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2)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최종혁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으로서 반드시 되어야할 일이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셔서 이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예수님은 어떤 일이 있을지, 어떤 고통을 감당해야할지 잘 아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심으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고, 아버지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신지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는 그곳으로 군사과 함께 왔고, 예수님은 체포되셨으며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마 26:56). 그렇게 체포되신 예수님은 밤새도록 재판을 받으셨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예수님께는 십자가 형, 즉 사형이 선고되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형에 해당되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처벌하기보다 로마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처벌하기를 원해서 빌라도에게 ‘반역죄’ 명목으로 예수님을 고발했고, 결국 빌라도가 십자가 형을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총 6번의 재판이 있었는데, 크게 보면 3번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의한 재판과 3번의 로마 정치 지도자들에 의한 재판이 있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최종 판결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내려졌고, 로마 정치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최종 판결은 빌라도가 내렸다. 오늘 이 과정을 4복음서의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얼마나 이 재판이 부당했는지 그리고 그 부당함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 잘못된 재판 절차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이다. 억울하게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궁극적으로 객관적일 수가 없고, 그것은 재판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재판에는 공정성을 위한 여러 제도적 장치가 있다.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셨던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도 마찬가지로 그런 제도적 장치가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재판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모든 제도적 장치를 무시했다. 처음부터 결론은 정해져있었고, 재판은 부정하게 진행되었다.

안나스

예수님은 가장 먼저 안나스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다.

18:12–13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13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12절은 안나스를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 표현하는데, 19절은 그를 “대제사장”이라고도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누가복음 3:1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라는 표현도 있다. 율법에 따르면 대제사장은 1명이기 때문에, 이 표현들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고, 그 설명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안나스는 서기 6-15년까지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다. 15년에 로마에 의해 대제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그 후로 대제사장으로 세워진 사람들도 주로 안나스의 아들들, 손자, 사위였다. 각자가 대제사장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짧았는데, 사위였던 가야바는 18년 동안 재임했고,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실 때의 공식적인 대제사장이 바로 이 가야바였다.

이들이 줄줄이 대제사장에 재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다. 로마 통치 아래 대제사장직은 돈으로 살 수 있었는데, 안나스 역시 그렇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고, 이후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자신의 아들들, 손자, 사위를 대제사장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래서 이 당시 공적으로는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유대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사람이 안나스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안나스는 언제나 대제사장으로 불렸고, 성경도 그런 당시 상황을 반영하여 안나스를 대제사장이라고 칭했다고 볼 수 있다(“대제사장들”).

여기서 조금 더 생각해 볼 것은 어떻게 안나스가 그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느냐는 점이다. 애초에 어느 정도 부유한 사람이기도 했겠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그가 성전에서 이뤄지는 상업 행위를 관리 감독하면서 엄청난 이익을 취했다는 것이다.

19세기의 유대인 기독교 성경학자인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연구 중 기념비적인 책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시대>를 저술했는데, 그 안에서 당시의 탈무드와 랍비들의 문헌 연구를 통해 정리한 성전에서의 상행위에 대한 묘사도 찾아볼 수 있다.

성전에서는 크게 두 종류의 상행위가 이루어졌다. 환전과 짐승 매매다.

첫째는 환전이었다. 유대인 남자들은 매년 성전세를 납부해야 했는데, 이 때 반드시 성전의 기준에 맞는 화폐로 납부해야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는 지역에 따라서 각자 다른 화폐를 사용했고, 환전상들은 그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꿔주면서 수수료를 받았다. 절기에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온 유대인들은 성전세 뿐 아니라 제사와 그곳에서 지내면서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기 위해서도 환전을 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많은 돈을 환전했을 것이고 이를 통해 환전상들은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흥정과 논쟁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둘째는 짐승 매매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희생 제물을 직접 가져올 수 있었지만, 그 제물이 율법의 기준에 맞는 흠 없는 제물인지는 정식으로 임명된 검사관에서 확인을 받아야 했다. 이것을 위해서 검사비를 지불해야 했다.

