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3)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최종혁
오늘날은 사형을 실제로 집행하는 나라가 많이 줄었고, 사형을 하더라도 최소한 ‘인간답게’ 죽을 수 있도록 인권을 보장해주는 쪽으로 제도가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의 십자가형은 그렇지 않았다. 로마의 십자가형은 고통과 수치를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대한 죄수의 고통과 수치를 드러내도록 설계된 공개처형이었던 것이다. 인간답게 죽을 수 없는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게 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죄의 심각성을 경고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는 말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사람을 가장 극악한 범죄자로 규정하여, 고통과 수치 가운데 죽게하는 십자가를 예수님이 짊어지고 가는 모습을 사람들이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지우고, 위기에 처했던 그들의 명성과 부를 되찾아 오기 원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이 원했던 대로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십자가 형을 선고 받고 군병들에게 넘겨지셨다.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성경의 기록에서 강조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는 사실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반복해서 이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언급하여, 예수님께서 힘이 없거나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선택하셨음을 분명히 했다. 예수님 자신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죽기 위해서”였음을 말씀하셨었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한 후로는 더욱 구체적으로 유대인 지도자들의 손에 의해 이방인에게 넘겨지고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연히, 불가항력적으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속 사역의 절정에 있는 사건이었다.
또 하나 십자가 사건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악함이다. 사람이 얼마나 악하고 또 악해질 수 있는지를 십자가 사건에서 볼 수 있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의미다. 빠진 사람 없이, 또한 사람의 모든 부분이 타락했다는 말이다. 최소한 우리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단호하게 우리는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일까?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그래도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어울려 살지 않는가! 정말 ‘악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대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선하고 악함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죄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 중 하나는 ‘과녁을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이 죄라는 것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죄에 대한 접근성이다. 기본적으로 범하기 쉬운 죄와 어려운 죄가 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에 비해서 접근성이 좋다. 실제로 다른 사람과 간음하는 것보다 음란물을 보는 것이 접근성이 좋다. 접근성이 나쁜 죄는 사람이 덜 범하지만, 접근성이 좋은 죄는 사람이 더 잘 범한다. 여기에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죄를 범하기 쉬운 상황이 있고 어려운 상황이 있다. 죄를 범하기 쉬운 환경은 그 죄를 범함으로써 내가 입을 해가 적거나 혹은 전혀 없는 환경이다. 죄를 범하기 쉬운 환경이 되면 접근성이 나쁜 죄도 범하기 쉬워진다.
평소에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교통 신호도 잘 지킨다. 이유없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그렇게 할 경우 득보다 해가 더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어떨까? 그래도 지금처럼 질서가 유지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쟁 중에 범죄가 늘어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집 안과 밖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집 밖에서는 그렇게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 집 안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조금씩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가족은 더 편하기 때문에, 남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말을 하기도 하고, 남이었으면 참았을 상황에서 참지 않기도 해서 생기는 차이다. 그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우리에게서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죄를 범하기 쉬운 환경이 되면, 사람은 더 쉽게 죄를 범한다. 그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의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 악함을 드러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신성모독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로마에 반역한 흉악한 범죄자가 된 예수님에 대해서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들 생각에 그것으로 자신들이 어떤 해도 받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심했던 군병들의 장난감이 되셨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셨다. 심지어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들도 예수님을 욕했다. 죄를 범하기 쉬운(범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감없이 자신들의 악함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악함을 통해 하나님은 자기 뜻을 이루셨고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셨다. 그것이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또 다른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였다.
군병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먼저 군병들의 악함을 보자. 빌라도의 최종 결정에 따라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지셨다. 이로써 본격적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고난은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되었었다.
마 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에 대한 최종 판결로서 사형을 선고한 직후의 모습으로서,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또 다른 예언의 성취다(4개의 종의 노래 중 3번째).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는 이 행동들은 이들이 예수님을 최소한 인간으로서도 존중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동안 예수님에 대하여 쌓였던 분노를 그렇게 쏟아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자리에서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당신이 무슨 그리스도냐면서 조롱했다. 그동안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어도 이렇게 대하지는 않았었다. 이유는 예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대중들이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그런 대중들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예수는 신성모독자로 처형 당하게 될 것이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도망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편에 설 사람들이 없을 것임을 이들은 확신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악함을 이렇게 드러냈던 것이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을 때는 이미 이런 모욕을 당하신 상태셨다. 그리고 빌라도도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하면서 자신의 군사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렸었다.
