함을 드러낼 수 있는 그 십자가 아래에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있었어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도 동일하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때로 우리는 어떤 죄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혹은 더 나아가서 (특히 남의 죄에 대해서) 용서 받지 못해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실제로 그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죄 용서를 받았다(군인, 강도 한 사람,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부흥 등).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어떤 죄든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어떤 죄인이든 하나님은 구원하실 수 있으시다.
이제 실제로 사함을 받았던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자. 구원 받은 십자가 상의 강도의 이야기로서, 아마도 역사 상 가장 극적으로 회심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과 함께 같은 날에 십자가에 못 박혔던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다. 마태와 마가는 이들을 “강도”라고 표현했고, 누가는 “행악자”라고 표현했다. 행악자는 ‘범죄자’라는 의미는 보다 일반적인 표현이고, 강도라는 표현은 이들이 바라바와 함께 로마에 반역하는 일에 공모했기 때문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여튼, 이들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좀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이들이나 예수님이나,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던 많은 범죄자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사 53:12 …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
예수님은 말 그대로 범죄자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말씀을 성취하셨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한다. 성경은 이들의 배경이나 신상에 대해서는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님에 대한 이들의 대조되는 모습에 대해서만 말해줄 뿐이다.
눅 23:39–42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누가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했던 조롱의 말을 기록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와 비슷한 유대인들의 조롱의 말을 기록한 후에 두 강도가 모두 그들과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고 기록했다(마 27:44; 막 15:32). 이 두 사실을 종합해 보면, 두 강도가 처음에는 함께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이 중 한 사람은 중간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동일한 상황에 있었고, 동일한 결과를 맞을 수 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이로 인해 결국은 전혀 다른 결과를 맞게 되었다.
먼저 끝까지 예수님을 비방했던 행악자가 있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조롱하며 했던 말은 이 사람이 생각했던 구원이 무엇이었는지를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가 생각하는 구원은 십자가에 달려있지 않은 것이다. 메시야라면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이유가 없고, 메시야라면 자기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둘리도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예수라는 사람은 스스로 메시야라고 주장할 뿐,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이 이 행악자의 생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조롱했다.
생각해 보면 이 모습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와 비슷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흔한 논리 중 하나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존재하면 어떻게 세상에 악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한 하나님은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다고 말한다. 내 삶에 이런 저런 문제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들을 해결해 주면 믿겠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나쁜 일들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다를게 뭐가 있냐고 한다.
예수님을 조롱했던 이 강도의 말은 특별하지 않다. 사실 동일한 이유로 어떤 사람은 무신론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어떤 종교인이 된다. 절에 갔더니 뭔가 잘 풀렸더라면서 그 때부터 부처님 최고를 말한다. 그러다가 안좋은 일이 생기면 또 무당을 찾아 가거나 다른 종교를 찾아간다. ‘천주교가 좋다더라. 기독교가 좋다더라.’하면서 종교 쇼핑을 한다. 뭐가 되었든, 누가 되었든, 나를 잘되게 해주면 그가 그리스도이고 그가 구원자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말하는 것이다(마 27:42).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 어떤 십자가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십자가는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편안하고, 안락하고,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나에게 마땅한 그것을 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종교다.
하지만 다른 행악자는 오히려 이 사람을 꾸짖었다. 단순히 같이 십자가에 달린 처지에 왜 사람을 조롱하느냐고 책망했던 것이 아니었다.
눅 23:40–41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고 있다. 그는 지금 로마에 의해서 십자가 형을 선고 받아 죽어가고 있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것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심판은 십자가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 영원한 심판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눅 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이 죽음을 앞둔 순간에 있었던 강도는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으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던 것이다. 그에게는 지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 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다. 십자가에서 죽음은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죽음으로 끝난다. 하지만 하나님의 죄에 대한 심판은 영원하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강도에 대한 책망은 남에 대한 책망보다 오히려 자신의 현재 상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절규(부르짖음)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언제 어떻게 이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마음과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그 모든 것을 우리가 알 수는 없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역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은 이렇게 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의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사람에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는 이 형벌과 다가 올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억울해하지 않는다. 이 고통이 좋아서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상당한 보응”임을 인정한다. 자신이 마땅히 하나님께 심판 받아야할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죄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다른 강도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다른 강도는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상황이 자신에게 마땅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하라고 예수님께 명령했다. 자신에게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는 지금 자신이 당연히 받아야할 형벌을 받고 있다고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결국 그를 영원히 심판하셔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의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셨다는 증거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인정함과 동시에 예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바라본다(41절,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는 예수님을 단지 십자가에 달릴만한 죄는 없었던 사람 이상의 의로운 사람으로 바라봤다. 그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봤던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우신 분으로 봤다. 그가 예수님을 단순히 ‘좋은 사람’ 이상으로 보았다는 것은 그의 마지막 기도에서 알 수 있다.
눅 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사람도 예수님이 지금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예수님의 끝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다. 예수님의 나라가 결국은 임하게 될 것을 이 사람은 확신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로 믿었던 것이다. 언제 믿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이 순간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믿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문제가 있다. 그는 그 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 두려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이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지옥에서 영원히 치뤄야 한다. 그는 자기 영혼의 최종 종착지는 메시야의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방금 전까지도 이 메시야를 조롱하는 일에 동참했었다.