이 절차가 순례자들에게는 불안 요소가 되었다. 검사를 받았는데 제사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결이 나면, 다시 어딘가에서 짐승을 구해와서 검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의 편이를 위해 모든 검사를 마친 인증된 짐승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에게서 희생 제물을 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먼 길을 노심초사 하면서 짐승을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되고, 검사에 합격할지 못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런 시스템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럴 필요가 있었겠구나 싶다. 하지만, 동시에 오용되기도 쉬운 시스템인 것도 분명하다. 이 매매는 약자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돈을 바꾸지 못하면 성전세를 낼 수 없고, 짐승이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 없다. 순례자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고, 상인들은 높은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장 경제의 원리에 따라,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환전 수수료가 터무니 없이 높아졌다. 때로는 상인들이 짐승의 가격을 너무 올려서 성전에서 희생 제물이 드려지지 않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들이 ‘성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기 전 감람산에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파는 곳이 있었다고도 한다. 결국 이런 상행위가 성전까지 들어오게 된 것인데, 여기에 성전을 관리하는 제사장들, 특히 그들의 리더인 대제사장이 관계 없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은 성전에서의 장사를 허락하는 대신에 자릿세나 수수료를 받았을 수 있다. 더 좋은 자리를 더 비싸게 내주었을 수도 있고, 뇌물을 받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더 적극적으로 직접 그런 상행위를 했을 수도 있다. 이미 ‘과점’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대제사장이 관여한다면 ‘독점’의 문제로 더 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안나스가 바로 이런 성전에서의 상행위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잘 이용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그 당시 성전 시장은 “안나스의 (아들들의)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안나스는 이 시장을 이용해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부를 이용해서 그의 자식과 사위, 손자까지도 대제사장으로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권력을 이용해서 계속해서 부를 쌓았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일반 백성들은 이런 상황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3년 전에 백성들이 안나스 가문의 시장들을 “그들의 죄악된 탐욕 때문에 휩쓸어 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예루살렘의 랍비였던 압바 사울은 대제사장들을 향해서, “그들은 스스로 대제사장이고, 그들의 아들들은 성전 금고 관리인이며, 사위들은 재정 감독관인데, 그들의 종들은 몽둥이로 백성을 때린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즉, 성전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은 비단 안나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안나스가 이 시스템을 가장 잘 이용했던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다른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이런 시스템 속에서 자기 배를 불려왔던 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었다. 누가는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눅 16:14). 예수님은 위선적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면서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마 23:25).

잘 알려진 과부의 두 렙돈 사건에서 예수님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21:4).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는 것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은 그 상황을 좋게 보신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헌신했던 과부의 믿음의 순수함은 칭찬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은 그 상황을 안타깝게 보셨다. 사실, 과부의 경우는 안타까워하셨지만, 그런 상황을 만든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셨다. 누가는 그 사건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에 대해 경고하신 말씀을 기록했다.

20:46–47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성전의 종교 시스템이 바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심지인 성전이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실제로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었고, 예수님은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보실 수 없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채찍을 만들어 짐승을 쫓아내고 상을 엎으셨다. 이 사건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도 흥미롭다.

11:15–18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이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서, 대제사장들(안나스, 가야바)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으려 했고, 반대로 백성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을 놀랍게 여겼다. 마태는 어린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소리질렀다고도 기록했다(마 21:15).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은 너무 과격하게도 보일 수 있지만, 당시의 백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더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예수님의 어떤 가르침 때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 그들에 대해서 했던 말들이 그들에게는 눈엣가시였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위협이 된다는 생각을 했었다.

특히, 나사로를 살린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예수님을 중심으로 로마에 반역하는 세력들이 일어나서, 결국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이런 특권을 빼앗기게 될 것을 그들을 우려하고 있었다(요 11:47-48). 그때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라고 하여 예수님을 죽일 것을 제안했고, 그때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었다(요 11:53).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그들의 돈벌이 수단을 직접적으로 무너뜨리셨던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들은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유다를 통해 사람들이 없을 때에 예수님을 체포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가장 먼저는 체포의 주동자 중 하나였던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서 재판을 받게 되셨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 재판에는 애초에 올바른 동기가 없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재판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동기가 이러하니 과정이 공정할리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판 규례를 모두 무시하면서 이 재판을 진행했다.

일단, 안나스는 당시 공식적인 대제사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재판 자체도 공식적인 재판은 아니었다. 안나스는 이런 재판을 할 권리가 없었다. 아마도 가야바가 유대인의 공식 의결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고 재판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 안나스가 먼저 예수님을 만났을 것이다. 특히, 먼저 확실한 기소거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나스는 예수님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서 물었다(요 18:19).