요 19:1–3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로마의 채찍질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고 한다(1절). 가장 약한 단계는 ‘푸스티가티오’로서 경범죄자에게 내리는 가벼운 형벌이었고, 중간 단계는 ‘플로겔라티오’로서 중범죄자에게 내리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그리고 가장 강한 단계는 ‘베르베라티오’로서 십자가 형을 받은 사람에게 가해지는 가장 잔혹한 채찍질이었다.
아직은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선고하기 전이고 예수님을 풀어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때 가해진 채찍질은 가장 약한 단계인 ‘푸스티가티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 단계에서 빌라도의 군사들은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일반적으로 점령지의 사람들 중에서 로마에 충성을 맹세하는 사람을 징병하여 군대를 조직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징병에 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발라도의 군사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을 것이고, 그 근방에 살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겠지만, 유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예수님께 흥미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채찍질로 만족하지 못하고 유대인의 왕이라는 예수님을 조롱했다.
이들은 정성스럽게 가시로 관을 만들어 그것이 왕관인 것처럼 예수님의 머리에 씌웠다(2절). 그것으로 부족한 것 같아서 망토도 구해와서 예수님에게 입혔다. 그리고 그 앞에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외치며 손으로는 예수님을 때렸다(3절).
빌라도는 이 상태의 예수님을 사람들 앞으로 데리고 나와서 보여주며 자신은 죄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해서 풀어주겠다고 했지만, 더 이상의 소동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선고했다.
마 27: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여기서 두번째 채찍질이 가해진다. 이제는 공식적으로 선고가 내려졌고, 따라서 가장 잔혹한 채찍질인 ‘베르베라티오’가 행해졌다. 이때 죄수는 기둥에 묶이고 옷이 벗겨진 상태에서 채찍에 맞는다. 채찍은 가죽 끈으로 되어 있고, 그 끝에는 돌, 뼈, 금속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어서, 채찍질을 할 때마다 문자 그대로 살이 찢겨나갔다. 죄수는 최소한의 방어도 할 수 없어서 이 채찍을 고스란히 맞아야만 했다. 벗겨진 옷을 대신해서 자기 피가 몸을 덮게 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무고한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어서 이 형벌을 진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무고한지 아닌지는 애초에 이들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자기들 앞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죄수의 신분으로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온 군대를 불러 모으고 앞서 하던 조롱을 계속했다.
마 27:27–30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이들은 관정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간 것이다. 그곳에서 군병들은 다시 한번 예수님을 왕이라고 조롱했다. 가시관, 홍포 외에 이번에는 갈대도 더해졌다(29절). 왕은 자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지휘봉을 들고 다녔는데, 그 지휘봉을 대신해서 툭하면 부러질 갈대를 준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권위도 없고 어떤 힘도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서 왕 앞에 복종의 의미로 무릎을 꿇듯이 꿇어 앉아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하면서 조롱했다.
이들은 참 정성스럽게 예수님을 조롱했다. 이들도 빌라도가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겠지만, 최소한의 동정도 없었다. 예수님께 침을 뱉고, 그 갈대로 머리를 때렸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지루한 하루 중 흥미거리를 주었던 특별한 죄수였을 뿐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이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도 관심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고통스럽게 하고, 더 치욕스럽게 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쾌감을 주었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은 죄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군병들의 죄성의 만들어 낸 예수님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성경의 전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하나의 상징처럼 보인다. 가시는 죄에 대한 저주로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것이었다(창 3:18). 또한 하나님은 죄를 주홍색 혹은 진홍색으로 표현하셨다(사 1:18). 따라서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피로 물든 홍포를 두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야말로 우리 죄를 그 몸에 두르신, 우리 죄를 짊어지신 메시야의 모습이기도 했다. 군병들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멸시를 당하고 조롱을 당한 예수님의 모습이야말로, 약속된 메시야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희롱을 마친 후에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끌고 나갔다.
마 27: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홍포는 벗겨졌지만, 가시관은 아마 그대로 머리에 있었을 것이다. 홍포와 다르게 벗기기 쉽지 않았을 것이고 그럴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처형 장소인 골고다로 향하셨다.
예수님은 당시의 관행대로 로마 군사가 앞뒤로 둘 씩 서고, 그 가운데서 자기 십자가를 끌고 가셨을 것이다. 당시 십자가는 우리에게 익숙한 십자형과 알파벳 T자형이 있었는데, 후에 예수님의 머리 위에 죄패를 단 것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형의 십자가를 끌고 가셨다고 할 수 있다.