그런 그에게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그에게 그야말로 복음이었다. 그에게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도 방금 전까지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가 의로우신 하나님의 메시야를 조롱했었다는 것을 안다. 이 죄를 자신이 절대 씻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나를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께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구하셨다. 그렇다면 염치가 없지만, 자신도 예수님께 구할 수 있을 것 같았을 것이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기도였을 것이다. 예수님께 무언가를 당당히 요구할 수는 없었다. 자신은 그럴 자격 없는 자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것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도 그리스도의 백성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자비를 구하는 것이다.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접 기도”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영접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말로 회개한 자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이 기도에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한 마디는 다른 모든 종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을 부정한다. 바로 우리가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십자가 위에서 강도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떤 선을 행할 수 있었을까?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 동안의 악행을 덮을만큼의 선행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이 강도야 말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의 핵심 진리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오직 믿음으로 회개한 이 강도에게 영원한 천국을 약속하셨다. 천국 변두리 구석진 곳을 약속하신 것도 아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천국을 약속하셨다. 구원의 은혜가 회개한 강도에게 즉시 임했다.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바로 죽지 않았다. 십자가 자체가 고통을 오래 느끼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죄수는 며칠씩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고통을 경험해야 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날 오후 3시에 바로 숨을 거두셨지만, 두 강도는 계속 살아있었다. 하지만 안식일에 십자가에 사람을 두고 싶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요청에 의해서 군인들이 이들의 다리를 꺾었고,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게 된 두 강도는 그날 죽게 되었다(요 19:32). 그렇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 날 구원 받은 강도는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되었고, 다른 강도는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예수님을 믿었던 강도에게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의 형벌이 그의 것이 되어 더 이상 받을 형벌이 없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강도는 스스로 자기 죄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오늘도 그 형벌을 받고 있고, 내일도 받게 될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는 영원한 형벌이기 때문이다.
두 강도 중에 누가 더 착한 강도였을까? 알 수 없다. 누가 더 좋은 일을 많이 했을까? 반대로 누가 더 나쁜 일을 많이 했을까? 알 수 없다. 이들의 영원한 운명은 그런 것들이 결정하지 않았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결정했다. 내가 원하는 나라에 예수님이 도움이 되면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은 멸망했고,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간구했던 사람은 구원 받았다. 당신은 어느 쪽에 속한 강도인가? 당신이 원하는 영원은 무엇인가? 더 착한 강도가 되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한 강도가 되어야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 그래봐야 강도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인을 부르시는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것이 유일한 살 길이고, 구원의 길이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는 예수님을 조롱했던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요 19:25–26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
여기 언급된 사람들이 예수님의 편에 있던 사람들의 전부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모두가 예수님께 적대적인 이 상황에서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정말로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와 요한을 비롯한 몇 사람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는 가장 비통한 마음으로 그 곳에 있었을텐데, 이것은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성전의 시므온이 예언했었던 일이었다.
눅 2:34–35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이 중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가 바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알았다. 십자가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의 죽음을 보고 있는 어머니로서 그의 마음은 칼로 찔리는 것처럼 아프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요 19:26–27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번째로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그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니를 바라보시면서 마지막으로 자녀로서의 도리를 다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다. 예수님께서 첫 기적을 행하셨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예수님은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셨었다(요 2:4). 이것은 무례한 표현이 아니라,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로서 일하시는 것을 나타낸 신호와도 같은 표현이었다. 후에 예수님은 마리아와 동생들이 자신을 찾아 왔을 때도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었다(마 12:48). 공적인 사역에 있어 육적인 관계에 우선 순위를 두실 수 없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곧 죽으실 것이고, 이로써 육적인 관계는 실제적으로 끝나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이것이 아들로서 마지막 도리를 다 하셨던 모습이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도 이 사실을 알아야 했다는 점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였고 경험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마리아를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어떤 여자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소리쳤었다(눅 11:27). 사실이었다. 마리아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었다. 메시야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경험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외침에 이렇게 답하셨다.
눅 11:28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 이유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예수님의 어머니고 형제고 자매이기 때문이다.
마 12:49–50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구원 받은 이들이 정말로 예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던 강도는 그렇게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히 2:11).
예수님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였고, 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도 역시 십자가 위의 강도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었고,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마리아를 돌보고 보호해줄 것을 부탁하셨다. 하지만 그녀의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직접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고, 지금 그 길을 가고 계셨다. 마리아는 이 예수님을 통해 자신이 단지 육적인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을 받음을 알아야 했다. 십자가 상의 강도가 그랬던 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를 자기 아들이 아니라 자신의 구세주로 믿어야 했다. 그렇게 육적인 어머니에서 영적인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우리 모두가 구원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리고 구원 받은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의 가족들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오늘 살펴본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모두가 사람을 향한 자비의 말이었다는 점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계속해서 하셨던 일들이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셨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다. 유대 종교인들에 의해서 더 큰 지옥 자식이 되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참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주셨다. 이는 이사야 말씀의 성취였다.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예수님은 정말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며 삯꾼들에게 이용당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 하시고 분노하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겠다고 하시는지를 보라. 이 예수님께 단 한가지만 요청할 수 있다면 무엇을 요청하겠는가? 돈을 더 벌게 해달라고 하겠는가? 주식이 좀 잘됐으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자식이 정신차리고 공부 좀 열심히 하면 좋겠다고 하겠는가? 시험 문제 찍은 것 좀 잘 맞게 해달라고 하겠는가? 키가 좀 더 크게 해달라고, 살이 좀 빠지고 얼굴이 더 잘생기고 예쁘게 해달라고 하겠는가?
만약 이런 것이 내가 예수님께 구하는 유일한 것이라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던 강도처럼 나에게도 십자가는 미련하고 무능하게만 보일 것이다. 굳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나 다 똑같이 보일 것이고, 오히려 더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런 것들을 하실 수 없어서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하다면 주실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우리 영혼의 구원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가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만큼 내가 사랑하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께 우리가 구할 것은 십자가 위의 강도가 구했던 것과 같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께 구하는 단 하나의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 단 하나 우리 찬양의 제목이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