여기서 안나스는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고 이 질문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관점에서 죽어야할 이유와 로마인의 관점에서 죽어야할 이유를 찾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에 반하는 이단이라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로마인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로마의 반역자이며 체제의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제자들에 대해서 물은 것은 그 숫자와 구성원에 대해서 알아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제자의 수가 많다면 그만큼 로마에 더 위협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 중에 로마에 적대적인 성향의 사람들이 있어도 마찬가지다(셀롯, 열심당원). 교훈에 대해서 물은 것은 그 중 무엇 하나라도 로마에 적대적이거나 율법에 반하는 것이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18:20–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한마디로 증인을 데려오라고 하신 것이다. 애초에 재판은 그렇게 진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치되는 증인들의 증거도 없이 이런 재판을 시작할 수 없는 것이 산헤드린의 법이었다. 예수님은 정당한 절차를 요구하셨던 것이다. 안나스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보냈다(24절).

가야바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다. 산헤드린 공회는 쉽게 말해 유대인들의 재판 기관이자 통치 기관으로 당시 유대 사회의 권력에 정점에 있었던 사람들의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의장인 대제사장 1명에 제사장 24명, 장로(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 46명으로 구성되어서 총 71명이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동안 밤이 깊었고 가야바는 자기 집으로(눅 22:54)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공회를 모은 것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는 문제였다. 사형 처벌 사건은 성전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재판을 해야 했는데, 이들은 사적인 가아뱌의 집에 모였다. 또한 이런 재판은 낮에만 이루어져야 했는데, 이들은 밤에 모였다. 이 일을 빨리 처리하기 위해 이들은 자신들의 법을 다 무시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일치하는 증언을 찾는 것이었다. 오늘날처럼 증거 자료를 수집하기 어려웠던 고대의 재판에서 증언은 정말로 중요했다. 증언으로 누군가를 범죄자가 되게 할 수 있었고 살인자가 되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십계명에도 거짓 증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고, 구체적인 율법 조항에서도 거짓 증언하는 것을 매우 심각한 죄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명기 19:15-20에 따르면 거짓 증언을 한 것이 드러나면 그 죄의 형벌을 증인이 받아야했다. 증언의 결과로 피고가 사형을 받아야 했다면, 거짓 증언을 한 사람이 사형을 받아야했다는 것이다. 신명기 17:1-13은 두 세 사람의 증언이 있을 경우 우상숭배한 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을 말하는데,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야 했다(신 17:7). 자신의 증언에 책임을 져야했던 것이다. 증언에 대한 이런 율법의 요구는 산헤드린 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서, 증인은 증언을 하기 전에 엄중한 경고의 말을 들어야 했고, 특히 사형 판결의 경우,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져야함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예수님에 대한 증언은 이렇게 이루어졌을까?

26:59–62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59절은 애초에 이 재판이 공정성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산헤드린의 법에 따르면 사형 처벌 사건은 다른 사건과 다르게 먼저 무죄를 선고하자는 주장으로 심의를 시작하게 되어 있었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중대한 판결이기 때문에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기 위해 이 재판을 시작했고, 그 쪽에 맞는 증언들만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그렇게 데려온 증인들의 증언조차도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모두 효력이 없는 증언이 되었던 것이다. 그나마 찾은 것이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가야바는 직접 유도 심문을 한다.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쉽게 말해, 당신이 신적 존재인지 말해달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자신을 “아들”이라고 칭하셨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요 10:30). 이 모든 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10: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곧 신성모독이었다. 물론 예수님은 실제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신성모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혹은 애써 외면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신성모독이었고, 가야바는 그 사실을 알고 여기서 그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입으로 이 재판 자리에서 그렇게 말한다면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야바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다.

26: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렇다고 하신 것이다. 이제는 때가 되었기에 예수님은 더 이상 숨기지 않으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듣고 가야바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한다.

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옷을 찢는 것은 슬픔과 비통의 표현이지만, 여기서 가야바는 전혀 그런 감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기뻤을 것이다. 증인들의 말이 일치하지 않아서 답답한 상황이었는데, 예수님이 알아서 신성 모독의 말을 해주니 속이 시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말을 바뀔까바 빠르게 판결을 내렸다.