십자가 전체의 무게는 약 136kg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끌고 간다고해도 무거운 무게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세로목은 처형장에 두고 가로목(34-57kg)만 지고 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쪽이든 이미 육체적으로 지칠대로 지쳐있었던 예수님이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사실을 군병들도 알았기에 그들은 구레네 사람인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다(32절). 지나가던 시몬의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 중에 하필 군병들에 눈에 띄어서 죄인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시몬에게 있어서는 억울하고 괴로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억울한 십자가가 사실 그의 것이며, 그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이 길을 가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때 시몬은 전혀 몰랐다.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길에 나와 있었다(눅 23:27). 예수님은 그 중에서 특별히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가슴 아픈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예수님의 마지막 공적인 연설이 되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처형 장소인 골고다에 도착하셨다.
마 27:33–34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골고다(갈보리)는 그 모양이 해골처럼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관례에 따라 예수님께 “쓸개 탄 포도주”가 제공되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약간의 마약 성분이 있어서 진통제 역할을 했었다.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 크기 때문에 준 것이다. 이것은 죄수에 대한 최소한의 자비 같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고통 때문에 죄수가 너무 발버둥치거나 하면 그것이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드니까 그렇게 한 것 뿐이다.
사실 이 포도주는 군인들이 아닌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제공했고, 군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편이를 위해 허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잠 31:6 독주는 죽게 된 자에게, 포도주는 마음에 근심하는 자에게 줄지어다
이 말씀 뒤에 현숙한 여인에 대한 말씀이 바로 이어진다. 그래서 부유한 여인들은 십자가 죄수에게 포도주를 제공하는 것으로 이 말씀을 적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조차도 거절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인간으로서 온전히 감당하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잔을 그대로 끝까지 마시기 원하셨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은 이런 진통제가 아니더라도 아프지 않게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도 있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다면, 최소한 아프지는 않게 죽으실 수도 있으셨다는 말이다. 육체적 고통이 없는 십자가도 가능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에서 예언된 것처럼, 메시야는 단지 죽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해야 했다. 실제로 고통을 느껴야 했다. 예수님은 그렇게 최후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십자가는 고통의 시간이었고 예수님은 그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군병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마 27: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마태의 이 표현은 한편으로는 무심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 문장에서 주요 동사는 “나누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보다 마치 군병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한 행위인 것처럼 기록된 것이다. 영화로 치면 군병들이 옷을 제비 뽑아 나누는 장면에서 줌 아웃을 하니까 그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계신 것과 같이 연출한 것이다. 마태만 이렇게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막 15: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눅 23: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요 19: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건이었다면 좀 더 자세한 묘사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이 어떤 모양의 십자가에 달리셨는지에 관심이 없다. 못은 얼마나 거대했는지에도 관심이 없다. 못이 박힌 정확한 위치도 관심이 없다. 못 박을 때 피가 얼마나 흘러 나왔는지, 어디 관절이 빠졌는지, 예수님께서 얼마나 고통스러워하셨는지, 그런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런 모든 것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성경의 관심사가 아니고, 우리가 관심을 두어야할 사항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묘사가 있다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예수님의 고통에 공감하기 쉬울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다. 십자가의 고통을 묘사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저절로 감정이입이 된다. 예수님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성경을 모르는 사람이 봐도 그렇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얼마나 불쌍하게 죽었는지를 우리가 이해하고 동정하기를 원하지는 않으신다. 애초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억울하고 불쌍하게 죽지 않으셨다. 만약 그랬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골고다를 향해 가는 예수님을 보면서 울던 여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눅 23:28). 그들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보이는 예수님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십자가를 보는 우리도 그래야 한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불쌍하게 여기며 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그만큼 불쌍히 여기셨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가지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라고 주어진 것이다.
다시 무심한 군병들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이들은 방금 말한 십자가의 그런 의미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최소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 같은 것도 없었다. 이들은 그저 예수님의 옷을 어떻게 나눠가질까에 관심이 있었다. 요한은 이 모습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며 이것이 예언의 성취임을 분명히 했다.
요 19:23–24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여기서 성취된 성경 말씀은 시편 22:18이다. 군인들이 예수님과 상관 없이 자기들의 이익과 재미를 위해서 했던 일이 오래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했던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위에는 이런 죄패가 붙어있었다.
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요한복음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이 죄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진짜로 자신들의 왕이 그렇게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칭 유대인의 왕”(요 19:21)이라고 변경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면서 거절했다(요 19:22). 아마 빌라도 입장에서는 그렇게 약간의 보복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군인들에게는 이 죄명이 끝까지 흥미로웠던 것 같다.
눅 23:36–38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이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그들의 장난감으로 노리개로 조롱거리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속에 있는 아이러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에서 누구도 예수님을 진짜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빌라도도, 유대인들도, 특히 이 군병들은 예수님이 진짜 왕일 수 있다는 조금의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조롱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말 왕이셨다.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들이 진짜 왕을 조롱하고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들이 조롱한 왕은 단지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다. 그들이 채찍질한 왕은 로마의 왕도 아니었다. 그들은 온 우주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물어봤었다.