26: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 부분도 산헤드린의 규칙에 어긋나는 부분이다. 판결을 내리기 전에 이들은 먼저 투표를 해야 했다. 투표를 해서 만약 과반이 무죄에 동의하면 피고를 석방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밤새 추가 심의를 하고 다음날에 다시 투표를 해야했다. 다시 투표를 할 때도 이미 무죄를 선고한 사람은 의견을 바꿀 수 없었고, 유죄를 선고한 사람 중에서 의견이 바뀐 사람이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여전히 유죄가 우세하면 그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그냥 “사형”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처음부터 이들은 공정한 재판을 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판결은 정해져 있었다. 처음부터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다. 예수님이 그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과 재물을 빼앗아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중요하지 않았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도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안위가 중요했을 뿐이다. 그것을 위해 이들은 예수님을 잘 죽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일단 예수님께 사형이 선고되자,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26:67–68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조롱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산헤드린

밤에 이미 모든 결정이 내려졌지만, 최종 공식 결정은 날이 밝은 후에 선포되었다. 산헤드린의 공식 판결은 오직 낮에만 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7:1–2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누가복음 22:66-71은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밤에 있었는 일이 이 날 아침에 그대로 반복되었다. 가야바는 같은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동일하게 답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 과정은 전혀 공정하지 않았다. 공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불법한 재판으로 예수님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으면 그냥 은밀하게 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겟세마네에서 체포할 것이 아니라 그냥 그곳에서 죽였어도 됐을 것이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굳이 (불법적이지만) 재판 과정을 밟았다. 굳이 로마인에게 사형을 부탁했다. 번거로운 과정을 자처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 때문에 위태로워진 자신들의 권위와 부를 되찾아와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기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야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셨던 모든 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백성들에게도 예수님이 틀렸고 자신들이 맞았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도 안되는 재판을 열었다. 가장 공정해야 할 재판을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부당하게 사용하여 예수님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예수님을 로마인 빌라도에게 넘겼다. 예수님을 제대로 범죄자로 낙인 찍기 위한 마지막 퍼즐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공개 처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눅 18:32).

로마 정치 지도자: 잘못된 양형 선고

빌라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의미는 이제 모든 것을 빌라도에게 맡긴다는 의미는 아니다. 빌라도의 판결을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다. 하지만 ‘신성모독’을 이유로 이방인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받아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한 고소 내용은 이러했다.

23: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이 말에는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 예수님은 가이사, 즉 로마에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말씀하기까지 하셨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거짓 증언이다.

백성을 미혹했다는 것, 예수님이 자칭 왕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는 말은 마치 예수님이 스스로를 왕이라고 주장하면서 백성들을 모아 로마에 대한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한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 또 예수님은 스스로 “내가 왕이다”, 혹은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와 메시야이심을 하시는 말씀과 삶과 행함을 통해 증명하셨고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말하며 계속해서 주장하고 사람들을 선동하지는 않으셨다. 오히려 사람들이 왕으로 삼으려고 할 때 자리를 피하셨고,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지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면서 로마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빌라도는 이들의 이런 얄팍한 의도를 이미 알고 있었다.

27:18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그래서 빌라도의 첫 반응은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였다(요 18:31). 빌라도는 예수님의 편이고 공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예수님이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오히려 유대인들 간의 문제에 끼어드는 것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상황에서 빠지고 싶었다. 하지만, 빌라도의 이 말에 대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답했다(요 18:31).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의미다.

정말 그랬을까?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 이후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스데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현장에서 바로 돌에 맞아 처형 당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의 경우도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들어 돌로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수님도 돌에 맞을 뻔 했었고, 절벽으로 밀쳐져서 죽을 뻔 했던 적도 있다. 즉 여기 유대인들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는 맞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설령 그것이 법이었다고 해도 이들은 이미 지키지 않고 있었고, 빌라도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이들은 빌라도의 손으로 예수님을 처형하기 원했다. 그것이 앞서 말한 것처럼 가장 확실하게 예수님을 사람들에게서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순교자가 아닌 범죄자로 죽어야 했다. 그들의 이런 이기심을 통해 성경의 말씀이 이루어져가고 있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 가장 원하지 않았던 것은 소란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확고한 태도에 빌라도도 예수님을 심문해봤지만 죽일만한 죄가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23:3–4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이에 유대 지도자들은 마구 달려들어 예수님을 고발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으셨다. 겟세마네에서 힘이 없어서 잡히셨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할 말이 없어서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처럼 정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잠잠한 어린양과 같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침묵에 빌라도는 놀랐지만, 더 염려스러운 것은 유대인들의 반응이었다. 흥분한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했고, 이에 빌라도는 갈릴리 관할자였던 헤롯이 마침 예루살렘에 내려와 있었기에 예수님을 헤롯에게로 보냈다. 골치 아픈 일을 떠넘기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헤롯 앞에 서게 되셨다.