요 18:33–37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싸워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시지는 않으셨다. 대신 예수님은 진리를 증언하여 영적인 차원의 나라를 세우신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견디신 것이다.
히 2: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맛보셨다. 하지만, 그것은 잠깐이다. 이제는 예수님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
계 19:11–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12그 눈은 불꽃 같고 그 머리에는 많은 관들이 있고 또 이름 쓴 것 하나가 있으니 자기밖에 아는 자가 없고 13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14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15그의 입에서 예리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그들을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16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싸우지 않으셨지만, 다시 오실 때는 싸우실 것이다. 예수님의 머리에는 가시관이 아닌 진짜 왕관이 놓여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자기 피를 흘리고 피 묻은 옷을 입으셨지만,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의 옷에는 심판하신 적들의 피가 묻어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손에는 갈대가 아닌 철장이 들려 있을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이심이 선포될 것이다.
예수님께 “네가 왕이냐”며 조롱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왕이심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오고 두려움이 밀려오겠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왕으로 삼지 않으면, 왕이신 예수님은 나의 심판자가 되실 뿐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면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했던 이 군사들의 모습이 절대 우리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유대인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제 유대인들의 악함을 보자. 예수님이 로마 군병들의 손에 넘겨진 이후로 유대인들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때리거나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집중했다.
먼저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둘이 있었다.
마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앞뒤 정황을 보면 이들은 분명 바라바와 함께 처형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라바가 주동자였을텐데, 바라바는 군중들에 의해서 석방되었고 예수님이 그 자리를 대신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예수님과 같은 처지였기 때문에, 이들이야말로 그래도 예수님을 동정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을 조롱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다.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라는 생각은 전혀하고 있지 않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을 이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는데 쓰고 있다. 정말로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고, 악한 모습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 27:39–40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이 사람들은 구레네 사람 시몬 같은 사람들이다. 본래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마태가 주목한 것은 이들의 행동과 말이다. 이들이 머리를 흔들며 했던 말은 시편 22편의 성취였다.
시 22:7–8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했던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다수는 예수님께서 얼마전 예루살렘으로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실 때 “호산나”를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이제 이렇게 그들이 원했던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조롱하고 있다. 가룟 유다만 배신자가 아니었다. 예수님이 그들이 생각했던 메시야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을 때, 이들은 즉시 예수님의 대적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조롱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합류했다.
마 27:41–43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이들의 말에서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최고조에 다다른다. 이들은 마치 사탄이 처음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했던 말 같은 말을 한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보라고,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증명되지 않겠느냐고 했던 사탄처럼, 여기 이 종교 지도자들도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인 것이 증명되지 않겠느냐면서 내려와보라고 한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마찬가지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네가 정말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원하실 것이라며 조롱한다.
정말로 악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강조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이 모습 자체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도 아니고 그리스도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거한다고 이 조롱의 말을 통해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 죽어서 내려오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인 것을 증명하셨다. 베드로는 그의 첫 공식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행 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악한지,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그 악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결국 그들이 승리하고 예수님이 패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악함을 통해 예수님을 그들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십자가에 있었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사람들의 악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또 하나 우리가 끝으로 주목해볼 것은 그런 사람의 악함을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악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
병사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사람들이 있었다.
마 27: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구레네 사람 시몬도 아마 후에는 자신이 지었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가는 시몬을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하는데(막 15:231), 이런 경우 “루포”가 충분히 독자들이 알만한 사람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마가는 마가복음을 로마에서 썼을 가능성이 높은데, 로마서 16:13에는 이런 말씀이 있다.
롬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로마에 루포라는 이름의 성도와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만나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자기 아내와 아들들에게 소개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것이 어디까지나 추정이라고 생각된다면 더 확실한 경우도 있다. 바로 십자가에 달렸던 강도 중 한 사람이다.
눅 23:39–43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구도 천국에서 만날 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 강도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그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강도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지만, 이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고, 그분을 믿게 되었다. 만약 바라바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면 이 사람은 이런 은혜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강도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그럼, 정말로 구제불능인 것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어떨까? 예수님을 찾아오고 장사지냈던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있었다.
행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많은 제사장도 믿고 구원 받았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 바울도 이 범주에 들어갈 것이다. 그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라.
딤전 1:15–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라고 다른 고백을 하겠는가. 우리 모두가 구제불능의 죄인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심과 능력은 그런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영광을 받으신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의 악함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