헤롯

헤롯 앞에서 재판 받으신 사건은 누가복음 23:6-12에 짧게 기록되어 있다. 헤롯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이미 들었었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었다(눅 23:8). 특별히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서 있던 예수는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헤롯은 그저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보인 후에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다. 하지만 헤롯도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죄를 찾지는 못했다.

빌라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예수님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빌라도는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불러 모으고 이렇게 말했다.

23:13–16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리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이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고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심문하였으되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그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그가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이 사람은 사형에 처할 죄가 없는데, 너희가 그렇게 처벌하고 싶으면 그냥 좀 때려서 놓겠다고 중재안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완강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또 다른 묘수를 생각해 냈다.

27:15–19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로마법에 따라 사형할 명분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아내가 예수님을 “옳은 사람”, 즉 의인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꺼림직했을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다. 이미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랍비였던 예수님 중에서 한 사람을 풀어주겠다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할 것이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가 전혀 달랐다.

27:20–2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이 부분에 대한 요한의 기록도 보자.

19:4–15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 (히브리 말로 가바다) 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정말로 광기에 가까운 모습이다. 대제사장들, 즉 안나스와 가야바는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는 그야말로 유대인로서 할 수 없는 말까지 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빌라도도 결단을 내렸다.

27:24–26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결국 빌라도의 최종 판결은 ‘무죄’였다. 하지만 무죄에 대해서 형량이 선고되었는데, 그것은 ‘사형’이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죄 없으심이다. 예수님을 유죄라고 선고한 자들은 공의롭지 못한 재판을 했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로마인들은 예수님이 무죄임을 알았다. 하지만 최종 선고는 사형이었다. 재판이 공의롭게 진행되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따라 움직인 결과, 예수님은 십자가로 향하게 되었다. 그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이 불의한 자들의 손에 심문을 당하시고 이제 죽기 위해 길을 떠나신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예수님은 이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형 장소까지 이동하실 것이다. 죄인은 십자가에 그냥 못박지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죄수를 고통스럽게 하고 또한 치욕스럽게 한다. 거기에 더해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고 그로 인해 로마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예수님은 그런 길을 가셨다.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흉악한 죄인이 그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자신이 그 죄인이 아님에 감사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과정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매우 억울했을 것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단지 그 자리에 있다가 군병들의 눈에 띄었다는 이유로 십자가를 져야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라, 여기 있는 예수라는 자의 것이다”라고 계속해서 소리치면서 갔을 수도 있다.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런 흉악안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사실 예수님이 그러셔야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의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흉악한 범죄자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는 예수님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체가 아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질만한 아무런 죄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정말 억울하게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셨던 것이다. 예수님이야말로 “이 십자가는 내 것이 아니라”고 소리쳐야하셨던 분이시다.

그럼, 누가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을까?

가장 먼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악당으로 생각될 것이다. 그들이 이 말도 안되는 재판을 이끈 주동자들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그렇게 환영했으면서 불과 며칠만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빌라도는 어떨까? 나름 빌라도는 예수님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정말 예수님을 위했다기 보다 자기의 위치를 염려해서 그렇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 최종 십자가형을 선고하면서 자기는 이 일에 책임이 없다고 빠져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누구보다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자신과 예수님의 말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큰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판 유다는 어떤가? 예수님을 배반한 제자들은 어떤가? 그들도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만약 예수님께 당신은 왜 죄가 없으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답하셨을까? 예수님은 아마 이 말씀으로 답하셨을 것이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에게 벌어진 모든 심문과 재판의 과정은 부당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셨다고 생각해 보면 얘기가 다르다. 예수님은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너무나 많은 죄, 결코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했다. 죄를 지은 우리에게 있어 사형선고는 전혀 부당하지 않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억울하지 않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선고 받으신 것이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시려고 의로우신 예수님이 죄인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나의 죽임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의 관찰자가 아니라 당사자다. 이 모든 재판 과정에서 예수님은 마치 어리석은 듯, 마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듯 잠잠하셨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였다.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가 이런 의미이기를 기도한다.